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박자 인생
“꽃 숨 번지네
꽃새암 시암을 하네”
썰렁한 교실에 박수소리가 요란했다. 누군가는 탄성조차 질렀다. 막 자작시 낭송을 끝낸 브리태니커박사의 얼굴에 득의만만한 표정이 넘쳤다. 지식의 보고라는 브리태니커 사전과 비견할 만한 학식을 겸비했음을 우러르는 시문학반 강사 배선생이 붙여준 닉이었다. 이름보다 닉으로 불리는 것이 더 감각적이며 어딘지 신세대 취향이 느껴져 훨씬 기분을 돋구었다. 하여 시문학반 교실에선 브리태니커 박사, 앙대여 여사, 황진이 여사, 영도여사, 매창여사 등등 각자의 품위에 어울리는 닉으로 이름을 대신하고 있었다.
온풍기도 없는 주민 센타 3층 강의실은 어떤 교실보다도 진지한 학구열로 뜨거웠다. 옆 교실에서 흘러나오는 방정맞은 에어로빅음악도 방해되지 않았다.
“박사님, 꽃새암은 뭐시랑까요?”
눈치 없는 앙대여 여사가 주책없이 또 브박사의 기분을 망치고 있었다. 말끝마다 앙대여를 남발하는 까닭에 쭈꾸미 여사에서 앙대여 여사로 갈아탄, 나운동 시장에서 30년 이상을 주꾸미만을 팔아왔던 시인이었다. 말이 시인이지 사실 등단언저리에도 못 오를 실력이었다.
브박사는 시낭송 뒤끝을 채 즐기지 못하고 앙여사의 입술 끝 검은 사마귀를 째려봤다. 아니나 다를까 사마귀가 씰룩쌜룩 반춤을 추었다. 긴장을 할 때 마다 앙여사의 상징인 검은 사마귀는 자동문에 딸린 종처럼 저절로 요란을 떨었다. 브박사는 쿡 웃음이 났다.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앙여사에게 너그러운 자신의 성품을 또 한 번 과시하고 싶었다. 브박사는 자신의 책상위에 놓여있는 백석시집위에 양 손을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마치 백석의 수제자로서의 자긍심을 보여줄 듯 브박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사님, 꽃새암이란 말이죠.”
앙여사의 초롱초롱한 눈빛에 그만 브박사의 마음이 누그러졌다. 애초 앙여사의 쪽을 좀 팔리게 하고 싶었는데 여의 앙여사의 눈빛과 마주치니 브박사는 그만 맥이 풀리고 만다. 앙여사의 눈빛은 네 살배기 어린아이와 같았다. 차마 그 눈빛에 뜨악한 말 따윈 어울리지 않았다.
“꽃새암이란 말이죠.”
브박사가 진지하게 앙여사를 향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브박사의 진지함은 늘 주민 센타 시창작교실의 백미였다. 지도교사인 배선생보다 브박사의 인기가 출중했다. 브박사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꽃샘이라고도 하는데요.”
느글거리는 중년부터 백발의 소녀 같은 할머니들로 이루어진 수강생들은 도합 10명이었다. 여성 여덟과 남성 둘이었다. 그 중에 대략 일곱쯤이 출석했다. 오늘은 다른 날과 달리 4명이 나왔다. 브박사는 오늘처럼 수강생이 적은 날이 싫었다. 적어도 일곱 이상이라면 잘난 척하는 맛이 났지만 겨우 셋을 두고 열을 내야 하는 시간은 안타깝기만 했다.
“꽃이 피는 것을 시샘하는 매서운 날씨라는 뜻이죠. 지금처럼 이른 봄, 꽃이 필 무렵 변덕스럽게 추워지는 날씨나 그 추위를 이르는 말이랍니다.”
사전을 암기하듯 브박사는 여느 때처럼 명쾌하고 품위 있게 대답했다.
“브라보”
앙여사가 붉어지는 양볼 높이까지 손을 올리며 박수를 쳐댔다. 마지못해 다른 수강생들도 비척비척 박수를 보냈다. 브라보라는 말도 사실은 브박사가 알려준 말이었다. 좌중을 둘러보는 브박사의 시선이 엉겼다. 갈채를 받아야 마땅하련만 이렇게 소소해서야 원. 브박사는 오늘은 이것으로 끝낼 수밖에 없었다. 깐죽이 변씨가 빠진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박수에 대한 답례로 브박사는 정중히 목례를 했다. 뻣뻣한 와이셔츠 깃이 살짝 브박사의 목을 건드렸다. 기분 좋은 쓸림이다. 아직도 자신이 와이셔츠를 입고 넥타이차림으로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있다는 사실은 브박사로 하여금 시시한 일상에 그나마 품격을 불어넣는 기회인 셈이다.
“그럼, 꽃새암이 우물과 관련된 어떤 것인감요?”
눈치 없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앙여사가 앉으려는 브박사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브박사가 날카롭게 앙여사를 쏘아본다. 앙여사는 미안했던지 브박사의 안색을 살피며 변명처럼 다음 말을 내뱉었다.
“지 동네에선요. 시암이 우물 아닌가벼요?”
맞는 말이다.
“그러게요. 브박사님, 왜 시암이라고 쓰셨나요?”
야속한 배선생이 브박사에게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아따, 선생님. 샘이라고 쓰면 음률에 맛이 나지 않습디까?”
퉁명스럽게 브박사가 배선생에게 대꾸를 했다.
“그렇게 임의로 쓰시면 안 되겠는데요. 시암은 앙여사님 말씀대로 우물을 지칭하는 사투리잖아요. 그냥 ‘샘’이라고 쓰셔야 됩니다.”
똑 부러진 배선생의 설명에 브박사가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샘이나 시암이나 그것이 그것이었다. 브박사의 눈꼬리가 신경질적으로 움찔거렸다.
“아따, 시란 감정이 흐르는 대로 좀 늘여 쓰기도 하고 줄여 쓰기도 혀야 제 맛 아닌가비요?”
억지라도 부려야 좀 체면이 설, 브박사였다.
“그것이 그런 것 아니에요, 박사님. 임의로 쓰시면 안 되죠. 공감대가 형성이 되어야 하니까요. 정확한 시어구사가 시를 짓는 첫 번째 요소인 거죠.”
브박사의 얼굴이 점점 달아올랐다. 팔푼이 앙여사가 밉기만 하였다.
“그런데 작품 좋아요, 박사님. '꽃새암 샘을 하네'로 충분히 마음을 전달한 거 같아요. 훌륭한 시입니다.”
배선생의 말에 수강생들은 일제히 브박사를 향해 다시 한 번 박수를 쳤다. 누군가의 전화기 알람이 울렸다.
“수고하셨습니다. 브박사님처럼 이 계절에 맞는 시 한 수 다음 주까지 숙제입니다.”
배선생의 수업종료 선언에 브박사의 얼굴에 아쉬움이 묻어났다. 앙여사의 얼굴엔 설렘이 너울댔다.
“그럼, 오늘도 식사하실 거죠?”
앙여사의 달뜬 목소리가 좌중을 훑었다.
“오늘 저는 약속 있습니다.”
배선생의 대답에 앙여사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저도 오늘은 안 되겠어요.”
브박사의 대답은 앙여사의 희망을 일순 무너뜨렸다. 백석 시집을 끼고 나서는 브박사를 눈으로 쫒으며 앙여사의 마음이 서늘해진다. 일주일간의 희망이 일순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이 순간을 위해 새벽부터 얼마나 설렜던가? 아니 지난 일주일을 또 견뎌오지 않았던가?
브박사의 오래된 검은색 에쿠스 승용차가 떠나가고 있었다. 앙여사의 안타까운 눈길이 승용차를 뒤따랐다. 한참을 붙박이처럼 서 있던 앙여사도 마지못해 발걸음을 돌렸다. 칼바람이 앙여사의 처진 어깨너머로 앙탈을 부렸다.
기실 브박사는 한 번 튕겨본 것이다. 비록 서둘러 시동을 걸고 먼저 빠져 나왔지만 내심 앙여사가 자신을 한 번 더 붙잡아주길 바랐다. 예상과 달리 앙여사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다. 야속한 마음도 생겼다. 막상 주차장을 빠져나왔지만 브박사는 어디로 방향을 틀어야 할지 난감했다.
호랑이 같은 마누라가 점심은 밖에서 하라고 했는데. 오늘 곗날이라며 여편네들이 집을 통째로 차지하고 고스톱 판을 벌이고 있을 터인데. 어디로 가서 여섯 시간을 때워야 하나 브박사는 막막하기만 했다. 배도 슬슬 고파 무엇이라도 먹어야 하는데. 굶더라도 혼자서는 식당에 가지말자는 게 나름 브박사의 철칙이었다.
브박사는 다시 떠나온 주차장으로 차를 돌렸다. 주민 센타 앞 편의점에서 우유와 빵을 사서 차안으로 들어왔다. 씽씽, 브박사의 가슴에 소슬바람이 파고들었다. 고장 난 히터가 야속하기만 했다. 큰딸이 물려 준 승용차가 언제까지 제 구실을 할 수 있을지. 그나마 위풍당당한 승용차가 체면을 지켜주고 있었는데. 브박사는 뭔가 자꾸 아쉽고 가슴이 시렸다.
딱히 방향을 정하지 못하는 브박사의 차가 한참을 주차장에 머물렀다. 도서관이라도 가고 싶지만 제자라도 만날까봐 무섭다. 이미 아침나절에 한 바퀴 돌아버린 월명산도 그렇고.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복지관에 가서 점심이라도 따뜻하게 먹으면 좋으련만. 전직 교장체면에 줄을 서는 것도, 예전의 동료들을 만나는 것도 껄끄러웠다. 초췌한 자신을 들키고 싶지 않았으며 지난 동료들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도 유쾌하지 않았다.
꾸역꾸역 막무가내로 쑤셔 넣은 빵은 소화도 되기도 전에 신물을 일으키며 식도를 타고 올라왔다. 벌컥벌컥 우유를 들이키며 신물을 가라앉혔다. 퇴직하고 채 10년도 되지 않았는데 작금의 후줄근한 자신의 처지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퇴직금을 일시불로 받을 수밖에 없었다. 병원을 확장한다는 큰 딸을 도와주지 않으면 이혼하겠다는 아내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 남편보다 자식 편을 드는 아내였다. 아무리 쥐꼬리만 한 월급이었어도 자신이 한 평생을 먹여 살렸건만. 이제 다달이 나오는 연금에 의지한다면 두 내외 남부러울 것 없는 인생이라는 것을 모를 까닭이 없는 아내인데 무슨 생각으로 홀라당 벗겨 먹으려 했는지. 또 그런 아내에 못 이겨 결국 통장을 내 놓게 된 자신은 무엇인지. 죽어도 마지막까지 쥐고 있으라고 그렇게 친구들이 신신당부 했건만. 35년 인생을 저당 잡힌 퇴직금을 고스란히 내놓고 나니 몸에서 장기 한 쪽이 빠져난 것 같은 허전함이 몰려왔다. 그래도 그럭저럭 자식새끼 자랑에 위안을 삼으며 살아왔건만 요즈음 들어 갑자기 만사가 심드렁해지고 지난 세월에 대한 회한만 늘어갔다.
연금처럼 꼬박꼬박 생활비를 주겠다던 큰딸의 약속은 지켜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여도 자신에게 돌아오는 용돈은 고작 십 만원 남짓이었다. 배신감마저 찾아왔다. 아내와 딸년을 탓해봤자 그나마 마음 편하게 집안에 머물 수도 없다. 참는 도리밖에 없다는 사실이 서글프지만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오래전에 포기한 감정이었다. 무엇인가에 분노하고 그 분노를 밖으로 표출하는 일 같은 것은 어쩜 사치인지도 모른다. 다행인 것은 큰 사위의 타이틀이 만들어내는 배경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브박사는 가만 창밖을 응시했다.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까닭모를 온갖 회환들이 요동쳤다. 가장 힘든 것은 자신의 지나온 삶에 대한 허망함이었다.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한 평생 그렇게 침묵하고 인내하며 살았는가? 그 대답을 찾으려하면 할수록 쓰디쓴 자기비하만 용솟음쳤다.
젊었을 때는 자식을 위하고 아내를 위한다는 게 답이었다. 퇴직 전까지만 해도 어엿한 아들을 둘이나 공무원 만들고 의사사위를 둔 자랑에 어깨가 으쓱했건만. 지금은 공무원인 아들들도 의사 남편을 둔 딸도 정작 자신들 사는 것에 바쁘니 일종의 배신감마저 느껴졌다.
살뜰하며 고분 거리던 아내는 점점 기세등등해지고 자기 맘대로 활개를 치는 것에 반해 자신은 한없이 쪼그라들기만 하니. 당면한 현실을 어떻게 소화해 내야할지 참으로 난감하고 심사가 뒤틀리기만 한 즈음이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서러움 같은 감정은 아니었다. 해마다 달랐다. 점점 자신이 세상으로부터 쪼그라들고 있고 가족에게서마저 외면당하는 기분이었다.
어느 새 찔끔, 진물 같은 눈물이 눈 끝에 맺혔다. 행여 누구에게 들킬라 서둘러 눈물을 훔쳤다. 브박사는 무조건 차에 시동을 걸었다. 어디로 가야할까? 목적지도 없이 걸린 시동은 덜덜대며 요란을 떨었다. 가고 싶지 않다는 차의 의지가 핸들을 통해 전해졌다. 기름 값 계산도 해야 하는데. 게이지에 자꾸 눈길이 가는 것 또한 못마땅한 현실. 브박사는 냅다 엑셀을 밟았다. 갈 데까지 가보자. 기름이 떨어지면 어떠랴?
사실 기름 값 때문에 아침에 아내와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나온 참이었다. 달랑달랑한 게이지를 확인하고 몇 만 원쯤 여분의 용돈을 위해 고군분투했건만 아내는 일언지하 거절했다. 서운한 것보다 분노부터 치솟는 것을 억누르며 며칠 점심을 우유와 빵으로 때우자 셈하며 그냥 물러섰던 것이다.
이주 전에 떨쳤던 허세가 후회되는 참이었다. 10만원의 용돈 중에 절반을 하루의 점심값으로 쓰고 나니 으쓱거리던 어깨에 내리던 묵직한 후회가 뼈저리게 안겨왔다. 사실 계획된 지출은 아니었다. 수업시간에 절찬을 받은 뒤끝이었다. 여우같은 여편네들의 성화에 못 이겨 아니 깐죽이 변씨의 농간에 밀려 제 발등을 찍은 꼴이었다.
“멋진 시인이 될 수 있으실 거예요. 다음 학기엔 등단을 하시죠.”
배선생의 입바른 칭찬이었다. 사실 배선생은 그 누구의 작품이라도 한결같은 칭찬을 했다. 칭찬하는 단어의 맛은 달랐지만 어쨌든 칭찬은 칭찬이었다.
수업이 폐강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배선생 나름의 고육지책이었다. 배선생의 칭찬일색은 나름 효과가 있었다. 앙여사도 황진이여사도 매창여사도 등단할 다음 학기를 기다릴 수 있었고 새 학기의 수강명단에 이름을 올릴 것이다. 미리 수강인원을 확보하지 않으면 그나마 배선생의 용돈벌이가 끝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지난 5년 동안의 주민 센타 경험을 통해 브박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차라리 허심삼아 깐죽이 변씨가 운영한다는 부동산 사무실이라도 갈까? 슬쩍 땅마지기가 있다는 사실을 흘리면 깐죽이 변씨가 더 이상 깐죽거리지 않을 수도 있다. 사실 그럴 듯한 선산도 있지 않은가? 비록 공동명의였지만 엄연히 장손으로서 자신의 이름이 등기부에 기재 되어 있지 않은가? 브박사는 용기가 났다. 대대손손 여산 송씨 가문이 주는 후덕한 은공이었다.
방향을 정하고 나니 좀 기분이 풀렸다. 변씨의 사무실은 대로변 상가에 있었다. ‘무대포 부동산’이라는 푯말의 위세가 대단했다. 간판 하나에도 품격이라는 것이 있는데 ‘무대포라니’. 브박사는 변씨의 저열함이 고소하기만 했다. 주차장엔 변씨의 외제 승용차가 보이지 않았다. 그놈의 아우디 승용차에 자꾸 주눅이 들곤 했는데 이
번엔 승용차가 보이지 않으니 오히려 힘이 빠졌다. 자리에 없으면 그냥 나와야 하나, 점점 매서워지는 칼바람에 브박사는 옷깃을 여몄다. 백석시집을 챙기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백석시집은 브박사 나름 품위의 상징이었다. 브박사는 한 번 더 안색을 고치며 ‘무대포 부동산’의 문을 열었다.
순간 브박사는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배선생을 비롯한 여섯 명의 수강생과 깐죽이 변씨가 왁자지껄 웃으며 떠들고 있었다. 심지어 여섯 명의 수강생 중, 넷은 오늘 수업에 출석하지도 않은 이들이었다.
브박사가 들어서자 가장 놀란 것은 배선생이었다. 배선생의 난처한 표정과 마주치니 브박사는 자신이 죄를 지은 듯 멈칫거렸다.
“아니, 박사님. 어짠 일로.”
깐죽이 변씨가 예의 그 호탕한 웃음을 웃었다. 브박사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후회가 되었지만 이왕지사 이렇게 된 마당에 어찌 하겠는가?
“아니. 선생님이 여기까지. 오늘이 무슨 날인가비요?”
브박사는 천연덕스럽게 물었지만 속이 따끔거렸다.
“아, 네. 오늘 변사장님 생신이라고 해서 축하해 드릴겸.”
배선생이 쭈뼛거렸다.
“아따 우리 박사님. 잡수실 복은 있으신 것 같은디.. 마침 요리가 곧 올 테니 식사나 함께 합시다.”
깐죽이 변씨가 느물거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브박사는 점점 기분이 상해왔다.
“아. 버얼써 설렁탕 한 그릇 뚝딱 했는디. 부동산 시세나 좀 알아볼까 해서.”
브박사는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재빨리 사무실 안을 훑어보았다.
꾀죄죄한 여느 복덕방과 달리 변씨의 사무실은 듣던 대로 깔끔했다. 돈이 들어간 흔적이 보였다. 특히나 손님을 배려한 비싸 보이는 의자가 눈에 띠였다. 덜덜거리는 안마의자가 두 대나 있었다. 수강생중 두 여사님이 안마의자에 앉아 안마를 즐기고 있었다. 근동의 지도가 일목요연하게 벽을 장식하고 있었다. 밖에서 보이는 것과 달리 큰 손들이 드나 듬직하게(????) 보여 브박사는 자꾸 주눅이 들었다. 변씨의 사무실을 두 눈으로 확인하니 평소 변씨가 돈 좀 있다는 행세를 하는 것이 이해가 되었다.
“아이고, 우리 박사님도 솔찬히 부동산이 있는가비요?”
수강생 어여사가 그나마 브박사의 체면을 살려주려는 듯 호들갑을 떨었다.
“뭐, 많은 것은 아니고. 선산도 좀 있고 부모님이 물려주신 전답이 좀 있어서.”
사실 브박사는 선산 이외에 딸랑 300여 평이나 될까 말까 산 속 고샅에 있는 밭뙈기가 전부였다. 브박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박사님. 시방 저하고 거래를 해보시려고 왔는가빈디요?”
능글능글 변씨가 떨떠름하게 웃었다. 남을 깔보는 웃음이었다. 브박사는 마음을 다잡는다. 결코 얕잡혀선 안 되었다.
“뭐, 거래라고 하기보담...”
점점 자신을 잃어가는 브박사가 주춤거렸다.
“아실랑가? 우리 사무실에선 짜잘한 것은 손도 대지 않는디, 딴 부동산 소개하 면 어떨랑가?”
변씨의 거드름에 브박사는 부아가 났다.
“아, 그런가. 난 또 한 5억쯤 되는 물건이라서.”
억이란 소리에 수강생들과 배선생, 변씨마저 놀라는 눈치였다. 속으로 아차하면서도 브박사는 통쾌했다. 거짓말이 자꾸 늘어나는 것이 불안했지만 왠지 제동을 걸 고 싶지 않았다.
“아이코, 죄송혀요. 형님.”
다소 부드러운 목소리로 변씨가 바짝 다가와 어정쩡하게 서 있던 브박사의 손을 잡아끌었다. 형님이라는 소리에 비위가 상했다.
“그 정도 액수라면 혀볼만 현디요.”
구미가 당기는 듯 변씨의 눈이 번들거렸다. 순간 브박사는 간이 떨렸다. 변씨가 달라 들면 곤란할 텐데. 변씨는 깐죽이라는 별명과 함께 찐득이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었다. 변씨가 한 번 달라붙으면 안 되는 거래가 없다는 소리를 소문으로 익히 알고 있었다.
변씨는 아직 60대 초반이어서 그런지 혈기가 왕성했다. 돈푼깨나 쓰는 품새에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브박사보다 인기가 많을지도 모른다. 그런 점이 브박사가 시문학반 수업을 출석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장애요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변씨의 능글거리며 거들먹거리는 품이 브박사의 신경을 번번이 건드렸던 것이다. 하여도 자신의 무기는 지적능력이었고 학교 교장으로 은퇴했다는 관록이었다. 무식한 변씨와 비교도 되지 않았다.
“배달이요.”
때마침 중국집 배달원이 요란하게 문을 제키며 들어왔다. 그 틈을 타 브박사는 서둘러 핑계를 대고 사무실을 나왔다. 잡을 기세를 보였던 변씨는 더 이상 브박사를 붙잡지 않았다.
“저, 갑자기 변사장님이 점심을 하자고해서. 몰랐어요, 다른 분들도 오시는 줄.”
뒤따라 나온 배선생은 변명 아닌 변명을 해댔다.
“아이고 신경 쓰지 마세요. 선생님.”
태연을 가장하며 브박사는 천천히 손을 흔들었다. 여유 있게 차에 올라 주차장을 빠져 나왔다. 속에선 불이 난 것처럼 야릇한 분노가 일었다. 왠지 무리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는 사실이 똥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비참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앙여사가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앙여사마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생각하기도 싫었다. 세삼 앙여사에 대한 고마움이 앙여사를 무시했던 감정을 살짝 웃돌았다. 정말 앙여사라도 찾아가서 말벗이라도 해야 할까? 따돌림을 당한 동지의식이 앙여사에 대한 애틋함으로까지 전해졌다. 차를 골목에 멈추고 앙여사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아니고, 우리 박사님.”
앙여사의 어눌하면서도 낭창한 목소리가 반가움에 들떠 있었다. 찌뿌듯했던 브박사의 마음이 일시에 걷혔다.
“아따. 아까 그냥 가서 살짝 섭섭했던 참이라.”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브박사는 한껏 점잔을 뺐다.
“진지는 자섰는교?”
앙여사는 점심시간을 한 참이나 지났음에도 식사타령이었다. 평소 앙여사는 따뜻한 밥 한 끼가 최고의 대우라는 사실을 강조하곤 했다.
“암먼요. 설렁탕 한 그릇으로 때웠지요.”
체면을 위해 이까짓 거짓말 쯤 뭐 대수겠는가, 브박사는 점점 거짓말을 해야 하는 횟수가 늘어만 갔다.
“그렇다면 따뜻한 쌍화차나 한 잔 잡수셔야지요?”
앙여사의 목소리가 간들거렸다. 듣고 싶은 소리였다. 썰렁하고 움츠러들던 마음이 일시에 요동쳤다. 따끈한 차 한 잔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시점에 앙여사의 콧소리가 정다웠다. 하지만 브박사는 셈을 해야만 했다. 쌍화차 한 잔 값이면 설렁탕 한 그릇이었다.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체면에 앙여사에게 찻값을 지불하게 할 수는 없었다.
“쌍화차를 끓여가지고 왔는디요.”
그야말로 반가운 소리였다.
“나운 시장 맞은편 공원으로 나갈랑게. 그리로 오셔유.”
브박사는 목적지를 향해 차의 시동을 다시 걸었다. 백미러로 차 뒤편을 확인하던 중 누런 똥개 한 마리가 차 뒷바퀴에 오줌을 싸는 모습이 보였다. 생리작용을 하는 놈을 놀래 킬 수 없어 기다렸다. 얼른 끝내고 사라져주길 기다리건만 볼일을 끝낸 누렁이가 비키지 않았다. 좁은 골목이었던지라 누렁이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미물이라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뿡하고 경적을 울려도 꼼짝하지 않았다. 종내는 쏜살같이 앞쪽으로 오더니 그만 차를 가로막고 퍼질러 앉았다. 참 실하게 생긴 놈이었다. 막무가내로 길을 막고 있으니. 경적을 또 다시 울려 보았지만 누렁이는 꼼짝하지 않았다. 누렁이를 쫒아내려면 경적만으론 안 되었다. 브박사는 천천히 차에서 내려 누렁이에게 다가갔다. 으르렁거릴 뿐 누렁이의 시선이 차 아래쪽으로 향해 있었다.
브박사는 누렁이의 시선을 뒤따랐다. 빨간 원피스를 입은 사자를 닮은 듯, 애완견 한 마리가 차 바닥에 앉아 있었다. 브박사는 웃음이 났다. 애완견을 지켜내려는 누령이의 품새에 어쩐지 기분이 좋았다.
그때 막 브박사의 차 뒤쪽으로 검은 승용차가 한 대 정차했다. 이름도 유명한 외제차였다. 뻘건 색으로 염색한 머리를 가진 중년의 여자가 급하게 차에서 튀어나왔다. 한 눈에 알 것 같은 인물이었다. 투자를 미끼로 사위의 병원 확장 개업 시 모자랐던 자금줄이 되었던 여자였다. 세상 어디에도 없을 듯 족히 서 너 명의 남자를 잡아먹을 듯 색기가 느껴졌었다. 부끄럽게도 브박사의 꿈속에서 몇 번 만난 적도 있었다.
여자는 브박사는 안중에 없다는 듯 누렁이에게 다가서더니 그만 누렁이의 목을 감싸 안으며 울먹였다.
“안토니, 클레오파트라는 어딨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기세였다. 누렁이가 꼬리를 흔들며 짖어댔다. 차 바닥에 있던 주먹만 한 애완견이 그제야 튀어 나왔다. 여자는 애완견을 품에 안으며 죽었다 살아온 새끼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할아버지. 하마터면 우리 딸을 죽일 뻔 했잖아요. 제대로 주차를 하셨어야죠. 어쩔 뻔 했어요. 안토니가 지켜주지 않았으면 클라오파트라가 다쳤을 것 아니에요.”
표독한 표정으로 쏘아대는 여자에게 당황한 브박사는 잠시 머리가 띵했다. 그저 전화를 하기 위해 주차했을 뿐이고 주차했을 당시에는 아무 것도 눈에 띠지 않았다는 변명을 해야 했다. 하지만 여자가 워낙 쏘아대는 통해 브박사는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클라오파트라가 얼마인 줄 아세요? 기천이라고요. 아시겠어요?”
이건 또 뭔 소리인가. 쏘아대던 여자가 핑 돌아서며 한 손으로 누렁이를 쓰다듬고 한 손으론 애완견을 안고 차에 올라타고 있었다. 브박사가 대꾸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멍한 시선으로 여자를 쫒다가 브박사는 그만 차 속에 있는 일행인 한 여자와 눈길이 부딪혔다. 순간 브박사는 아뜩했다. 분명 큰 딸이었다.
여자가 타자마자 차가 후진을 하더니 반대 방향으로 사라졌다. 휘청거리는 마음과 시선을 바로잡기 위해 브박사는 안간힘을 썼다. 그대로 차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분명 잘못 보았을 거야. 브박사는 스스로를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고선 꿀꿀하던 기분을 팽개칠 수 없었다. 담배생각이 절실했다.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아니 냄새를 풍기지 않으려고 독하게 끊은 담배였는데. 브박사는 딸이 탄 차의 뒤꽁무니를 허탈하게 바라보았다.
입맛을 다지며 브박사는 덜덜거리며 시동을 켰다. 시동이 걸리는 않았다. 부르르 소리만 요란할 뿐. 브박사는 급 짜증이 났다. 망치라도 손에 잡히면 때려 부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호흡을 조절하며 잠시 몸을 좌석에 기댔다. 뒷목이 뻐근해져 왔다. 거칠던 호흡이 잔잔해지자 걱정이 앞섰다. 밧데리가 나갔을까? 다행히 일곱 번째 시도 끝에 시동이 걸렸다. 언제 차가 멈출지도 모르는 불안감을 안고 브박사는 천천히 목적지를 향해 움직였다.
오늘은 뭔가 마가 낀 일진이었다. 마음을 다독이며 브박사는 앙대여 여사의 목소리를 기억해냈다.
“박사님. 기다릴 테니 싸게 오셔요.”
가라앉는 기분을 바꾸기 위해 브박사는 오늘 자신이 수업시간에 발표한 시를 낭송하기 시작했다. 지난 5년 동안 지은 시가 무려 500여 편이 넘었다. 그 생각을 하니 브박사는 다시 기운이 났다. 배선생 말대로 내년에 등단을 하면 간추려 족히 한 권은 책으로 엮어낼 수 있는 분량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죽기 전 시집 한 권쯤은 자신을 위한 장식품으로나마 남겨야 했다.
앙여사가 말한 나운 시장 앞 작은 공원이 눈에 띠였다. 앙여사가 움츠리고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어쩐지 반갑고 고맙고 한편으론 애처롭기도 했다. 마땅히 주차할 곳이 없어 한 참을 헤매다 겨우 주차를 끝내고 브박사는 서둘러 공원으로 향했다. 백석시집을 손에 들며 브박사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마음은 급했지만 행동은 느리고 기품 있게, 절대 본마음을 들켜서는 안 되었다. 시쳇말로 밀당이라는 것도 있으니 말이다.
브박사를 발견한 앙여사가 환호하는 표정으로 두 손을 저으며 뛰어왔다. 마치 낭랑18세처럼 앙여사의 양 볼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브박사의 입가에 설익은 미소가 번졌다. 가슴마저 뛰었다. 세삼 앙여사가 참으로 귀여웠다.
“아이고, 박사님. 추우신데 여기까지 오시라고 해서 참말로.”
거침없이 앙여사가 브박사의 팔짱을 끼었다. 평소 같으면 어림도 없는 수작이었지만 오늘 만큼은 브박사도 충분히 앙여사에게 아량을 보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박사님, 기분이 꿀꿀하시죠?”
브박사의 안색을 살피며 앙여사가 애교를 떨었다.
“꿀꿀하실 땐 꿀 차가 제격이죠. 그만 쌍화차가 동이 났네요. 슈퍼에 다녀오겠어요. 슈퍼 꿀 차도 맛있당게요.”
쌍화차 핑계로 사람을 부르더니 쌍화차가 동이 났다고 하는 앙여사의 수작이 못마땅했지만 브박사는 모르는 척 앙여사의 하는 양을 지켜봤다. 몸뻬를 입은 푸진 엉덩이를 흔들며 앙여사가 총총히 달려갔다. 말릴 사이도 없었다. 꿀 차 같은 것을 꼭 마셔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개그 아닌 개그를 펼치고 있는 앙여사가 고맙기만 했다. 아니 흔드는 엉덩이가 사뭇 관능적이었다. 은근한 쾌감이 몰려왔다.
한 번도 수업을 거른 적이 없었던 앙여사였다. 지난 오년동안 자신이 그렇게 핀잔을 주어도 늘 자신을 ‘박사’라고 추켜세우는 앙여사였다. 사랑 따위가 아니면 어떠랴. 진심으로 자신을 위해주는 사람이 옆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아직 세상은 살만하지 않는가? 브박사의 가슴이 뜨거워졌다. 왼 종일 꿀꿀하던 마음이 천천히 풀리고 있었다. 그 순간만은 앙여사는 브박사의 나타샤였다.
공원 구석에 서있는 벚나무가 한껏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꽃송이를 터트리고 말 기세였다. 아무리 이러고저러고 몹쓸 세상이라고 한탄을 하여도 어김없이 봄은 올 것이고 그 봄을 기다리는 브박사의 마음도 쓸쓸하고 서럽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때였다. 브박사의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몸을 떨었다. 깐죽이 변씨였다. 받을까 말까 망설이다 모른 척 했다. 한 번 뱉어놓은 말들을 주워 담을 수는 없겠지만 시치미를 뗀다면 허세를 부렸던 속내를 들키지 않을 수 있으리라. 깐죽이 변씨는 줄기차게 몇 번을 더 전화를 해댔다. 5억이라는 숫자의 위력이었음이 느껴져 브박사는 은근히 쾌재를 불렀다. 한편으론 등줄기가 서늘했다. 왠지 하루가 일 년 같았다. ‘오늘의 운세’라도 보고 나왔어야 했는데 아침에 마누라가 밀치는 통에 그냥 나온 것이 후회가 되었다.
“박사님.”
한 손에 꿀 차를 들고 한 손을 높이 흔들며 앙여사가 웃고 있었다.
“방금 배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는디요.”
앙여사의 달뜬 목소리는 그네를 타고 있었다.
“모다 모였다는디요. 지난 번 그 노래방이래요. 혀서 제가 박사님이랑 함께 있다고 혔는디요.”
브박사는 자꾸만 오그라들었다. 앙여사의 다음 말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 당장 가서 합류혀요. 오늘은 변사장이 쏜다는디요.”
속도 모르는 앙여사는 영락없이 합격통지를 받은 수험생이었다. 브박사는 무엇인가 거절할 구실을 만들어야겠는데 도통 생각나지 않았다.
“안 오시면 다음 주 수업 끝나고 밥 사셔야 한다는디요.”
브박사는 터무니없는 밥 타령에 울화가 치밀었다.
“뭐, 아무 때나 지들이 오라면 가고 가라면 오고. 우덜이 그렇게 싸게 논답니까?”
부아가 치민 브박사가 앙여사를 향해 괜한 퉁명을 떨었다.
“글씨, 한 명도 빼놓지 않고 다 모인다고. 꼭 박사님도 모시고 오라는디요. 박사님 전화가 안 된다면서요.”
꿀차를 내밀며 앙여사가 생글거렸다. 앙여사의 미소가 더욱더 브박사의 염장을 질렀다.
“지도 판 접었는디요. 함께 가요. 뭣이냐? 봄맞이 단합 대회라는디. 그래야 시란 것도 잘 써질틴디.”
앙여사의 콧소리가 자꾸 높아만 갔다. 기분이 영 내키지 않았지만 또 브박사는 앙여사의 간청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더욱이 합류하지 않으면 다음 주 밥을 사야한다는 말도 자꾸 켕겼다. 앙여사가 브박사의 팔을 잡아끌었다. 못이기는 척 브박사가 앙여사에게 팔을 맡겼다.
지난번 연말에 송년모임을 가졌던 노래방은 변씨의 사무실 근처였다. 노래방에 도착해보니 과연 앙여사의 말처럼 도합 열 명의 수강생이 전부 참석해 있었다. 변씨의 득의만만한 표정에 브박사는 자꾸 주눅이 들었다. 벌써 탁자위에는 양주 한 병과 과일 안주가 놓여 있었다. 노래방에서 양주라니 필시 변씨의 허세였다. 돈 자랑질이 보여 브박사는 밸이 꼴렸다. 맥주 몇 병이면 충분할 것을.
“우리 변사장님이 오늘 생신 턱을 단단히 쏘신다는데요.”
변씨를 추켜세우는 배선생마저도 야속했다. 브박사는 마지못해 의자 모서리에 살짝 걸터앉았다.
“울고 웃는 인생사 연극 같은 세상사...”
매창여사가 송대관을 흉내 내며 분위기를 띄워가고 있었다. 기분에 취한 수강생들의 목소리가 몹시도 흔들렸다. 깐죽이 변씨가 브박사 옆으로 끼어들며 양주잔을 치켜들었다.
“형님, 한 잔 하십쇼. 형님과 저의 거래를 위해.”
이건 또 무슨 망발인가? 깐죽이 변씨는 그 시끄러운 와중에서도 브박사의 5억이라는 말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브박사는 변씨의 말이 들리지 않는 척 ‘네박자’의 노랫말을 달싹거렸다.
“형님은 걱정하실 것 없으요. 지가 다 알아서 팔아 드릴팅게. 오늘은 뜨끈하게 목이나 축이시게요.”
변씨가 컵에 넘치듯 양주를 부어 브박사에게 권했다.
“ 땅, 지번만 주시랑께요.”
브박사는 순간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기분이었다.
“긍게, 고것이 서천 땅인디.”
브박사는 그야말로 위기에 몰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자기가 쌓아온 자신의 모든 위상이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질 형국이었다. 눈앞이 깜깜해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생각나지 않았다.
“쿵짝쿵짝 쿵짜자 쿵짝 네 박자 속에”
노랫소리보다도 더 우렁차게 변씨의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브박사의 온 촉수가 서릿발처럼 곤두섰다. 변씨가 허겁지겁 전화기를 붙들고 밖으로 나갔다. 브박사는 변씨가 나간 틈을 타 살짝 빠져 나갈 심산이었다. 마음이 급해왔다. 슬슬 눈치를 보며 브박사가 막 문을 여는 순간,
“박사님, 어딜 가시려고용?”
앙여사가 꼬부라진 혓소리를 내며 브박사의 팔을 붙들었다. 다른 여사들마저 나가려는 브박사의 다른 팔을 붙잡았다. 여자들의 억센 힘에 브박사는 잠시 휘청댔다.
“울고 웃는 인생사 소설 같은 인생사 세상사 모두가 네 박자 쿵짝”
막 매창여사를 향한 열화와 같은 박수가 터지자마자 변사장이 노래방 안으로 다시 들어왔다. 우악스러운 앙여사가 기어코 브박사를 의자에 앉혔다. 잽싸게 변씨가 브박사 옆에 달싹 붙어 앉으며 사과 한 쪽을 집어 브박사의 입 주변에 가져왔다. 브박사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저었다. 변씨가 들고 있던 사과가 밑으로 떨어졌다.
“아이고, 아까워라.”
변씨가 호들갑스럽게 떨어진 사과를 집어 들어 쓱싹 소매에 닦더니 브박사를 향해 다시 내밀었다.
“형님, 서천 어느 쪽인디요? 아따 형님허고 지 사이에 뭔 밀당을. 지만 믿으랑께요. 지번을 좀 알켜 주시랑께요.”
느물거리며 변씨가 다시 한 번 브박사에게 엉겨 붙었다. 브박사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져 갔다.
“생일잔치면 생일잔치지. 우덜만 빼놓고, 그게 헐 짓이여?”
부르르 입술이 떨렸고 주먹이 쥐어졌다. 수치심과 분노와 미안함이 한꺼번에 브박사를 압도했다.
“배선생, 어디 대답 한 번 해보쇼. 싸가지 없게 선생이란 작자가...”
부아가 치민 브박사의 목소리가 떨렸다. 배선생의 안색이 굳어졌다. 갑작스런 배선생에 대한 공격에 일행은 침묵을 지켰다.
“아따, 형님. 오해는 요? 혹시 지 헌티 거짓말 헌 것은 아니겄지요. 없는 것을 있는 땅인양. 지가 듣기론 형님 퇴직금조차 딸내미 병원 확장허는디 뺏겼다고 허든디.”
그만 변씨가 브박사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린 셈이었다. 갑자기 브박사의 주먹이 변씨의 면상을 향해 날아갔다.
“시방 니가 날 깔보는겨?”
날쌘 변씨가 브박사의 주먹을 피하려다가 그만 탁자를 넘어트렸다. 양주병이 깨지는 소리가 나고 과일안주가 사방으로 튀었다. 브박사는 씩씩거리며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백석시집을 서둘러 집어 들었다.
“이봐, 이 늙은이가.”
변씨가 안색을 바꾸며 소매를 걷었다. 브박사는 순간 움찔하였다.
“뭐시라.”
브박사의 바닥에서 주운 마이크를 변씨를 향해 휘둘렀다. 변씨는 피하면서도 역공을 시도했다. 말릴 사이도 없이 둘은 엉겨 붙었다. 여사님들이 소리를 질러댔다. 순식간에 실내가 아수라장이 되었다.
“박사님, 박사님.”
앙대여 여사가 변씨를 가로막으며 브박사를 밖으로 끌어냈다. 브박사는 못이기는 척 앙대여 여사에게 몸을 맡겼다. 배선생과 다른 여사님들이 씩씩대는 변씨를 붙들고 있었다. 놀란 노래방 주인이 당황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이봐요. 주인장. 손해배상은 저 무식한 변씨에게 청구하시오.”
브박사는 마지막 예의를 지키며 서둘러 노래방을 빠져나왔다. 간신히 주워들고 나온 백석시집을 점검했다. 양주가 묻어있는 몇 페이지를 빼면 그런대로 무사했다. 브박사는 먼지를 털 듯 온몸을 털었다. 눈이라도 쏟아질 듯 하늘은 잔뜩 찌푸렸고 바람도 매서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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