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10살을 갓 넘은 K는 순창 어딘가에서 일본인 순사를 때려눕히고 군산으로 피신을 왔다는 둥. 당시 일본인 순사가 휘둘렀던 칼에 의해 눈 밑의 상처가 만들어졌다는 둥. 그것이 K의 훈장이라는 소문 등등. 어디 그뿐인가, 인공시절엔 청년학도병으로 나라를 위해 한 몸 헌신했으며 인공 후엔 지리산 빨치산 토벌대의 대장으로서 한 몫을 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들이 나돌았다. 나이도 이치도 맞지 않는 이야기들이었다. 비록 이 모든 전설 같은 이야기들의 진위를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확실한 것은 군산 시내를 주름잡고 있는 K란 존재가 내 또래 아이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음엔 분명했다. 비록 왜소한 체격에 살집이 있어 뒤뚱거리던 K였지만 눈 밑의 칼자국과 옆으로 째진 날카로운 눈에서 흘러나오던 광선을 나는잊을 수가 없었다. 오발탄과 같은 내 처지가 K의 그늘에서라면 뭔가 수가 날 것 같은 기대감. 그것은 내 미래에 대한 희망 같은 것이었다. 나름 인생 최대의 선택을 한 것임을 나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다행스럽게 필대를 통해 첫눈에 K가 나를 자신의 부하로 받아들여진 것이 암담하던 현실에 비친 한 줄기 햇살처럼 느껴졌다.
K는 통행금지 사이렌이 울리기 직전, 하루에 한 번씩, 양키시장 순찰에 꼭 나를 끼고 돌려 했다. 나와 함께 양키시장을 돌면서 자신의 점포를 헤아리는 맛을 느끼고 싶어 했다. 감도가를 옆에 낀 양키시장은 비행장에서 쏟아진 오만가지 미제 물건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감둑에서 주머니를 두둑이 불린 손이 큰 손님들은 불철주야 양키시장 안으로 발길을 돌려 감둑에서 번 돈들을 그대로 쏟아 붓고 있었다.
“봐라, 이 배 좀 봐라.”
땅딸막한 덩치에 애기봉분처럼 솟은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며 K는 거들먹거렸다.
“울 엄니 못 먹어 각혈을 허다 돌아가셨다. 내 여동생 갸, 서울로 식모살이 갔는디 여직 못 찾았는기라. 언젠가 다시 만나면 내 양키시장 사장 시켜 줄끼라.”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K는 김진규나 최무룡의 흉내를 내며 멋진 대사를 읊조렸다. 배운 것도 없다했는데 K는 양키시장 누구 못지않게 유식했고 서정적이었다. 그 모습 또한 나를 매혹시키기에 충분했다. 가끔씩 앞뒤가 맞지 않는 대사조차 그럴듯해 보였다.
독하다고 소문난 K는 어렸을 적 헤어진 식구들 이야기를 할 때면 언제나 말이 느려지고 목을 큼큼 거렸다. 그런 K가 나는 싫지 않았다. 아니 한 편으론 진짜 형님 같은 은근함도 있었다. K 또한 나를 마음에 들어 했다. 묵직한 면도 있지만 청하면 들려주는 유행가의 운치가 가슴을 녹여주는 멋이 있었다. 뿐 만인가? 뜻을 알 수 없는 내 양키노래는 한 참 군산의 미군부대 문화가 시작되던 때에 걸맞게 유행의 첨단을 걷게 했다. K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그린필즈였다. 멋들어진 양키 발음을 들으며 내가 들려 준 노랫말처럼 푸른 초원인 고향을 상상하는지, K는 아련한 추억 속에 잠기곤 했다.
K의 고향은 순창 골짜기, 섬진강이 흐른다는 진메라는 마을이었다. K의 고향이야기는 얼개가 맞지 않았다. 푸른 초원이 망망했다던가, 섬진강을 끼고 앞산이 턱 숨을 막게 했다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넷까지 그곳에서의 추억이 K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던 듯. K의 목구멍에 양주가 쏟아진 날은 으레 그 시절 이야기를 입이 닿도록 읊어대고 또 읊어댔다.
열여섯에 처음으로 교도소를 들락거렸고 이제 갓 삼 십 줄 중반에 들어선 K는 군산 주먹계의 황제였다. 내 어머니보다 겨우 서넛 밑이었나. 신수가 편했더라면 나 같은 아들, 자기보다 쬐매 더 잘생기고, 키가 더 크고, 어딘지 야릿야릿하면서도 날카로운 눈빛을 가진 아들 두엇쯤 두었을 것인데. K는 나를 보면 왠지 아들 같아 듬직하기만 하다고, 나의 다부진 몸집도 좋았지만 굵은 목소리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들은 특히나 자신의 거친 삶에 한 줄기 서정이이라고 읊어댔다. 술판이 벌어진 그 자리에 나를 끼고 있으면 K는 어느 새 순한 어린양이 되곤했다.
특이하게도 K의 독특한 취미중의 하나는 소설듣기였다. 틈이 나면 누군가가 낭독하는 소설을 들으며 자장가 소리를 듣는 듯 그렇게 잠에 빠지곤 했다. 그 당시에 K가 즐겨 접했던 소설들은 일재시대의 무정을 필두로 배따라기, 운수 좋은 날, 레디메이드 인생, 무녀도, 탁류, 아네모네 마담, 메밀꽃 필 무렵, 소나기 등등.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낭독을 듣고 있었다. 부하 중 소설 낭독을 주로 전담하는 이를 늘 옆에 끼고 다닐 만큼, 이야기 속에 빠져 들었다. K의 사무실은 어느 대학 교수 못지않은 많은 장서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K 스스로 소설을 읽는 것을 본 사람은 없었다. 머리가 뛰어났을까, 소설낭독을 듣고 난 후엔 늘 누군가에게 소설의 내용을 재방하는 K 덕분에 살벌한 그들의 세계에 싸구려 서정이 넘쳤다. 그런 K의 특이성 때문에 누군가는 그를 존경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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