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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에피소드 50. 숙제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16. 6. 1.

   Dear M, 로 시작했던 메일은 제가 너무 과도한 감정 노출을 한 것으로 보여요. 읽어보면서 저도 좀 부끄럽다능. ㅋㅋㅋ그럴 때가 종종 있어요. 나도 모르게 격해지는 감정. 사실 그 순간에는 글도 쓰지 말아야 해요. 너무 날것이 도출되니깐 요. 또 썼다하더라도 타자에게 보여주지 말아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어요. 조금 부끄럽지만 한편으론 날 것 또한 가끔씩은 허용될 수 있다고도 생각할래요. 제 맘대로. 사실 저 조금 막무가내긴 해요.

   이번 오신 첫날 요. 1년 6개월 만에 나를 봤다는 제 친구요. 제가 일방적으로 1년 6개월 연락을 뚝 끊었었거든요. 제가 너무 그 친구에게 자꾸만 의지를 하는 것 같아 저 스스로 제동을 건거였어요. 저 스스로 저를 벌하고 싶은 마음에. 제가 어린 시절부터 너무 독립적이어서 절대 남에게 어깨를 기대려하지 않는 좀 독한 면이 있어요. 이 말은 제 어깨도 잘 빌려주지 않았다는 말과 일맥상통하기는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에요. 좀 어리석어서 마음에 끌리면 또 한계를 지을 줄 모르는 면도 있고. 케이스 바이 케이스랄까? ㅎㅎ

   앗. 잊었다. 맨 첫 문장을 쓴 이유는 제 감정 노출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시지 말란 말씀드리려고요. 저 예의도 있고 기본 강령 중의 하나는 상대를 늘 인정하자 주의에요. 너는 너 살고 싶은 대로 살고 나는 나 살고 싶은 대로 살자. 그러다 교차 되는 부분은 또 그 부분대로. 솔직히 저 무서워 도망갈까 봐. 염려되어서요. 나름 절제도 잘하는 편이고. 너무 잘해서 탈이 날 지경!!! 제가 무슨 말 하는지 이해하시죠?

   있잖아요. 지금 재수에 옴 붙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어요. 그런데 어쩌겄어요. 또 그것이 그대의 운명이었을지도.ㅎㅎㅎ 제 수다를 그대로 받고 있으니. 제 편에선 요. 영감 팍팍 받아요. 상상과 생각이 날개를 달고 우주를 날아다녀요. 쓰고 싶은 이야기들이 너무 많아 미칠 지경이에요. 제 글쓰기 선생님이 말씀하시더군요. 쓰고 싶은 욕구를 참을 수 있어야 진정 작가가 된다고요. 그 말뜻을 알겠어요. 너무 쓰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아서 두서가 안서요. 이런 이야기도 저런 이야기도. 지들끼리 전쟁을 하는 것 같아요. 먼저 세상에 나오고 싶다고.

   "자자, 요놈들아, 열중 쉬 엇! 얼릉 팔 뻗고 열 좀 지어봐라. 제발, 응!"

   그렇게 주문을 걸어요. 한편으론 이런 영감들이 도망칠까 겁이 나기도 해요. 잊혀질까 도. 지금은 단속을 하고 있어요. 일단 6월 말, 공모전 제출하고 뭐든 써보자. 다음 계획은 군산여자들 2부작 꽃배인데 그걸로 정했고 선생님도 그러자고 했는데 또 여행기도 쓰고 싶고. 영혼의 여행기요.

   

  아이가 있어요. 이 아이는 어느 날 하나님의 실수로 시골 가난한 농부의 집 아이로 태어난 거에 요. 그 아이는 자기도 모르게 늘 상상을 하며 꿈을 꾸어요. 세상 넓은 곳으로 새처럼 날고 싶다는. 저 너머 너머엔 무엇이 있을까 상상에 빠져 외톨이가 될 수밖에 없었던 아이는 정말 등짐을 메고 여행을 떠나는 거예요. 그 여행의 과정을 그리고 싶은 거죠. 거친 벌판과 강과 바다와 사막을 지나 계곡 깊은 숲을 지나게 되면서 만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 벌써 결론 부분은 좀 더 구체성을 띠기도 하고. 울창한 숲에 이르게 되는 거예요. 피곤도 하고 또 비도 오고 바람도 불어서 아이는 큰 바위 밑에 쪼그리고 앉게 되는 거죠. 배도 고프고 춥기도 해서 아이는 그 바위에게 말을 걸게 되는데 정말 바위가 대답을 하는 거예요. 아이는 또 바위의 소리를 마음으로 듣게 되는. 재미있겠죠? 그 아이가 저예요. 그 바위는 누구일까요? 맞히면 500원. 절대 답 말해 주지 않을 거예요. 절대롱!

 

  이런 상상을 하다 보니 어딘가 어린 왕자와 비스끄므리...ㅎㅎㅎ 맞아요. 어른을 위한 동화 같은 것이라니...이걸 먼저 쓰고 싶다요. 선생님에겐 숨기고 같이 써야겠어요. 저한테 욕동을 다스릴 수 있어야 진정 작가라고 하셨는뎅...

   있잖아요? 가끔씩 자신의 글 속의 캐릭터와 사랑에 빠지는 그런 경우는 없으신가요? 전 요. 제가 쓴 캐릭터와 가끔씩 사랑에 빠져요. 요즈음은 철이 나 알렉산더라는 캐릭터와 연애 중이에요. 원래 장편 속에 단편으로 액자 구조속의 캐릭터인데 나도 모르게 빠져 들고 말았어요. 창비 문학상에 제출했던 작품인데 물먹었어요. 왜 그런지도 알아요. 제가 너무 무리하게 이야길 전개해서. 액자구조를 탈피하고 단일하게 갔어야 했다. 후회했지만 상관없어요. 다음엔 더 잘 쓸 수 있는 확신이 있으니까. 엥. 옆길로 샜다. 이 남자 철이 나 알렉산더는 7살 무렵 은빛 보육원에 맡겨져요. 마이스터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보육원에 봉사 차 왔던 미군인 알렉산더씨에 의해 입양돼 미국에서 공부해서 천문학박사가 되어 NASA에서 근무를 하다 외계인에 빠져 50만년 후의 미래를 책임질 의무를 스스로 떠안게 되는 인물이에요.

   안 궁금해요? 피! 그래도 요 밑에 붙여볼게요. 심심해서 술 마시고 싶으실 때 술 대신 제 남자에게 빠져 보시길. 이만 총총! 담에 문답식으로 물어 볼 거예요. 읽었나, 안 읽었나?



   찌를 듯 강한 전자파가 목표물을 향해 직진해 왔다. 그들이 왔다. 도리가 없었다. 견딜 수 있을까. 두려움이 포효하고 있었다. 두려울수록 날 선 긴장감은 그를 단련시켰다. 3,000도를 웃도는 광고온계가 자신 내부에 설치되어 있었다. 3,100, 3,200 3,300 순식간에 광고온계가 팽창했다. 폭발할지도 몰랐다. 절박했다. 절박하면 할수록 자신이 더 단단해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알 수 없었다. 악랄한 고통 앞에서도 주눅이 들지 않는 자신이 대견했다. 정신을 집중했다. 감지되는 모든 고통이 척추를 타고 온 몸에 비수처럼 꽂혔다. 어떤 형태의 공격이라도 막아낼 힘이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 하지만 아는 것과 경험하는 것은 천지차이였다. 안다고 해서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아니 알기 때문에 더 두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담담히 다가오는 공격에 맞선다. 다소 초조하게 그들의 공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공격에 대비해 종종 명상에 들어갔다. 어느 곳이든지 가부좌를 틀고 앉아 호흡을 셌다. 감은 눈으로 호흡을 세는 횟수가 많아지면 곧 호흡마저도 잊어버린다. 가수면 상태에 들어간다. 그 상태에서 프로토콜을 사용했다. 즉 외계인들과의 교신 언어인 프로토콜로써 현재 자신이 처한 곤경을 알리는 것이다. 설사 그들에게 자신의 상황을 알리지 않아도 그들은 이미 그림자정부가 그에게 가하는 위험을 먼저 알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가 겪는 곤경을 알고 함께 하고자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극도의 불안감은 자신의 한계를 아는 까닭이다. 그들과의 교신을 통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해보고 싶었다. 그들과의 교신의 한 방법은 명상을 통해 이루어졌다. 하여 요즈음 늘 혼자 있을 때는 사색과 명상의 자세로 돌입하는 시간이 늘어갔다. 그런 훈련 덕분인지 처음엔 아찔했지만 곧 맞설 수 있었다. 눈을 감고 자신내부로 쏟아지는 공격을 감지한다. 정중앙 이마를 타고 흐르는 푸르스름한 빛을 감은 눈으로 확인한다. 그럼으로써 전자파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었다. 공격에 맞서 다시 한 번 프로토콜을 사용한다. 그들이 보낸 전자파가 프로토콜을 타고 밖으로 빠져 나가 곧 힘을 잃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안도의 숨을 내 쉰다. 하지만 언제든 그들의 공격은 다시 이루어질 것이다. 긴장감을 늦출 수가 없었다.

얼마 전에 만났던 그림자정부의 비밀요원중의 하나가 말한 사실이 퍼뜩 머리에 떠올랐다.

“우리는 인간의식에 영향을 주는 전자시스템 개발을 5년 전에 끝냈어요. 그것뿐만 아니에요. 개발 중인 여타의 향정신성 무기들과 결합한다면 완벽하게 한 인간의 행동과 결정과정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죠. 간단하죠. 버튼 하나만 누르면 돼요. 우리는 이 시스템을 M.F.라고 부르죠. ‘남을 자유자재로 조종한다.’는 뜻의 mind fuck의 앞 글자를 딴 것이죠. 엄청나지 않나요? 모든 사람들을 우리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렉산더는 그가 일부러 자신에게 경고하러 왔다는 것을 눈치 챘다. 그것은 곧 그들의 공격이 임박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 공격은 시시때때로 그를 분산 시킬 것이다. 잠시도 안심할 수가 없었다. 과연 언제까지 자신이 견딜 수 있을까? 그는 묻고 있었다. 어쩜 이런 물리적인 고통은 견딜 수 있을 것이다. 가장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심리적인 고통이었다. 심리적인 고통을 재는 측정기가 있다면 알렉산더는 피식 쓴 웃음이 나왔다. 얼마 전에 과학 잡지에서 읽은 기사가 생각났다.

“영화 토탈리콜의 실제로 가능? 대체현실 대두 보고서를 통해 대체현실 기술의 성공 가능성이 현실로 대두되고 있다.”

알렉산더가 이 기사에 끌리는 단 하나의 이유는 그것이었다. 참을 수 없는 심리적 고통을 대체현실을 통해 치유해줄 수 있다는 그럴 듯한 과학적 근거를 제시한 문구들 때문 이었다.

“대체현실은 인간의 인지 과정을 왜곡시켜 외부에서 만들어진 의도된 기억이나 이용자가 가상공간에서 경험하는 것을 실제의 체험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기술이다.”

정말 인간의 기억을 조작하거나 주입하는 것이 실제로 가능할까. 그림자 정부요원이 말한 M.F.라는 기술이 실제로 성공했다는 그들의 말이 사실이란 말인가? 헤드 마운티드 디스플레이(HMD·Head mounted Display)라는 것을 머리에 쓰기만 해도 가상현실의 세계에 진입할 수 있다니. 그림자 정부 요원의 모든 말들에 신빙성을 제시해주는 기사였다. 놀랄만한 일도 아니었다. 이미 20년 전부터 과학계가 연구해왔고 어느 정도 마무리 단계에 와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바도 아니었다. 알기에 알렉산더는 더 두려운 것이다. 이러한 기술을 가지고 과연 그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과학적 진보의 기술을 가지면 가질수록 인류는 발전했을까? 그 발전된 모습이 지금의 현실이란 말인가? 알렉산더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들이었다. 진실은 은폐되고 지식은 특정인들의 손아귀에 있다는 것.

과연 이 시점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 자신이 인류의 미래를 지고 있다는 자부심은 한낱 공상에 불과하단 말인가?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세계 곳곳의 수많은 동지들의 얼굴이 오버랩 되어 왔다. 그들과 함께 걸었던 지난 20년은 외롭지 않았다. 자신의 과부화 된 능력에 도취되어 온 것도 사실이었다. 그것이 신념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자기는 어떤 사람인가? 자신의 신념으로 인해 사랑하는 딸을 잃은 아버지일 뿐이라는 사실. 그로인한 심리적 고통이 인류의 미래를 지고 있다는 자부심보다 더 현실이라는 사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알렉산더는 자꾸만 보이지 않는 거대한 세력에 의해 자신의 목표가 방해를 받고 있는 지금의 상황이 걱정됐다. 어떻게 대처해나갈 수 있을까 막연한 심정이었다. 설사 자신을 믿고 따르는 회원들의 강한 지지에 대한 확신, 그것만으로 부족했다. 물론 프로토콜의 교신으로 외계인의 힘에 의지할 수도 있다. 지금까지 줄곧 그들의 도움을 받아 온 것도 신기할 정도였다. 하지만 여전히 알렉산더는 부족한 무엇인가를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신념의 부족인가, 알렉산더는 자신에게 물었다. 그럴지도 몰랐다. 하여도 자신의 한계를 느낀다는 것은 곧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첫걸음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다음 단계에 대한 그림을 아직 그리지 못해 답답하기만 했다. 한 때 그림자 정부의 요원 이었다가 자신의 회원으로 등록한 미스터 챙은 종종 그림자 정부의 실재에 대한 많은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일루미나티(Illuminati) 또는 광명회(光明會)는 과거와 현대 그리고 실재와 가공의 세계에서 주목받는 몇몇 집단의 명칭 가운데 하나이지. 통상적으로 현대에 들어와 구체화하였거나 바이에른 일루미나티가 지속하여 이른바 권력 뒤에 숨은 그림자 세력으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정부와 기업들의 정세를 살피며 세계를 지배하려 드는 음모 조직으로 일컬어지고 있다는 사실. 바로 이것이 그림자 정부의 원형이야. 이 일루미나티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기획하기 위해 비밀리에 회합을 가진다네. 세계의 재력가와 권력자 등 영향력을 지닌 일부 인사들로 구성된 모임이지. 신세계질서. 이것은 일루미나티의 궁극적인 목표로 모든 정부와 민족주의 그리고 조직화된 종교를 무력화시키고 자신들이 세상을 지배하겠다는 새로운 질서를 뜻한다는 말이라네. 그들은 가까운 미래에 그러한 역사를 도모하겠다는 의지로 미국지폐인 1달러에 자신들의 표식을 담아 넣은 것이란 말이지. 피라미드뿐만이 아니네. 미국의 국새인 독수리에도 일루미나티의 표식은 담겨져 있다고 하더군. 이 일루미나티 회원들의 운영하는 단체를 우리는 통상 그림자 정부라고 일컫는 다네. 이 그림자 정부는 전 인류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관장하고 통제하고자 몇 가지 계획들을 추진 중에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전 인류의 몸 안에 베리칩을 장착하려는 계획이네. 처음으로 베리칩에 관한 얘기를 들었을 때, 내가 느꼈던 소름끼친 감정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네. 그런 식으로 우리는 누군가에 의해, 그래, 바로 그림자 정부에 의해 모든 것을 지배당하고 있다네. 모든 것의 정점은 권력에 있어. 인간의 DNA속에 저장되어 있는 본능 중에 하나이지. 누가 그 권력을 얼만 큼 쥐고 흔드냐 에 따라 한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한 국가도 인류전체의 미래도 결정되는 것 아닐까? 이 우주 전체까지도 말이야.”

이미 알고 있는 상황들을 미스터 챙을 통해 한 번 더 확인하게 된 셈이다. 알렉산더는 오늘 빨간 옷 숙녀를 만나기로 약속한 날임을 기억했다. 저녁 만찬에 초대받았다. 그녀는 그림자정부의 핵심요원임에 틀림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더는 그녀의 초대를 거절하지 않았다. 그녀는 알렉산더로부터 어떤 정보를 끌어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녀는 알렉산더가 영국에서 만났던 외계인에 대한 실질적인 정보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 정보를 가지고 그녀는 또 얼마간의 보조금을 타낼 수 있을 것이고 그 보조금은 그녀의 개인적인 생활을 위해 쓰여 질 것이다. 이 지점까지도 알렉산더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더는 자신과 외계인의 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가진 모든 정보를 원하는 누구에게라도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아니 신념을 넘어서 진리를 찾는 사람들이 마땅히 취해야 할 행동의 원칙이었다. 그 점을 그림자정부의 요원들은 교묘히 이용을 했다. 알렉산더로부터 얻은 정보를 토대로 또 어떤 거짓정보를 세상에 내놓게 될지 두려운 것도 사실이었다. 외계인과의 전정한 교신을 방해하기 위한 그들의 공작이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알렉산더처럼 몇몇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공격하는 것도 그들이었다. 이러한 공격을 통해 그들이 노리는 것은 단 하나, 진실을 은폐하고 우주 공동체라는 인식의 확대를 막는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림자 정부가 온 우주를 지배하며 유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알렉산더씨, 당신이 추진하고 있는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프로젝트에 대해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빨간 옷의 숙녀는 이미 알고 있는 질문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알렉산더의 프로젝트에 대해 파악하고 있음을 그 또한 알고 있었다. 알렉산더는 생각했다. 왜 그녀는 이미 알고 있는 사항을 반복해서 들으려 할까? 자신을 시험하고 있는 것일까? 짐작할 뿐이었다. 그는 그녀가 원했던 사항들을 일일이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녹음까지 하고 있는 빨간 옷 숙녀를 알렉산더는 지긋이 바라다보았다.

“당신이 그러한 일을 하려는 진짜 이유는 무엇 입니까?”

마치 취조하듯 그녀는 물었다.

“세상에는 자신의 임무를 이해하고 끝까지 해보려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나는 영적이고 다정한 사람들이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사람들을 한데 모아 우리의 미래를 설계해야함을 느꼈습니다. 나는 내 직관의 안내를 받아 우주적 보편성을 완전히 자각함으로써 서로가 소통하며 두려움과 갈등을 극복하는 평화로운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길만이 환경오염, 가난, 전쟁, 질병과 같은 부조리로부터 인류를 구원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말하는 새로운 시대란 결국 지구인과 외계인의 통합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그런 것이죠? 당신에게 어떤 이익이 있는 것일까요?”

그녀는 알렉산더를 직시하며 직접적인 질문을 했다.

“맞습니다. 지구인과 외계인이 인류의 종말을 막고 새로운 시대를 위해 힘을 합치자는 것입니다. 우리만으로는 아직 부족합니다. 그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프로젝트를 만든 것입니다. 나에게 어떤 이익이 있냐고요? 글쎄요. 이익보다는 일종의 사명의식입니다. 우리와 외계와의 통합만이 우리의 살길이며 그 통합의 교량역할이 제 임무라는 인식 말이죠. 마치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를 융합해 헬레니즘 문화를 이룩한 알렉산더 대왕처럼 말이죠.”

빨간 옷의 숙녀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를 알렉산더는 짐작하고도 남았다.

“당신이 과연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군요. 설사 그렇다손 치더라도 당신은 결국 누군가에 의해 살해되고 말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경고이기도 합니다.”

빨간 옷 숙녀는 단호한 표정으로 알렉산더를 응시하며 말했다. 알렉산더는 그녀의 시선을 마주하며 웃었다. 정작 그녀는 그녀 자신이 얻고자 하던 어떤 정보에 대한 언급도 하지 않았다. 알렉산더는 그녀의 경고를 이해했다. 또한 그녀가 자신을 만나려 했던 이유를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부분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더 이상 물을 것이 없는 것처럼 그녀는 서둘러 알렉산더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먼저 일어났다. 알렉산더는 그녀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그녀의 뒷모습에서 알렉산더가 발견한 것은 푸르스름한 어떤 빛이었다. 바로 외계인들이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왔을 때 발견했던 일종의 그런 빛이었다. 알렉산더는 안심이 되었다. 누군가 자신을 지켜주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림자 정부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주는 외계생명체의 존재를 알렉산더는 또 한 번 경험한 순간이었다. 알렉산더는 집으로 돌아왔다. 텔레비전을 켰더니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화면에는 UFO가 페루의 마추피추 상공에 또 다시 나타났다는 소식 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미확인 비행물체에 의해 관광객 3명이 납치돼 사라졌다는 소식과 함께였다. 우울한 소식이었다. 알렉산더는 그것 또한 그림자정부가 무엇인가를 감추기 위해 사람들에게 외계인은 위험한 존재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한 계략임을 눈치 챘다.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 알렉산더는 묻고 있었다.

오늘 알렉산더는 전에 스텔스기 조종사였던 밀러씨와 면담이 예정되어 있었다. 알렉산더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짐작하고도 남았다. 눈물을 흘리고 고백이라도 하고 싶단 말인가? 아니면 자신의 신변에 대한 안전을 보장해 달라는 부탁일까? 자신에게 무슨 힘이 있다고. 때론 사람들은 알렉산더에게 무리한 기대를 가지고 찾아온다. 알렉산더는 자신의 한계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 알렉산더는 그것이 부담스럽기만 했다. 하지만 알렉산더는 또한 알고 있었다. 자신의 미약한 힘에 의지하려는 많은 사람들의 두려움을. 함께 극복하고 싶었다. 그것이 알렉산더가 사람들의 기대치와 만나는 이유였다.

얼마 전에 밀러씨는 양심선언이라는 것을 했다. 자신이 누른 버튼 하나로 수천 명이 죽어갔다는 사실, 자신의 아이들과 같은 시리아의 아이들이, 이라크의 아이들이 죽어갔다는 사실을 고발함으로써 정부인지, 어느 집단인지에 의해 그는 암살 대상자가 되고 말았다. 가족의 안전마저 위협되었다. 그걸 대비해서 안전장치를 마련했지만 그 안전장치라는 것은 영속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계획은 이루어졌고 이제 그는 그와 그의 가족에 대한 안전을 알렉산더, 혹은 알렉산더의 조직의 힘에 의탁하고 싶은 것이다. 알렉산더는 밀러씨의 기사를 읽었고 그의 고민과 그가 자신을 만나려는 의도를 거부하지 않았다.

거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오히려 밀러씨의 정보와 기술들이 알렉산더의 조직에게 얼마간의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조차 들었다.

약속시간보다 일찍 알렉산더는 집을 나섰다. 문을 열자 5월의 상큼한 공기가 폐 깊숙이 스며들었다. 저절로 깊은 숨이 공기를 한껏 끌어 들였다. 어디선가 쟈스민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근처 중국인인 공의 정원에선가? 알렉산더는 코를 흠흠 거렸다. 가벼운 차림으로 나선 발걸음이 마치 날아오를 것 같았다. 꽃향기 때문이었을까? 나비와 벌들이 바람을 따라 날아 다녔다. 높이 선 플라타너스의 잎들이 바람에 따라 춤을 추고 있었다. 햇살을 반주삼아 마치 치어리더의 치마처럼 팔랑거렸다.

살아있다는 것이 이런 것이다. 단지 숨 쉬고 느낄 수 있다는 것, 가슴이 뿌듯해 졌다. 약속된 카페는 이른 시간이라 한가했다. 알렉산더는 카페의 문을 열다 멈칫했다. 바흐곡이 흐르고 있었다. 마테수난곡, 특히 그가 좋아하는 아리아가 흐르고 있었다. 잠시 심호흡을 했다.

아, 나의 하느님이여.

나의 눈물로 보아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 앞에서 애통하게 우는

나의 마음과 눈동자를

주여, 보시옵소서. 불쌍히 여기소서!

가슴이 뻐근해졌다. 한쪽 구석에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데, 여섯 살로 보이는 여자아이와 함께였다. 여자 아이는 마치 흘러나오는 곡의 바이올린 파트를 본인이 연주라도 하듯 연주자의 흉내를 내고 있었다. 사내는 그런 여자 아이를 넋이 나간 듯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 옆에 여행 가방이 놓여 져 있었다. 한 눈에 밀러씨 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알렉산더가 들어서자마자 일어섰다. 그도 알렉산더를 한 눈에 알아차린 것 같았다. 성큼 알렉산더는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밀러씨?”

“네. 노먼 밀러입니다. 알렉산더씨?”

“네, 철이 나 알렉산더입니다.”

둘은 앉았다. 밀러씨 옆의 여자아이가 알렉산더를 보고 웃었다. 알렉산더는 그녀의 웃음이 쟈스민 향기와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알렉산더는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공주님, 이름이?”

“네, 알렉산더 아저씨, 저는 도리언이에요.”

알렉산더는 살짝 웃었다. 여자아이가 너무 사랑스러웠다. 특히 에메랄드빛 눈이 깊었다.

“어떻게 내 이름을 알았지?”

“방금요. 아빠한테 말씀하셨잖아요?”

알렉산더는 참을 수 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머쓱해졌다.

“그래, 내가 방금 그랬구나. 그러면 넌, 도리언 밀러?”

“네, 도리언 밀러예요. 근데 어떻게 제 성을 아셨죠?”

“방금 네가 그랬잖니? 이름이 도리언이라고. 밀러씨가 네 아빠일 것이고. 그러니 넌 도리언 밀러가 되겠지.”

“와, 아저씨 천재다.”

도리언 밀러도 알렉산더를 보며 크게 웃었다. 그들의 웃음을 지켜보며 밀러씨도 긴장감을 내려놓은 듯 푹하고 한 숨을 쉬었다.

“네, 제 딸입니다. 오랜 동안 숨어 지내느라 힘이 들었죠.”

“그렇군요. 딸이 아직 어려서. 나머지 가족은?”

“아들과 아내는 멀리에 있습니다. 아내가 둘을 책임지기 힘들 것 같아서.”

“아, 그랬군요. 고생하시겠군요.”

알렉산더는 그렇게 밖에 말할 수 없었다. 밀러씨의 얼굴이 긴장했다. 곡이 끝나자 도리언은 가지고 있는 꾀죄죄한 인형과 혼자 이야기 하고 있었다. 알렉산더는 가슴이 찡해졌다.

“근 일 년을 숨어 지내셨을 것 같군요.”

“그렇습니다. 지쳐갑니다.”

“실제 공격을 받은 적은 없습니까?”

“글쎄요. 공격이라면 공격이겠지요.”

“무슨 일이?”

“제 이웃이 총탄에 맞았어요.”

“이웃이요?”

“네, 제가 잠시 식구들을 피신시키면서 우리 집을 부탁했었거든요.”

“그렇군요.”

“네, 상황이. 두려웠어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좀 마음이 가벼워 졌어요.”

“그렇겠지요. 저를 만나려는 이유는?”

밀러씨의 얼굴이 팽팽히 굳어졌다. 알렉산더는 왠지 미안했다.

“아, 제 짐작대로라면.”

“그렇습니다. 도움을 청합니다.”

“저에겐 힘이 없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박사님의 힘이 아니라 박사님 주변의 힘이 필요합니다.”

“아, 네?”

알렉산더는 난감했다. 예상은 하고 있었고 답도 준비했었다. 하지만 밀러씨의 딸, 도리언을 보니 차마 준비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얼마 전에 그들의 공격에 의해 자신이 지켜주지 못한 딸 엘리자베스가 생각났다. 아니 도리언을 만나자 마자 엘리자베스가 떠올라 가슴이 뻐근했었다.

“뉴스에서 보셔서 제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아셨겠죠?”

“네, 봤습니다. 선생님이 연락하셔서 조사해봤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아내와 아이들과 평화로운 아침 식사를 마치고 근무하는 부대로 출근합니다. 최첨단 스텔스기를 조종해서 공중 급유기의 도움을 받아 대서양을 횡단합니다. 이라크에 혹은 어떤 목표물에 엄청난 양의 폭탄을 투하합니다. 투하한 폭탄은 이라크 군인들만이 아니라, 이라크 어린이들을 포함한 많은 이라크 민간인들을 죽인다는 사실에 전혀 게의 치 않았습니다.

그것은 저의 직장이었고 저는 그저 저의 임무를 올바르게 수행할 뿐이었습니다. 임무를 끝낸 저는 스텔스기를 조종하여 다시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돌아옵니다. 아침에 출근해 수많은 인명을 살상한 저는 저녁에 아내, 아이들과 함께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으며 힘들었던 하루를 마감합니다. 그것이 저의 일상이었습니다.

어느 날 말이죠. 집에 돌아 왔는데, 그래요. 부활절 가까운 날이었죠. 거실에서 바흐의 마테 수난곡이 흘러 나왔죠. 도리언이 방금 들으신 부분을 연주하고 있었죠. 도리언의 오빠, 존, 제 아들입니다. 나지막이 도리언의 연주에 맞춰 아리아를 따라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저는 순간 숨을 쉴 수 없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왔단 말인가? 그 기분 짐작하시겠어요?"

알렉산더는 밀러씨를 지긋이 응시했다. 밀러의 얼굴에 눈물이 흘렀다. 무엇인가 대꾸를 해야겠다는 마음과 달리 알렉산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때였습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사실은 저도 연주자였습니다. 첼로를 연주했어요. 음악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아버님이 반대하셨죠. 저의 아버지도 군 요직에 계시다 퇴직한 신분이셨고 집안 대대로 그 계통의 요직을 두루 거친 가족력이 있습니다.

저의 어머니 쪽은 나름 음악 쪽의 조예가 깊으신 분들이었죠. 아마 제 기질의 반은 외가 쪽이었습니다. 물론 그분들은 이미 다 고인이 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군에 근무하게 되었고 참으로 유능한 비행기 조종사였습니다. 다음 일은 짐작하시겠죠?"

알렉산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리언은 마치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인형놀이에 빠져 있었다. 알렉산더는 밀러씨의 부탁을 정중히 거절하려고 나온 자신의 결심이 흔들렸다.

"지금까지는 그럭저럭 딸아이와 함께 피해 다녔습니다. 보시다시피. 하지만 곧 저는 붙잡히고 말 것입니다. 제 목숨이 촌각에 달려있다는 사실엔 이미 각오한 몸입니다. 다만 도리언, 도리언을 구하고 싶습니다."

알렉산더는 자신의 예상이 빗나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밀러씨는 분명히 알렉산더의 그룹에게 목숨을 의탁해 올 것이었고 그것이 부담스럽기만 했는데. 그는 딸아이만을 맡긴다니. 뭔가 한 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멍했다.

"그렇습니다. 신문에서 읽었습니다. 박사님의 딸을 잃으셨다고요. 도리언과 같은 나이였더군요."

알렉산더는 갑자기 가슴에 통증이 느껴져 왔다. 알렉산더의 얼굴이 샛노래졌다.

"죄송합니다. 아직 가슴이 아프시겠지요. 무례함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도리언을 딸처럼 키우시면 어떻겠는가? 제안을 해야만 하는 제 입장입니다. 물론 박사님 이외에 누군가 맡길 수 있는 사람들은 있겠지요. 하지만 도리언 만은 뭔가 저와는 다른 일을 하는 분 밑에서 자라게 하고 싶었습니다. 물론 저 아이가 음악에 재능이 있기는 합니다. 음악가로서 자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저는 숨어서 지내는 일 년 동안 박사님에 대한 모든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박사님의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프로젝트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가 군에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거였습니다. 세계의 평화, 마치 사명처럼 말이죠. 웃으실지 모르지만 평범한 인간도 자신안의 존재의 신비를 경험하게 되면 뭔가 신의 뜻을 이루려는 의지가 생깁니다. 저의 의지는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말았지만."

밀러씨는 잠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살랑살랑 오월의 바람이 가볍게 불고 있었다. 햇빛에 반사되는 나뭇잎들의 움직임으로 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

"참 좋은 시절이군요. 여느 때 같았으면 지금쯤 어느 공원이든, 해변 가에서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겠지요."

알렉산더도 같은 생각이었다. 이 무렵이면 아내와 딸, 엘리자베스와 근처 공원에서 햇빛 바라기를 했을 것이다.

알렉산더는 도리언에 시선을 두었다. 도리언도 알렉산더의 시선을 눈치 채고 희미하게 웃었다.

"참, 따님이 예쁘군요."

"네, 천사 같지요. 이 애를 보면 어디선가 쟈스민 향기가 나는 것 같습니다."

알렉산더는 깜짝 놀랐다. 오늘 아침 공의 정원에서 불어오던 쟈스민 향기가 이곳까지 묻어 온 것 같다니. 알렉산더는 이제 뭔가 운명 같은 느낌이 들었다.

"좋습니다. 도리언과는 이야기를 해 보셨습니까?"

"네, 도리언은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아직 어린나이인데."

"지난 일 년 동안 이해시키려고 노력한 결과입니다."

"그럼 도리언과 헤어져 앞으로 밀러씨는?"

"도리언과 헤어지는 일이 도리언을 지키는 일이라는 것을 안다는 사실입니다. 그 외의 다른 계획은 아직 없습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우선 도리언을 저희에게 맡기시고 밀러씨는 제가 가라는 곳으로 가시겠습니까? 하지만 그곳까지 가는 것은 밀러씨 개인 차원에서 해결해야 합니다. 그곳에 도착하면 저희 요원들이 앞으로의 일에 대해 말해줄 것입니다. 선택은 밀러씨 개인 몫 입니다."

밀러씨는 굳은 얼굴로 알렉산더를 쳐다보았다. 알렉산더는 예기치 않은 자신의 제안을 계속했다.

"벨기에의 유판 이라는 곳으로 가십시오. 벨기에 동부, 독일국경 근처입니다. 그곳에 우리 동지들의 아지트가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그곳에서 1989년부터 꾸준히 거대한 삼각형 UFO들이 출현했던 곳입니다. 지금은 그때처럼 이슈화되지 않지만 꾸준히 UFO가 출몰하는 지역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잊혀 진 곳입니다. 그곳까지 가기만 하면 안전에는 아무 이상이 없을 것입니다. 밀러씨가 도착하기 전 미리 연락을 해 놓겠습니다. 이것 밖에 드릴 말씀이 없군요. 다시 한 번 말합니다. 어떻게 가느냐 하는 것엔 전적으로 밀러씨 스스로 모색하시기 바랍니다."

알렉산더는 전혀 예정에 없는 제안을 하는 자신에 놀랐다. 밀러씨는 알렉산더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고마운 제안입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한 가지만 약속해 주십시오. 도리언의 안전을."

"그 점은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아직 제 딸, 엘리자베스의 사망 신고조차 못한 상태입니다.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지만 괜찮으시다면 도리언을 엘리자베스로 키우겠습니다. 무리한 제안 입니까?"

"아, 아닙니다. 그것을 저도 제안 드리고자 왔습니다. 도리언은 더 이상 제 딸이 아닙니다. 제 딸로서 살아가기에는 생명조차 보장되지 않습니다. 아시겠지만."

도리언은 두 어른들의 말을 이해하는지 어쩐지 혼자만의 세계 속에 빠져 있었다.

"알겠습니다. 양해해 주신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젠 도리언은 엘리자베스 알렉산더입니다. 의의 없으시죠?"

"네,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저 먼저 떠나겠습니다. 떠나기 전 잠시 제 딸아이와 둘만 있겠습니다. 작별인사라도······."

"네, 그렇게 하시죠."

알렉산더는 일어서서 카운터로 갔다. 계산을 마치고 돌아서니 밀러씨가 도리언의 눈물을 닦아내고 있었다. 도리언은 밀러씨의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도리언을 두고 밀러씨가 성큼 걸어왔다. 악수를 청했다. 그렇게 밀러씨는 떠났다. 알렉산더는 도리언에게 가까이 갔다. 도리언은 사라지는 밀러씨의 뒤로 시선을 두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알렉산더는 가슴이 아렸다.

"자, 자, 아가씨, 우리도 이제 가야겠어요."

"네, 알렉산더씨."

알렉산더는 웃음이 나왔다.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발음을 하는 도리언이 여섯 살 여자 아이 같지 않았다. 도리언도 눈물을 훔치며 웃었다. 도리언은 한 손에 자신의 가방을 끌고 한 손으로 가만 알렉산더의 손을 잡았다. 알렉산더의 손바닥에서 꼬물거리는 작은 도리언의 손이 따뜻하고 보드라웠다. 알렉산더는 도리언의 손을 잡은 채로 걸었다. 둘은 말이 없었다. 도리언은 호기심으로 사방을 훑어보고 있었다. 알렉산더는 그런 도리언을 보고 이 아이가 살아 갈 미래가 답답했다. 이상한 책임감이 무겁기조차 했다.

사실 알렉산더가 밀러씨에게 제안 한 벨기에의 유판에 있는 그들 본부는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던 알렉산더가 속한 그룹의 총 본산이었다. 그곳에서 알렉산더는 외계인들과 끊임없는 교신을 통해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 지에 대한 방향을 설정하는 곳이다.

말하자면 알렉산더 프로젝트의 뇌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굳이 밀러씨를 그곳에 보내는 이유는 뭔가 그곳에 가게 되면 밀러씨의 경험이 그룹에 핵심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었다. 실제적인 외계인과의 접촉, 그의 비행술과 그에 따른 지식이 필요했던 참이었다. 사실 그룹 원들과 상의를 하지 않고 단독으로 결정한 사항이었지만 알렉산더는 자신의 직관을 믿었다.

도리언과 함께 살기 시작한 알렉산더는 서서히 마음의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엘리자베스가 떠난 그 자리를 도리언이 채워주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무사히 벨기에 유판 본부에 도착한 밀러씨에 대한 검증이 그룹들 사이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기뻤다. 밀러씨가 제공한 기술과 비밀정보들이 앞으로 알렉산더가 나아가야 할 길에 촉매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높이고 있었다. 알렉산더는 지금까지 자신들의 그룹에서 얻은 외계인에 대한 모든 정보를 세상에 알리기로 결정했다.

시기가 문제였지 무엇을 어떻게 알릴 것인가 하는 사항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그림자 정부가 보여준 지구인과 외계인들과의 잘못된 충돌, 외계인에 대한 왜곡된 정보, 그림자 정부가 그런 왜곡된 정보를 무차별하게 발표함으로써 얻게 되는 막강한 그들의 이익. 방향을 알 수 없는 그들의 정책을 지구인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온 우주의 미래에 대해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가에 대한 경종을 세계인 모두가 알아야 한다는 취지였다.

더불어 세계각지의 더 많은 사람들이 알렉산더의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프로젝트에 공감할 수 있어야 하며 그랬을 때에야 비로소 알렉산더가 지향하는 다음 50만년 동안 이어질 인류문명에 대한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전 인류는 부당한 세력들, 온 인류를 우주전쟁과 지구파괴, 환경재앙과 문화적광기로 끌어 들이려 하는 세력들에 맞서 싸울 행동이 필요한 시기라는 인식의 공감이 확산되고 있었으며 그 날을 함께 기다렸던 것이다.

불안하기도 했지만 알렉산더는 뭔지 모를 그 어떤 사명감에 충만 된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었다. 그룹 원 모두가 ‘요이 땡’ 이곳저곳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터트릴 그들의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일군의 세계유명 방송매체와 일간지들과의 비밀 섭외를 끝낸 상태였다. 진실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은 세계 도처에서 그들을 돕고 있었다. 디데이가 다가오고 있었다.

도리언과 함께 살기 시작한 후 일 년 동안 마음의 안정을 찾은 알렉산더는 자신들의 계획에 매진했으며 그 결과를 보여줄 만큼 충분히 안정적인 삶을 누렸다. 도리언을 만난 후 어쩐지 더 이상 자신에게 공격을 해오지 않은 그림자 정부에 대한 일말의 불안감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새로운 삶이 가져다 준 작은 변화일 뿐이라고 애써 고개를 저었다. 바로 내일이다. 내일 열시에 그들은 총 출동할 것이다. 알렉산더는 그 결과에 대해 굳이 예상하고 싶지 않았다. 단지 그래야만 했으므로 그럴 것이다. 그렇게 자신을 다독거렸다.

도리언은 누구보다도 알렉산더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알렉산더와 함께 지냈던 일 년 동안 도리언도 많이 안정되었다. 다른 아이들과 다름없이 학교를 오가며 친구들을 사귀었다. 얼굴 표정도 밝아지고 하고 싶다던 바이올린 연주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다보는 알렉산더는 누구보다 행복했다.

특히 해질 무렵 마태 수난곡 중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의 서막부분의 도리언의 연주를 들을 때면 알렉산더는 눈물이 났다. 나의 하나님, 눈물로서 기도하는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부분의 아리아를 나지막이 읊조리면 그동안 인류가 재현해 놓은 모든 죄악을 씻을 수 있을 듯 경건함과 애통함이 동시에 몰려왔다.

자신의 딸 엘리자베스 대신에 자신에게 보내준 도리언이라는 천사에 대해 무엇보다 알렉산더는 감사했다. 따라서 도리언의 친부인 밀러씨에 대한 보고를 들을 때마다 마치 자신의 생에 선물을 안겨준 산타 할아버지 같은 감정이 되곤 했다.

미국 시간, 오전 10시에 맞춰 거사는 이루어질 것이다.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새벽까지 뒤척이다 꿈속에서인지, 실재인지 강력한 푸른빛이 자신을 감싸는 기분을 느끼며 잠들었다. 한, 두 시간이나 잤을까.

여느 날처럼 도리언은 학교에 가고 알렉산더는 약속된 장소로 가기위해 차를 몰았다. 아침에 도리언에게 작별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긴장 탓이었으리라. 열어 둔 차장으로 5월의 싱그러운 바람이 부드럽게 전신을 감싸는 것 같았다. 스치는 공기를 마음껏 들여 마셨다. 삶의 찬미가가 절로 나올 것 같은 기분, 인류의 미래가 자신의 손에 달린 듯 무거운 의무감마저 마치 하늘하늘 나비처럼 날아오를 듯 가볍기만 했다.

도착 장소에 이르니 주변에는 약간의 술렁거림이 있었지만 약속된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작은 인터뷰라고 했으니. 5분 전에 자리에 앉았다. 탁자 위에 있는 냉수로 목을 축이고 시계를 확인했다. 5, 4, 3분 전, 정확히 3분 전 잊고 있었던 전화벨이 울려 알렉산더는 흠칫했다.

벨기에 유판 본부의 전화번호였다. 전화번호를 확인한 순간, 뇌가 정지된 것 같은 아찔함과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칼날 같은 서늘함이 동시에 알렉산더에게 몰려왔다. 잠시 깊은 숨을 쉬며 마지못해 전화를 받았다.

“멈추십시오. 1200명, 요원들의 생명이 당신 손에 달려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 일, 이 분의 시간이 지났을까? 약속 장소에 있던 기자들이 일제히 알렉산더를 향해 시선을 집중했다. 알렉산더는 잠시 숨을 골랐다. 무엇을 해야 할지 혼동되었다.

“당신들의 약속된 장소 모두에 같은 메시지가 전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우리의 명령에 따를 것입니다.”

전화선을 타고 흐르는 목소리는 낯이 익었다. 도리언의 얼굴이 아른 거렸다. 밀러씨였다.

“당신에게 한 통의 편지가 전달 될 것입니다. 바로 지금 당신 앞에 있습니다.”

들려오는 전화기의 목소리에 아무 대답을 하지 못하고 알렉산더는 자신 앞에 있는 테이블위에 시선을 두었다.

그 곳에 한 통의 하얀 봉투가 놓여있었다. 알렉산더는 전화기를 내려 놓았다.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집어 들었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구분이 안 섰다. 감전된 듯 그렇게 봉투 속 내용물을 꺼냈다.

알렉산더씨에게.

전화기속의 목소리를 들으시고 놀랐을 당신을 떠올리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짐작한데로 밀러, 도리언의 아버지입니다. 내부 고발자로서 1년을 보낸 뒤 당신을 찾아갔던 일이 작년이었습니다. 수시로 도리언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고를 받고 있습니다. 우선 당신에게 마음을 다해 고마움을 전합니다. 당신이 궁금해 하실 일의 전개는 이렇습니다. 내부 고발자로서 1년을 보내는 중에 수없는 생명의 위협을 느꼈습니다. 애초 저는 러시아 쪽으로 망명을 신청해 놓았고 그 배후에는 KGB가 있었습니다. 어떤 연유로 더 이상 그들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 왔고 그때 NSA의 접촉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들은 나에게 도리언의 생명과 아내와 아들의 신변 보장을 해 주는 조건으로 당신에게 접촉해 당신의 외계프로젝트에 대한 정보를 빼돌릴 임무를 주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믿지 못했습니다. 당신만이 내 딸, 도리언을 지켜줄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 무렵 신문지상에 당신의 딸이 원인모를 테러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시점이었습니다. 나는 내 아내와 아들을 러시아로 보낸 직후였으므로 도리언 만을 책임지면 됐습니다. 나 혼자 몸이었다면 나는 그들의 조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용서하십시오. 당신은 내 딸 도리언의 영원한 아버지가 될 것입니다. 당신들이 비밀스럽게 밝힐 그 모든 정보는 내 손에서 이미 NSA 외계프로젝트 팀으로 넘어갔습니다. 저는 웹 크롤러라는 소프트웨어를 사용해서 당신 그룹 내의 모든 정보를 수집 복사해서 NSA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내 딸을 살렸으며 나는 아마 당신이 이 편지를 읽은 몇 분 후 태평양 상공에서 한 줌의 재가 되었을 것입니다. 무엇으로 용서를 빌어야 할지. 무엇보다도 당신들이 믿고 있었던 인간보다 진보한 고등지적 생명체들에 대한 당신들의 믿음에 다시 한 번 경외를 표합니다. 그리고 부디 당신들의 활동이 전 우주를 위해 진정으로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 그곳에 하느님의 축복이 내리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도리언을 부탁합니다.”

분명히 N. Miler라는 사인이 있었다. 알렉산더는 이제 오랫동안 준비된 모든 그들의 계획들이 일루미나티라는 집단에 의해 장악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곳에서, 유럽에서 중동에서 아프리카에 일제히 드러내놓기로 한 그들의 진실은 결국 또 다시 음모의 장막으로 사라지게 될 운명이 되고 말았다는 인식, 하지만 알렉산더는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일어나 밀러씨의 편지봉투를 들고 집으로 향했다. 진이 빠져 자꾸 몸이 가라앉았다. 차 안의 라디오에서는 평소와 같은 크고 작은 사건에 대한 뉴스들이 쉴 사이 없이 흘러 나왔다.

“태평양 상공에서 2년 전 내부 고발자로 알려진 노먼 밀러씨가 탄 헬리콥터가 폭파되었습니다.”

간단한 한 줄의 뉴스에 알렉산더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물론 밀러씨에 의해 오늘 전 세계에서 동시에 진행키로 한 외계인에 대한 진실 밝히기 프로젝트는 무산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더에게는 도리언 이라는 귀중한 생명이 있었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선물이라는 사실이 더 절실해졌다.

집 쪽으로 향하던 차를 도리언의 학교 방향으로 틀었다. 도리언이 몹시 보고 싶었다. 아침에 놓친 키스를 하고 와야겠다는 생각에 가속장치를 밟은 발에 힘이 들어갔다.

예고도 없이 찾아간 도리언의 학교는 때 마침 이른 점심시간 이었다. 아이들이 줄줄이 식당을 향해 가고 있었다. 알렉산더는 눈으로 도리언을 찾았다. 보이지 않아 식당으로 직행했다. 몇 번 와 본 경험으로 서슴없이 식당을 찾을 수 있었다.

아이들은 웃고 떠들며 먹고 있었다. 마치 5월의 종달새처럼 쉼 없이 조잘거리는 아이들 사이로 도리언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침 무심결에 놓쳤던 도리언과의 작별의식, 안고 뽀뽀를 하며 하루를 기원하는 의식을 하기 위해 왔지만 알렉산더는 망설였다. 나중에 도리언이 이 날을 어떻게 생각할까? 뉴스에서 들은 도리언의 친 아버지 밀러씨가 사망한 날 알렉산더가 일부러 학교를 찾아왔었다는 사실은 어떤 기억으로 남을까 알렉산더가 망설이는 이유였다.

특별한 날이 아니어야 해. 알렉산더는 뒤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집으로 돌아왔다. 영국의 노스데번, 벨기에의 유판, 멕시코의 포포카테페틀, 히말리야의 콩가라. 일본의 후쿠시마, 한국의 서울 등등 그들 그룹의 본부와 화상회의를 위한 시스템을 가동시켰다. 이날 일제히 이 모든 지역에서 ‘외계인과의 접촉과 진실’에 대한 인터뷰 실패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야만 했다.

알렉산더는 밀러씨를 유판에 보낸 자신의 실수를 또한 해명해야만 했다. 가슴이 무거웠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혼자서 감당하기가 버거웠다. 시스템이 정상 가동하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알렉산더는 턴테이블위에 마태수난곡 제 39곡 아리아를 올려놓았다. 알렉산더가 가장 좋아하는 곡이었다.

“주여, 그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알렉산더는 뇌까렸다. 가슴이 아팠다.

밀러씨와 처음 만났던 날 카페에서 들었던 바로 그 곡이었다. 비록 자신들의 계획에 지장을 초래한 밀러씨였지만 그의 죽음은 고통을 가져왔다. 인간으로서 각자가 지고 가야할 삶의 무게. 알렉산더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본부마다 화상회의 시스템이 준비되어 있다는 신호가 왔다. 비장한 얼굴들이 하나하나 비쳐졌다. 알렉산더는 먼저 자신의 과오를 사과했다. 하지만 아무도 알렉산더의 과오에 대해 책하진 않았다. 아마도 누구라도 밀러씨의 접촉을 받았으면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밀러씨의 정보력과 기술은 그들의 원하던 바로 그것이었으므로. 화상회의를 통해 얻은 결론은 그것이었다.

빠른 시일 내에 다시 한 번 오늘의 계획을 실천하자는 것이었다. 비록 일급기밀로 알려진 몇몇의 정보가 밀러씨에 의해 일군의 일루미나티 그룹에게 전달되었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그것이 그들의 계획에 그리 큰 걸림돌은 되지 않을 것임을 아는 까닭이었다.

걱정스러운 것은 오늘의 사건을 계기로 더욱더 그들을 향해 날아올 공격에 대한 대비였다. 어쩜 알렉산더 자신에게 더욱 강한 공격이 이어질 것이 분명하였다.

최전방에 선 알렉산더는 이미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있었으므로. 세계 각국의 유수한 인재들이 속속 알렉산더 그룹의 일원으로 통합되면서 오히려 그것이 그들 그룹의 위험성을 드러내는 꼴이 된 것이다. 서로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자신들을 지켜나가자 하는 방향으로 화상회의는 끝났다.

알렉산더는 피곤했다. 하루가 힘에 겨웠다. 정말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는가? 때때로 회의가 들기도 했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밀러씨의 죽음은 그에게 감정적인 고통으로 다가왔고 그 어떤 공격보다 치명적인 공격이기도 했다. 자신이 자신을 회의하는 것만큼 두려운 것이 없음을 알렉산더가 아는 까닭이다. 어떤 사건을 감정적 차원으로 접근하지 않으려는 방식으로 지금까지의 사건들을 처리해온 알렉산더였다. 하지만 밀러씨의 사건은 그렇지 않았다. 아마도 도리언이 자신 옆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도리언을 부탁한다는 밀러씨의 편지가 자꾸 알렉산더의 감정 선을 복잡하게 한 것이다.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말자. 그냥 좀 자고 싶었다. 침대에 누워 뒤척거리다 깜박 잠이 들었다. 인기척에 알렉산더는 깨었다. 도리언이었다. 알렉산더가 턴테이블에 올려놓은 엘피판을 켜고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었다. 비장한 표정의 도리언의 얼굴, 알렉산더는 도리언에게 죄를 진 기분이었다.

알렉산더가 침대에서 일어나자 도리언이 켜던 바이올린을 내려놓았다. 알렉산더를 향해 뛰어 들었다.

"아빠, 오늘 아침 키스."

도리언은 놀랍게도 아침 키스를 잊은 것을 알고 있었다. 기뻤다. 자신이 아침키스를 하기 위해 도리언에게 갔던 일이 생각나자 웃음이 났다.

"고맙고. 여전히 우리 공주님은 최고의 연주가가 될 거야."

"그래, 아빠. 난 세계최고의 연주자가 될 거예요."

자부심으로 가득 찬 도리언의 표정에 알렉산더의 두려움과 고통이 일시에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래. 부디 꿈을 잊지 말고. 열심히"

알렉산더는 도리언의 작은 몸을 꼭 껴안았다. 세상 모든 걱정 근심이 한 순간에 기쁨으로 변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알렉산더가 중얼거렸다. 도리언을 안은 알렉산더의 온 몸과 마음엔 따뜻하고 부드럽고 달콤한 미래의 세상, 미래의 우주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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