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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에피소드 36. 하쿠나 마타타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16. 5. 18.

하쿠나 마타타



“엄마, 엄마”

세진은 날고 있는 호랑나비를 쫓고 있어요. 나비를 엄마라고 부르는 세진은 여섯 살이에요.

“뿅뿅”

세진이 발걸음을 뗄 때마다 이상한 소리가 났어요. 동생 세진이 넘어질세라 누나 세은이 동생 뒤를 쫓아 왔어요.

“뿅뿅”

세진과 세은의 신발에서 나는 소리였어요.

푸석, 그만 세진이 넘어졌어요. 팔랑팔랑 호랑나비는 멀리멀리 날아갔어요. 아이고, 아팠을 텐데. 세진은 아픈 줄도 모르고 아쉬운 듯 멀어지는 호랑나비를 바라보고만 있었어요.

세은이 뛰어왔어요.

“뿅뿅, 방귀”

넘어진 세진은 곁에 있던 빨간 맨드라미꽃을 가리켰어요. 맨드라미꽃이 바람에 몹시 흔들렸어요. 바람에 흔들리는 빨간 맨드라미꽃과 세진 귀에 들리던 누나의 신발소리가 세진에게는 방귀꽃이 핀 것처럼 보였을까요?

“아니야, 이건 그냥 꽃이야. 땅과 바람과 비와 햇빛이 만들었지.”

세은이 세진을 일으켜 세우며 다정하게 설명을 했어요.

나는 온 몸이 근질거렸어요.

“이 꽃 이름은 맨드라미야.”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을 참고 참았어요. 목이 따끔거릴 만큼 참다가 그만 꿀꺽 마른침을 삼켰어요.

잠깐만요. 궁심하시죠? 내가 누구냐 하면요. 세진과 세은이 놀고 있는 바닷가 찻집 앞, 의자 곁에 살고 있는 노란 민들레랍니다. 특기는 노래 부르기예요. 하쿠나 마타나. 제일 좋아하는 노래죠.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노래 부르면 세상이 온통 노랗게 돼요. 기분이 좋아져요.

제 앞쪽으로는 바다 건너 도시가 보이고 뒤쪽으로는 작은 찻집이 있어요. 사실은 말이죠. 나는 늦둥이에요. 다른 민들레들은 이른 봄에 태어나 벌써 멀리 멀리 소풍을 갔지만, 난 땅속 지렁이랑, 개미랑 노느라 늦장을 부렸어요. 초여름에 태어나 이제야 꽃을 피우고 있는 셈이죠. 친구들은 모두 떠나 혼자 남은 나는 바다갈매기들과 바람과 햇빛과, 꽃들과 나비들을 친구삼아 슬픔과 외로움을 달래고 있어요.

“쉿”

이건 비밀인데요. 제 마음을 뺏어간 이는 ‘나의 왕자님’ 검은 개랍니다. 나의 왕자님은 바로 내 이웃이에요. 저보다 열배, 어쩜 백배나 되는 커다란 몸에 검은 털을 뭉실뭉실 가지고 있어요. 얼마나 잘 생기고 맘씨도 고운지······.

“똥똥똥, 똥개”

세진이 손으로 뭔가를 가리켰어요.

그때 저쪽에서 나의 왕자님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세상에서 가장 멋진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었어요. 난 기분이 조금 상했죠. 나의 왕자님을 똥개라니. 으앙, 울고 싶어졌어요.

“아니야, 똥개라고 하면 안 돼. 제는 미미야.”

세은이 처음으로 나의 왕자님을 미미라고 불렀어요. 부끄럽지만 그때까지 나는 그를 “나의 왕자님”으로만 불렀거든요. 세은이 미미라고 불렀을 때, 나의 왕자님은 곧 미미가 된 셈이죠.

세은의 얼굴이 굳어졌어요. 세은은 다가오는 미미를 피하기 위해 세진을 일으켰어요. 하지만 세진은 세은의 손을 뿌리치고 미미에게 달려갔어요.

“안 돼, 세진”

세은은 겁이 난 표정으로 동생을 불렀어요.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어요. 무섭기도 했지만 또 동생 세진이 걱정인 모양이었어요. 누나의 마음을 알지 못한 세진이 성큼성큼 미미에게 걸어갔어요. 미미 또한 세진에게 다가오더니, 세진 앞에서 팔랑 몸을 눕혔어요. 세진도 미미 곁에 폴짝 주저앉았어요.

“미미”

세진이 미미를 보며 자꾸 히죽거렸어요.

미미가 세진을 향해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혀를 쑥 내밀어 세진의 손과 팔을 핥았어요. 세진도 미미의 머리털을 살살 쓰다듬었어요.

“까르륵, 까르륵”

세진은 즐거워 죽겠다는 듯 발을 굴러댔어요. 세은도 살금살금 세진과 미미 곁으로 다가갔어요. 세은을 눈치 챈 미미가 갑자기 펄떡 일어났어요. 세진도 세은도 깜짝 놀랐어요. 세은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 그 자리에 서 있었어요. 미미가 어슬렁어슬렁 세은 곁으로 다가갔어요. 잔뜩 몸이 굳어있던 세은을 향해 미미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어요. 세은의 표정이 변하기 시작했어요.

“미미. 미미”

다가오는 미미의 등 쪽 털에 세은이 가만 한 손을 올렸어요. 세진도 폴짝폴짝 세은과 미미 곁으로 뛰어왔어요.

“까르륵, 까르륵”

세진과 세은의 웃음소리가 가을 햇살에 반짝였어요. 이제 세진과 세은은 미미의 친구가 되었어요. 미미가 꼬리를 뱅글뱅글 돌렸어요. 세진과 세은은 미미의 꼬리를 잡으려 뛰어 다녔어요. 뿅뿅, 세진과 세은의 신발소리가 사방으로 함께 뛰어다녔어요. 미미 또한 잡힐 듯 말 듯 꼬리를 흔들며 폴짝폴짝 잘도 도망 다녔어요.

아이들이 노는 사이, 세진 엄마는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며 눈물만 흘렸어요. 나도 슬펐어요. 나는 가만 세진 엄마의 정강이에 내 솜털을 갖다 댔지요. 내 솜털이 누군가의 몸에 닿게 되면 나는 그 누군가와 이야기를 할 수 있어요. 믿지 못하시겠다고요? 날 만나거든 내 솜털에 그대의 손을 얹혀 보세요. 우주의 언어, 바로 우주의 언어로 이야기를 할 수 있단 말이죠. 우주의 언어란 무엇이냐고요? 미안해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느낌이란 것만 확실해요.

“세진 엄마, 슬퍼하지 말아요.”

나는 살그머니, 최대한 부드럽고 상냥하게 내 솜털을 가만가만 세진 엄마 다리에 문질렀어요. 처음 세진 엄마는 나를 눈치 채지 못했어요. 안타까운 나는 내 숨결이 세진 엄마에게 전달되어 우주의 접선이 이뤄질 때까지 계속 세진 엄마를 귀찮게 했죠. 우주의 접선이란 우주의 언어가 통할 때 쓰는 말이랍니다.

뭔가를 눈치 챈 세진 엄마가 대답했어요.

“그래, 미안. 내가 너무 슬퍼서.”

세진 엄마의 목소리는 울음으로 가득 차 있었어요.

“저렇게 예쁜 세진과 세은이가 있는 데 무엇이 슬퍼요?”

세진 엄마에게 미안했지만 나는 차마 묻지 않을 수 없었어요.

“난 어려. 이제 막 이십대야. 혼자서 아이들을 키우기엔······.”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세진 엄마는 코를 풀었어요. 난 어서 빨리 세진 엄마의 나머지 이야기를 듣고 싶었어요.

“힘들게 노력해봤어. 편의점에서 세탁소에서, 식당에서, 노래방에서······.”

갑자기 세진 엄마가 큰 울음을 참는 듯 후후거렸어요. 내 온 몸의 솜털이, 내 심장이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어요.

“하지만 부족했어. 보다시피 세진은 아파. 약값을 벌기에도 모자라고. 유치원도 보내지 못하고. 일해야 하는 시간에 세진과 세은을 맡아줄 사람도 없고. 난 너무 힘들어. 더 이상은 못하겠어.”

나는 세진 엄마를 이해할 것도 같았어요.

“가족이란 함께 있어야 해요.”

나는 뜨거워지는 내 심장을 세진 엄마에게도 느끼게 해 주고 싶었어요.

“누가 그걸 모르니?”

세진 엄마는 더 크게 울었어요.

“어제 뉴스를 봤어. 이곳에 버려졌던 아이가 좋은 엄마, 아빠에게 발견되어 훌륭하게 자랐데. 혹시 아니? 우리 세진과 세은도······.”

세진 엄마는 울음을 삼켰어요. 나는 어떡하든 세진 엄마의 마음을 돌이키고 싶었어요.

‘엥엥’ 내 몸의 모든 털들이 막 흔들리기 시작했어요. 내 마음이 간절해지면 나도 모르게 내 몸이 흔들리며 부풀어 올라요. 세진 엄마는 놀라지도 않았어요. 어른들은 놀라는 법을 가끔 잊어버리죠.

어머나, 그 사이에 세진과 세은의 엄마가 사라졌어요. 저 만치 세진 엄마가 정신없이 달려가고 있었어요. 세진 엄마가 앉았던 의자 위엔 눈물에 젖은 하얀 휴지가 산처럼 쌓여 있었어요. 그 옆엔 과자와 빵과 우유가 놓여 있었어요.

내 심장은 터질 만큼 뜨거워졌어요. 세진 엄마의 슬픔. 세진과 세은에 대한 걱정. 아이들을 버리고 간 세진 엄마에 대한 분노. 내 몸에서 불이 났죠.

“세진 엄마, 부탁이에요. 세진과 세은은 엄마가 필요해요.”

내 온몸에 피가 거꾸로 치솟았어요. 툭툭 내 몸에서 터진 솜털들이 막 세진 엄마의 뒤를 쫒아갔어요.

“하쿠나 마타타, 하쿠나 마타타”

세진 엄마를 뒤쫓아 가며 내 솜털들이 노래했어요.

“하쿠나 마타타, 하쿠나 마타타”

내 솜털들의 노랫소리가 온 세상을 가득 채웠어요. 어쩐지 슬프기도 했어요.

“엄마, 엄마”

미미와 즐겁게 놀던 세진은 갑자기 엄마를 찾았어요. 세은도 깜짝 놀라 엄마가 앉아있던 의자 쪽으로 뛰어 왔어요. 의자위엔 엄마가 없었어요. 세은과 세진은 울음을 터트렸어요.

맨드라미꽃만큼 불어난 내 몸을 막 흔들었어요. 내 솜털들은 이제 몽땅 세진 엄마를 향해 치달렸어요.

“하쿠나 마타타, 하쿠나 마타타.”

내 솜털들의 노랫소리가 세진 엄마를 붙들 수 있을까요?

미미도 아이들 곁으로 재빨리 뛰어왔어요. 맨드라미꽃만큼 불어났지만 솜털을 잃어버린 나를 눈치 챈 미미가 놀랜 표정으로 물었어요.

“맞아, 민들레?”

“응”

나는 마음이 급해 미미에게 나를 설명할 수 없었어요.

“엄마, 엄마.”

이제 더 크고 요란하게 세진과 세은이 울었어요. 미미가 세진과 세은에게 몸을 바짝 기대며 혀로 열심히 세진과 세은을 번갈아 핥았어요. 세진이 미미를 안았어요. 세은이 그런 세진을 안았어요. 나도 세진과 세은에게 솜털을 잃어버린 내 몸을 비볐어요.

“아이들아, 울지 마. 엄마는 틀림없이 다시 오실거야.”

살살, 부드럽게 내가 속삭였어요.

“그래, 울지 마. 엄마가 오실 때까지 내가 지켜줄게.”

미미가 세진과 세은을 향해 나지막이 말했어요. 난 황홀했어요. 미미의 목소리는 세상에서 가장 달콤했어요. 미미도 우주의 언어로 세진과 세은을 위로한 셈이죠.

“엄마가 다시 올 때까지 우리를 지켜줄 수 있어요?”

세은은 울음을 멈추고 나와 미미에게 번갈아 물었어요.

“그럼.”

나는 힘주어 말했어요. 미미도 컹컹거렸어요.

“엄마는 틀림없이 오실거야. 배고프지? 우리 엄마가 오실 때까지 빵을 먹으며 기다리자.”

똑똑한 세은은 우는 세진을 달랬어요. 세진은 빵과 과자를 잔뜩 먹었어요. 세은도 의젓하게 빵과 과자를 배불리 먹었어요.

간들바람이 살금살금 세진과 세은을 만지며 지나갔어요. 바다갈매기가 끼룩끼룩 자장가를 불러주었어요.

“하쿠나 마타타, 하쿠나 마타타”

나도 미미와 함께 하쿠나 마타타를 나직하게 불렀어요. 세진과 세은은 꼭 껴안더니 잠이 들었어요. 호랑나비 한 마리가 팔랑팔랑 날아왔어요. 호랑나비는 세진의 콧등에 살포시 앉았어요.

그때 저쪽에서 세진과 세은의 엄마가 뛰어왔어요. 세진 엄마를 쫓아갔던 내 솜털들이 세진 엄마의 온몸에 다닥다닥 붙어있었어요.

“나에게도 세은과 세진이 필요해.”

세진 엄마가 나를 보더니 쑥스럽게 웃었어요. 세진 엄마의 말에 이제는 미미만큼 부풀어 올랐던 내 몸이 다시 작아지기 시작했어요. 비록 솜털을 잃어버렸지만 나는 내 모습이 싫지 않았어요. 하지만 미미가 나를 싫어할까봐 살짝 걱정도 되었어요.

“미미, 나 좀 봐. 요술이 시작됐어.”

미미가 놀란 눈으로 나를 지켜보았어요.

“세진과 세은에게도 엄마가 필요해. 엄마도 세진과 세은이 필요해.”

내 몸은 점점 작아지고 있었고 나는 노래를 불렀어요. 미미 또한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었어요.

“미미에게도 네가 필요해.”

나는 미미의 말에 기절 할 뻔 했어요.

“미미, 나도 네가 필요해.”

그만,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도 같은 말이 튀어 나왔죠. 미미가 웃었어요.

빨간 저녁노을이 사방을 물들였어요. 행복한 꿈을 꾸는지, 세진과 세은도 살포시 웃고 있었어요.

“하쿠나 마타타, 하쿠나 마타타”

미미와 나는 목소리를 높였어요. 세진 엄마도 따라 불렀죠. 세진과 세은이 잠든 의자 주위로 은은한 노래 소리가 멀리멀리 퍼졌어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