證猫
갯바람이 매섭게 똬리를 틀며 치달렸다. 잠들지 못한 도시는 온통 눈에 매몰되어 있었다. 칠년만의 폭설이었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배기에 나지막한 집들이 버거운 눈을 이고 있었다. 한결 같이 버려진 집들이었다. 눈의 무게를 못 이겨 폭삭 주저앉을 것 같은. 이미 내려앉아 눈 속에 형체를 감춘 집들도 더러 있었다. 버려진 집들엔 빨간 혹은 파란 페인트로 X표시가 그려져 있었다. 아마도 이 계절이 지나면 이마저도 자취를 감출 것이다. 그것은 내 영역이 사라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살 곳을 잃어버린, 아니 강탈당한 존재들은 또 꾸역꾸역 버거운 삶을 연장하기위해 어디로든 떠나야 한다.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은 어쩜 행운인지도 모른다. 그런 운조차 없는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의지조차 없는 인간들도 있는 법이다.
나는 어제 저녁 무렵 세 번째를 잃었다. 내 뱃속에서 용케도 살아 탈출한 행운의 주인공들은 체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하나씩 죽어 나갔다. 잠깐 먹을 것을 위해 어슬렁거리는 사이에 마지막 새끼를 잃었다.
―축하해.
―고마워.
―알릴거야?
―그래야겠지.
―그냥 웃어. 너, 웃고 싶은 것을 애써 참고 있잖아.
―들켰네.
―왜, 참아?
―너 때문이지.
―설마?
―그냥.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서. 뭐 예의랄까?
사루비아는 얼마 전에 내가 내 아이들을 잃어버린 것을 두고 미안한 모양이었다. 그건 순전히 내 부주의 때문이었는데.
―그깐 예의. 똥통에나 쑤셔 넣지.
―미안, 기분 나빴다면.
―아니, 딱히 기분 나쁘다는 말은 아니고.
―그렇다면 다행이고. 대신 함께 있어줄래? 증인이 돼줘.
―내가 방해되지 않아?
―전혀.
―그렇담 다행. 넌 가끔씩 나를 거추장스러워 했잖니?
―으응. 아니었다고는 말 못해. 근데 지금은 아니야. 네가 날 떠났다고 생각하니 네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 알게 된 것 뿐이야.
사실, 며칠 동안 난 사루비아 곁에 나타나지 않았다. 나도 내 용무가 있었던 셈이었다.
―왜?
―글쎄. 이유 같은 것은 몰라.
―그래. 다행이야. 난 늘 네 앞에선 쭈뼛거리게 돼.
―지금도?
―조금은 안심이 돼.
―왜 무엇인가를 잃어봐야 비로소 그 존재의 가치가 드러날까?
―피. 나한테 그런 것 묻지 마. 난 복잡한 생각 따윈 싫어.
―미안. 사실은 나도 그래. 생각이란 것은 늘 사치야.
―꼭 그런 것만은 아니야.
―그럴지도 모르지. 그럼 내 경우엔 그렇다고 할게. 근데, 묻고 싶은 게 있어.
―뭘?
―나 못났잖아. 보다시피 뚱뚱하고.
―진심으로 듣고 싶어?
―그래. 오래 전부터 묻고 싶었던 말이었어. 빙 돌리지 말고 말해줬으면 좋겠어.
―글쎄, 못 생겼는지, 잘 생겼는지는 주관에 따르니깐. 뭐, 고양이인 내 눈엔 그다지 못 생긴 것도 잘 생긴 것도 아닌 그냥 사람이야.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세상의 모든 것의 기준이 너 같았으면 좋겠다.
사루비아의 얼굴이 금세 환해지는 것에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사실 난 일련의 그녀의 행동과 마음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늘 폭행을 일삼는 그녀의 남자를 참아내는 것도,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는 것도, 더군다나 남자의 생일상까지 차려줄 모양이라니······.
어제의 일이었다. 내 간절한 요청으로 사루비아는 자신의 가방 안에 나를 숨겨 마트에 갔었다. 나는 그녀와 약속한데로 절대 가방 속에서 튀어나오지 않고 그녀의 동선을 따라 그녀만을 살피기로 했다.
사루비아는 불루베리 케이크와 싸구려 스파클링 와인 한 병을 샀다. 그녀는 치즈코너를 둘러봤다. 그녀는 ‘유통기한 임박’이란 글자가 새겨진 12,800원짜리 가격표 밑에 4,900원짜리 새로운 가격표가 붙어있던 크림치즈를 쇼핑카터에 떨어뜨렸다. 사실 내 눈엔 그 옆에 맛있게 보이던 로코포르 치즈에 그녀의 손길이 가길 바랐지만.
사루비아는 곧 이어 한우코너를 무시하고 수입육 코너로 직행했다. 수입육 코너엔 미국산과 호주산이 뒤섞여 가격표를 달고 있었다. 나는 호주산과 미국산과의 가격차이가 무엇일까, 호기심이 일었다. 판매대 안쪽에 하얀 위생 캡을 쓰고 있는 여자가 무표정한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난 그녀의 무표정이 좋았다. 100킬로를 웃도는, 군데군데 맞아 멍이든 얼굴의 사루비아를 보고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 그녀는 어쩜 사루비아보다 더 참혹한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무엇인가를 견뎌야 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무감각이니까. 고양이인 나도 아는 사실이 좀 슬펐다.
―저기, 요거 두 조각만 주시겠어요.
사루비아가 위생 캡을 쓴 여자의 표정을 살피며 100그램당 700원이나 싼 미국산 척 아이롤을 가리켰다. 여자는 말을 잃어버린 자동로봇처럼 고기를 저울에 올려놓았다. 가격표를 붙이고 포장용기에 놓더니 한 번 더 비닐로 쌓아 내밀었다. 사루비아는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하다가 또 참는 눈치였다.
사루비아는 색색파프리카와 브로콜리, 양파, 양송이, 마늘, 미역을 사더니 곧장 3층 의류코너를 향해 카터를 움직였다.
보기보다 카터는 제법 묵직한 듯 에스컬레이터를 탄 그녀가 뒤뚱 비틀거렸다. 곧 허리를 곧추세우더니 쇼핑카터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익숙한 조심성이었다.
속옷코너들이 즐비했다. 유혹하는 표정의 광고모델이 내 눈에도 멋져 보였다. 천천히 쇼핑카터를 밀며 사루비아가 매장 앞을 기웃거렸다. 한가한 까닭일까? 눈치가 빠른 점원이 쇼핑카터를 매장 옆으로 밀어주었다. 점원의 친절에 그녀의 굳었던 얼굴이 좀 편해 보였다. 그녀가 남성용 속옷 코너로 직행했다. 점원이 그녀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사이즈는요?
―100으로요.
―나이는 어떻게 되시나요?
―40대요. 아, 아니에요 30대인가?
매장점원이 살짝 웃음을 띠었다. 나도 쿡쿡 웃음이 나서 참기 힘들었다. 단언컨대, 사루비아는 남자 팬티를 사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속옷을 입어야할 상대를 매장 점원에게 들키기라도 한 듯 얼굴이 붉어졌다.
―이것은 어때요?
점원은 화려한 꽃무늬 사각팬티를 들어 보이며 가볍게 웃었다. 마치 입을 사람을 알기라도 하는 웃음이었다. 사루비아는 점원과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네. 예쁜데요.
사루비아는 점원의 말에 건성으로 대답하더니 시선을 돌렸다.
―요즈음엔 중년들도 화려한 것을 찾아요.
점원은 손에 들고 있었던 것을 제자리에 돌려놓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마치 유행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핀잔이라도 하듯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점원이 사루비아의 시선을 쫓아 재빨리 갈색 도트무늬의 팬티를 집어 들었다.
―얼마예요?
―23,500원요.
점원은 보란 듯이 가격표를 들이댔다. 순간 나는 사루비아의 미세한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사루비아는 자신의 통장잔고를 떠올렸을 것이다.
―여기 50프로 세일 하는 것도 있어요.
사루비아의 멈칫거림을 눈치 챘을까? 점원은 한쪽 구석의 진열대를 가리켰다. 50프로 세일이라는 문구가 사루비아의 시선을 끄는 눈치였다. 하지만 사루비아는 곧장 그쪽으로 가지 않았다. 점원이 넘겨준 진갈색 도트무늬 팬티를 손에 들고 엉거주춤 서있었다. 점원은 양손에 세일 상품을 하나씩 들고 사루비아를 향해 웃어보였다.
―네, 예쁘네요.
마지못해 사루비아가 점원을 향해 웃었다. 사루비아가 세일 코너로 다가갔다. 그녀는 점원이 보여준 것은 안중에도 없는 듯 다른 팬티를 골라 손에 쥐었다.
―100사이즈로 주실래요?
점원은 세일 상품의 진열대를 몇 번이나 뒤적였다.
―어떡하죠? 100사이즈는 남아 있지 않군요. 세일 상품이라서 사이즈가 다 있는 건 아니에요. 이것은 어때요. 요건 100인데.
점원이 내미는 물건이 눈에 차지 않는지 사루비아는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얼마에요?
―11,000원, 반값이에요.
점원은 얼마나 싼지를 강조하듯 재빨리 대답했다.
―그럼, 그것으로 주시고요. 요것도 함께 싸주세요.
하나를 사기가 미안했던지, 사루비아는 신상하나와 세일 상품 하나를 고른 셈이었다.
―포장해드릴까요?
―네. 가격표는 떼어주세요.
사루비아의 얼굴은 점점 달아올랐다. 사루비아가 말한 대로 남자에게 무엇인가를 선물한다는 것, 그것도 속옷을 준비하는 사루비아의 흥분을 나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사루비아는 유아 옷을 파는 가게로 갔다. 파랑과 분홍, 유아용 신발 두 켤레를 샀다. 유아용 신발을 바라보는 사루비아의 얼굴에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를 처음으로 본 것도 같았다.
나는 잠시 어제 일을 떠올리니 웃음이 났다. 사루비아의 얼굴에서 행복을 읽은 첫날처럼 느껴졌으니까.
―흠, 어때? 냄새만으로도 죽여줄 것 같은데.
콧노래를 멈춘 사루비아가 익어가는 음식물의 냄새를 흡입했다. 행복의 절정을 마음껏 흡입하고 말겠다는 듯, 사루비아의 표정은 근래에 보기 드문 흥분으로 일렁거렸다.
사실 나에겐 고문이었다. 사루비아가 흥얼거리며 요리를 하고 있는 사이, 나는 목젖에서 침이 올라와 참기 힘들었다. 눈치 없는 그녀는 내가 아침도 굶었다는 것을 잊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적당히 익은 소고기가 야채와 어울려 풍기는 냄새. 비강을 통과한 냄새는 순식간에 내 대뇌 후각 중추를 강타했다. 발끝에서 머리털 끝까지. 모든 세포가 깨어 스멀스멀 움직였다. ‘흠’ 내 입에서도 감탄사가 저절로 튀어 나왔다. 필시 전달 통로에서 사루비아의 설렘이란 감정과 나의 욕망이 합체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설렘은 분명 사랑의 묘약이었다. 누군가 '사랑을 어떻게 알아차려요?' 묻는다면. 나는 단연코 답할 것이다. 설렘의 농도를 측정해보라고.
사랑의 묘약에 취한 사루비아가 이제야 생각난 듯 소고기에서 발라낸 기름덩이를 나에게 던져줬다. 허겁지겁 정신없이 먹어치운 나는, 사루비아의 다음 행동을 지켜보기로 했다.
딱히 식탁이라고 볼 수없는 앉은뱅이 밥상 위에 노란 물방울모양의 테이블보가 로맨틱했다. 사실 사루비아는 입지 않던 오래된 원피스를 잘라 손수 기워 만든 것이다. 워낙 품이 큰 원피스였던지라 테이블보로써 손색이 없었다. 분홍 접시 두 개와 보라색 플라스틱 컵 두 개와 몸체가 긴 샴페인 잔. 한 번도 쓰지 않았던 포크와 숟가락 젓가락을 배치하니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멋졌다. 두 개씩 나란히. 그림 속에 누워있던 농부부부처럼.
―이리와 봐, 봄비.
사루비아가 인터넷을 뒤지더니 나를 불렀었다. 그때는 다소 사루비아와 지금처럼 친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배가 고파 먹을 것을 찾아 어슬렁거렸지만 버려진 집들엔 더 이상 먹을 것이 남아 있지 않았다. 지금보다 더 거구였던 사루비아를 올려다보며 나는 가장 측은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었다. 뭐랄까. 같은 종족은 아니었지만 그녀도 나를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았고 우린 곧 친구가 되었다. 우연히 마주친 사루비아가 내 생명의 은인인 셈이었다.
―이 그림 좀 봐. 오후 네 시. 밀레의 그림을 누군가 판화로 복제했고 고흐는 판화를 또 그림으로 복제했고. 일련의 과정을 통해 탄생한 고흐의 그림 속 장면은 독신주의자가 되겠다던 내 꿈을, 미래를 잃어버린 내 절망을 단 한 방에 날려버렸어. 저 그림 같은 삶을 살 수 있다면. 내 인생에도 저 그림 같은 날이 꼭 있어야 했어. 내 인생에 대한 책임이자 권리야. 그때 이래로 내 꿈은 단 하나, 이 그림처럼 살고 싶었을 뿐이야.
사루비아는 인터넷 속의 그림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나도 그녀의 시선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사루비아의 간절함이 느껴졌던 순간이었다. 그제, 사루비아는 어디에서 구했는지 오후 네 시라는 그림의 복제품을 액자로 만들어 방 한 면에 비스듬히 기대 놓았던 것이다.
오후 네 시라는 그림을 배경으로 차려진 생일상은 정말 그럴 듯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사루비아의 밥상이 이토록 화려한 적은 없었다.
―넌 기억이 있어?
불쑥 사루비아가 테이블위에 음식을 차례로 놓으며 물었다.
―뭘?
―가령 너의 과거 같은 거.
―글쎄, 나 같은 미물에게 기억나는 과거 따위가 있을까?
왜 나에게도 기억이란 것이 없겠는가? 상처가 여전히 아파, 기억하고 싶지 않을 뿐이란 것을. 사루비아는 내 대답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난 사루비아라는 내 이름이 좋았어. 어쩐지 사루비아란 이름 속엔 나름의 긴 이야기가 있을 것 같았으니까. 그저 기분이 그랬다는 것이지. 이유 같은 것은 알 턱이 없었지. 아니 어쩜 명순이, 진희, 혜순이. 인자 같은 그렇고 그런 이름이 아니어서 그랬을지도 몰라. 특히나 할머니가 ‘사~루~ 비~아~ ~ ~ ’라고 글자마다 긴 꼬리를 메달 듯 불렀을 때의 기분은 최고였어.
―톡톡 튀는 벼룩처럼. 미안.
―뭐 미안할 것까지야. 암튼 할머니가 사루비아라고 부르는 반면에 동네 아줌마들은 ‘이쁜이 딸’이라 불렀지. 아마도 우리 엄마의 이름이 ‘이쁜’이어서 그랬을 거야.
―그래서 싫었겠구나. 그때는.
―그런 셈이지. ‘왜, 사루비아란 이름이 있는데’, 그런 생각을 했지만 그냥 모른 척 했어. 그 무렵은 뭔가를 따지거나, 생각을 많이 할 때가 아니었거든. 그저 느낌으로 온 세상을 안아보려고 안간힘을 썼을 때니깐. 내 모든 감각이 세상을 향해 무한대로 열렸던. 이해하겠어?
―그래. 이해해. 나도 느낌이 중요했으니까. 그때 이야기가 듣고 싶어. 나에게도 어떤 기억은 필요하니까. 혹시 말이야, 네 기억을 듣게 된다면 나도 기억하고 싶은 어떤 것을 끌어 낼 수도 있을 테니까. 가령 따뜻해서 잊고 싶지 않은······. 기억이 없다는 것은 말이야, 꿈이 없다는 것과 같아. 미래가 없다는 말이지. 기억과 꿈이란 살아있다는 증거잖아. 난 그게 필요해. 과거가 없는 미래란 불가능해.
난 조금 우쭐한 기분으로 두서없이 떠들었다.
―뭐, 그렇게 까지 심각해질 필요가? 내 기억이 네 기억을 끌어낼 수 있을 지 어떨지 모른지만 암튼 계속할게. 10살 무렵 한 여름이었어. 할머니의 장례식. 사람들이 나를 보며 혀를 찼어. 불쌍하다고 했던 것 같아. 사실 내 기분은 그랬어. 슬픔 같은 것이라기보다는 두려움 같은 거였지. 어쩜 옆집 경숙언니처럼 고아원 같은 곳에 보내질지도 모른다는. 이해해?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는 그 기분? 그건 자세히 설명할 수 없어. 느껴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이거든.
―충분히 이해해. 나도 누군가에게서 떨어져 나왔을 때 그런 기분이었어.
―그랬구나. 한 번도 네 기분은 어떨까 생각해보지 못했어. 자신 속에 갇혀있다 보면 늘 그래. 내 삶의 방식이 조금은 부끄럽기도 하고.
―뭐가 부끄러워? 네가 누군가에게 악의적인 행동을 했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그렇게 말해주어서 고마워. 난 부끄러움이 많았어. 하여 늘 구석에서 지냈던 것은 아니었을까? 되도록 남들의 시선을 피해.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난 그 점이 항상 안타까워. 넌 좀 뻔뻔해질 필요가 있어.
―글쎄. 성격이니까. 한 번 고정된 것들은 쉬 바꾸질 못해. 막말로 죽을 때까지 안고 가는 거지.
―너무 비관적이다.
―할 수 없어. 그것이 나니깐. 암튼 '가자' 피곤에 지친 표정으로 기억도 없는 엄마가 손을 끌었을 때, 할머니를 잃은 슬픔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어. 안도감이었지. 장례식 내내 두려움으로 긴장되었던 마음이 일시에 풀렸어. 승용차 뒷좌석에 앉아 마지막으로 떠날 곳을 뒤돌아봤지. 막 바다위에 해가 지고 있었어. 거대한 붉은 빛의 용 한 마리가 활활 타는 여의주를 삼키듯, 붉은 해가 꼴깍 바다 속으로 침몰했지. 온통 사방이 붉었고. 내 가슴에도 화인이 찍히듯 뜨거웠어. 순간 누군가에 의해 내 세상이 강제 종료 당한기분이랄까. 이상했어. 분명 안도감이었는데 내 무의식의 저편에는 어쩜 안도감보다 더한 두려움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그때의 강렬함이 아직도 선연해.
―이해하기 힘들어.
―굳이 모든 것을 이해할 필요는 없어. 느낌인 거야. 설명할 수 없어도 느끼는 것으로 충분해.
―그렇담, 나도 느끼도록 노력해볼게.
―그렇게 하던가. 암튼 그제의 그곳은 달랐어. 아참, 그제, 병원에 들렀다 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그곳에 다녀왔어. 그냥 이상스럽게 거길 가고 싶더라. 날씨 탓이었을까? 변한 환경 탓이었을까? 아니면 내가 변한 것일까? 간척지 조성으로 더 바다는 깊숙이 밀려 나갔고, 바다였던 갯벌엔 보라색 들꽃들과 갈대들이 무성했어. 마치 영혼이 모두 빠져나간 폐선처럼. 석양은 더 이상 붉지 않았고 사람의 흔적도 없었지. 가만 할머니를 불러봤어. 낯선 이방인에게 대답하지 않겠다는 듯 바다는 잠잠했어. 저 밑에서 뭉실뭉실 어떤 기분이 몰려 나왔어.
―슬펐어?
―글쎄, 딱히 슬픔과는 다른 느낌. 알잖아.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을 때였으니까. 엄마가 없었어도 충분했었던. 아니 할머니가 엄마였으니까. 일종의 그리움이 아니었을까.
불현듯 사루비아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돌발 행동은 사루비아의 특기였다.
―엄마가 섬 그늘에······.
저절로 흘러나오는 콧노래는 ‘섬집아기’였다. 섬집아기를 들으며 잠들었을 무렵은 사루비아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고 사루비아는 늘 나에게 말했다. 필경 엄마의 목소리였을 것이다. 하지만 기억나는 것은 할머니 목소리뿐이라고. 열 살 이전의 기억. 그런 까닭일까? 섬집아기를 부를 때면 사루비아의 주변은 온통 갯내와 시큼한 막걸리 냄새가 넘쳐났다. 할머니가 선창가에서 막걸리를 팔았다고 했다. 갯내와 막걸리 냄새가 가져다 준 분홍빛 꿈. 꿈이란 늘 사루비아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고 했다. 분홍빛 물이 오른 아기에게서 풍겨오는 냄새와 연관되는, 영영 이룰 수 없을 꿈이라니 ······.
사루비아의 흥분된 표정이 금세 어두워졌다.
―내 꿈들은 그랬어. 엄마의 집으로 들어갔을 때부터 무너지기 시작했지. 한 마디로 엄마의 나이 많은 남자는 성도착증 환자였어. 나와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들은 그를 그저 일본문학에 정통한 대학교수라고만 알고 있었지만. 엄마는 애완견처럼 그에게 꼬리를 살랑거렸지. 노예처럼 수발을 들었고, 때론 흠씬 두들겨 맞기도 했지. 그가 나를 만지기 시작했다는 것도 엄마는 몰랐어. 난 엄마가 더 이상 불행해지길 원하지 않았으니까.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난 아기를 가졌어. 자신의 뱃속에 아기가 들어있다는 것도 모를 나이였어. 엄마의 손에 끌려 수술을 당했고. 난 엄마의 불행이 꼭 나 때문인 것만 같았어. 내가 사라지면 엄마도 다소 나아질 것이라는 바람 같은 것. 그 이후로 엄마의 집을 나왔어.
온갖 알바를 하면서도 난 꿈을 잃지 않으려 고등학교에 진학했지. 고등학교 내내 학교와 알바를 병행했어. 물론 나이가 있었던지라 쉽지 않았지만, 몸이 컸던 관계로 고등학생이었다는 것을 처음엔 들키지 않았지.
나는 사루비아의 담담한 얼굴을 쳐다보았을 뿐, 신들린 듯 사루비아는 계속했다. ―그 일이 일어났어. 크리스마스 날이었지. 그때 저녁까지 식당 알바를 끝내고 새벽녘 편의점 알바를 할 때 난 겁탈을 당했어. 술에 취했는지, 약에 취했는지, 내 또래의 남자가 들어와서 담배를 찼더니만. 난 또 임신을 했지. 두 번째 임신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스스로 병원을 찾아가서 아이를 죽였어.
나는 가슴이 답답해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럼에도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아주 가끔이었지만 나는 사루비아가 말하는 방식, 가령 끔찍한 이야기를 할 때조차도 무표정한, 섬뜩할 정도의 이상한 웃음 따위가 싫을 때도 있었다. 예상치 못한 뜻밖의 말들을 내 뱉을 땐 혼동되기도 했다. 수시로 돌변하는 날씨처럼 그녀의 감정은 기복이 심했다. 뭐랄까, 지킬과 하이드의 양면성을 숨기고 있다가 부지불식간에 정체를 드러내곤 하는.
―딱히 재주가 없었던 탓에 나는 늘 공단주변을 맴돌았어. 어쩌면 사람들의 시선을 가장 적게 받는 일을 택하고 싶었던 까닭이었을 거야. 생각보다 일자리는 많았지. 회사를 옮기면서 형성된 인맥정도라면 밥벌이를 할 만큼의 일자리는 충분해.
일곱 번째 공장에서 X를 만났어. X는 말이 없는 편이었어. 나와 다른 점이 있다면 가끔씩 내가 실수를 한다는 것이고. 반면 X는 모든 면에서 정확했어. 그의 별명은 ‘줄자’였지.
일 년에 한 번 뿐이었던 회식자리였어. 사장을 포함한 십 여 명의 회동은 모처럼만에 훈훈한 분위기를 연출했지. 직원들끼리라도 생일을 찾아주자고 자신의 생일을 일주일 앞둔 미스 고가 술주정처럼 떠벌리던 날, 몇몇은 상기된 표정으로 날짜를 세었고, 취한 미스 고는 스마트폰으로 열심히 숫자를 받아 적었어. 실현될지 여전히 의문이었지만 또 기대심이 팽배한 것도 사실이었지. 쭈뼛거리며 생일을 말하던 X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해.
사루비아는 그녀의 남자를 X라고 불렀다. 사루비아가 하던 말을 멈추고 혼자만의 생각에 잠겼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해?
나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보라색 불루베리 케이크라면 좋겠지.
세상이라도 무너뜨릴 듯, 깊은 한숨을 쉬며 사루비아는 동문서답을 했다.
―글쎄? 취향문제니깐.
―난 말이야, 케이크 위에 꽂힌 촛불을 불면 꼭 소원이 이루어질 것 같아.
―미신이야.
―미신이라도 괜찮아. 오늘 나는 촛불에 소원을 빌어 볼 거야.
―무슨?
―응. 지금까지의 모든 고통을 잊을래. 그리고 새로 시작하려고.
나는 사루비아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아이를 가졌고 아이의 아빠와 잘 해보겠다는 것이리라. 사루비아가 말하던 오후 네 시라는 그림 속 부부처럼. 오직 하나뿐인 꿈을 이루게 해달라는 소원을 비는 촛불의식을 가져보려는 그녀의 마음을 어찌 모르겠는가?
―그냥 그렇게 믿고 싶으니깐. 한 번도 누구랑 함께 촛불을 불어본적이 없었어. 오늘은 스파클링 와인도 준비했거든.
―별거 다 했네.
―응. 와인 같은 것을 사본 적은 없어. 근데 꼭 영화 속 근사한 장면을 따라해 보고 싶었거든. 하여 인터넷에서 추천된 와인을 사본거야.
도대체 사루비아의 횡설수설을 나는 따라가기 힘들었다. 케이크도 이미 사 왔고 나는 사는 것 또한 지켜보았는데.
―묻지도 않았는데 X가 말했어. ‘마지막 직장이었으면’ 라고.
사루비아가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마치 안 해본 일이 없다는 듯이. 새로운 일터란 이곳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고 선언이라도 하듯. 얼마 후에 알았지. 그가 감옥을 들락거렸다는 것을. 그의 아버지가 어린 시절부터 그를 폭행했으며 그 후론 줄곤······. 믿기진 않았지만 그가 아버지를 죽였다는 소문조차 돌았어. 그것도 열일곱이었을 때. 그곳은 X의 먼 친척이 운영하던 공장이어서 그나마.
‘왜 그렇게 살아요?’ 회식 날, 점점 취해가던 미스 고가 참아 왔다는 듯 내게 물었어. 사람들은 놀라, 미스 고와 내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지. 내 얼굴은 홍당무가 되고 있었지. 딱히 미스 고의 도전적인 질문 때문만은 아니었어. 오랜만에 마신 소주 때문이기 했고, 정확히 말하면 X의 눈빛 때문이었지. 상대의 모든 것을 담고 싶어 하는. ‘꼼짝 마, 그대로 있어. 함께 있어야 해.’ 라고 갈구하는. 절대 저항할 수 없는 그 무엇. ‘언니는 시집도 안가고 그 나이에 이런 곳에서 일하고 싶어요? 혹시 돌싱, 아니면 누군가의 내연녀?’ 누군가 쿡쿡거렸지. 재미있어 죽어도 좋다는 웃음이었어. 하지만 난 웃음도 화도 나지 않았어. 얼마간은 나도 내 자신에게 묻고 싶었던 말이었으므로.
제법 조리 있게 미스 고는 또 한 번 물었지. 피해갈 수 없었어. ‘나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어서.’ 당황한 나는 대답 같지 않은 대답을 했어. 내 얼굴은 달궈진 석쇠처럼 뜨겁더라. 미스 고는 피식 웃더니 그대로 상에 고꾸라졌어. ‘나에게서 자신의 미래를 보았다고. 답답해 죽을 것 같다고.’ 미스 고는 며칠 후 사과를 해왔지.
‘아직도 그걸 몰라요?’ 좀체 나서지 않던 X가 술김에 뱉은 말이었어. ‘사루비아씨 주변에 있으면 따뜻해져요.’ X의 말은 그랬어. 그때 X의 눈빛은 너무 깊었어. 농담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만큼. 내가 누군가를 따뜻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처음으로 깨달은 날이었어. 그저 술주정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그 의미는 너무 컸던 셈이야. 회식자리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나와 X를 번갈아 바라보았지.
시간이 흐르는 사이 일행은 곧 취해갔고 그들 위에 삶의 고단함이 폭설처럼 내렸어. 일행을 뒤로 한 채 나는 슬며시 빠져나왔지. 어느 결에 X가 내 옆에 있었어. 침묵한 체 하염없이 걸었지. 걷다보니 어느 새 풀풀 눈발이 날렸고, 예정된 폭설처럼. 그렇게 우리의 사랑은 시작된 셈이야. 누군가 ‘사랑은 어떻게 시작될까요?’ 묻는 다면 이렇게 대답하겠어. 나도 모르던 내 좋은 점을 알려 주는 사람을 만났을 때라고. 그리고 꼭 상대의 눈을 깊게 응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상대의 눈빛을 충분히 받아 낼 수 있는 지점에서 사랑은 비로소 시작할 것이라고. 나는 그날부터 X를 용서하기로 했지.
사루비아의 끝날 줄 모르는 이야기에 나는 약간 졸렸다. 그를 용서하기로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궁금증이 일었지만 귀찮아 참았다. 사루비아는 점점 열에 달뜬 얼굴로 변해갔다.
그때였다. 사루비아가 기다리던 X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오늘도 여느 날처럼 비틀거렸다. 나도 긴장했지만 사루비아의 얼굴은 거의 시뻘게졌다. 사루비아는 서둘러 가장 예쁜 원피스로 갈아입었다. 겨울이건만 사루비아가 찾아낸 원피스는 가을바람에 살랑일 것 같은 쉬폰 원피스였다.
―쿵쿵
X가 늘 하던 것처럼 문을 걷어찼다. 나는 겁이 나 도망치려했다.
―증인이 돼 준다고 했잖아.
사루비아의 간절한 눈빛이 나를 붙들었다. 사루비아는 재빨리 불을 껐다. 한쪽 구석에 제켜있던 이불을 나에게 던졌다. 이불속에 숨어 있으라는 말이었다. 나는 떨렸지만 사루비아와의 약속을 지켜야했다. 어쨌든 사루비아가 내 생명의 은인이기도 했으니.
X는 발로 문을 걷어차더니 비틀거리면서도 용케 방문을 찾아 열었다. 썩은 술 냄새가 일시에 방안으로 밀려들었다. 사루비아는 재빨리 케이크의 촛불을 켰다. X가 잠시 뻘쭉한 표정으로 방안을 응시했다. 뭔가 생각해내려 애쓰는 눈치였다.
―X년.
문가에 선 체 X는 퉤퉤 가래침을 모으더니 사루비아를 향해 뱉었다. 문을 다시 닫더니 홱 밖으로 나갔다. 그 바람에 케이크의 불들이 다시 꺼지고 어둠이 내렸다. 어둠 속에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튀긴 가래침을 닦아내는 사루비아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밖에선 요란하게 오줌을 갈기고 있는 X의 소리가 들렸다. 옷을 추기는 소리가 나더니 X는 휘청거리며 안을 향하는 눈치였다. 나는 숨통이 조여들 것 같아 더 이상 그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았다.
사루비아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케이크의 촛불에 다시 불을 붙였다. 도망치려는 나를 눈치 챈 사루비아가 말했다.
―제발, 부탁이야.
뭘 부탁한다는 것인지, 도통 모르겠어서 나도 잠시 혼동이 왔다. 증인이 되어 달라는 말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묻지 않은 걸 후회했다. 다시 물을 수 없었다. 나는 그냥 이불 속에 있어야했다.
―X년, XX년, XXX년, 또라이.
점점 거친 욕설을 퍼부으며 X가 방문을 부수기라도 할 듯 낚아챘다. 이미 몇 번 부서졌던 것을 겨우 못 몇 개로 붙여놓은 방문은 힘없이 나뒹굴었다. 일시에 한기가 방안으로 몰려왔다. 다시 케이크의 촛불이 힘없이 꺼졌다.
여전히 사루비아는 어둠 속에 서 있었다. 저승사자처럼 보였다. 몰려든 바람이 사루비아의 쉬폰 원피스를 휘감았다.
―지랄 떨지 말고 불, 불.
X가 소리를 질렀다. 딴은 이해할 수 있었다. X는 어둠을 싫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어두운 곳을 떠나지 못하는 것은 사루비아 때문일까? 호기심도 들었지만 물은 적은 없었다.
사루비아가 서서히 움직이며 스위치를 찾는 눈치였다.
―와장창.
방안에 들어 선 X가 사루비아가 차려 놓은 상을 걷어찼다. 어둠 속인데도 불구하고, 술에 취해 비틀거렸음에도 불구하고, 조준은 정확했던지 넘어진 테이블은 곧바로 사루비아가 아끼던 오후 네 시라는 액자를 부쉈다. 액자와 유리잔과 접시가 한데 어울려 깨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사루비아가 불을 켰다. X가 씩씩거리며 서 있었다. 사루비아는 늘 그래왔던 것처럼 잠시 X의 얼굴을 응시했다. X는 술김에도 사태를 파악했는지 나뒹굴던 테이블을 다시 집어 들었다. 순간 테이블이 사루비아의 몸을 향해 날아갔다.
사루비아가 피할 틈도 없었다. X가 던진 테이블이 정확히 사루비아의 배를 때리며 떨어졌다. 순간 사루비아가 배를 움켜쥐며 주저앉았다. 와작, 깨진 유리와 접시들 위로 테이블이 격파되었다. 바람이 주저앉은 사루비아의 원피스를 휘감았다. 사루비아의 매끈한 다리가 그대로 드러났다. 허벅지를 타고 피가 흘렀다.
―저, 등신.
X가 참혹하게 웃었다.
―말했지. 때릴 기세가 보일 때는 도망치라고. 병신이냐? 미친.
X가 울분에 못 이겨 찢어지듯 절규했다.
―오늘 생일이잖아요. 그리고······.
사루비아가 말끝을 흐렸다.
―뭐라고? 누가 그랬어. 이 미친, X년.
사루비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난, 애미도 애비도 없어.
X는 다시 한 번 부서진 테이블을 들어 방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불루베리 케이크가 사방으로 흩어졌고 스테이크 고기와 야채 조각들이 온 방안으로 튀었다.
―난 괴물이야. 난 살인자라고. 널 죽일 수도 있지.
X는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금방이라도 사루비아에게 달려들 기세였다. X는 여느 날과 달랐다. 뭐랄까, 다른 날보다 더 살기가 등등했다.
―오늘이 말이야. 오늘이 말이야. 무슨 날이냐고? 이 괴물이, 지 애비를 죽인 살인자가 태어난 날이라고?
미친 듯이 X는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사루비아는 그저 표정 없이 X를 바라볼 뿐이었다. X는 분에 못 이기는 표정으로 엎질러놓은 음식물 위를 밟고 사루비아에게 다가갔다. 금방 목이라도 졸라 죽일 듯 씩씩거렸다. 허벅지와 장딴지를 타고 흘러내리던 피가 바닥을 적실 정도였지만 사루비아는 여전히 침착하게 앉아 있었다.
X가 바짝 다가앉았을 때 사루비아가 기다렸다는 듯 X를 밀쳤다. 순식간에 온 힘을 다해 이를 악물며 시뻘개 진 얼굴로. X는 그대로 방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사루비아의 손이 떨렸다. X의 발에서도 피가 보였다.
―물.
엎드린 채 X가 물을 외쳤다. 사루비아는 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어섰다. 쉬폰 원피스가 피에 젖어 있었다. 사루비아는 나갔다가 대접에 물을 가져왔다. X가 물을 마셨다. 사루비아가 가만 X의 옆으로 앉았다. 물을 마시는 X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물을 다 마신 X가 캑캑거렸다. X의 입에서 거품이 몽실몽실 새어 나왔다. X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X가 몸을 뒤척였다. 달그락, 뿌지직. X의 몸 밑에서 접시와 유리의 파편들이 찌그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 누구야.
사루비아가 침착하게 X를 향해 물었다. 여전히 표정이 없는 얼굴이었다.
―미친개, 잡년
X가 배를 움켜잡으며 일어서려고 했다. 사루비아는 베개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일어서려던 X의 몸을 베개로 밀었다. X는 그대로 뒤뚱거렸다. 그 틈에 사루비아는 X의 몸에 올라타 베개로 X의 입과 코를 막았다. X의 얼굴에 공포의 그림자가 스쳤다.
―1999년 12월 25일 새벽 2시 33분. 나룡동 33번지 에프엠 편의점.
사루비아는 낮은 목소리로 최대한 천천히, 또렷하게 말했다. 사루비아는 자신의 음부 가까운 곳의 선명한 흉터를 X에게 보여주었다. 담뱃불로 지진 흉터 같았다. X의 겁에 질린 얼굴이 사루비아를 올려다보았다. 사루비아가 희미하게 웃었다. X는 뭔가 말하고 싶은지 손을 버둥거렸다. 사루비아는 X를 누르고 있던 베개에 서서히 힘을 실어 눌렀다. X는 반항하지 않았다. 체념의 빛이 X의 얼굴에 서렸다. 사루비아의 온 얼굴이 땀으로 번뜩였다. 칼바람이 사루비아의 쉬폰 원피스를 사정없이 휘몰아 감았다. 피비린내가 점점 방안의 공기를 압도해갔다.
나는 잠시도 사루비아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사루비아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사루비아가 왜 증묘가 필요했는지 그제야 짐작 할 수 있었다.
―인생은 늘 예기치 않은 일로 가득 차 있지. 난 더 이상 우연에 나를 맡기지 않겠어. 부끄러워 숨지도 않겠어.
사루비아가 어제 힘겹게 계단을 오르며 나에게 했던 말이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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