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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에피소드 8. 최태풍씨에게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16. 5. 6.

최태풍씨에게


  오늘 아침 산책길에는 바람이 몹시 불었습니다. 바다로부터 올라오는 습한 공기가 온 대지를 무겁게 눌렀지만 습습한 바람에 몸을 맡긴 나는 더할 나위 없는 행복감에 젖어 발걸음마저 경쾌했습니다. 5월의 숲이 품에 내는 냄새에 취해 코를 발록였더니 마음 깊은 어떤 곳까지 나를 이끌고 가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온 몸으로 느꼈답니다. 뭉게구름 사이로 비스듬히 비껴 뜬 해는 긴 손을 뻗치더니 특유의 활기로 주변의 풀과 나뭇잎을 더듬고 급기야는 드문드문 드러난 대지를 향해 길게 몸을 눕히더이다. 나는 마치 어린 시절 땅뺐기 놀이를 하듯 햇살이 점령한 부분을 피해 키 큰 나무들이 내린 그림자를 밟으며 바람이 이끄는 대로 내 마음을 따라가 보았습니다.

  그곳에 당신이 있었습니다.

  14살에 만났던 한 여자를 평생 가슴에 품으며 고석동이란 이름을 버리고 하얀 가면을 썼으며 결국 최태풍이라는 이름으로 죽어야했던 남자. 저는 지금 당신의 죽음을 목격해야합니다. 당신이 보여준 그것들에 대해 뭔가 특별하고 넘치게 아름다워서 슬픈, 조금은 관능적이면서도 순수한 그런 죽음을 선물하고 싶다는 열망, 당신은 마땅히,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는 존재이므로.

  당신을 만나 행복했던 2년여의 시간들. 때론 재산에 눈이 멀어 인간 된 도리를 저버리고, 욕망에 들떠 여자를 덮치며, 여자를 얻기 위해 자신을 숨겨야 하는 비열함으로 당신을 몰아세웠지만 당신은 10살도 안된 계집애에게 노란 각시붓꽃을 내밀고 이화자의 화류춘몽을 입에 달고 살며 사랑하는 여자의 안위를 위해 아낌없이 심지어 목숨까지 버리는  낭만과 다정함과 열정을 동시에 지닌 인물. 실존의 인물로서는 결코 존재할 수 없는 당신을 그리며 어쩌면 나는 내 남자로서 당신을 만나고 싶은 꿈을 꾸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우수수 쏟아져 내린 복사꽃잎을 밟으며 저 멀리 보이는 바다를 망연히 바라만 보았습니다.

  당신은 이제 공모자이면서 동시에 원수라면 원수, 연적이라면 연적이었던 안일표를 죽여야 합니다. 그를 죽여야만 사랑하는 여자를 지킬 수 있다는, 어쩌면 공모자 안일표를 죽임으로써 오래전 여자의 아이를 훔쳐내 여자의 불운을 조장하며 부메랑처럼 돌아오는 악연을 끊어내기 위해 술에 취해 걷고 있던 안일표를 도로 곁 도랑으로 밀어붙여 “저 오사리잡놈. 깨골창에 코 박고 죽을 놈. 속창사구 터져 죽을 놈”이라고 독설을 퍼부었던 당신의 여자의 소원을 이루게 합니다.

   물론 그 사고로 당신 또한 피투성이가 된 채, 죽어가는 안일표의 속주머니에서 낮에 여자가 주고 간 수표를 꺼내어 여자의 집으로 갑니다. 여자는 피투성이가 되어 나타난 당신을 보고 놀라기도 했지만 낯선 당신의 흉측한 얼굴의 이마 정중앙의 검은 사마귀를 알아차리며 당신을 집안으로 들입니다. 이제 당신은 일 초 일 초 죽음 앞에 있게 되었고 당신의 여자는 당신에 대한 원망과 당혹과 걱정스러움에 집에 있던 소주로 피로 얼룩진 당신의 몸을 닦습니다. 당신은 여자에게 안일표에게서 빼앗아온 수표를 건넵니다. 어리둥절하기만 한 여자는 병원의 의사를 부르려 합니다. 당신은 여자의 손을 놓지 않습니다.

“하얀 가면, 최태풍”

  당신의 입을 통해 나오는 말들을 들으며 여자는 이제까지 풀 수 없었던 당신에 대한 퍼즐 조각들을 하나하나 꿰맞춰나가지요.

“안중근이 고종팔의 동생이여.”

   차마 당신은 여자에게 원수의 아들 안중근이 여자의 아들이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여자의 아들의 쌍둥이 동생이라는 말을 합니다. 이제 여자는 당신과 여자와 여자의 아들들에 대한 모든 퍼즐을 완성할 단계에 이르게 되고,  당신을 죽이고 싶은 순간적인 살의를 느낍니다. 왜냐면 당신은 여자를 카인과 아벨을 낳은 하와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여자는 마지막 숨을 고르고 있는 당신의 목을 조릅니다. 그리고 당신은 죽어갑니다. 어쩌면 당신은 그녀에게 가했던 폭력을 그런 식으로 용서받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자는 여전히 살아야했고 하와로서의 자신을 벗어 던지고 이젠 평생을 걸쳐 자신을 사랑했던 남자의 여자로 돌아갑니다. 말을 잃어버린 여자는 당신의 주검 앞에서 춤을 춥니다.

  “유카, 벚꽃이 하늘하늘 지는구나.”

  여자는 당신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니 닮았다.”

   여자는 노란 각시붓꽃을 내밀던 까까머리 중학생이었던 당신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여자는 시간을 거꾸로 달리며 당신과 여자사이의 길고 긴 인연을 더듬고 해원합니다. 여자는 자신의 정원에 당신을 묻고 무덤 주위로 꽃을 심습니다. 노란 각시붓꽃, 햇볕이 드는 곳이면 어디라도 잘 자라는 꽃. 여자는 이제 지아비로서 당신을 존경하며 사랑하겠다는 맹세를 하지만 아직 그녀에겐 형을 희생물로 만들어 자신의 출세의 도구로 삼으려는 아들의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카인과 아벨이 짊어져야했던 운명의 고리를 여자는 어떻게 끊어야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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