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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에피소드 20. 나는 니엘이다.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16. 5. 12.

나는 니엘 이다. 19살, 그룹 틴탑의 니엘, 내 우상이다. 하여 서명자라는 이름 대신에 나를 니엘 이라고 불러 달라 간청 드린다. 놀라운 사실은 진짜 니엘도 나와 같은 나이라니. 어쩜 내가 진짜 니엘 일지도 모른다. 니엘의 코스프레? 그렇다고 니엘 만큼 내가 잘 생긴 것도 아니다. 노래를 잘하는 것도 물론 아니다. 비슷한 점을 굳이 찾으라면 도톰한 아랫입술, 뭐 그 정도랄까? 학교에서도 친구들은 나를 니엘 이라고 부른다. 아니 내가 보이지 않는 곳에선 어쩜 그들은 나를 서필순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안다. 드림하이의 아이유? 상관없다. 없는 곳에선 나라님도 욕한다는 게 사람의 심리인 것을. 내 뒤에서 나를 뭐라 부르던 나는 니엘이다. 평수만 달랐지, 니엘의 쌍겹눈에 오똑한 콧날, 그의 더벅머리. 나는 대 만족이다. 언니, 오빠도 니엘 이라고 부른다.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면 내가 쓰는 이야기 속에 그들이 어떤 캐릭터로 등장 할지 모른다. 후환이 두려운 것이다. 내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그들의 캐릭터들. 다만 엄마, 아빠는 여전히 명자이다, 빌어먹을 나의 이름 명자, 아빠한테 따진 적이 있다. 일제 시대도 아니고 그 허고 많은 이름 중에 하필 명자냐고? 우리 아빠 왈, 밝을 명에, 스스로 자 자란다. 다행이다. 그나마 아들자나, 사람자자가 아니라서. 명자, 스스로 밝게 살라고 이름 지은 것이라 하더라. 하지만 어느 날인가 할머니가 그랬다. 순전히 명자라는 이름은 할머니의 죽은 여동생의 이름이었다고. 할머니가 여동생이 너무 보고 싶어서 내 이름을 명자라고 지었다고. 이런 내 이름의 역사와 설명을 듣자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리하여도 촌스러운 내 이름이 자꾸 걸리는데. 하여 15살 무렵부터인가, 나는 내 이름을 니엘 이라고 부르라 간청했다. 사실 그 때 틴탑 이라는 아이돌 그룹 중에 니엘 이라는 아이를 첨 보았을 때, 바로 필이 통했다면. 자세한 기억은 아니지만 무슨 음악프로였다. 어쩐지 서구적인 이름의 여운도 좋았지만 그래, 그날이 내 생일이었거든 7월 10일. 그날 나는 다시 태어났다. 니엘 이란 이름으로. 망설여지기는 하지만 고백하나 하자면 난 또 하나의 이름이 있다. 아니 이름이라 하기에는 창피한, 뭐 별명 같은 것, 지금은 아무도 그렇게 부르진 않는다. 하여도 굳이 밝히는 것은 내가 지금 하고자 하는 내 이야기는 그 이름으로 불리웠던 시절의 이야기이니까.

*

'버벅이'

말 그대로 말을 매끄럽게 하지 못하고 자꾸 더듬는 인간, 그게 나였다. 그렇다고 지금도 내가 버벅거리는 것은 아니다. 내가 버벅이로 살았던 시절을 기억하는 나의 형제들 이외에는 모두 내가 버벅이였다는 사실을 잊었다. 아니 어쩜 내 형제들 조차도 내가 버벅이였다는 사실을 잊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뭐 청산유수처럼 지금 말을 잘 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말하는 횟수를 최대한으로 줄인 까닭이다. 말하는 대신에 나는 쓴다. 닥치는 대로 쓴다. 일부러 쓴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나를 청산유수처럼 말 잘하는 아이로 기억한다. 그들의 기억회로를 수년간 천천히 바꾸는 작업을 은밀히 한 보람, 그것이 비로소 완전한 지금의 결과를 이끌었다. 아는가? 사람들은 말을 조금 밖에 하지 않는 다는 것에 은근한 무게감을 갖는다. 마치 심오한 철학자라도 바라보듯, 뭔가 자신들의 경계를 벗어난 어떤 지점에 있는 자, 낯설지만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자, 이런 시선 말이다. 나 또한 그런 시선을 즐긴다. 내가 나도 잘 모르는 데 내 밖의 인간들이 어찌 나를 옳게 판단하겠는가? 모두가 자기가 보고 싶고 듣고 싶은 것들만 보고 들을 수 있다는 장점은 인류의 삶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 어쩜 그들의 이런 특성에 의해 나름 나를 규정짓는 그들이 내는 색깔이 싫지만은 않다. 솔직히 말하면 은근히 즐기기도 한다. 얼마나 다양한가? 마치 무지개 빛깔의 빨, 주, 노, 초 파, 남, 보. 아니 그것들의 뒤섞임. 하여 전혀 본질과 다른 다양한 색깔, 그것이 나다. 푸하하핫! 내가 그런 나를 가장 좋아하는 점은 이것이다. 말을 덜하면 어쩜 귀찮은 일이 덜 생긴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 하여 나는 절대 다투는 법이 없다. 복실이 빼 놓고는 말이다. 가끔씩 복실이와는 토닥거린다. 그것도 아주 가끔. 아, 미안하다. 너무 장황한 내 소개. 아 지겹다. 바로 진격이다. 내가 버벅이였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사실여부는 그대들의 몫이다. 다만 난 말하고 싶은 것을 쓰는 것뿐이다.

“할^머*니>잉~.”

소녀가 버벅 거린다.

“어짜그랴, 사탕은 하루에 두 알이면 족헌디. 넘 많이 잡수면 이가 썩어야. 이가 썩으면 우짜되는지 할머니 봐라잉.”

할머니는 소녀에게 보이려고 누렇고 빠진 이들, 시커메 볼품없는 이들을 허옇게 드러내며 웃는다. 이가 드러난 할머니의 미소를 늘 보아왔기 때문에 할머니의 볼품없는 이빨이 소녀는 새삼스럽지 않다.

“할^머*니>잉~, 하나 ~만 ^ 깨~물~어 먹^겠*고*롬~.”

할머니는 마지못해 아랫목 벽장문을 연다. 반짇고리를 주섬주섬 거린다. 심심풀이로 남겨둔 몇 알 남지 않은 사탕이다. 입에 문 박하사탕처럼 달고 상큼한 손녀가 그렇게 징징거리니 하는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다음 장날 까지 셈해보니 딴은 그런 손녀가 야속하기도 한 심사다. 여섯 살, 버벅이 손녀와 자신의 수준이 엇비슷함에 생각이 미쳐 그만 할머니는 피식 웃음을 흘린다. 그 웃음에 손녀는 바짝 할머니 무릎 앞으로 엉덩이를 바짝 디민다.

“그랴, 오늘은 딱 한 개로 족혀다잉. 이젠 오늘은 요걸로 만족혀. 알겄지?”

재차 손녀의 다짐을 받는다. 손녀는 설령 더 먹고 싶었을지라도 당장 눈앞에 알록달록 달디 단 그것이 아롱거리니 할머니의 말씀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냉큼 입속으로 사탕을 받아 넣는다.

어쩌면 세상에 이렇게 맛이 있는 사탕이 있을까! 황홀경에 빠진 소녀가 오물조물 입속으로 사탕을 녹이며 그 맛을 음미하는 것을 지켜보는 할머니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핀다.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은 마치 자신의 그 옛날 옛적의 환생을 보는 듯 즐겁고 흐뭇하기만 하다.

소녀는 더 먹고 싶은 욕심이 들었지만 할머니와의 다짐도 있고 다음날 또 맛볼 수 있는 기대감도 있으니 그 작은 셈으로도 오늘은 이걸로 족혀. 라고 생각한 듯 언니오빠가 있는 우물터로 입속에 든 사탕을 녹여가며 슬슬 나들이를 나선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는 할머니의 얼굴에도 미소가 깃들었다 금방 사라진다. 이제 슬슬 자신도 운을 다해 어쩜 이번 가을이든 겨울이든 세상을 떠 할아범 곁으로 갈 것 같은 생각이 미치자 세상사에 미련이 아직 남아 있음이 집혀져 마음이 급해지기도 한다. 어찌 저것들이 눈에 밟혀 저승사자의 동행에 쉬 따라나설 것 같지 않은디 생각하니 기다리는 할아범도 또 붙잡는 세상사도 마음이 쓰여 목침을 베고 눕는 자리가 편치만 않다.

우물터로 나온 소녀는 저만치서 언니오빠를 찾는다. 도시 오늘은 어찌 아무도 보이질 않아 내심 궁금하기도 했지만 사탕을 언니오빠보다 하나라도 더 먹은 만족감으로 도로 집으로 돌아온다. 목침을 베고 코를 골고 있는 할머니 곁으로 살금살금 기어가 바짝 눕는다. 모로 누운 할머니 저고리 속으로 살금 손을 넣어본다. 젖꼭지가 만져진다. 쪼글 거리는 젖꼭지의 감촉도 좋다. 할머니에게서 나는 퀴퀴한 냄새를 코로 들여 마시며 세상에서 엄마 다음으로 맛있는 냄새는 요 냄새여 사탕보다도 더 맛있는 냄새여 라고 생각하며 바짝 몸을 밀착시킨다. 가슴속으로 손녀의 손이 들어오고 젖꼭지만 남은 것을 그 작은 손으로 비비고 있는 손녀 손에서 오는 따뜻한 감촉이 싫지 않은지 잠결에서도 할머니는 한 쪽 손으로 손녀의 등을 두서너 번 쓰다듬더니 이내 쌕쌕거리는 손녀의 숨소리에 박자를 맞춰 할머니의 숨소리도 거칠어진다.

초가을의 선선한 저녁공기에 제켜둔 삼베이불을 끌어와 손녀딸을 덮어주고 할머니는 밖으로 나온다. 아직 밭일에서 돌아오지 않은 며느리를 대신해 부엌에 들어가 쌀뒤주를 열고 저녁밥 준비를 한다. 보리 반, 쌀 반을 퍼서 찬물에 박박 문지르다 쌀뜨물을 받는다. 된장이라도 풀어 풋고추와 호박을 넣은 찌개라도 끓일 양이다. 두 서 너 번을 헹구어 가마솥에 안치려는데 그제 서야 밭일에 나갔던 며느리가 들어온다.

“오냐, 어짜, 고추는 좀 거둘게 있던가?”

내심 걱정스레 묻는다. 아들이 밥상머리에서 올해 고추농사는 망쳤다는 말을 듣고 걱정하던 참이다. 다른 때 같으면 아침이면 부리나케 밭으로 쫒아 갔으련만 요사이는 한 발자국도 바깥으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다리에 힘이 부치고 몇 걸음을 띠면 그만 주저앉고 말 형편이었다.

“엄니, 올해 고추는 한 자루나 거둘 수 있을랑가 모르겄어요. 탄저병에 좋은 새로운 농약을 뿌렸는데도 영 신통치 않네요. 걱정이에요. 올해는 고추농사로 돈을 좀 챙겨야 큰애 중학교 입학금이라도 장만 혀야 할틴디.”

며느리는 말끝을 흐린다.

“글타냐, 그렇게 안됐다냐. 그놈의 탄저병은 해마다 고추농사를 망치게 하더니만 올해도 그렇타냐. 우짜 새 농약은 안 들었더냐? 해마다 좋다하는 농약이 글케 효험이 없으면 어떻게 농사는 짓는 다냐?”

할머니는 앞으로 지을 고추농사가 걱정이다. 그나마 있는 밭뙈기에 주로 고추농사를 지으며 사는 아들내외에 대한 걱정이 태산이다. 차라리 고추농사를 포기하고 마늘이나 생강 농사를 시작하면 좋으련만 아들이 말을 잘 듣지 않는다. 성격이 고집불통이어서 벌써 몇 년째 고추 농사에 매달려 있다. 잔소리를 하다가도 듣는 척 대꾸만 할 뿐 자신의 뜻을 굽히려 하지 않는 아들의 성질은 꼭 할아범을 닮았다. 아들을 볼 때 마다 먼저 간 할아범이 새삼 생각나는 요즈음은 자신도 할아범 곁으로 갈 날이 멀지 않았구나 셈해보곤 한다. 그러려니 남아있는 손자, 손녀들뿐만 아니라 오십이 다 된 아들 내외에 대한 걱정이 아득하다. 특히나 막내 손녀가 보면 볼수록 측은하기만 하다. 어찌된 일인지 유난히 그 아이가 맘에 밟히는 것을 보면 딴 아이들보다 욕심도 많고 묻고 싶은 것도 많고 생각이 많은 아이인 듯해서이다. 생각해본께 그 아이는 먼저 떠난 여동생을 많이 닮았다. 막내 손녀를 바라보고 있으면 열 살도 되기 전에 가슴이 시꺼멓게 타서 죽은 자신의 여동생이 자꾸 생각나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여린 심성도 욕심 많은 것도 생각 많은 것도 거기다 말을 버벅 거리는 품새도 영락없는 여동생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지긋이 막내 손녀를 쳐다보고 있으면 가슴 한 켠이 싸해진다. 고 어린 것의 세상살이가 당최 편안할 것 같지 않은 이 심사는 무엇인가? 아무리 용을 써 봐도 잡히는 것은 없는데. 할머니는 설레설레 고개만 흔들 뿐이다.

“엄니, 그나저나 외 당숙네 일은 물어야 헐틴디요잉.”

“글타. 내일 이고먼. 애비랑 함께 가야 쓰것다. 일 물을 형편도 되지 않은디, 미안타야.”

“엄니, 그래도 일은 물어야지요. 아범이 아마 미리 준비했을 성 싶으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꺼구만요.”

며느리의 말에 다소 안심은 되기도 하지만 사는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아들내외에게 먼 친척네 일 물을 것까지 남기고 갈 생각을 하니 딴은 미안스럽기도 하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다른 때와 다르게 이른 아침상이 준비 되었다. 약간의 소란스러움에 잠이 깬 소녀는 뜨기 싫은 눈을 가늘게 뜨며 동정을 살핀다. 할머니가 저고리며 두루마기를 챙기는 모양이 예삿일이 아닌 것 같아 오도카니 일어나 앉으며 눈을 비비적거린다.

“할^머*니~, 어~딜~ 가신^디야~?”

“아야, 잘 주무셨어? 할마니가 내 새끼 잠을 깨웠디야? 어여, 다시 주무셔. 할마니 오늘 일이 있어 아빠랑 좀 다녀 올팅게 어여 한 숨 더 자고 이따 일어나 아침밥을 먹으라잉.”

“아^빠*랑~ 가신^다고*요~? 지^^도 따라*가고 싶**은디~요^.”

소녀는 숨을 헐떡거린다. 벅차다. 말의 단어수가 많아지면 얼굴에 핏날이 선다.

“오야. 근디 좀 멀어서 데꼬 갈 수가 없어야. 긍게 좀 자고 이따 저녁에 올팅게 집에서 기다려잉. 언니오빠들이랑 싸우지 말고 잘 놀고 있으면 할머니가 만난 것 갖고 올팅게 말여.”

“알었어, 할머니. 만난 것 많이 갖고 오셔잉.”

소녀의 언니가 언제 들어왔는지, 소녀가 하고 싶은 말을 가로챈 끼어든다. 소녀는 열을 받지만 그래도 언니가 자기 대신 빠르게 말해 준 것에 만족하는 편이다. 소녀는 웃을락 말락 망설인다. 다시 한 번 소녀의 언니가 할머니를 채근한다.

"만난 것 많이 갖고 오셔잉."

소녀의 언니가 소녀 대신 재차 다짐을 받는다. 소녀는 다시 고꾸라져 잠에 빠진다. 그런 막내 손녀를 생각하며 밖으로 나선 할머니는 푸진 미소를 흘린다. 서둘러 한 벌 밖에 없는 가실두루마기를 챙겨 토방으로 나선다. 며느리는 새벽 참에 일어나 벌써 고무신을 새 하얗게 닦아 가지런히 댓돌위에 얹혀 두었다. 사실 며느리로 데려 오려는 마음이 들기 전에는 하도 없는 집에서 없는 며느리 들여앉히기가 마땅찮기만 했는데 막상 우리 집 식구다 생각하는 그날부터 며느리가 듬직하고 꼼시랑꼼시랑 부지런하기만 하여 내심 처음 마음이 미안스럽기도 하고 내가 무신 복이 있어 저렇듯 알뜰살뜰한 며느리를 한 집안 식구로 모셨는지 고것도 돌아가신 영감의 은덕이려니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엄니, 잘 댕겨 오셔요. 외당숙네 가세는 우리집 보다는 나승게 크게 마음은 쓰지 않아도 되것지요. 아범이 좀 준비 했씅께 엄니는 편안 맘으로 쉬엄쉬엄 급하지 않게 오시구요.”

“그랴. 내 형편 봐서 자고 올지도 모릉께 기다리지 말고.”

오랜 만에 아들을 앞세우고 친정 나들이를 하는 할머니다. 친정 식구들 얼굴을 볼 생각을 하니 콩당콩당 설레기도 하였다. 할머니의 얼굴엔 꼭 막내손녀딸 만키롬 붉고족족 홍조가 피어났다.

아들은 한 손엔 작은 보따리를 들고 한 손으로 어머니를 부축하며 먼 길을 떠나는 마음이 마땅치도 않다. 없는 살림에 인사는 챙겨야 하는데 마땅한 것이 없어 겨우 달걀 몇 줄과 찹쌀 몇 되뿐이다. 궁색한 살림을 외가 식구들에게 들키고 말걸 생각하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어쩌겄는가? 저렇게 좋아하시는 어머님 생각을 혀서 군소리 없이 나서야할 것을.

그렇게 할머니와 아빠가 떠나신 날 소녀는 늦게 까지 늘어지게 잠을 잤다. 떠지지 않는 눈을 뜨고 엄마가 차려놓은 밥상 앞에 오도카니 앉아 밥숟갈을 뜨고 있다. 동그마니 혼자 남은 집이 쓸쓸하기만 하였다. 동무가 없어 쓸쓸한 것이 아니다. 동무라면 누렁이가 있으니께. 그렇다. 내 새끼라고 불러주는 할머니의 부재. 오독오독 씹히는 밥알마저 세고 있다. 채 한 공기를 비우지 못하고 상보를 덮는다. 엄마라도 찾아 나설 요량이었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는다. 세수를 하지 않은 것이 생각나 후다닥 대야에 세숫물을 받는다.

“어어!!! 할^머*니잉~”

할머니의 얼굴이 대야에 어른다. 눈을 문질러 자세히 보니 자기 얼굴이 어렸다. 혼자 빙긋이 웃으며 작은 손으로 물을 건져 얼굴에 문댄다. 아마도 할머니 얼굴에 볼을 비벼대는 것인지도 모른다. 대충 머리에 물을 묻혀 빗고 촐랑촐랑 문밖으로 나선다. 마침 누렁이가 촐랑 거리며 따라 나선다. 막상 엄마를 찾아 나선 길이었지만 엄마가 있을 법한 고시래 밭까지는 한 참이다. 그곳까지 갈 자신이 없었다. 그곳까지 가기에는 무섭고 험난한 여정이었다. 동구 밖을 지나더라도 무서운 곳은 서낭당을 지나쳐야 한다는 것이다. 서낭당 근처엔 얼씬도 하지 못하게 했던 할머니가 또 떠오른다. 할머니와 딱 한 번 서낭당을 지나쳐본 적이 있다. 지난 여름날 엄마, 아빠의 새참거리를 챙겨 나서는 할머니를 따라나선 일이 있었다. 서낭당 근처엔 오래된 한 참을 쳐다보아도 끝이 보일락 말락 한 큰 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그 나무엔 치렁치렁 색색의 천들이 둘려 있었다. 옆에는 돌무더기들이 쌓여 있었다. 호기심으로 소녀가 그 천중의 빨간 천 하나를 풀어 가지려 했을 때 할머니의 호통이 생각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그 나무 옆에 건물이 하나 있었다. 판자로 얼키설키 역인 헛간 같은 곳이었다. 그곳을 생각하면 오싹 한기가 돌기도 했다. 호기심으로 삐죽 판자 틈으로 기웃거렸던 그곳엔 무시무시한 할머니 그림이 벽에 걸려 있었다. 판자 벽 틈으로 비친 햇살에 드러난 그림은 꿈에 볼까 무서운 할머니 그림이었다. 알록달록 저고리와 치마를 입은 할머니. 할머니 이긴 할머니인데 도시 자신의 할머니와 영 딴판인 눈썹이 하늘로 치켜 올라가고 입술은 새빨갛고 뭔가에 잔뜩 화난 얼굴이었다. 순간적으로 움칫 뒷걸음을 치다 돌에 걸려 넘어져 잠시 앵앵거리는 것을 할머니가 달랬던 기억도 난다. 하여 소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엄마를 찾아 나서길 단념한다. 애꿎은 누렁이가 소녀에게 꼬리를 밟힌다. 깽깽거리더니 먼저 앞선다. 잠시 어디로 갈까 생각을 하는 눈치다. 언니 오빠가 있는 학교로 방향을 튼다. 필경 이 시간쯤엔 아침 조회시간 이렷다. 목표가 정해지자 발걸음의 속도가 빨라졌다. 조회시간의 교장 선생님의 말씀 소리와 그 풍경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종내는 빠른 걸음으로 종종거리며 달린다. 숨이 차올랐다. 겨우 도착한 학교는 조회시간의 끝 무렵이었다. 차마 학교 문으로의 진입을 망설이고 전나무 울타리 사이로 건너다본다. 오빠의 눈에 띄기라도 하면 득달을 당하고 귀찮아지기 때문이다. 막 조회를 끝낸 교장 선생님께서 교단에서 내려오시고 아이들은 담임선생님의 명령에 따라 나란히 나란히 각자의 교실로 향하고 있다. 그 아이들 사이에서 언니 오빠 열심히 찾아본다.

오빠가 눈에 띄었다. 콧물을 질질 흘리고 있는 오빠가 우습다. 언니를 찾는다. 어느새 교실로 가버렸는지 보이지 않는다. 서운하기도 했다. 늦잠을 자느라고 오늘 아침은 언니의 책보자기도 한 번 매보지 못했고 오빠, 언니의 학교 배웅을 하지 못했었다. 그것이 서운해서 자꾸 언니 오빠의 교실을 바라다본다. 행여 창문 넘어 짓궂은 장난이라도 치는 언니 오빠의 얼굴이라도 볼 수 있으려나 기다렸다. 수업 시간이 시작되었는지 창문에 어리는 아이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잠시 심드렁하여 발길을 돌린다. 어디로 가야 할 거나 주춤거리다가 다시 집 쪽으로 방향을 튼다. 집을 나설 때 졸졸 뒤따르던 누렁이를 돌팔매를 던져 집으로 보낸 것이 후회막급이다. 길 양옆으로 즐비하게 늘어선 코스모스들이 소녀를 웃돌고 있다. 빨강, 분홍, 자주, 흰 색깔의 코스모스들이 가을 햇살에 마냥 잘난 척 얼굴을 디밀고 있다. 조금 심술이 난다. 코스모스 몇 가지를 뚝 분질러 그 꽃잎을 손톱으로 튕겨본다. 언니 오빠가 장난치는 걸 옆에서 보고 따라 해 보는 중이다, 언니 오빠가 할 땐 톡톡 잘만 튕겨 나가던 꽃잎들이 자꾸 찢어지기만 할 뿐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그것도 심드렁해지자 윙윙거리는 벌들에 시선이 닿는다. 앉을 듯 말 듯 윙윙거리는 벌들 사이로 몇 놈은 날개를 내리고 열심히 꽃술을 빨고 있다. 벌에 쏘이는 것쯤이야 된장 한 술 바르면 되는 것으로 생각해 꽃술 위에 앉아있는 놈 하나를 골라 공격한다. 눈치 빠른 놈은 퍼뜩 날아 도망친다. 또 다른 공격목표를 정하고 조준한다. 마음을 다해 눈을 맞추니 꼼짝 당한 벌 한 마리를 손가락에 쥐고 자세히 들여다본다.

"너는 눈이 도대체 몇 개니? 두 개인 것도 같고 세 개인 것도 같고 입은 왜 이렇게 뾰족해? 귀는 없나 보지, 이 긴 수염은 왜 달고 사니?"

생각으로 묻는다. 물어봐도 앵앵거리는 벌은 도무지 대답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아마 대답하고 있을지도 모르나 소녀는 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답답해진 소녀는 죽을 똥 살 똥 퍼덕 거리는 벌을 다른 쪽 손바닥에 놓는다. 쏜살같이 벌이 날아 도망친다. 그 모양이 예쁘기만 하여 소녀의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퍼덕퍼덕 집으로 가는 길이 지루하기만 하다. 길가에 놓인 돌 몇 개를 차보기도 하고 마치 땅바닥 위에 금을 그어 놓은 듯 폴짝폴짝 경계선을 넘어 이쪽저쪽으로 뛰어보기도 한다. 한 참을 그러려니 저쪽에서 언제 보았는지 누렁이가 쏜살같이 달려온다. 달려오는 누렁이가 구세주 같다. 얼른 쪼그리고 앉아 뛰어오는 누렁이를 안는다. 꼬리를 설레설레 흔들며 소녀한테 안긴 누렁이는 가쁜 숨을 몰아 쉬며 혀로 소녀를 핥는다.

먼 친척 집에서 아기였을 때 데려온 누렁이다. 사실은 소녀에게는 할머니 다음으로 친한 친구이다. 늘 소녀가 가는 곳은 어디든지 앞장서거니 뒤서거니 따라나선다. 그럴 때마다 좋기도 하지만 귀찮을 때도 있다. 특히나 집에서 좀 떨어진 곳으로 갈 때는 누렁이를 집에 묵어 두기도 한다. 혹시 뒤따라오다가 길을 잃을지도 모르는 불안감에 소녀는 극단의 조처를 하기도 하는 것이다. 묶어둔 새끼줄을 당기며 소녀를 따라나서고자 낑낑거리는 놈을 뒤에 놓고 올 땐 짠한 마음도 없지 않다. 그래도 소녀는 그편이 마음이 훨씬 편안하였다. 그런 누렁이가 점점 커졌다. 이젠 누렁이를 소녀는 제힘으로 제압할 수가 없었다. 하여 굳이 따라나서는 누렁이를 이제는 겨우 돌팔매 몇 개에 혹은 훠이훠이 할머니 마냥 손으로 돌아가라는 시늉으로 누렁이를 제지한다. 몇 번을 실랑이를 하다가도 용케 누렁이는 소녀의 마음을 아는지 아쉬운 듯 몇 번 소녀를 돌아보다가 혼자서 집으로 가곤 한다. 이제는 누렁이가 길을 잃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더는 소녀에게 없다. 누렁이가 소녀만큼 커가고 있으므로 소녀가 집을 잃을 일이 없는 것처럼 누렁이 또한 그만큼 똑똑해졌으리라는 믿음이 소녀의 걱정을 덜어준 것이다.

그런 소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 지 누렁이는 줄곧 소녀를 뒤따르다가도 가끔 해찰을 한다. 동네 다른 개들과 함께 종종 마실을 다니기도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소녀는 누렁이가 보이지 않자 길을 잃었나 걱정이 되었다. 곧 동네 다른 개들과 섞어 노는 누렁이를 보고 걱정한 자기 마음을 몰라주는 듯 누렁이에 대한 야속함에 눈을 흘기기도 했다. 하지만 소녀는 곧 누렁이도 소녀 이외에 다른 친구들과도 사이좋게 노는 것이 좋다는 너그러운 마음이 되었다. 누렁이를 봐주기로 했더니 점점 누렁이의 마실 나가는 횟수가 늘어 가끔은 서운한 마음이 아니 드는 것도 아니었다.

누렁이는 오늘은 무슨 일인지 앞장서서 소녀를 집으로 데리고 가는 듯하였다. 심심해서 누렁이의 꼬리를 잡으려고 달려들면 누렁이는 또 쏜살같이 저만치 도망친다. 그러다 소녀가 오기를 기다리고 다가선 소녀는 또 누렁이의 꼬리를 잡으려 하니 또 누렁이는 잡히지 않으려고 도망쳐버린다. 그들의 모양새에 아직도 쨍쨍한 가을볕이 빙긋이 웃으며 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누렁이와 함께 집으로 돌아온 소녀는 아직 점심이 되지 않았는데도 배가 고프다. 아침밥을 겨우 반밖에 먹지 못했다는 생각으로 덮어 두었던 상보를 벗기고 나머지를 먹는다. 한 숟가락 한 숟가락 뜰 때마다 토방에서 건너다보는 누렁이의 눈을 읽는다.

"너*도 배~고^파, 아^침*밥 안~ 먹^었*어~?"

누렁이에게 묻는다. 수북이 한 숟가락을 떠서 허리를 굽혀 댓돌 위에 놓는다. 누렁이가 얼른 소녀가 놓은 밥을 핥아 먹는다. 소녀는 기분이 좋았다. 나머지 밥을 삼키려는데 갑자기 안 계신 할머니가 보고 싶어졌다. 아침에 헤어진 할머니가 벌써 그리운 것이다. 소녀의 눈동자에 눈물이 어린다.

"할^머*니~는 지~금~ 뭐* 하^실~까잉~."

가만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 채로 생각을 쥐어짠다. 또렷이 집히는 것이 없었다.

그 시간에 할머니는 모처럼 만난 친정 식구들과 환담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친정 당숙네 결혼식이라서 친정 쪽 일가친척이 총출동한 날이었다. 시집가느라 친정을 떠나 더러는 육십 년 가까이 만에 처음 보는 유년시절의 사촌들, 오촌들을 만나니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 듯하였다. 마음은 그런데 몸이 자꾸 가라앉고 통 입맛이 없다. 부잣집 혼인 잔치라서 상다리가 무너질 것 같은데 입맛이 없으니 아쉽기도 하고 집에 있는 손자 손녀들에게 먹일 수 없는 안타까움에 가슴이 답답하다. 누가 볼세라 인절미 몇 조각을 살짝 속곳 주머니에 쑤셔 넣는다. 형제간이면 좀 싸달라고 할 것이지만 당숙네에게 까지 궁색한 살림을 들키는 것 같아 속만 아리다. 아들의 안색도 살피니 그리 밝지만은 않은 것이 외당숙네의 품새에 기가 죽은 것인가 생각돼 안쓰럽기조차 하다. 할머니는 점심을 먹은 것이 체했는지 자꾸 헛구역질이 나고 으슬으슬 몸이 춥기도 하다. 따뜻한 아랫목에 자리를 마련해 주어 누워 있지만, 마음은 벌써 옹색한 집에 가 있다. 오랜만에 만난 친정식구들의 만류에도 아들을 앞장세워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자꾸 몸이 가라앉고 헛발질을 하는 통에 몇 번을 쪼그리고 앉는다. 아들은 막무가내로 어머니를 등에 업는다. 등에 업힌 어미는 미안스럽기도 하지만 오랜만에 아들 등에 업힌 기분이 나쁘지 않다. 언젠가 젊은 시절 할아범 등에 업혀 가슴이 터질 것 같았던 그 시간이 생각나 피식 혼자 웃는다.

"영감, 내 영감 곁으로 갈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소. 올 가실 들어 유난히 몸이 밑으로 가라앉고 기력이 바싹 쇠한 것 같은데 아직 아범도 저리 궁색하고 자라나는 새끼들이 눈에 밟히니 요번 겨울은 좀 넘기고 한 해만 더 있다가 가면 안 되겠소. 내년 가실 쫌이면 어떨까 하온데."

혼자서 중얼거린다. 그런 어머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 지 어머니를 등에 업은 아들은 어머니가 짠하기만 하다.

"우리 엄니가 왜 이렇게 가볍기만 할까, 허깨비를 업은 것 같소."

속으로 아들은 평생을 효도 한 번 진하게 하지 못한 자신을 책한다. 어머니가 몇 번을 마늘 농사나 생강농사로 갈아타라고 했건만 고집을 꺾지 않고 올해도 망친 고추농사를 생각하니 속이 쓰리다. 올겨울엔 고추 팔아 어머니 한약이라도 한 제 지어드리려고 맘먹었는데 당최 그럴 수 없을 것 같아 울화가 치민다. 묵묵히 어머니를 업고 걷는 아들의 숨소리가 거칠어 친다. 그 거친 숨소리를 박자 삼아 언제 잠들었는지 아들의 등위에서 쌕쌕거리는 어머니의 숨결이 편안하였다.

할머니가 그리워진 소녀는 할머니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할머니가 주시곤 하던 사탕이 생각났다. 평소엔 벽장문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지만, 오늘 만은 집안에 아무도 없으니 살짝 벽장문을 열고 사탕을 찾아 아무도 모르게 두 개만 먹고 싶었다. 누렁이가 볼까 봐 방문을 닫고 벽장문을 열어본다. 벽장 안에는 온갖 것들이 쌓여있었다. 이불부터 시작해서 옷가지들 바느질도 구들 겨울에 방안을 데우는 화덕이며 색 바랜 천들이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분명 할머니가 사탕을 벽장 안에서 꺼냈는데 어디 있을까 머리를 굴려 보았다. 한쪽 구석에 분홍빛 다구다 보자기에 싸인 것이 있어서 꺼내 살짝 풀어보았다. 할머니 치마저고리였다. 여름 나들이 때 입었던 모시옷이었다. 얼른 주섬주섬 다시 보자기에 쌓아 제자리에 갖다 놓는다. 그 옆으로 무쇠 다리미가 있었다. 무거워 들고 나올 수가 없어 뚜껑을 열어본다. 아무것도 없었다. 마침 할머니의 반짇고리가 눈에 띄었다. 반짇고리를 주섬 거리다가 그만 꽂아둔 바늘에 찔렸다. 아파 콕 눈물이 나온다. 벌을 받는 것 같다. 그렇지만 사탕의 유혹을 견딜 수 없었던 소녀는 드디어 누런 봉투에 들어있는 몇 알 남지 않은 사탕을 발견했다. 두 알만 먹을 요량으로 두 알만 살짝 꺼냈다. 속으로는 할머니도 모르실 거야. 라고 자신을 안심시킨다. 꿀맛이다. 서서히 혀 아래에 사탕을 놓고 빨면 그 단맛을 오래도록 즐길 수 있다. 더구나 이렇게 몰래 먹는 사탕의 맛은 할머니가 준 사탕보다 훨씬 맛있다. 생기가 돈다. 자꾸 방문 밖에선 누렁이가 같이 놀자고 촐랑거린다. 두 알을 오래도록 빨았는데도 아직 성이 차지 않는다. 두 알을 더 꺼낸다. 남아 있는 사탕을 세어보니 겨우 여덟 개 뿐 이었다. 철석같이 자신과 약속한다. 더 안 되겠으니 꼭 두 알 만이다고. 한 알씩 한 알씩 혀 밑으로 입천장으로 양어금니 사이로 옮겨가며 단맛을 즐긴다. 그렇게 두 알도 먹었지만 그래도 또 먹고 싶다. 하지만 더 이상은 안 된다. 아마 더 먹으면 할머니가 눈치 채실 것이 뻔하고 그러면 다시는 사탕을 주시지 않을지도 모른다. 생각돼 아예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방안에 혼자 있으면 사탕의 유혹에 자신이 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누렁이가 반가움으로 꼬리를 살랑거린다. 자꾸 앞발로 소녀를 끌어당긴다. 필시 마당 한쪽에 쌓인 볏짚 눌에서 씨름을 한 판 붙어보자는 기세다. 아버지가 지붕의 용마름을 고치려고 얻어다 놓은 지푸라기가 남아 쌓여 있었다. 그 위에 질펀하게 앉아 누렁이를 쓰다듬다 보면 얽히고설켜 종내는 씨름하는 모양새가 되곤 했다. 그 장난에 누렁이는 은근히 재미가 붙은 것 같았다. 사실 벌써 두 번이나 그런 놀이를 하다 아버지에게 꾸중을 들은 적도 있는데 또 누렁이가 유혹하니 그 유혹을 뿌리칠 힘이 없다. 집안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친구였기의 누렁이를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예 볏짚 단을 하나 풀어 털썩 주저앉는다. 누렁이가 무릎 사이로 고개를 디민다. 자꾸만 밀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드는 누렁이가 싫지만도 않다. 그렇게 누렁이와 한 참을 실랑이를 벌인다. 그만 가을볕의 따사로움에 눈꺼풀이 풀리고 먹은 뒤끝이라 그런지 잠이 들고 말았다. 누렁이도 소녀 옆에 나란히 누워 개 팔자 상팔자로 쌕쌕거린다. 지나가던 참새들도 둘의 모양새를 보고 미소를 보낸다. 행여 지저귐에 깰세라 발길을 재촉하고 어디서 튀어나왔는지도 모를 생쥐들은 안심하고 누렁이가 잠든 사이를 즐기느라고 분주했다.

다른 날 같으면 점심 무렵이면 엄마는 소녀의 밥걱정이 되어 일찍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덤으로 놓아둔 밥상 위의 밥 때문이었는지 점심때가 지나도 돌아오지 않고 계셨다. 학교에 간 언니 오빠도 분명 학교가 끝났을 시간이 되었는데도 나타나지 않는 걸 보니 필시 동네 어귀에서 또래들과 같이 한 판 붙은 것이 분명하였다.

가을 햇볕도 가장 뜨거운 햇살을 내뿜고 서서히 힘을 잃어가는 시간, 늘어지게 자고 난 소녀가 빼꼼이 눈을 뜬다. 누렁이의 한쪽 발이 소녀의 배 위에 놓여 있어서 갑갑했던 모양이다. 누렁이의 발을 살짝 치우다가 그만 누렁이도 인기척에 깨어 또다시 소녀를 핥으려 한다. 소녀는 누렁이를 물리치고 하품을 늘어지게 한다.

갑자기 소녀에게 둘러붙던 누렁이가 뭔 눈치를 챘는지 폴짝 일어나 뛰어나간다. 그런 누렁이의 모습이 의아해 소녀는 느리게 일어나 부엌으로 가서 항아리에서 한 바가지 찬물을 떠 벌컥벌컥 마신 다음에 누렁이를 찾으러 나선다. 누렁이가 폴짝거리며 꼬리를 세차기 흔드는 저편으로 할머니를 업은 아버지가 보인다. 소녀는 누렁이 마냥 폴짝폴짝 뛰며 아버지에게로 달린다. 소녀의 뜀박질은 더 빨라진다.

"아^부*지~, 할^머*니~가 아*프^시~당^까*요~?

묻는다. 그 소리에 할머니가 부스스 깨서 아들에게 채근한다.

"야야. 그만 내려 도고. 힘들었제?"

아버지가 등에 업힌 할머니를 내려놓는다. 할머니가 풀썩 주저앉는다. 깜짝 놀란 아버지가 할머니를 일으켜 세우고 그 사이에 먼저 도착한 누렁이가 할머니 치마를 핥으며 아는 체를 한다. 아들이 누렁이를 쫒는다. 할머니가 소녀를 건너다보며 활짝 웃으며 뛰어드는 소녀를 안는다.

"그만 해라. 할머니 피곤하시다. 얼른 집에 가서 좀 누우셔야겠어요." 아버지가 할머니를 부축한다. 소녀도 할머니의 한쪽 팔을 부축하고 싶지만, 키가 닿지 않는다. 그런 소녀의 마음을 할머니가 먼저 읽는다. 한쪽 손으로 손녀의 조막손을 쥔다. 누렁이가 주인댁을 앞장서 룰루랄라 판을 치며 집으로 향한다. 마침 저 멀리서 뒤늦게 나타난 언니 오빠가 합세한다. 노는 데 지쳐 마침내 배가 고파 뭔가 먹을 것을 찾으러 집으로 오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다다다닦 뛰어오는 발걸음에 괜스레 소녀의 마음이 더 급해진다.

아침에 나가시면서 할머니가 하신 말씀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맛있는 것 많이 갖고 오꾸마."

한 약속 말이다. 어느새 언니 오빠가 잔칫집에 가셨다 돌아오시는 아버지의 보따리를 낚아챈다. 쏜살같이 집으로 먼저 달려간다. 소녀의 급해진 마음이 조금 더 급해지고 울화가 치민다.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아버지는 쓸쓸하면서도 뿌듯하다.

댓돌에 신발을 벗고 방안으로 할머니를 모시고 들어가는 아버지 뒤로 소녀는 아빠와 할머니의 신발을 가지런히 놓는다. 누렁이는 무엇이 좋은지 아직도 씩씩거리며 꼬리를 쉼 없이 흔든다. 아버지의 보따리를 낚아채고 먼저 달려온 언니 오빠는 벌써 획득물을 펼친다. 싸움이 일었다. 양손에 부침개와 돼지고기 삶은 것을 들고 서로 많이 먹겠다고 야단들이다. 그런 모습을 보며 소녀는 거의 울 뻔했다. 자신 몫의 먹을거리를 챙겨줄 할머니, 아버지의 도움이 절실할 때이다. 소녀의 울상 된 모습을 본 오빠가 소녀에게 돼지고기 몇 점을 건넨다. 그러는 순간에 아버지가 나오시다가 큰소리를 치신다.

"이놈들아. 체 허겄다.. 엄마 오시면 김치랑 같이 먹어야제. 막내 것도 좀 챙겨 도고 엄마 것도 좀 냉겨야제."

아버지의 채근에 큰 언니가 획득한 시루떡 한 조각을 소녀에게 내민다. 얼른 받아든 소녀는 억울하기만 했지만, 고것이라도 감지덕지한다. 시루떡을 야금야금 거리며 할머니가 궁금해 방으로 들어온 소녀는 벌써 할머니가 눈을 감고 계신 것을 보고 다시 살금살금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다. 언니 오빠는 벌써 쥐꼬리만큼 엄마 몫을 남겨놓고 또 쏜살같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누렁이는 제 몫을 아직 챙기지 못했는지 마루 위를 힐끔거리며 폴짝 걸린다. 소녀도 엄마 몫이라고 남겨둔 보자기를 살짝 열어보고 돼지고기 한 첨과 시루떡 모서리 한 조각을 뜯어낸다. 씩씩거리며 폴짝거리는 누렁이 생각이 미쳤는지 돼지고기 한 첨을 더 빼 고기 쪽은 자기 입에 넣고 비계 쪽을 뜯어 누렁이에게 건넨다. 누렁이는 소녀의 손가락까지 같이 먹을 태세지만 얼른 눈치 빠르게 소녀는 손가락을 뺀다.

밭으로 일을 나가셨던 엄마의 기척 소리가 들리자 누렁이는 쏜살같이 또 내달린다. 그런 누렁이를 따라 소녀도 눈치를 채고 누렁이의 뒤를 쫓는다. 노곤한 하루의 노동을 끝낸 엄마는 댓돌 위의 할머니와 아버지의 신발을 보고 손을 씻는 둥 마는 둥 머리에 둘렀던 수건을 마루에 내려놓고 할머니를 보러 방안으로 간다. 문소리에도 기척을 안 하시는 시어머니를 잠깐 내려다보더니 걷어차인 삼베이불 위에 홑이불 하나를 꺼내 덮어드리고 남편을 찾아 나선다. 도란도란 엄마와 아빠의 말소리를 들으며 소녀는 언제쯤 엄마를 위해 남겨놓은 떡을 엄마가 드실 것인지 궁금하다. 셈하는 속으로 보자기를 들고 엄마에게로 가고 싶기도 하지만 마루에 앉아 꾹 참고 있다. 잠시 후 마루에 나온 엄마를 향해 소녀는

"엄**니, 요거 아^부^지~가.

소녀가 힘겹게 더듬거리는 모양새에 엄마는 가슴이 싸하다.

"그랬디야. 우리 막내는 먹었고?"

소녀는 빤히 엄마를 쳐다본다. 엄마는 몇 첨 남지 않은 돼지고기를 집어 소녀에게 건넨다. 망설임 없이 받아먹는 소녀가 엄마는 가엾기만 하다. 엄마는 남아 있던 떡 한 조각마저 반은 소녀에게 떼어주고 반은 손에 들고 부엌으로 나가신다. 아마 저녁을 지을 요량인 듯하다. 소녀도 쪼르르 엄마 뒤를 따라 부엌으로 들어가고 그 뒤를 누렁이가 따라 들어간다. 소녀는 누렁이에게 발길질을 한다. 누렁이는 소녀의 저지에 서운한 듯 돌아서 나온다. 부엌에선 엄마와 소녀의 도란도란 이야기 소리가 들린다. 저 마을 건너편으로 조막만 한 오두막집 위로 솔솔 하나둘씩 저녁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런 즈음에 늘 언니 오빠들의 다투는 소리가 들리자 아버지의 호통소리에 잦아드는 소리가 늘 반복되는 소녀네 가족의 일상이었다.

부엌 쪽에서 아궁이에 불이 지피는 소리와 솥뚜껑 여는 소리, 도마 소리가 나더니 뚝딱뚝딱 한 상 가득 저녁상이 차려진다. 소녀는 쪼르르 할머니 방으로 건너간다. 아직도 곤히 주무시고 계신 할머니를 흔들어 깨운다.

"할~머*니~"

할머니는 소녀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리지만 피곤한 눈을 도로 감으며

"할머니는 저녁 건너뛰련다. 점심을 잘 먹어서 안 먹어도 돼야."

말씀하신다. 소녀는 아쉬운 듯 도로 마루로 나오며 고개를 흔들다 손을 모아 잠자는 모양새를 만든다. 소녀의 모양새를 보고 아버지가 할머니의 동태를 살피러 방안으로 들어가시더니 도로 나오시며

"자자, 할머니는 주무신다 하니 이따 깨시면 다시 차려 드리고 우리 먼저 먹제이."

말씀하신다.

일곱 식구의 밥상은 포지기만 하다. 별 찬이 없는 밥상이건만 오가는 숟가락 젓가락 소리가 바쁘기만 하고 그런 아이들을 바라다보는 엄마와 아빠의 마음 또한 표지기만 하였다. 오물 조 물 씹느라 언니 오빠보다 속도가 느린 막내 밥공기 위에 두부 한 조각을 올려놓으며 아빠가 말씀하신다.

"막내야. 이따 할머니 깨시거들랑 엄마에게 와서 전 해도고."

"할머니 저녁 드시라고요?"

소녀의 오빠가 낼름 소녀대신 말을 받는다.

"그랴."

밥을 먹자마자 소녀는 자신의 의무를 완수하기 위해 할머니 옆으로 가서 나란히 누웠다. 할머니가 깨시면 엄마에게 알려드려야지 깜냥에 그런 속 이었다. 그러다 잠이 들고 말았다. 밤이 이슥해져서야 겨우 눈을 뜬 할머니는 옆에서 쌕쌕거리는 막내 손녀가 참으로 사랑스럽다. 복숭앗빛 볼에 어린 머리칼 몇 올을 가지런히 제자리로 돌려놓고 살짝 이마에 손을 올려놓는다. 그때 무렵의 자기 자신이 생각나 모든 것이 그립기만 하였다. 세월이 그렇게 후딱 지나 저승 갈 날도 얼마 남지 않은 자기 처지가 어쩐지 아쉽기만 하다. 일어나려고 일어서다가 그만 할머니는 주저하지 않고 말았다. 점심으로 먹은 것들이 속에서 용트름을 하는 것 같고 자꾸 신물이 난다. 체한 것 같기도 하고 어질어질하고 다시 오한이 인다.

"야야, 야야,"

아들을 부른다.

어머니의 부르는 소리에 급하게 문을 열고 아들이 들어온다.

"나 좀 붙잡거라. 자꾸 주저 앉으려 해서."

"어디 가시게요."

"뒷간 좀 가야 않쓰겄나."

어머니를 부축해서 문을 나서는 아들의 얼굴에 근심이 서린다. 아무래도 잔칫집에서 드신 것들이 안 좋은 모양이다. 일을 보시고 비틀거리며 나오시는 달빛에 비친 어머니 안색이 누렇기만 하다. 서둘러 어머니를 부축하며

"괘찮으시죠."

"그랴. 체했나 속이 좀 쓰리더니 이제야 톳물이 나오네."

아들에게 잔뜩 몸을 실으며 겨우 몇 발자국 띄신 어머니는 흙마루에 주저앉는다.

"야야, 찬물 좀 한 바가지 떠오렴."

아들이 떠온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시더니 한기를 느꼈는지 몸을 부르르 떠신다. 그런 어머니를 부축해 방안으로 뉘어드린다.

"저, 죽이라도 쑤라 할까요?"

"괘않허다. 속을 비워야 안 쓰겠나."

힘이 빠진 목소리로 대답하며 아들에게 돌아가라고 손짓을 한다.

아들을 보내놓고 생각해보니 점심상에서 속곳에 쑤셔놓은 인절미가 생각났다. 서둘러 속곳에 손을 넣어 여남은 개의 인절미를 꺼내 달력 한 조각을 찢어 그 위에 놓는다. 막내 손녀딸을 위한 배려이다. 막내이다 보니 언니 오빠에 치여 제 양을 못 채우는 양이 항상 마음에 쓰였음이 틀림없다. 가만히 다시 드러누워 살아온 세월을 더듬는다. 꽃 같은 열여섯에 중늙은이 영감에게 시집와 부지런 살았지만 살림이 나아 진 것이 별반 없었다. 잘한 일이라는 것은 실한 아들 하나 잘 키워 저렇듯 예쁘기만 한 손자 손녀를 둔 지금의 처지이다. 그 사이에 아들은 그래도 동구 밖에 밭떼기를 하나 장만할 만큼 부지런하고 우직하며 효심이 지극하고 며느리 또한 아들만큼 믿음직하다. 몇 해만 더 견딘다면 아들이 알뜰살뜰 사는 양을 볼 수 있으리란 희망이 있는데 이렇듯 갑자기 올 가을 들어 기력이 쇠약함을 느끼니 이상하게 아쉽고 살아온 세월의 덧없음이 마음에 집히기만 한다. 좋았던 일, 힘들었던 일 세어보면 고만고만 그것들이 모다. 아득하기만 하다. 욕심 같아선 막내 손녀딸이 국민학교에 들어갈 때 까지 한 해만 더 견딜 수 있다면 좋으련만 생각하니 눈시울이 붉어진다. 손녀딸 쪽으로 돌아누우며 조막만한 손을 쥐어보니 온기가 참으로 좋다. 아침에 깨여 몰래 먹는 인절미 몇 조각에 신나 할 막내 손녀딸을 생각하니 또 비시시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늙어 간다는 것이 저승길을 앞에 둔다는 것이 이렇듯 눈물과 웃음이 교차하는 순간들이 더 빈번해지기 시작하는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조차 든다. 이런저런 살아온 세월을 더듬다가 스르르 눈이 감긴 할머니의 다 더듬지 못한 세월을 대신 세주기라도 하는 듯 문밖의 누렁이가 하늘을 보며 컹컹거렸다. 누렁이의 컹컹거림에 대답을 하는 듯 총총거리는 수많은 밤하늘의 별들이 미소 짓고 마치 쏟아지기라도 할 듯 가깝게 내려앉아 있었다. 인간사를 내려다보며 지긋이 미소 짓는 별들을 향해 누렁이의 친구들이 말을 걸고 있었다. 이곳저곳 가끔씩 들려오는 아는 체의 인사들이 셀 수 없는 세월만큼이나 아득하게 들리던 밤이었다.

다음 날 아침 손녀는 깨어나자마자 눈을 비비며 할머니의 안색을 살핀다. 모로 누운 할머니를 보기 위해 폴짝 일어나 할머니 얼굴 쪽으로 가서 앉는다. 그 기척에 그만 할머니는 눈을 뜬다.

"아야, 깼느냐. 였다. 인절미 먹어라. 물이랑 함께, 천천히."

어젯밤 찢은 달력 위에 놓은 인절미는 한밤을 지새우며 곰시랑 거렸는지 조금 딱딱해 졌으련만 손녀는 할머니의 마음이 고맙기만 하다. 고것도 언니 오빠 몰래 먹는 인절미의 고소함이 어찌 그리 맛있기만 한지, 씹고 있는 인절미 속에서 할머니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오물주물 인절미를 씹고 있는 손녀를 바라보다가 할머니는 그만 일어나 거울을 챙겨 본다. 쪽 거울 속에 비친 누렇게 뜬 자신의 얼굴이 한없이 늙어 보였다

"할^머*니~ 이*쁘*요."

열심히 인절미를 씹으면서도 할머니의 거울을 보는 모습을 놓치지 않고 또 예쁜 말을 내뱉는 손녀딸은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을 것 같다.

"야야, 천천히, 물도 마시며 먹잖고."

할머니의 구시렁구시렁 소리에 손녀는 자리끼로 놓아둔 물 한 대접을 벌컥거린다.

"할^머*니~, 참~말~로 맛^있*당^께요~."

소녀는 숨이 차다. 어쩐지 혼자만 먹고 있다는 생각에 비로소 언니 오빠에게 미안키만 하다. 눈치 챈 할머니가 선수를 친다.

"언니 오빠들은 어제 많이 먹었을 것 같은 게 너나 먹어라."

할머니의 말에 만면에 웃음을 띠며 소녀는 대 여섯 개를 순식간에 먹어치우더니 나머지를 싸고 있다.

"무엇 하러? 엄마랑 함께 먹으려고?"

손녀의 안색을 살핀다. 고개를 끄덕이는 손녀의 마음이 할머니는 이쁘기만 하다. 남은 인절미를 쥐고 문밖으로 나가는 손녀를 물끄러미 바라다보다 생각이 났는지 벽장문을 연다. 반짇고리에 놓아둔 사탕을 한 알 꺼내 입안에 넣는다. 어쩐지 입이 텁텁하고 쓴맛이 사탕을 먹으면 나을 것 같았다. 반짇고리에 남아있는 사탕을 세어보다가 할머니는 빙긋이 웃음을 짓는다. 막내 손녀의 꼼수가 눈에 잡혀 우습기만 하다. 엄마에게 남은 인절미를 주고 왔는지 손녀는 방안으로 들어온다.

"할^머*니~, 사~탕~?

오물주물거리는 할머니의 입을 바라보며 눈치 빠른 손녀는 사탕 타령을 한다. 그만큼 인절미를 먹었으니 오늘 사탕은 건너뛰어도 될 것 같다.

"야야, 사탕이 몇 알 남지 않았으니 내일 주꾸마."

할머니의 대답이 어찌 야속하기만 하지만 손녀는 그런 체를 할 수 없다.

"할머니, 사탕은 어디서 나요. 아빠가 장에 가셨다가 오실 때 사오시나요?"

할머니를 향해 손녀가 묻는 눈치이다. 할머니는 손녀의 표정으로 손녀의 말을 알아듣는다. 조막만한 손녀가 무릎을 맞대며 달려드는 통에 할머니는 장난기가 발동한다.

"아니지, 그 있잖혀. 저쪽 동구 밖 서낭당 있잖여. 한 밤에 별이 총총 한 날에 가면 말이야. 하늘에 있는 별이 쭉 땅으로 떨어져야. 그때 그 별들을 주우면 사탕이 되는 거란다."

"참말로 그랸디야? 그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별이 서낭당에서 사탕으로 만들어지는 거야?"

바짝 호기심이 생기는지 손녀딸의 눈이 별처럼 총총거린다.

"아니 오직 서낭당 지붕으로 떨어지는 별들만이 사탕으로 만들어지는 거야. 하여 별사탕이라고 하드라.

손녀의 총총거리는 눈동자 속에 어린 호기심이 마냥 별사탕처럼 반짝인다. 그런 손녀를 바라보며 할머니는 배시시 웃는다.

"아하, 그러면 별사탕을 주우러 서낭당에 가면 되겠네요. 할머니."

서낭당이란 단어를 생각하며 손녀는 한기를 느끼는 듯하다. 그 모습이 마냥 귀여운 할머니는 덧붙인다.

"그랴, 그라면 되지만 할머니도 서낭당에 가기가 무서워서 아주 가끔 밖에 못가거든. 별이 떨어져야 하니 한밤중에 가야 하는데 잠도 자야 하고 서낭당이 무섭잖혀."

"그라면 할머니가 가실 때 지도 따라가서 별사탕 주우면 안 될까요? 할머니잉?"

애교 섞인 재촉에 더욱더 신 난 할머니는 덧붙인다. 어느 새 손녀의 표정으로 할머니는 손녀의 말에 선수를 친다.

"그럼 요번 초승달이 뜨는 밤에 우리 함께 가볼까? 초승달이 뜨는 밤엔 별사탕이 유난히 많이 떨어지거든."

"그래요. 할머니. 할머니랑 함께 가면 틀림없이 무섭지 않을 거예요. 아니 우리 누렁이도 같이 가요."

"그럼 그렇게 할까. 누렁이랑 함께 가면 덜 무서울 거야."

손녀는 할머니 무릎으로 바짝 기어올라 손을 내밀며 새끼손가락을 걸고 흔든다. 약속, 굳은 약속의 의미이다. 어젯밤에 저녁을 거른 할머니는 배가 고프다. 아침상이 차려지고 할머니 몫으로는 누룽지가 끓여져 올라왔다. 누룽지의 구수한 냄새에 동한 막내 손녀의 표정을 보며 몇 숟가락을 막내 손녀 몫으로 건넨다.

"어머니요. 그야는 아침에 제 언니 오빠 몰래 인절미를 먹었다카네요. 그만 먹어도 배부를성싶은데."

엄마가 끼어든다. 언니 오빠의 눈이 일제히 막내 동생에게 쏠리고 그 눈빛이 매섭다. 주눅이 든 막내 손녀를 위해 할머니가 나선다.

"그만 해라. 언제나 막내가 너희보다 조금 먹길래 막내 몫을 좀 내가 챙겼다. 그러니, 야한테 눈 흘기지 말고, 언니 오빠가 뭐 하는지, 매번 막내 것이나 탐내고? "

할머니의 꾸지람에 막내에게 쏟아진 눈길이 거두어지고 있으나 여전히 입들이 대빨 나왔다. 언제나 할머니는 막내 동생 편만 드는 것 같아 한편으로 할머니가 야속하기만 하다. 할머니는 입맛이 없었던지 담아 놓은 누룽지의 반도 먹지 못하고 상을 물린다. 그 사이 목표물을 조준했던 사냥개처럼 오빠가 얼른 할머니의 누룽지 그릇을 낚아챈다. 그 순간에 아버지가 개입해서 오빠를 나무란다.

"할머니 더 드시게 그만 해라."

멀쑥한 오빠는 도로 할머니 앞으로 그릇을 놓아둔다.

"됐다카이. 입맛이 없이 그만 먹을 란다. 그래 우리 큰손자가 할머니 몫까지 먹고 막내를 좀 보살펴라. 알겠제?"

"네, 할머니, 알겠어요."

서둘러 할머니의 누룽지 그릇을 훠이훠이 젖으며 먹는 틈에 언니의 숟가락도 몇 번 누룽지 그릇에 담가지더니 곧 그릇이 비워졌다. 늘 크는 아이들에겐 항상 먹을거리가 부족하기만 한 옹색한 살림살이였다.

그렇게 철석같이 약속을 했던 할머니가 그 길로 아프기 시작했다. 시름시름 앓더니 가을 내내 일어나질 못하신다. 아픈 할머니를 바라다보는 막내 손녀도 할머니처럼 아프기 시작했다. 몸이 아픈 것이 아니라 마음이 아팠다. 웃고 떠들던 명랑함이 사라지고 늘 시무룩해 있다. 그런 손녀를 바라다보는 할머니는 더 아팠다. 딱히 어디가 아프다고 말할 수 없으나 기력이 없고 입맛도 없고 도시 일어날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속으로 저승길 여행이 얼마 남지 않았음이 집혀와 담담히 기다리는 심정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 어머니를 바라다볼 수밖에 없었던 아들 내외도 가실 철에 겨우 거둔 고추농사에 아직 어머니를 보내드릴 여비도 장만하지 못했음에 마음이 급하기만 하다. 하여 겨울철에 아이들과 어머니만을 남기고 두 부부는 부지런 타지로 품팔이를 나섰다. 미나리꽝에서 미나리를 건져 다듬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엄동설한이라도 품삯이라도 벌을 수 있어 다행이다 싶다. 새벽녘에 나와야 하는 일이라서 밥상을 차려 어머니 옆에 놓고 가지만 드시는지 아니 드시는지 늘 밥 대접은 비어 있기 일쑤였다. 어느 날 가만히 막내딸을 불러 물었더니 할머니는 거의 드시지 못하고 언니 오빠들이 먹는다고 했다.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겨울에 번 돈으로 봄엔 기필코 어머니 보약이라도 한 제 지어드려야겠다고 생각하니 엄동설한의 추위도 견딜 수 있었다. 그런 아들 내외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할머니는 나날이 누워 지내는 일이 많아졌고 별사탕을 함께 주우러 가자고 철석같이 약속했던 손녀딸은 이제나저제나 할머니가 퍼뜩 일어나셔서 함께 서낭당에 갈 수 있는 날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아들 내외는 새벽녘에 나가 달빛이 창호지 문에 물들 때쯤에야 겨우 돌아와 늦은 저녁을 먹어야 하는 형편이었다. 아이들은 게걸스럽게도 제 몫이 늘 모자라도록 잘도 먹는데 막내딸과 어머니는 당최 입맛이 당기지 않는지 유독 속도가 느리다. 어머니를 위해 늘 흰죽이나 녹두죽, 호박죽을 번갈아 끓이기는 하지만 도시 그것마저도 잘 드시지 못하신다. 하여 가끔 큰맘 먹고 곶감을 사오기도 하고 없는 살림에 약식을 만들어 드려도 입맛이 당기지 않는 눈치이다. 입맛 돈다는 한약을 한재 지어서 정성껏 데려드려도 효험이 없는 듯하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아들 내외는 나름 마음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람이 밥을 먹지 못하면 그것은 저승길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이라고 늘 동네 어르신네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꽃샘추위가 제 갈 길을 가지 못하고 미적거릴 무렵, 막내 손녀는 할머니를 자꾸 채근했다. 사탕을 먹고 싶건만 이젠 할머니의 사탕도 남아 있지 않은 듯했다. 할머니가 잠드신 틈을 타 벽장 속 반짇고리를 뒤져 봤지만, 사탕은 보이질 않았다.

"할^머*니~, 할*머^니~,"

불러보고 또 불러봤지만, 할머니는 들은 척도 안 하신다. 손녀는 초승달이 뜨나 안 뜨나 초저녁부터 하늘을 연신 바라보다가 할머니를 몇 번 채근해본다. 워낙 기운이 없어 하시고 누워 계시기만 하는 할머니에 대한 안타까움보다 별사탕을 함께 주우러 가지 못하는 것이 더 안타까웠을까, 그날 밤 쯤은 틀림없이 할머니랑 누렁이랑 함께 서낭당에 가서 별사탕을 주울 수 있으리란 희망에 손녀는 연신 할머니를 불러 보았다. 아직 엄마 아빠는 돌아오시지 않았고 연신 오빠 언니는 저희끼리 찧고 까불고 있었다. 누렁이는 어딘 가 마실을 나갔는지 보이질 않는다. 할머니를 부르다 지친 손녀는 밖으로 나온다. 하늘을 보니 별들이 총총하고 저쪽 높은 하늘 가로 초승달이 한껏 웃고 있었다. 마음이 급해지기만 했다. 배고픈 줄도 모른다. 다시 방안으로 돌아 온 손녀는 다시 한 번 할머니를 불러본다.

"할머니, 할머니. 하늘에 초승달이 떴고 별이 총총해요. 할머니 별사탕 주우러 가요."

그 말이 하고 싶었다. 손녀는 많은 말을 맺지 못한다. 할머니는 입모양으로 손녀의 말을 짐작할 뿐이다. 막내 손녀의 채근에 할머니는 헛손질로 손녀를 부른다. 뭐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지만, 손녀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할머니의 손을 잡고 바짝 말씀하시는 할머니 입 쪽으로 귀를 기울인다. 뭐라고 띄엄띄엄 말씀하시는 것 같건만 손녀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다만 손녀를 잡은 손만이 힘껏 기력을 다하는 듯 으악 스럽다. 손녀는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어 할머니가 잡은 손을 억지로 뿌리친다. 살며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언니 오빠에게로 간다.

"언니야. 할머니가 이상하다."

막냇동생의 울먹이는 소리에 언니 오빠들이 할머니 방으로 뛰어가고 때맞춰 엄마·아빠가 막 대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엄마야, 아빠야, 할머니가 이상하다."

이제 막내딸은 울상이 되었다. 서둘러 어머니 방으로 달려간 아들 내외의 외치는 소리에 총총했던 별님들도 무슨 일인가 바짝 귀를 세우고 마실 갔다 돌아온 듯 어슬렁거리던 누렁이도 꼬리를 바짝 올리며 토방으로 올라섰다.

그날 밤, 그렇게 할머니는 이승을 하직하셨다. 마지막으로 막내 손녀의 손을 부여잡고 무슨 말씀이 하시고 싶었을까?

"함께 별사탕을 주우러 가자"

는 말씀을 하시고 싶으셨을까?

옹색한 초가지붕 위로 훨훨 나비처럼 할머니의 흰 저고리가 나풀나풀 날아갔다. 그 모습을 보며 소녀는 할머니와 함께 그렇게 날고 싶었지만, 자신에겐 날개가 없다는 것이 슬펐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했지만 돌아가셨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소녀에겐 잘 집히지 않았다. 비록 곳곳에서 울음소리가 나고 엄마 아빠 언니 오빠의 얼굴이 많이 흐려졌지만, 소녀는 나날이 잔칫날처럼 여겨졌다. 생전 보지 못했던 먼 친척들이 오고 동네 사람들이 온 마당에 모이고 술과 떡뿐만 아니라 온갖 맛있는 것들이 지천으로 넘쳐났다.

그렇게 며칠이 떠들썩하게 지났고 드디어 상여가 나가는 날, 비로소 소녀는 할머니와 영영 이별하는 것임을 눈치 챌 수 있었다. 할머니 꽃상여가 마당에 놓이는 날, 참으로 예쁜 상여 꽃이 할머니의 미소를 닮은 것으로 보였다. 상여 꽃을 하나 뜯어내려다 어떤 아저씨의 눈에 띄어 꾸지람을 들었다. 그것이 슬펐다. 그런데 그 슬픔이 갑자기 할머니의 부재로까지 인식되자 비로소 소녀의 눈물은 쏟아지기 시작했다. 참았던 눈물이 아니 것만 그 조막막한 몸에서 어찌 그런 슬픈 울음이 나올 수 있었는지 먼 훗날 소녀는 꼭 이날의 울음과 슬픔을 기억할 것이다. 할머니의 상여가 동구 밖을 나서는 순간에 소녀는 할머니와 영 이별을 했다. 엄마와 언니들이 그곳에서 할머니와 이별하도록 채근했다. 더는 할머니와 함께 갈 수 없었다. 울다가 지쳐 누렁이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내내 할머니의 상여가 멀어지는 것을 뒤돌아보며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은 상실의 고통으로 소녀는 자신의 몸 어딘가가 텅 비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이 슬픔이라기보다는 어떤 허망함 같은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소녀는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몇 분의 동네 엄마들을 보니 그 허망함이 조금은 편안해지기도 했다. 할머니 방으로 들어가 본다. 방이 말끔해졌다. 벽장문을 열어본다. 며칠 전 반짇고리를 뒤지던 때와 별반 다른 것이 없다. 동네 아주머니 한 분이 소녀를 부른다.

"막내야, 이리 와서 밥 먹어야지. 할머니는 마실 가신 거야. 아마 곧 또 오실 거고."

아주머니의 말마따나 꼭 할머니는 오실 것이다. 어느 날 가신 것처럼 꼭 다시 오셔서 소녀와 함께 별사탕을 주우러 가실 것임을 소녀는 굳게 믿는다.

"아이고, 이 어린 것을.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야를 어떻게 떼 놓고 가셨쓰거나."

동네 아주머니들의 눈물 바람이 소녀를 또 울게 하지만,

"네가 엄마 아빠 말 잘 듣고 언니 오빠랑 사이좋게 놀고 있으면 할머니는 다시 오실 거구먼."

위로하는 동네 아주머니의 그 말에 소녀는 참고 있었던 배고픔이 한꺼번에 몰려와 생전 먹기 어려운 맛있는 것들을 맘껏 먹을 수 있었다.

그렇게 맛있는 것들을 양껏 먹은 소녀는 잠이 쏟아지는지 할머니 방으로 돌아가 늘어지게 한잠을 잤다. 갑자기 어수선하던 바깥 동태에 잠을 깨고 밖으로 나와 보니 엄마 아빠는 돌아와 계셨고 언니 오빠들도 평소와는 다르게 조용히 어른들의 눈치를 보기에 바빴다. 누렁이도 전보다 더 얌전해 진 것 같고 자신만 이상스레 외톨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럴 때 할머니가 옆에 계셨으면 하는 마음에 소녀는 두리번거린다. 할머니가 안 계시다는 것을 확인한다. 그것이 슬퍼 소녀는 엄마의 치마폭으로 내 달린다.

"엄마, 엄마. 할머니, 할머니."

우는 아이를 달래며 엄마도 눈물 바람을 한다.

"할머니는 우리 막내가 엄마 아빠 말 잘 듣고 언니 오빠랑 사이좋게 놀고 있으면 오실 거구먼, 그런게 우리 막내 이렇게 울면 안 돼. 울면 할머니가 안 오셔. 예쁘게 하고 있어야 할머니가 더 빨리 오실 거구먼. 세수 좀 해야겠다. 우리 막내 얼굴 보면 저 멀리 있는 할머니가 못 알아보실 거구먼."

엄마는 소녀의 손을 붙잡고, 울어서 땟국물이 흐르는 소녀의 얼굴을 씻긴다. 평소 같으면 으레 할머니의 몫이었다. 할머니의 거친 손보다 어쩐지 조금 더 부드러운 엄마의 손이 기분 좋은 소녀는 금세 얼굴이 환해졌다. 누렁이의 얼굴도 쫄래쫄래 소녀의 뒤를 따라다니며 소녀의 표정을 따라 흐려졌다 맑아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해 소녀는 학교에 들어갔다. 할머니의 부재가 때때로 소녀를 슬프게 했지만, 아이들은 곧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법, 새봄의 태양이 새 생명을 잉태시키듯 학교라는 새로운 환경이 소녀를 들뜨게 했다. 언니 오빠와 함께 가는 학교길이 무엇보다도 재미있었다. 누렁이도 얼마간 따라오다가 제 갈 길을 알고 돌아가면 아쉽기는 하지만 교실에서 기다리고 계시는 예쁜 담임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날 생각을 하며 학교를 향해 달음박질 치곤 했다. 그렇지만 소녀의 생각 속엔 별사탕을 주우러 가자는 할머니와의 약속을 잊을 수가 없었다. 보름달이 지고 초승달이 뜰 무렵이면 소녀는 기필코 언젠가 꼭 서낭당에 누렁이라도 함께 별사탕을 주우러 갈 것이라고 다짐을 하곤 했다. 소녀가 막 갓 들어간 학교생활의 즐거움에 들떠 있었을 즈음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할머니에 대한 부재는 새로운 친구들과의 만남 때문에 어느 정도 상쇄될 수 있었던 것일까 걱정만큼 그렇게 소녀의 상심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며칠은 방학이란 느낌 없이 잘도 지냈건만 하루하루 시간이 갈수록 무엇인지 소녀의 시간에 지루함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물론 누렁이와도 언니 오빠와도 또 동네친구들과의 사이에도 즐거움은 끊이지 않았지만, 할머니와 시간을 대체할 수는 없었을까? 무엇보다도 자신이 말을 더듬거린다는 사실이 싫었다. 친구들이 어딘가에서 늘 자신을 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점점 소녀는 말을 잃어갔다. 소녀는 더욱더 할머니의 부재가 실감났다. 할머니에 대한 묘한 그리움이 몰려들 때마다 할머니가 말씀하신 별사탕에 대한 생각을 지을 수가 없었다. 마치 별사탕을 줍기라도 하면 할머니와의 연대가 이어질 것 같은 기대감이라면 기대감이랄까 어린 마음에도 생각은 있기 마련인지라 혼자 있는 시간이 되었을 때마다 밀려드는 생각은 어찌할 수 없었을까? 그런 생각을 자주 하면 할수록 뒤끝엔 늘 더 많은 어떤 것들이 소녀의 마음에 쌓였던 것이었을까 어느 날 밤 소녀는 그야말로 아무도 모르게 큰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래, 초승달이 뜨는 어느 날 밤, 누렁이와 함께 서낭당에 가는 거야. 그곳에 가면 틀림없이 할머니가 말씀하신 데로 맘껏 별사탕을 주울 수 있을 거야. 뭐 혹시 알아 할머니도 별사탕을 줍기 위해 함께 내려오실지도 모르잖아."

소녀의 속내에 그리움의 가지 끝에 매달린 꽃들이 소녀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보름달이 지고 서서히 줄어드는 밤하늘 달님의 모양을 확인하며 잠드는 여름밤의 하늘엔 총총한 수많은 별님이 소녀에게는 마치 주머니에 가득 채울 수 있는 자신의 사탕이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가끔씩은 꿈속에서 어딘가를 헤매는 자신을 종종 만나기도 했고 아주 가끔은 보고 싶은 할머니와도 어렴풋하게나마 만난 적이 있는 것 같은 그런 밤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하늘의 달님은 몸을 감추면 감출수록 더 많은 별사탕을 하늘에 메달아 주시는 것일까 세다 지쳐 잠이 들 때면 별사탕을 찾아 어딘가를 헤매는 꿈을 꾸게 되는 소녀에게 드디어 초승달의 살가운 미소가 어느 날 밤 소녀를 향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강렬한 신호를 보내게 되었다.

"아가야, 그래 오늘 밤이야. 누렁이와 함께 올래? 어쩜 할머니를 만날 수도 있고 네가 가질 수 있는 양껏 너의 별사탕을 주머니에 넣을 수 있을 거야."

마치 소녀에게 그런 신호를 보냈음이 틀림없었다. 서로에게 보내지는 에너지의 흐름이 그날 밤 소녀의 잠을 깨웠을까? 아니면 꿈속에서 다시 할머니를 만나 별사탕 이야기를 하고 있었을까? 자정이 넘은 시간. 소녀는 쿨쿨대는 언니 오빠들 사이에서 부스스 일어나 창호지로 비치는 희미한 빛을 안고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는다. 꿈인 듯 생시인 듯 빼꼼 문을 열고 마루에 나오는 소녀를 누렁이란 놈이 꼬리를 흔들며 반갑게 맞는다.

한여름이지만 새벽은 차가웠다. 엷은 옷에 몸을 부르르 떨던 소녀는 다시 방안으로 들어가 언니 웃옷을 하나 걸치고 나온다. 누렁이의 꼬리 짓에 누렁이의 등을 쓰다듬으며 소녀는 별사탕을 주우러 떠나가고 있었다. 어디에서 무슨 용기가 났는지 겨우 하늘 한 쪽의 초승달의 미소에 의지해 소녀가 나아가고 있었고 그 옆을 뒤질세라 누렁이가 연신 소녀를 핥아대며 따라가고 있었다. 서낭당까지 가는 길은 익숙했지만 가다 서다, 소녀는 한참을 하늘의 별들을 세어보기도 한다. 소녀와 함께 별사탕을 세는 것일까? 누렁이의 컹컹거림이 긴 꼬리를 끌고 새벽하늘을 향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얼마쯤 왔을까 저만치 서낭당의 어둠이 걸어 나오는 듯 소녀와 누렁이를 맞고 있었다. 훤한 대낮조차도 어른들마저 꺼리던 곳이었건만 소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성큼성큼 서낭당을 향해 걷고 있었다. 몇 백 년의 되었을지도 모를 느티나무에 걸린 색색 천 조각마저 초승달의 희미한 미소에 젖은 어둠을 끌어내리고 있었다. 연신 컹컹거리던 누렁이도 서낭당 가까이에 오니 오금이 저렸는지 자꾸 소녀의 뒤쪽으로 멈칫거렸지만, 소녀는 당당히 빼꼼히 열린 서낭당 문을 밀고 서낭당 안으로 진입하였다. 시커먼 어둠 사이로 벽 위의 무당 할머니 그림 위에 서린 초승달의 빛이 사위를 한층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소녀가 열어젖힌 문 사이로 사정없이 초승달이 꼬리를 내리고 있었고 삐걱거리는 문 여는 소리에 갑자기 놀란 어둠 속의 물체들이 일제히 후다닥 숨을 곳을 찾아 부산거리고 있었다. 찍찍거리는 요란한 소리에 놀라 소녀도 잠시 멈칫거리다 이내 벽 위의 초상화에 눈길을 준다. 그 순간에 돌연 초상화의 얼굴이 슬며시 미소를 띠며 소녀를 반갑게 맞이한다. 소녀 뒤에서 멈칫거리던 누렁이도 낑낑거리며 소녀의 몸에 연신 꼬리를 감고 빙글거리다가 흠칫 놀라 벽 위의 초상화에 시선을 멈춘다. "컹컹" 누렁이의 울음소리가 긴 여운을 끌며 어둠 속으로 울러 퍼지고 있었다. 누렁이의 컹컹거림이 꼬리를 끌며 긴 메아리를 불러들이는 순간에 서낭당 벽 위에 미소 짓던 초상화가 휙 희미한 빛을 가르고 소녀 앞에 바람처럼 우뚝 다가섰다.

"아, 할머니?"

소녀는 자기도 모르게 버벅거리지 않고 비명을 질렀다. 컹컹거리던 누렁이도 깜박거리며 초상화 속에서 걸어 나온 할머니의 모습에 잠시 어리둥절 멈칫거렸다.

"그래, 우리 예쁜이, 오래간만이지? 할머니 안 보고 싶었어?"

"할머니, 정말 할머니네. 할머니 어떻게 된 일이에요. 할머니가 왜 여기에 계셨어요? 할머니는 아주 멀리 멀리에 가셨다고 했는데 이렇게 가까운데 계셨네요."

참 이상한 일이었다. 그동안 자신이 뱉어내는 말들이 자꾸 목 안으로 기어들어가 서성거리기만 해 늘 불안했던, 하여서 꾸역꾸역 자신의 뱃속 어딘가로 기어들던 말들이 불쑥불쑥 튀어 나왔다. 놀란 소녀는 두서없이 반가운 마음에 덥석 할머니의 품으로 안기며 고개를 들고 할머니에게 연신 물어댄다. 멈칫거리던 누렁이도 꼬리를 흔들며 할머니 치마폭을 감싸며 연신 할머니를 핥아 대며 신이 난 듯 헤롱 거린다.

"그래, 우리 누렁이도 그동안 잘 놀았어?"

한 손으로 소녀의 손을 잡고 한 손으로는 누렁이의 고운 털을 쓰다듬으며 할머니는 꾸부정 쪼그리고 앉는다.

"그래, 우리 손녀딸 그동안 얼마나 컷나 한 번 안아보자꾸나."

할머니가 두 손을 벌리자 소녀는 할머니 품 안으로 스르르 미끄러지듯 안기고 뒤따라 누렁이도 할머니에게 커다란 몸을 치댄다. 도시 꿈인지 생시인지 못 믿을 풍경에 소녀는 할머니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본다. 소녀의 따뜻한 두 손의 여린 향기가 할머니의 코끝에 감기며 할머니의 쪼그라진 두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희미한 섬광을 그린다.

"할머니, 울지 마. 진짜 할머니네."

소녀의 작은 외침에 누렁이가 화답한다.

"그래, 우리 아가. 별사탕 주우러 왔지? 이 할미랑 함께 가자고 한 약속을 지키려고 왔단다."

쪼그라진 할머니 얼굴에 떠오르는 미소에 소녀도 마음을 놓고 와락 할머니의 어깨에 매달린다. 누렁이도 사정없이 컹컹거리며 꼬리를 연신 흔들며 할머니와 소녀의 주변을 돌고 있었고 찍찍거리며 숨을 곳을 찾아 내달리던 작은 것들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잔뜩 호기심으로 가득 찬 눈빛을 가지고 삐죽 고개들을 내밀고 있었다. 마치 작은 축제가 벌어지려는 순간인 듯 스멀스멀 어떤 기운이 서낭당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초승달의 희미한 빛들마저 열어젖힌 문을 넘어서, 혹은 찢긴 판자벽들 사이로 모습을 드리우며 축제의 순간을 위해 제 모습을 부서트리고 있었다. 적막하던 사위가 갑자기 부산거리며 작은 소리로 가득 차오르는 서낭당안의 어느 새벽녘이었다. 할머니는 잠시 동안 손녀딸의 등을 연신 쓰다듬고 가끔 누렁이의 등도 쓰다듬어 주었다. 이쪽저쪽 마치 잔칫집 곳간을 드나들 듯 작은 생쥐들도 연신 눈치를 보며 그들의 만남을 엿보고 있었다.

"그래, 이제 그만 우리 별사탕 주우러 갈까? 애야. 누렁이도"

자신의 이름을 듣자마자 누렁이는 꼬리를 잔뜩 곧추세우고 고개를 뻣뻣이 들며 컹컹 하늘을 향해 출발 신호를 보냈다. 누렁이의 포효가 끝나자마자 한 줄기의 강한 섬광이 그들을 향해 쏟아졌다. 섬광은 할머니와 손녀와 누렁이를 감싸며 회오리바람처럼 슈웅 꼬리를 끌며 셋을 들어 올렸다. 눈 깜짝할 사이 셋의 모습은 어수선한 서낭당 안에서 사라졌다. 너무나 순간적인 일이었기에 들락거리던 생쥐들마저도 어리둥절 가던 길을 멈추고 사라진 섬광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라진 섬광의 긴 꼬리가 빙글빙글 하늘 높이 사라지는 순간에 서낭당의 적막은 잠시 세상과 세상 사이의 다리가 되어 남아있는 것들과 사라진 것들 사이를 연결하고 있었던 것이었을까? 멈추었던 생쥐들도 그들의 사라짐을 이해했는지 다시 이쪽저쪽으로 그들의 갈 길을 재촉하고 있었고 서낭당 벽에 걸려있던 초상화가 사라졌을 뿐,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여느 깊은 밤처럼 세상은 쌕쌕 잠들고 있었다.

한 손엔 손녀를 한 손엔 누렁이의 등을 어루만지며 섬광에 쌓여 넘어온 새 세상이 그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들이 도착한 세상 또한 소녀가 사는 세상과 별다를 바가 없어 보여 누렁이도 소녀도 잠시 딴 동네에 나와 있는 듯 놀라지 않았다. 다만 그들이 사는 동네와는 낯선 곳이었지만 할머니와 함께 라서 그리 낯설지도 않았다. 할머니의 손을 꽉 잡은 소녀는 별사탕을 맘껏 주울 수 있는 세상에 왔다는 것이 기쁠 뿐이었고 그들과 함께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즐거운 누렁이는 연신 꼬리를 흔들며 주체할 수 없는 기분을 맘껏 누리고 있었다.

"할머니, 여기가 별사탕을 주울 수 있는 곳이에요?"

소녀는 어느 새 자신이 여느 아이들처럼, 언니 오빠처럼 술술 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더 이상 놀라지 않았다. 잔뜩 호기심과 기대감으로 똘똘한 눈망울을 굴리며 묻고 있는 손녀의 앙증맞은 모습에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 가득 포진 미소가 번졌다.

"그래, 이곳에선 네가 가질 수 있는 만큼 많은 별사탕이 있는 곳이란다."

"마음대로 가져갈 수 있다고요?"

되묻고 있는 소녀의 얼굴에도 한 가득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쪼르르 귀엽고 예쁘게 생긴 동물 한 마리가 그들 앞으로 달려왔다.

"환영합니다. 이곳은 스피카라는 별입니다. 저는 스피카의 귀염둥이 보노보노라고 합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지요?"

갑작스러운 동물의 출현으로 깜짝 놀란 소녀는 할머니의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누렁이도 덩달아 겁먹은 모습으로

"웬 놈이야, 누구람?"

이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소녀 또한 누렁이의 말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눈이 휘둥그레졌고 누렁이 또한 자신의 말소리에 귀를 쫑긋거렸다. 할머니가 그 모양을 보며 손녀를 품 안에서 떼어놓으며 손녀의 눈에 자신의 눈을 맞췄다.

"아가야, 이곳은 저 애 말처럼 스피카라는 별이야. 이곳에선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말을 할 수 있단다. 꽃도 나무도 동물도 물도 바람도 살아있어 원하기만 하면 누구나가 말을 할 수 있는 별이란다. 하지만 원하는 상대하고만, 서로가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는 상대라야 한단다. 놀라지 말렴."

"할머니,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나와 말할 수 있다고요? 저와 말하고 싶은, 제가 듣고 싶은 상대와는 누구와도 말 할 수 있고 들을 수 있단 말이에요? 누렁이도 나와 말할 수 있고 저기 저 귀여운 동물도 저랑 정말 말할 수 있네요. 이상해요, 할머니. 이 별은 참말로 이상한 별 이에요."

"그래, 네가 사는 곳에선 오직 사람들하고만 이야기할 수 있지만, 이곳은 그 무엇이라도 원하기만 하면 서로가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고 서로 들을 수 있는 그런 별이란다. 이리 와 봐라. 보노보노야. 우리 손녀딸과 누렁이를 소개해줄게."

"네, 할머니. 누렁이도 예쁜 아가씨도 저를 보고 놀랐나 봐요. 저처럼 귀여운 것을 보고 놀라다니요? 제가 무섭게 생겼나요?"

탱글탱글 까막눈을 굴리며 보노보노라는 수달은 할머니 가까이 다가섰다. 소녀는 다가서는 수달을 피해 할머니 곁으로 바짝 붙고 호기심에 동한 누렁이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보노보노 곁을 빙글빙글 돌았다.

"아하, 너 말대로 조금은 귀엽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나만큼 귀여울까? 우리 아가씨가 처음이라서 좀 무서워할 것 같은데 살살 좀 하시지. 난 우리 아가씨가 맘 상하는 것 싫거든, 보노보노야. 난 말이야. 누렁이라고 해. 지구별에서 왔어. 먼저 나하고 악수할까?"

누렁이가 보노보노를 향해 앞발을 들자 보노보노 또한 한쪽 발을 들어 누렁이의 앞발을 치며 바짝 누렁이 곁으로 다가선다.

"그래. 다시 한 번 우리 스피카별에 온 것을 환영해. 귀염둥이 보노보노를 처음으로 만난 것 또한 너의 행운일 것 같다. 난 이 별의 귀염둥이이자 소식통이기도 하지. 이 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훤히 꿰뚫고 있어. 그래서 너희 할머니가 나에게 부탁을 하셨지. 너희를 안내해 달라고. 할머니, 그리하셨지요?"

보노보노라는 수달은 누렁이와의 인사말을 끝내고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어쩐지 아양을 떨듯, 잔뜩 애교를 부리는 모습으로 할머니를 향해 찡긋 윙크를 하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소녀는 그만 마음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스피카별의 햇살만큼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보노보노의 윙크에 화답하였다. 마침 곁을 지나고 있던 바람님도 잠깐 그들의 첫 만남에 대한 호기심으로 빙그그르 돌며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자신들이 원하기만 하면 말하고 들을 수 있는 스피카별나라의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먼 지구별에서 여행을 온 소녀와 할머니와 누렁이의 소식을 전하는 바람님에 의해 한바탕 술렁거리고 있었다. 소녀는 보노보노의 모습이 귀엽기 시작했습니다. 사실은 소녀의 집 근처에는 보노보노 같은 작은 동물들이 많이 있었으므로 익숙한 모습이었다. 다만 신기한 세상의 말하는 동물을 처음 대하는 것이라서 그만 멈칫거렸을 뿐이었다. 소녀는 보노보노의 조잘대는 모습이 귀여워 할머니의 치마폭을 벗어나 살살 보노보노 곁으로 다가가 말을 걸어본다.

"보노보노야. 안녕. 나도 누렁이와 지구별에서 함께 왔어. 너를 만나서 나도 반갑고. 그리고 신기해. 네가 말할 수 있고 누렁이도 말할 수 있다니. 내가 너의 말을 들을 수 있고 나도 너에게 더 이상 버벅거리지 않고 말할 수 있다니. 좀 재미있을 것 같아. 우리 악수할까?"

소녀는 먼저 보노보노에게 한쪽 손을 내밀었다.

"그래, 아가씨. 나도 만나서 반갑고요. 우리 친구 됩시다. 누렁이와 친구가 되었으니 당연히 아가씨와도 친구가 될 수 있지요. 다시 한 번 스피카별에 온 것을 환영해요. 앞으로 만나게 될 신기한 세상을 내가 많이 보여 줄게요."

서슴없이 보노보노는 앙증맞은 소녀의 손에 자기 앞발을 댐과 동시에 소녀의 손 등에 살짝입술을 대본다. 까칠까칠한 보노보노의 입술을 맞은 소녀의 손이 잠시 움찔하였지만, 소녀 또한 서슴없이 다른 쪽 손으로 보노보노의 부드러운 털을 어루만져 준다. 그들의 모양새를 지켜보시고 있던 할머니의 얼굴에도 행복한 미소가 번진다. 손녀가 서슴없이 보노보노를 향해 인사하는 것을 보고 어쩐지 안심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래, 애들아. 이제 서로들 친구가 되었으니 축하한다. 보노보노가 우리에게 이 스피카별에 관한 많은 것을 보여줄 거야. 사실은 우리가 온 지구별과 비슷한 세상이지만 또한 많은 것이 다르단다. 우선은 마음만 먹으면 살아있는 것들은 서로에게 말하고 들을 수 있지만 어느 한 쪽이 마음을 닫으면 말이 들리지 않게 돼. 들을 수도 없게 되는 것이지. 그래서 이곳에선 서로 말하고 들을 수 있다는 것은 곧 친구라는 의미야. 그리고 이 스피카별은 지구별처럼 많은 사람은 살고 있지 않단다. 대신 풀과 나무와 꽃들이 많고 동물과 새와 같은 것들이 지구별의 사람만큼 많단다. 그래서 이 별에서 만나는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대할 때는 지구별의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된단다. 꽃도 나무도 동물도 심지어 시냇물도 바람까지도 너희 친구가 될 수 있음을 알게 될 거야."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소녀도 누렁이도 신기한 스피카별 여행에 대한 흥분으로 가슴이 콩닥거립니다.

"할머니, 저는요. 제가요.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아주 좋아요. 할머니와도 또 우리 아가씨와도 말하고 들을 수 있다니, 그렇지요? 아가씨!"

누렁이의 물음에 소녀는 얼른 누렁이의 살랑거리는 꼬리를 잡고

"누렁이야, 뭐 언제는 우리가 친구 아니었니? 그때도 지금도 넌 내 가장 친한 친구야. 하지만 말할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지금이 더 좋아. 더 이상 그 누구도 나를 버벅이라고 부르지 않을거야. 나도 네가 좋아. 참말로 좋아."

소녀의 대꾸에 누렁이는 기분이 최고가 되었다. 팔짝팔짝 소녀의 가슴으로 뛰어오르지만, 소녀는 누렁이의 기세에 눌려 한 발짝 뒤로 물러선다. 아기였던 누렁이가 이제는 소녀보다 더 큰 몸을 가졌기 때문이다. 소녀의 자라는 속도보다 누렁이의 크는 속도가 더 빨랐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누렁이가 늘 소녀보다 더 빠르게 자란 것은 누렁이의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소녀를 지켜주는 든든한 친구가 되라는 그런 하늘의 뜻 말이다. 소녀와 누렁이의 대화를 지켜보던 할머니도 스피카별의 보노보노도 만면에 행복한 웃음이 번졌다. 빛나는 우정과 신뢰의 빛이 그들 사이를 은은히 비추며 서로에게 웃어주고 있었다.

"자, 자! 이쯤이면 우리 서로 인사를 나누었으니 간단하게 나의 별, 스피카에 대해 말씀 올리겠습니다."

보노보노가 성급하게 끼어든다.

소녀도 누렁이도 보노보노가 설명하는 말을 듣기 위해 보노보노 곁으로 바짝 다가선다. 이제는 보노보노 또한 그들의 친구가 되었음이 틀림없다.

"자, 우선은요. 이 스피카별은 지구별과 별다른 차이점은 없지만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서로 원하기만 하면 말을 할 수도 들을 수도 있다는 것은 이제 이해하셨겠고. 다음으로는 이 별에는 지구별보다 아주아주 적은 사람들만 살고 있습지요. 그런데 말이죠. 놀라지 마세요. 그 사람들이 이 스피카별을 모두 지배하고 있지요. 이 스피카별의 모든 상황은 적은 수의 사람들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왜냐고 묻는다면 저도 대답할 수가 없고요. 여하튼 그들에 의해 움직이는 이 스피카별에는 많은 문제점도 있지만 웬일인지 또 다들 협동해서 하나하나 문제점들을 해결에 나가는 특이한 움직임들이 있습니다. 지금부터 마주칠 모든 스피카별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추함까지도 멈춤이 아니라 항상 변화한다는 것을 꼭 알고 계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말이다."

할머니가 아무래도 보노보노의 설명을 잘 이해하지 못할 것 같은 손녀와 누렁이를 위해서 거든다.

"지구별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는 것처럼 이 스피카별에는 날씨만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모든 것들이 달라진단다. 물론 지구별도 그렇긴 하지만 이 스피카별의 속도는 지구별보다 수만 배 빠르게 변한다고 한다는 말이란다. 지구별과 비교해서 말이다. 지구별의 하루는 스피카별에서는 100년이 지나는 것이지. 알아듣겠니?"

"할머니, 어렵지만 스피카별은 모든 것이 빨리 변한다는 것만은 명심할게요."

"할머니, 그럼 저는 이 별에서는 빨리빨리 자라게 되나요?"

호기심 많은 누렁이가 아주 영리한 질문을 한다.

"아니란다. 네가 스피카별에 왔더라도 넌 지구별에서 온 동물이기 때문에 스피카별의 속도에는 맞춰지지 않는단다. 우리가 느끼는 속도와 스피카별의 속도가 달라서 우리는 우리의 속도에 따라 스피카별의 속도를 느낄 수밖에 없단다. 보노보노가 한 말은 이 스피카별의 모든 것들은 스피카별에 있는 사람들이 느끼는 속도에 대한 말이란다."

소녀와 누렁이는 할머니의 설명에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말이다."

보노보노가 얼른 말을 잇는다.

"요점은 그거야. 이 스피카별을 보고 실망하지 말라는 말씀, 혹시 안 좋은 것들을 보더라도 이 스피카별에는 늘 변화가 있기 때문에 더 좋은 쪽으로 빠르게 변한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려는 게 그만…. 암튼 내 별, 스피카를 체험하시면 제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지요. 그리고 또 하나 놀라지 마시라고 미리 말씀드리는 것은요. 스피카별에는 아주 적은 사람들만이 산다고 했지요. 그 사람들의 모습은 지구별 사람들과 좀 다르답니다. 사람들의 입이 두 개 있어요. 얼굴에 하나 얼굴 반대쪽에 하나, 귀는 머리 위에 오직 하나가 있답니다. 스피카별의 모든 것들은 지구별의 것들과 그 모양이 다르지 않지만, 사람들의 모양만이 다르답니다. 그러니 놀라지 마세요. 그들은 이곳에서 그런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혹시 그들을 만나거든 겁먹지 마시고 다정히 인사하세요. 친절하게 대하면 크게 다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단지 그들은 쉼 없이 말합니다. 그래서 입이 두 개랍니다. 또한, 남의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귀가 하나랍니다."

갑자기 소녀와 누렁이는 겁에 질렸다. 동화책에서 읽은 괴물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마치 심술궂은 괴물이 이 별의 주인이라고 하니 덜컥 겁이 나서 할머니와 보노보노를 번갈아 쳐다본다. 할머니는 그들을 향해 빙긋이 미소를 짓는다. 손녀와 누렁이의 심정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와 다르게 생긴 모습을 보면 누구나 먼저 경계를 하고 두려워할 수 있다는 것을 할머니가 이해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림책에서 본 이상스런 모습의 괴물들은 어디 한구석 착한 것이 아니라 늘 악당에 속해 있기 때문에 당연히 무서워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나 곧 그들은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착한 것과 악한 것의 차이는 어느 쪽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를 수 있음을 할머니 자신도 오랜 세월의 경험으로 알 수 있었던 일임을 기억한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이루어지는 경험의 축적에 따라 모든 것을 바라다보는 시각이 얼마든지 변할 수 있음을 깨닫는 것은 곧 성숙한다는 의미이며 세상을 더욱 너그러운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는 지름길임을 알기 때문에 할머니는 아직도 살아갈 날이 많은 그만큼의 경험을 하면서 새롭게 얻어지는 삶의 지혜들을 가질 그들을 바라보면 어찌 웃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래, 애들아. 상상해보면 무섭겠지만, 사실은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인데 이 별에 살다 보니 이 별에 맞게 그렇게 변한 것이란다. 놀라지 말거라. 우리 종족인 사람들도 먼 훗날에 그런 모습으로 바뀔 수 있음을 기억하면 그들을 대할 때 우리 종족의 미래의 모습이다 이렇게 생각하렴. 알아듣겠니?"

"네, 할머니. 그런데 제 종족은 이 별에서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저와 같은 개들은요?

누렁이가 잔뜩 호기심에 찬 표정으로 할머니와 보노보노를 번갈아 바라본다.

"아이코, 우리 누렁이는 아직도 호기심이 많구나. 글쎄? 만나봐야 알겠지?"

"하하하!!! 누렁이님, 사실은요, 사람들 이외에는 이 별과 지구별과는 크게 다를 것이 없답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생명을 가진 것들은 모두 말하고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 이외에는 말이죠. 그러니 크게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소개가 너무 길어지면 재미없잖아요. 직접 보고 듣고 느끼며 알아가는 것이 최고죠. 사람에 관한 이야기는 혹시 놀랄까 봐 염려되어서 미리 말씀드린 것이고요. 자 이제 우리 슬슬 출발할까요?"

아직도 걱정스럽기만 한 소녀는 여전히 멈칫거린다. 할머니를 잡은 손엔 벌써 땀이 났고 얼굴은 겁먹은 표정이다. 그런 손녀가 걱정된 할머니는 주저앉아 손녀를 달랜다.

"아가야, 너무 무서워하지 말거라. 여기 할머니도 있고 누렁이도 있고 또 이 별의 재주꾼인 보노보노도 항상 네 곁에 있잖니? 그리고 이 별은 오히려 지구별보다 덜 위험한 곳이란다. 지구별보다 사람들이 적어서 크게 문제 될 것이 없고 우리가 공격하지 않는 한 우리를 공격하는 것들은 아마 없을지도 모르겠다. 혹시 우리를 보고 놀라 피하려는 것들은 있을 수 있지만 말이다. 우린 다만 이곳에 별사탕을 주우러 왔고 그 여행을 하는 중에 잠시 이 스피카별을 만난 것이고 이 별에서 보고 듣는 것도 네가 봄에 갔다 온 소풍처럼 재미난 것이 될 것이란다. 별사탕만 생각해, 알았제?"

갑자기 할머니가 지난 봄 소풍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고 소녀의 얼굴이 환해졌다. 엄마 손을 잡고 친구들과 만난 것들을 먹고 놀았던 재미있었던 첫 번째 봄 소풍에 대한 기억은 소녀의 기분을 바꾸게 했다.

"그래요, 아가씨, 그렇게 웃어요. 훨씬 예쁘시네요. 절 믿어요. 제가 이래 봬도 힘이 세거든요. 아가씨를 지켜줄게요. 그래서 할머님도 저에게 부탁하신 거예요."

눈치 빠른 보노보노가 얼른 끼어들며 소녀를 안심시키려고 노력한다.

"그래요. 우리 아가씨, 저도 있잖아요. 우리 함께 봄 소풍날처럼 그렇게 즐겁게 이 별을 여행해요. 절 믿어요. 저는 늘 아가씨 곁에 있을게요. 아시죠. 제가 우리 동네에선 짱 이었잖아요."

누렁이가 촐랑대며 소녀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소녀를 안심시키려 한다. 그러나 사실은 누렁이조차도 속으론 새로운 별의 세계에서 마주쳐야 할 모든 것에 대한 호기심도 있지만 동시에 두렵기도 했을지도 모른다. 다만 누렁이는 소녀의 지킴이로서 늘 소녀 곁을 떠나지 않고 함께 할 수 있는 마음의 자세가 있었기에 소녀보다 더 용감한 척, 그래서 소녀가 좀 더 행복하게 이 여행을 즐기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할머니도 보노보노도 누렁이까지 소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노력한 덕분으로 소녀의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함께 할 동행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소녀는 이제 더는 이 여행이 겁나지 않았다.

"자, 이제 출발할까요?

보노보노가 앞장서 나아가려는 찰라, 마침 그 곁에서 잠자코 그들의 하는 모양새와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커다란 나무 하나가 말을 걸어왔다.

" 부디 즐거운 여행 하렴, 나도 너희가 스피카별에 온 걸 환영한단다. 우린 결국 모두 친구야, 그렇지? 너희 지구별에서도 누구나가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처럼 이곳에서도 너희는 여전히 나와 친구가 될 수 있지? "

소녀는 깜짝 놀랐다. 이 별에서는 어느 것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말을 할 수 있다는 것

생각나 얼른 커다란 나무의 말 걸음에 대꾸를 한다.

"고맙습니다. 나무님, 그래요 저도 우리 누렁이도 할머니도 모두 모두 이 스피카별에서 친구랍니다. 환영해주신 것 고맙습니다."

"그래요, 신갈나무님, 당신이 먼저 말을 걸어주셔서 저도 고맙습니다. 늘 당당하고 점잖으셔서 감히 알은체하기가 망설여졌는데 신갈나무님께서 먼저 인사해주시니 이 보노보노도 더불어 기쁩니다."

촐랑이 보노보노가 끼어든다.

"아하, 신갈나무님이시군요. 저희 지구별에서도 신갈나무란 분이 계시는데 이 스피카별에도 똑같은 이름의 나무님들이 계시군요. 환영해주셔 감사합니다. 이 노인네도 신갈나무님의 친구가 될 수 있지요?"

할머니도 쭈글쭈글한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며 신갈나무의 환영사에 대꾸하고 누렁이도 신갈나무님의 커다란 밑둥 둘레를 빙글빙글 돌며 구시렁구시렁 고맙다는 말을 한다. 마치 이 스피카별의 태양도, 바람도, 나무들도 그 모든 것들이 이 지구별에서 온 이방인들과 금세 친구가 된 것처럼 다정스럽기만 하다. 이곳에 있는 모든 존재는 아마도 지구별보다 훨씬 친절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기대감으로 그들 일행의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다. 누렁이는 이 별에서만은 자신도 말을 할 수 있고 들을 수 있다는 현실이 믿기진 않지만, 또한 사실이었기에 그동안 할 수 없었던 가슴속 말들을 할 수 있으리란 기대감으로 기쁘기만 했다. 소녀가 늘 학교에서 배운 노래들을 흥얼거릴 때 누렁이도 옆에서 컹컹거리며 흉내를 내 보았던 노래마저 부를 것 같아 흥얼흥얼 가벼운 발걸음에 박자를 맞추며 그때 그 노래들을 기억하려고 애를 썼다. 그런 누렁이를 옆에 두고 걷던 소녀 또한 누렁이의 흥얼거림에 덩달아 노래가 나왔다.

발걸음도 가볍게 보노보노가 앞장서고 그 뒤를 소녀와 누렁이와 할머니가 뒤따랐다. 햇빛은 쨍쨍, 바람은 낮은 소리로 노래하고 마치 소풍을 나온 듯 기분으로 나섰다. 낯선 별이었던 지라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가며 구경하기에 바쁘기만 하였다. 지구별처럼 초록 나무들과 초록 풀들과 색색의 예쁜 꽃들이 마치 한가득 미소를 띠며 그들의 여행하는 모습을 구경이라도 하듯 잔뜩 호기심에 찬 표정으로 오히려 그들 일행을 바라본다. 말할 듯 말 듯 묘한 표정을 마주치며 보노보노는 익숙한 것들에게 인사하느라고 바쁘다. 때론 혼잣말로 때론 대답을 들으며 왕수다 보노보노의 뒤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즐겁기만 하였다.

보노보노는 왕수다일 뿐만 아니라 또 만물박사이기도 한 것이 분명하였다. 수없이 만나 것

들과 인사를 나누는 틈틈이 지구별 손님들에게 스피카별에 사는 것들에 대해 설명하기에

바쁘다. 특히나 나무들, 곤충들, 꽃들에 대한 수다는 끝이 없다.

"요, 예쁘게도 생긴 꽃은 말이야, 말채나무란다. 글쎄 지구별에서도 있을까, 이것에 대한 전설이 있는데 들려줄게.

어느 산골 마을에 일 년에 한 번 가을 무렵에 보름달이 뜨면 천 년 묵은 왕지네들이 떼를 지어 몰려와서 힘들게 지어놓은 곡식들을 모두 먹어치웠데. 동네 사람들은 늘 배고프고 가난하게 살 수 밖에 없었지. 어느 해 또 가을 보름달이 뜨는 날이 가까워져 오자 동네 사람들이 마을 앞 정자에 모여 걱정을 했데. 때마침 그 앞을 지나가던 젊은이가 사람들의 걱정을 듣더니 좋은 수를 생각해 냈데. 보름달이 뜨기 전까지 독한 술 일곱 동이를 빚어서 지네들이 나타나는 마을 어귀에 가져다 놓으라고 했데. 보름달이 뜨자 예년과 마찬가지로 우레와 같은 큰소리가 나더니 큰 지네 일곱 마리가 입에서 독기를 뿜으며 졸개들을 거느리고 나타났데. 그리고 술을 보더니만 정신없이 들이켰데. 술을 먹은 지네들은 모두 곯아떨어지고 그 사이 젊은이는 지네들의 목을 모조리 베어버렸데. 다음날 그 젊은이는 가지고 다니던 말채찍을 땅에 꽂더니 이것이 여기 있는 한 다시는 지네의 습격이 없을 것이라고 했데. 말채찍은 봄이 되자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워 마침내 크게 자라자 동네 사람들은 그 나무를 말채나무라고 불렀단다. 그래서인지 말채나무 가까이에는 지금도 지네가 범접하지 못한다네.

재미있지? 요처럼 이곳에 있는 나무와 꽃들과 어떤 장소들에는 그들만의 이야기들이 많이 있단다. 나도 우리 할머니로부터 어렸을 적에 듣던 이야기들이야. 지금은 가끔 친구들에게도 이야기를 해주지만 도무지 그들은 관심이 없어.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이야기를 해주고 싶은데. 그래서 난 쉼 없이 내 친구들뿐만 아니라 바람과 햇빛과 물과 나무와 풀들에게도 이야기를 하는데 어떤 이들은 재미있다고 들어주고 어떤 이들은 들은 척도 안 하지. 그럴 땐 슬퍼. 우리의 조상이 대대로 전해오는 이야기들을 다시 후세에 전해질 수 없을 것 같아서. 마치 내가 들었고 알고 있던 이야기들이 나에게서 영영 사라질 것 같아서. "

걱정스런 눈빛으로 일행들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하는 보노보노에게 귀를 쫑긋거리며 열심히 듣고 있던 누렁이가 거든다.

"난, 재미있었는데. 할머니가 옛날이야기를 아가씨에게 해줄 때도 난 재미있었고 우리 아가씨가 읽던 동화책 이야기도 재미있었고 또 오늘 보노보노의 이야기도 재미있는데…."

누렁이의 말에 보노보노의 얼굴이 더 신이 났다. 신이 난 그들이 채 몇 발자국을 떼었을까? 보노보노가 말했던 바로 그 사람들이 셋이나 나타났다. 얼굴에 하나, 얼굴 반대쪽에 하나, 이렇게 입이 두 개이며 귀가 머리에 달린 사람들...그들은 무엇인가 잔뜩 화가 난 채 서로를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듣는 양보다 말하는 양이 훨씬 많은 사람들. 막상 보노보노에게 미리 들었던 모습이었지만 소녀는 괴물처럼 생긴 그들이 무서워 할머니의 치마폭으로 달려들었다. 누렁이는 어느 새 용감해 졌는지 긴 꼬리를 살랑 흔들며 앞장서 그들에게 다가섰다. 보노보노는 웃음을 참지 못하겠는지 자꾸 킥킥거렸다.

“안녕하세요? 저는 지구별에서 여행 온 누렁이랍니다.”

누렁이는 용감했다. 갑자기 서로를 향해 소리치던 그들이 누렁이가 하는 말을 들렸는지 잠시 멈춰 그들을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할 말이 많으신가봐요?”

누렁이가 다시 한 번 그들에게 물었다. 갑자기 그들은 누렁이를 비롯한 보노보노 일행을 모른 척하고 다시 그들은 서로에게 소리쳤다.

“누렁이님, 말했잖아요. 이곳에선 서로가 서로에게 원할 때만 서로가 말할 수 있고 들을 수 있어요. 지금 저 사람들은 우리의 말을 들을 준비가 안 되었단 의미예요.”

“죄송, 잊었어요? 왜 저 사람들은 제 말을 듣기를 원하지 않을까요?

머쓱해진 누렁이가 보노보노에게 물었다.

“그것은요. 지금 저 사람들은 자기들의 주장을 말하기에 바쁘답니다. 서로가 자신이 옳다는 말을 큰 소리로 외치고 있잖아요. 입이 두 개이고 귀가 하나이므로 말하는 양이 듣는 양보다 많아요. 서로 영원히 이해할 수 없죠.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 하니까요? 아니 어쩜 말하는 양을 듣는 귀가 채 입력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구요.”

보노보노의 어려운 말을 누렁이도 소녀도 이해했을까? 다만 할머니는 손녀와 누렁이를 향해 빙긋이 웃었다.

“그래, 애들아. 보노보노의 말처럼 저 사람들은 지금 바쁘단다. 해서 우리들과는 말할 여유가 없데. 그냥 놔 두자. 알겠니?”

소녀도 슬며시 할머니의 잡은 손을 놓고 먼저 앞장선다. 어쩐지 소리치고 있는 사람들 곁을 빨리 떠나고 싶어졌다. 어쩐지 차라리 예전의 자기처럼 빨리 말할 수 없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소녀는 속으로만 웃었다. 누렁이가 소녀보다 먼저 앞장선다. 둘은 누가 빠른지 내기라도 하는 듯 발걸음이 빨라졌다. 보노보노 또한 누렁이와 소녀의 뒤를 따라 나섰다. 할머니는 그들 뒤를 느긋하게 걸어갔다. 소리치던 사람들은 그들이 멀어져가도 계속 소리쳤다. 한 번 더 소녀가 뒤를 돌아봤다.

"아가씨, 웃기죠?"

누렁이가 헤벌쭉 웃으며 꼬리를 들어 소녀의 종아리를 툭툭 쳤다.

"그래, 우스워. 저렇게 자기 말만 하면 어떻게 될까? 차라리 지구별에서의 나처럼 말을 잘 하지 못하는 게 낫겠지?"

누렁이가 소녀와 함께 웃었다.

"참 이상하다 생각하겠지만 이 스피카별에서의 문제점은요?"

보노보노가 바짝 누렁이의 옆으로 끼어들며 말한다.

"모두가 말하기에 바쁘다는 거죠? 듣는 쪽보다 말하는 쪽에 정신이 팔려있어요. 듣기와 말하기의 배분이 형편없어요. 아마도 스피카별의 사람들이 진화를 하게 된다면 어쩌면 말이죠, 지금보다 더 많은 입이 달려야 할 지 모르겠어요."

보노보노의 말에 누렁이도 소녀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더 많은 입이요?"

"그럴지도 모르죠. 제 상상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요.

"아니란다, 애들아. 보노보노 네가 말했제. 스피카별의 가장 큰 장점이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추함까지도 멈춤이 아니라 항상 변화한다는 사실, 어쩌면 말이다. 지금의 상황은 곧 변하게 될지도 모른단다. 뭔가 다른 방법으로 말이다. 더 좋은 방향으로, 그렇지 않을까?"

"그럴지도 모르죠, 할머니. 분명한 것은요. 필요에 따라 늘 변하는 스피카별에서 사는 내가 좋아요."

보노보노의 얼굴이 환해졌다. 누렁이도, 소녀도, 할머니도 보노보노가 환하게 웃는게 좋았다. 늘 변한다는 스피카별은 틀림없이 멋지게 변할거야. 아마도 그들 모두의 마음속에 그런 희망이 싹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를의 수다가 한 창 일 때, 갑자기 서쪽하늘에서 먹구름이 몰려왔다.

"와, 새까맣다."

조금 움추러 든 누렁이가 먼저 검은 구름을 발견했다. 구름이 몰려오는 속도가 빨랐다.

"구름님, 무슨 일이에요?"

보노보노가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잠시 누렁이와 소녀는 깜짝 놀랐다. 보노보노의 목소리가 너무 컷기 때문이다.

"그래, 보노보노님, 저쪽 북쪽의 시린 바람이 우리를 몰고 있어요. 북쪽에서 부는 바람요."

구름님이 애처로운 목소리가 그들이 있는 곳까지 들렸다. 누렁이도 소녀도 잠시 주춤거렸다. 구름이 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은 것이다.

"아, 그렇군요. 이해하겠어요. 하지만 너무 서두르지 마세요."

"그래요, 최대한 우리도 대처할 시간이 필요하단 걸 알아요."

누렁이도, 소녀도 보노보노와 먹구름이 무슨 말을 나누고 있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구름이 낮게 내려왔다. 아마도 보노보노와 다른 말이 하고 싶었나, 호기심으로 누렁이도 소녀도 바짝 보노보노 곁으로 다가갔다.

"네, 아가씨. 스피카별 북쪽엔 우리가 서있는 남쪽과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어요. 그곳 사람들은 귀가 세 개이고 입이 하나인 사람들이 살고 있어요. 그들의 입은요. 좁쌀만해요. 도무지 말을 하지 않아서 인지 자꾸자꾸 입이 작아졌다고 해요. 저도 잘 모르겠지만 암튼 그래요."

소녀는 깜짝 놀랐다. 어쩌면 자신이 버벅이였던 것처럼 스피카별의 또 다른 끝인 북쪽사람들은 말을 하기 힘든 사람들인지도 몰랐다. 소녀는 어쩐지 그쪽 마을에 가보고 싶었다. 자신처럼 수많은 버벅이 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어쩜 친구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누렁이처럼, 보노보노처럼, 자신과 어울릴지도 모를.

"보노보노님, 우리를 그 북쪽에 데려다 주실 수 있나요?"

소녀가 보노보노의 눈을 바라보며 간청했다.

"물론이지요, 아가씨. 허나 그곳에 가면 이곳처럼, 시냇물도, 바람도, 햇볕도 없습니다. 추운 바람과 허허 벌판 요. 서로들 마음을 꼭 닫고 있어요. 도무지 자신의 마음속의 말들을 꺼내지 않아요. 점점 자신들의 귀는 커지고 입은 작아져요. 설령 큰 소리로 말을 하려고 하는 누군가가 있어도 말하는 입이 퇴화되어 소리가 나지 않는 답니다. 하여 점점 그들의 귀만 당나귀처럼 커지고 있어요. 사람들은 환경의 동물이라지요. 그래서 그런지도 모르겠어요."

소녀는 자신의 귀를 만져 보았다. 지구별하고 똑같은 크기의 귀가 느껴졌다. 할머니의 귀도 누렁이의 귀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당나귀 귀요?"

누렁이는 웃음이 나왔다. 못생긴 당나귀의 길고 꼿꼿했던 귀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소녀도 쿡쿡 웃었다.

"그래도 가보고 싶어요."

"그럽시다. 까짓 것. 제 임무는 오늘 하루 동안 스피카별을 방문하신 지구별 여행자님들을 위한 최고의 안내자가 되는 거니깐요."

보노보노는 망설였지만 누렁이와 소녀의 호기심을 채워주기로 했다. 그들은 각자 그들이 향하는 곳에 대한 생각에 골몰하며 북쪽을 향해 걸었다. 점점 추워졌다. 바람도 세지고 있었다. 먹구름들은 쉴 사이 없이 남쪽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마치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이 도망치는 꼴이었다. 그들은 한참을 걸었다. 소녀는 할머니가 걱정되었다. 뒤를 돌아보았다. 할머니의 느린 발걸음이 아쉬웠다. 앞장서던 누렁이도 뒤를 돌아보았다.

“할머니, 힘 들어요?”

누렁이가 할머니를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소녀보다 더 빨리 누렁이는 할머니 곁으로 뛰어갔다. 할머니는 누렁이를 향해 아니 소녀를 향해 어서가란 손짓을 하였다. 보노보노가 얼른 할머니에게로 뛰어갔다. 할머니에게 무엇인가 속삭이더니 다시 소녀에게로 달려왔다.

“아가씨, 제가 할머니에게 말씀드렸어요. 할머니는 이곳에서 좀 쉬시는 게 어떠시냐고요?”

소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겁이 났다. 할머니와 함께 갈 수 없다면 이곳에서 포기하고 싶었다. 반반이었다.

“아가씨, 그래요. 우리 할머니도 먼길 오시느라고 힘들었을 것 같아요. 잠깐만 잠깐만 할머니를 이곳에 쉬시게 하게요. 제가 있잖아요. 지구별의 짱, 누렁이가요.”

누렁이가 잔뜩 애교스런 표정으로 소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앞발로 펄쩍 뛰며 자신의 꼬리를 물으려는 듯 빙글빙글 돌았다. 그 모습이 소녀를 웃게했다.

“아가씨, 누렁이님 말이 맞아요. 지금 할머니는 좀 피로하신 것 같아요. 또 우리들이 가려는 땅엔 엄청 추워요. 누렁이님이랑 아가씨는 두꺼운 피부를 가지고 계시잖아요. 그에 반해 할머니의 피부는 얇고 쭈글 거려요. 어쩜 추위에 다칠지도 모르잖아요.”

보노보노의 말에 소녀는 수긍을 하면서도 북쪽으로 가고 싶은 호기심이 더 강해졌다. 왜냐면 어쩜 북쪽사람들의 처지와 자신의 처지가 비슷할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요, 아가씨. 할머니는 잠깐 이곳에 쉬시게 하고 얼른 다녀오자구요.”

누렁이가 재촉을 하는 바람에 소녀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잠깐 이랬으니까, 그래 잠깐 구경만 하고 오는 거야. 라고 소녀는 생각했다. 보노보노가 앞장을 서고 누렁이와 소녀는 나란히 걸었다. 뒤를 돌아보니 할머니는 북쪽과 남쪽의 경계석이 놓인 곳에 앉아 계셨다. 어서가라는 할머니의 손짓에 힘입어 소녀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자,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보십시오.”

마치 막간을 소개하는 무대의 삐에로처럼 보노보노가 몸을 빙그르르 돌리며 소녀와 누렁이를 향해 소리쳤다.

“와, 온통 얼어붙었네. 이곳은 만화영화 속 겨울 왕국 같아.”

누렁이가 언제 만화영화를 보았단 말인가? 소녀는 누렁이의 호들갑이 우스웠다. 하지만 정말이었다. 사각거리던 발밑부터 눈에 보이는 모든 곳이 꽁꽁 얼어붙은 얼음왕국이었다. 사람들도 나무들도 동물들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보노보노님, 이 땅에서 누구도 살 수 없을 것 같아요.”

“네, 맞아요. 사는 것이 힘든 땅이겠지요?”

“그럼 보노보노님이 말씀하신 당나귀 귀를 달고 사는 사람들은 어디 있나요?”

누렁이의 끝없는 호기심은 아마도 소녀를 닮은 것 같았다.

“이곳에서도 마음 만 먹으면 서로 말하고 들을 수 있나요?”

“그럼요. 똑 같아요. 하지만 한 가지 사실은 이곳사람들은 서로 말을 하고 싶어 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지요.”

“왜요, 왜 서로 말하고 싶어 하지 않을까요?”

“글쎄요. 자신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일까요?”

소녀가 잽싸게 물었다. 그것은 소녀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버벅이로 지내야만 하는 자신이 말하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자신의 마음속의 말들을 말하려 할 때마다 힘이 들었던 어제까지의 자신이 떠올랐다.

“맞아요. 아가씨. 서로 말을 하지 않아서 그들의 입이 좁쌀 만 하게 변했을지도 모르죠? 들으려고만 해요. 하지만 말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들으려는 귀는 점점 커지고 있지요. 언젠가는 사람들의 키보다도 더 큰 귀를 매달고 다녀야 할지도 몰라요.”

누렁이가 보노보노의 말을 듣더니 킥킥거렸다. 소녀도 웃음이 났다. 자신의 키보다 더 큰 귀를 질질 끌고 다녀야 하는 어떤 장면이 그려졌기 때문이다. 누렁이는 우뚝 멈췄다.

“아가씨, 저길.”

누렁이가 앞발을 들어 가르킨 쪽엔 파란색 커다란 버섯이 피어 있었다.

“보노보노, 저건 뭐야?”

“아, 네. 이곳 사람들이 사는 집이에요.”

“네에?”

“얼음집요.”

“아, 지구별처럼 이곳 사람들은 저런 집에 사는 군요.”

호기심으로 똘똘 뭉친 누렁이는 어쩐지 신이 났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그 옆쪽으로 비슷한 모양의 집들이 몇 채 더 있었다. 하지만 색깔이 달랐다. 연하고 짙은 것만 빼놓고 나머지 집들은 전부 검은색 일색이었다. 소녀도 이제 그 집들이 보이기 시작했던 모양이다.

“지구별의 집들과는 달라요.”

“그렇죠? 이곳 사람들에게는 이곳만의 특징이 있으니까요. 대대손손 저런 집에 살아가고 있어요.”

“그래요, 그런데 왜 저 집만 색깔이 다를까요?”

소녀의 똘망한 눈이 빛났다.

“저 집에 살고 있는 사람들 때문이에요. 다른 집들과 다른 색 집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곧 이곳을 떠날 수 있어요. 이곳을 떠나 방금 우리가 떠나왔던 그곳으로 이사를 갈 수가 있답니다. 집의 색깔이 다르다는 것은 곧 이곳을 떠나야한다는 의미입니다.”

누렁이도 소녀도 보노보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요?”

성급한 누렁이는 바짝 보노보노에게 다가섰다.

“한 번 저 집의 문을 두드려 볼까요? 눈으로 확인하실 수 있을거예요.”

보노보노가 앞장서 파랑 집 문을 두드렸다. 인기척이 나는가 싶더니 곧 문이 열렸다. 누렁이도 소녀도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안에서 나온 사람은 역시 당나귀 귀를 가지고 있었지만 얼굴엔 또렷하게 소녀의 주먹 만 한 입이 달려있었다. 온통 파란색으로 덮혀진 괴물 같은 남자의 모습에 누렁이도 소녀도 겁이 났을 뿐이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가씨. 이곳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헤치지 않아요.”

“그렇지. 몸으로 헤치지 않지만 마음으로 헤치기 때문에 그걸 조심해야지.”

파란 집에서 나온 남자가 잽싸게 보노보노 보다 먼저 누렁이와 소녀를 보고 말을 건넸다.

“그래요. 아가씨. 이곳사람들은 누굴 헤치려는 의도를 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자신을 숨기다 보면 즉 자신의 속마음을 절대 말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은 상대에게 자신을 드러낼 수 없어 상대를 아프게 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에요.”

소녀도 누렁이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아무튼 파란 집 남자가 자기들을 헤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실례했습니다..”

“네, 실례하세요.”

파란 집 남자는 살짝 웃었다.

“어서 오세요. 참 오랜만에 누군가 제집에 손님으로 오셨군요.”

보일락말락한 웃음을 보이며 파란 집 남자는 일행을 안으로 안내했다. 파란 집 남자의 집 모든 물건들도 파란색 일색이었다.

“참 이상한 모습이군.”

누렁이의 속마음이 그냥 누렁이의 입을 통해 나오고 말았다.

파란집 남자가 크게 웃었다.

“그래요. 제 모습이 무섭지요?”

“어어, 그게 아닌데. 죄송해요.”

누렁이가 서둘러 변명을 했다.

“차, 드실래요. 무척 추우시죠?”

소녀의 새파랗게 변한 얼굴을 보고 파란집 남자가 차를 권했다. 차를 따르는 그의 주전자에서도 파란차가 흘러나왔다.

“색깔이 이래서요. 하지만 곧 몸을 녹여줄 거예요. 저의 집에 있는 모든 것들은 파란색뿐인걸요. 먹는 것 조차도요. 하지만 색깔만 다를 뿐, 다 먹고 마실 수 있는 거랍니다.”

소녀의 걱정스런 얼굴을 눈치 채고 파란 집 남자는 설명했다.

“하지만 곧 우리는 이곳을 떠나게 될 거예요. 이곳을 떠나게 되면서 우리의 모습도 바뀌고 말거예요. 지금은 진화의 단계예요. 귀는 점점 작아지고 입이 커지게 되죠. 그러다가 결국 입이 두 개로 나누고 귀는 하나가 되는 것이죠.”

파란 집 남자의 설명에 잠자코 있던 보노보노가 거듭니다.

“그래요. 이곳에 오래 살다보면, 어떤 계기로 자신들이 변해야겠다는 의지를 가지게 되는 모양이에요. 누군가는 말이죠. 그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키는 침묵이 진정한 관계를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죠. 하여 스스로 변화를 찾게 되고. 그 변화의 과정이 그들이 사는 집의 색깔로 표현되는 것이죠. 처음 저 이웃들 집처럼 검은 색이 점점 연해지고 그러다 보면 사는 사람들의 성향에 따라. 빨, 주, 노, 초 파, 남, 보 무지개 색깔의 집에서 살 수 있게 되는 거죠. 자신의 집 색깔이 변하게 되면 그 집의 가족들은 이곳을 떠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는 셈이란 말씀.”

보노보노의 긴 설명을 누렁이도 소녀도 도저히 다 이해할 수는 없었다. 아무튼 빨, 주, 노, 초, 파, 남, 보 색깔의 집에 사는 이곳 사람은 곧 그들이 떠나온 그곳으로 가게 되며 새로운 삶을 산다는 셈이라는 사실조차 다 이해하지 못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겨울 왕국을 떠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축하할 일임에 틀림없었다.

“그럼 어쨌든 축하할 일이라는 거죠?”

누렁이가 해맑은 얼굴을 파란집 사람을 보며 물었다.

“그래요. 우린 곧 이곳을 떠날 수 있어요. 지금 제가 있는 지점은 5단계, 남색과 보라색의 단계를 거치면 새로운 땅으로 갈 수 있어 너무 좋아요. 이곳은 너무 추워서 오래 견딜만한 곳은 아니에요.”

“저도 축하드려요. 남쪽에서 다시 만나요. 하지만 남쪽 땅이라서 꼭 좋은 것만은 아닐걸요.”

보노보노가 파란집 남자에게 말했다.

“아, 알고 있어요. 당신의 말을 이해해요. 또 그곳에 가면 수가 있겠지요? 다만 저는 우리 스피카별이 끊임없이 진화한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이 있어요. 누구에게나 살기 좋은 땅으로요.”

“맞아요. 저도 당신의 말에 공감해요. 우린 누구나 뭔가 부족하고 뭔가 넘쳐나요. 누군가 넘쳐나는 부분으로 모자란 누군가를 채울 수 있죠. 그것으로 우린 충분히 좋아질 수 있어요.”

보노보노의 얼굴은 환하게 빛났다. 파란 집에 살고 있는 남자의 얼굴도 점점 환해졌다.

“저, 가족들은요. 아이들은 없나요?”

소녀는 참으로 궁금했던 사항을 물었다. 조금은 소녀의 마음도 경계가 느슨해졌다.

“아가씨도 몹시 궁금했군요.”

보노보노가 웃으며 소녀를 바라보았다.

“네, 가족들은요. 아직 검은 집에 살고 있는 제 동생 댁에 있어요. 그들을 도우러 갔어요. 하지만 곧 돌아 올거예요.”

“놀러 갔어요?”

누렁이가 끼어들었다.

“네, 뭐 그런 셈이죠. 하지만 워낙 말이 없는 동생네 식구들과 놀이를 한다는 것 보다는 뭔가 서로 말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보자 이런 셈이죠. 우린 동생네 가족보다 조금 일찍 깨달았기 때문에 우리의 깨달음을 나눠주러 갔다. 뭐 이런.”

파란 집 남자가 말끝을 흐렸다.

“왜 아저씨는 가지 않으셨어요?”

“아, 전 성격이 많이 급해졌어요. 제가 가서 제 성격대로 급하게 몰아 부치게 되면 동생네 가족들의 입이 영 안 열릴 수도 있어요. 조심하느라고.”

말하며 파란 집 남자가 껄껄 웃었다.

“우린 그만 실례해야겠어요.”

보노보노가 일어섰다. 엉겁결에 누렁이도 소녀도 따라 일어섰다.

“우린 아직도 보아야 할 것이 많잖아.”

“맞아요. 고마워요. 아저씨.”

“고맙습니다.”

일행은 웃으면서 작별인사를 했다.

“아가씨, 이건 제 경험인데요. 숨 고르기 운동을 해보세요. 이곳 사람들의 말하기 속도에 제가 참지 못할 때 쓰는 방법 요. 크게 숨을 들여 마시고 내 쉬는 방법 요.”

파란 집 아저씨말이 누렁이와 소녀는 어리둥절했습니다.

“아하, 그러셨군요. 숨을 고르는 방법으로 아저씨는 자신을 조절하셨군요.”

새삼 보노보노가 웃으며 파란 집 아저씨에게 다시 한 번 인사를 하고 일행은 파란 집을 떠나왔다. 밖은 점점 어두워지고 더 추워졌다. 소녀는 그만 그곳을 떠나고 싶었다. 더 이상 그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아가씨, 너무 춥지요?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지요?”

소녀의 마음을 읽은 보노보노가 걸음을 빨리 해 앞장섰다.

“그럼 우린 더 이상 이 겨울왕국에 있을 필요가 없지요.”

누렁이도 좋은지 보노보노의 속도에 맞춰 껑충거렸다.

“숨 고르기에 대해 말하면요. 바로 이럴 때도 실천 할 수 있어요. 이렇게요. 푸하푸하푸하하”

갑자기 보노보노가 앞발을 옆으로 벌리며 숨을 크게 들여 마시고 내쉬며 요란을 떨었다.

“빨리 가고 싶은데 빨리 갈 수 없을 때, 마음과 달리 몸이, 몸과 달리 마음이 따라 오지 않을 때 이런 숨고르기 방법을 통해 자신의 조절하라는 말씀이 바로 파란 집 아저씨의 말씀. 아시겠어요?”

“요렇게 말이죠?”

누렁이도 보노보노의 흉내를 내며 앞발을 들여 올리며 가슴을 폈다 오므렸다. 소녀는 그들의 행동이 우습기도 했지만 왠지 자신도 그들처럼 흉내를 내고 싶었다. 일행은 가던 길을 되돌아 할머니가 기다리는 남쪽으로 서둘러 발길을 돌렸다. 그들 뒤로 어둠이 내려앉은 겨울왕국엔 날쌘 돌이 바람들이 더 유난을 떨었다. 스피카별에는 전혀 다른 두 나라가 공존해 있었다.

할머니가 기다리던 곳에 주저앉아 계셨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소녀 일행이 오는 것을 보고 할머니는 반가워 일행을 맞는다.

“늦었구나.”

“아, 할머니 죄송. 그거 알아요. 파란 집에 사는 파란 남자를 만났어요.”

누렁이가 뭔가 할 말이 많은 듯 그들이 겨울왕국에서 만났던 파란 남자의 이야기를 조잘거렸다. 할머니는 신기하다는 말을 연신하며 소녀를 향해 웃었다. 소녀도 할머니를 다시 만나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그곳도 어두워지고 있었다.

“오늘 제 안내는 여기 까지 예요.”

돌연 보노보노가 소녀일행에게 작별을 고하려는 눈치였다.

“그래, 보노보노야 고맙구나. 너를 만나서 반갑고 고마웠구나.”

“자, 약속된 일정이니 제 임무는 끝났고요.”

소녀는 어리둥절했다. 아직 더 볼 것도 더 만나고 싶은 것들도 많이 있는 곳인데 이런 이별을 해야하나 어쩐지 아쉬웠다.

“정말, 우리 이별이에요?”

누렁이도 서운한 듯 보노보노를 향해 울상을 지었다.

“아니야, 영 이별은 아니고 서로 간절히 원하면 또 만날 수 있을거야.”

할머니가 소녀와 누렁이를 향해 말했다.

“제가요. 할머니를 보고 싶다 보고 싶다 했더니 이렇게 만난 것처럼 요?”

소녀가 할머니에게 애절한 눈빛을 보냈다.

“그럼요. 우리는 언제든 만날 수 있어요. 간절히 원하기만 하면요.”

“간절히 원하기만 하면요?”

소녀가 다시 물었다.

“그럼 간절히 원하기만 하면.”

일행은 마치 한 마음이라도 된 듯, 함께 소리쳤다.

“간절히 간절히”

늦잠꾸러기 소녀가 오늘은 무슨 일인지 새벽부터 잠꼬대에서 깼는지 부시럭 거렸다. 소녀의 엄마와 아빠는 소녀의 잠꼬대에 귀를 기울였다. 귀를 의심했다. 소녀가 버벅거리지 않고 연거푸 말하고 있었다. 잠꼬대를 하는 것인지 소녀의 이마에 식은땀이 배었다.

“맹자야, 맹자야.”

엄마가 소녀를 흔들었다. 엄마의 목소리에 부스스 눈을 뜬 소녀는 어리둥절했다. 도무지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딘지 분간을 못하는 눈치다.

“맹자, 야가 꿈 꾸었는 모양이제?”

아버지가 거들었다.

“그런가 본디야. 뭔 식은 땀을 이렇게 흘리며.”

엄마의 따뜻한 손이 소녀의 이마의 식은땀을 닦아냈다. 소녀는 그제야 자신이 엄마와 아빠곁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스스 눈을 뜨더니 엄마 품속으로 안겼다.

“할머니잉, 할머니잉.”

엄마는 소녀가 할머니라고 말하는 말을 똑똑히 들었다. 아버지도 소녀가 할머니라고 더 이상 버벅이지 않는 것을 눈치 채고 놀랐다.

“야가, 이제 말을 또박스럽게 하네요. 학교 가더니 버벅거리지 않게 됐고만요.”

엄마가 기쁨에 놀라 소녀를 떼어 놓으며,

“맹자야, 참 말로 이젠 괜 찮아제?”

“맹자야, 한 번 더 말해봐라야. 아부지, 아부지 하고설랑.”

“아부지, 아부지.”

소녀는 아버지를 향해 또렸히 말했다.

“야가, 걱정스럽게 허드만 이제 괜찮아 졌구먼요.”

엄마의 기쁨에 찬 목소리가 소녀를 또한 기쁘게 했다. 하지만 소녀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숨을 고르고 있었다. 밖에서 뽀스락 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누렁이가 컹컹 거렸다. 이른 아침이었는데도 소녀의 집에 기쁨에 찬 말들이 수런거렸다. 소녀 또한 영문을 몰랐다. 자신이 더 이상 버벅거리지 않는 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했다. 하여도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소녀는 알 것 같았다. 진정으로 말하고 싶은 것, 말해야 할 것을 말해야지 아직 어린 아이임에도 소녀는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어느 날 하룻밤 할머니와 함께 별사탕을 주우러 갔던 소녀는 아무 것도 줍지 못한 빈손으로 돌아왔다. 놀라운 것은 다시는 버벅거리지 않는 다는 사실이었다. 버벅거리지 않았으므로 오빠, 언니도 친구들도 동네 사람들도 더 이상 소녀를 버벅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다만 어린 아이 같지 않게 수다스럽지 않았다. 일부러 말을 많이 하지 않는 것인지 혹은 많은 말을 하지 않는 것으로 더 이상 버벅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리려는 의도가 있었는지 소녀는 자신의 가슴속의 말들을 종이에 적기 시작했다. 일기를 쓰기 시작했던 즈음이었다. 선생님의 숙제도 있었지만 소녀는 쓰기에 바빴다. 상상 속 이야기를 썼다. 친구들의 이야기, 엄마, 아빠의 이야기, 누렁이의 이야기, 마치 손에 쥔 연필들이 날아다니는 것처럼 그렇게 썼다. 아무도 소녀가 그렇게 쓰는 것에 제동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엄마, 아빠는 소녀가 쓰는 모양이 신기해 새로운 공책과 연필을 사 나르기에 바빴다. 그렇게 쓰고 또 쓰던 소녀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이제 아무도 소녀를 버벅이로 부르지 않았지만 어느 날부터 소녀에게 새로운 별명이 붙었다. 서명자 대신에 서필순이라는 이름이 가끔씩 소녀를 멈칫거리게 했다. 어느 때 부턴가, 아니 드림하이라는 드라마가 친구들 사이에서 요란하게 오간 뒤부터라고나 할까 누군가는 나를 서필순이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곧 알 수 있었다. 드라마 속의 서필순하고 닮은 소녀를 놀리는 모양이었다. 허나 소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신경 쓰지 않았다 해서 정말 신경 쓰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누구나 사춘기 시절엔 특히 친구들 사이에 자신의 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고찰을 하는 것이 당연지사였으므로. 다만 아닌 척, 신경을 안 쓰는 척 했을 뿐이다. 하여도 소녀는 꿋꿋하였다. 못 들은 척 묵묵히 끊임없이 써댔다. 소녀가 써대는 글 중에서 특히나 자신 몰래 그녀를 서필순이라고 부르는 아이들에겐 그녀도 똑같은 별명을 붙여 주었다. 홍아람 대신에 홍팥쥐라고 구은아 대신에 구미호라고 조세준을 조디악이라고...소녀는 그렇게 일군의 악의 무리들에게 복수하는 방법으로 그들의 이름을 변형시켜 글을 쓰기도 한다. 이러한 소녀의 일련의 글들엔 몇 몇 친구가 동조를 하기도 했다. 은밀하게 함께 비웃을 수 있는 함께 디스할 수 있는 소녀가 있어 얼마쯤은 상대들에게 당하는 터무니없는 성가심에 복수를 할 수 있으므로. 여하튼 중학교에 들어오고서부터 소녀에게 소녀의 일생에 큰 은인이라고 불리 울 만한 친구가 생겼다. 마 고, 늘 누구에게나 상냥한 아이였다. 180센티가 넘는 키에 갖가지 운동으로 다져진 몸매, 아쉽다면 다훈증후근이라는 병을 타고난 아이였다. 하여 외면적으로는 지적으로 여타의 친구들과는 다른 아이였다. 어쩜 그런 점이 마 고와 친구가 될 수 있었던 어떤 끈이 되었다. 마 고 또한 세트처럼 늘 붙어 다녔던 다다라는 친구가 떠남으로써 그 자리를 메워 줄 누군가가 필요했을까? 그렇게 소녀와 마 고는 서로가 모르는 사이에 친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