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 te veux 에릭 사티 / 난 널 원해
Eric Satie 1866-1925
에릭 사티와 쉬잔 발라동 30년 뒤에야 배달된 러브레터 _ 글: 소설가 조경란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인 에릭 사티가 예술가로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그가 죽은 지 38년 만이다. 에릭 사티를 죽을 때까지 따라다닌 것은 가난과 독신이었다. 그는 평생 ‘무슈 르 포브르’ 즉, ‘가난뱅이 씨’라고 불릴 만큼 가난했으며 단 한 번의 연애를 끝으로 독신으로 살았다. 묻혀 있던 그를 다시 발견한 것은 프랑스 영화감독 루이 말이었다. 1963년, 루이 말 감독은 자신의 영화 <도깨비불>의 영화음악으로 사티의 피아노곡을 사용했다. 영화가 개봉되자 ‘정신이 아찔해질 만큼 아름다운 이 음악은 대체 누가 작곡한 거지? 뭐? 사티라고? 도대체 그가 누구야?’ 하며 전 세계가 깜짝 놀랐다.
마치 두껍고 푹신한 카펫이 깔려 있는 계단을 올라가듯 툭툭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 <짐노페디>나 <그노시엔>. 큰 소리로 외치는 게 아니라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피아노 소리. 에릭 사티의 음악을 글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파리 몽마르트르로 이사 온 시골 청년 사티는 술집에서 피아노를 치며 곤궁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술집에서 처음 쉬잔 발라동을 보았을 때, 그녀는 그 당시 이미 유명했던 화가 툴루즈 로트레크와 춤을 추고 있었다. 그때 사티는 절대로 겁먹을 것 같지 않은 야생의 냄새를 풍기는 그녀를 보며 ‘섣불리 손댔다가는 깨물릴 것 같군’ 하는 생각을 한다. 쉬잔 역시 로트레크의 어깨 너머로 사티를 눈여겨보고 있었지만 그들이 다시 만난 건 2년 뒤의 일이다. 그가 한평생 사랑했던 여자, 쉬잔 발라동. 화가 툴루즈 로트레크와 르누아르, 퓌비 드 샤반의 모델이며 그들의 연인이기도 했던 쉬잔. 사티는 그녀를 사랑했다.
툴루즈 로트레크 - 압생트를 마주한 쉬잔 발라동(Gueule de bois), 1887, 툴루즈 로트레크 미술관
사티는 어머니를 사랑했다. 그 둘의 모습은 거울처럼 닮아 있었다. 사티가 몽마르트르에서 만나 우정을 나누었던 소년 위트릴로는 쉬잔이 열여덟 살 때 낳은 사생아다. 사티가 쉬잔과 사귈 때, 사티의 집 문 앞에다 사티가 좋아하던 떠돌이 개를 죽여 상자에 담아 놓아두었던 소년. 그러나 먼 훗날, 부자와 결혼을 앞둔 쉬잔을 두고 사티가 몽마르트르를 떠나려고 할 때 함께 가게 해 달라며 사티에게 매달렸던 소년. 그 소년이 훗날 ‘몽마르트르의 화가’라고 불렸던, 몽마르트르에서 살고 몽마르트르에서 죽은 화가 위트릴로이다.
그는 어머니 쉬잔을 사랑했지만 쉬잔은 평생 그를 냉대했다. 그러나 위트릴로에게 그림을 가르치기 시작한 사람은 바로 그녀였다. 위트릴로는 어머니 쉬잔을 사랑했고, 쉬잔은 사티를 사랑했고, 사티는 일곱 살 때 죽은 어머니를 사랑했다. 사티와 쉬잔이 헤어진 건 어머니 때문이다. ▶르누아르의 그림 속에 나오는 쉬잔(Danse à Bougival, Suzanne Valadon et Paul Lhote), 1883, 보스턴미술관
르누아르의 모델을 하면서 그의 그림을 흉내 내기 시작하며 화가의 꿈을 키워 가던 쉬잔은 사티에게 모델이 되어 줄 것을 부탁한다. 그들의 동거는 반년 동안 지속된다. 어느 날 쉬잔과 사랑을 나누고 있던 사티는 맞은편 거울 속에서 벌거벗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게 된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벌거벗은 쉬잔이 “당신, 갑자기 왜 그래요?”라며 묻는다. 그날 이후로 사티는 쉬잔과 육체적인 사랑을 나눌 수 없게 되었다. 사티의 초상화를 완성한 쉬잔이 슬픈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이걸 그릴 때 내 몸과 마음이 참 이상한 느낌이 들었어요. 어쩐지 이건 내가 그린 게 아니라, 내 몸 속에 들어온 당신 어머니가 그린 것 같아요.”
헤어지고 두 달 뒤 사티는 쉬잔에게 편지를 쓴다. ‘나는 어머니를 사랑했소. 그러나 나는 당신을 사랑했소. 이 사랑은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이오.’ 그 뒤 사티는 애달프고 슬픈 음악들을 계속 작곡하였지만 한동안 압생트라는 독한 술에 빠져 살았다. 쉬잔은 그녀의 소망대로 프랑스의 표현주의 화가로 성공했다. 사티는 59세에 죽었다. 그가 죽은 뒤 아르크에 있던 그의 방에서 부치지 않은 편지 한 묶음이 발견되었다. 수신인은 모두 쉬잔 발라동이었다. 그리고 한 장의 사진이 있었다.
쉬잔과 그의 아들 위트릴로와 개 한 마리가 나란히 있는. 그리고 뒷면에는 ‘사랑스러운 쉬잔 발라동의 사진’이라는 사티의 고딕 필체가 남아 있는. 이 사진 속에 사티는 보이지 않는다. 사티가 죽은 뒤 이 사진을 건네받은 쉬잔이 개 줄을 쥐고 있던 맨 왼쪽 사티의 모습을 도려낸 것이다. 30여 년 세월이 흐른 뒤에야 겨우 배달된 사티의 편지를 받은, 61세의 유명인사 쉬잔은 이렇게 고백한다. “솟아나는 추억은 괴롭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지만….” 그 말줄임표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그 숨겨진 의미 때문에 쉬잔은 사진 속 사티의 모습을 도려내 버렸던 것일까. 쉬잔을 떠올리며 작곡할 때, 사티는 생각했다. 쉬잔을 육체적으로는 소유할 수 없었지만 예술적으로는 가질 수 있다, 라고.
결국 쉬잔에 대한 사티의 예술적 소유는 지금 우리가 함께 나눌 수 있는 사티의 음악, 즉 예술로 승화한 것이다. 단 한 번의 연애. 사티가 쉬잔을 만난 건 그의 나이 스물일곱 살 때였다.
에릭 사티 Eric Satie 시대를 앞서간 기발한 상상력
프랑스 노르망디의 옹폴뢰르에서 태어났으며,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고독을 내면화하며 매사에 고분고분하지 않은 까탈스런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의 기벽과 독특한 삶은 남다른 상상력의 산물이다. 펠트 모자를 쓴 채 염소 염을 기르고 코안경을 쓴 그의 모습을 담은 사진은 지금 봐도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다. 그의 경박하고 괴상한 차림과 거침없고 익살스러운 행동들은 동료 음악가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당대의 음악가들은 사티의 뒤에서 수군거렸는데, 보통은 사티가 사기꾼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어릿광대의 모습을 하고 과도한 음주로 비틀거리며 몽마르트 거리를 활보하는 사티의 모습은 시대에서 튕겨져 나온 반항아, 이단자의 모습이다. 사티는 파리음악원에서 피아노와 화성학과 솔페지오를 배웠지만 규율의 엄격함을 견뎌내지 못했다. 국가가 규범의 총체를 발명해내는 곳이라면, 학교는 그것을 유포하고 개인의 의식에 덧씌우는 기관이다. 사티는 음악원 공부 대신에 국립도서관을 다니며 플로베르의 소설을 읽거나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의 책들을 읽고 탐구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마침내 사티는 파리음악원에서 뛰쳐나와 자유를 찾아 보병으로 군대에 들어가는데, 거기 역시 음습한 감옥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군대에서 패충열이라는 병을 얻어 제대한 뒤 사티는 파리 몽마르트에 있는 카바레 ‘검은고양이’에서 피아노를 치며 생계를 꾸린다. 사티는 나중에 카페 ‘오베르주 뒤 클루’로 옮겼는데, 여기서 자기보다 네 살 위인 드뷔시를 만나고 오랫동안 교유를 이어갔다. 두 사람의 음악적 경향은 달랐지만 오랫동안 친하게 지냈다. 사티는 자주 점심을 먹으러 드뷔시의 집을 찾아가곤 했다. 1898년부터 파리 근교의 빈민가에 있는 아르쾨유의 한 아파트에서 오래 숨어 지내는 생활을 했다. 아무도 사티의 아파트를 가본 사람이 없다. 염세주의자이자 우울증 환자였던 사티는 아무도 아파트에 들이지 않고 혼자 가난과 고립의 운명을 벗 삼아 살아갔다. 사티는 “삶은 내게는 너무나 견딜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내 영지 속에 은둔해 살기로 결심했다”라고 말했다. 창문조차 봉쇄해 외부자의 시선을 차단한 그 아파트에서 사티는 무려 27년간을 은둔하며 살았다.
Ramon Casas가 그린 에릭 사티, 1891.
사티의 사후에 비로소 그 아파트가 공개됐는데, 고장 난 피아노 뚜껑 밑에 쓰레기들이 은닉되어 있었고, 집안은 온통 몇 년 동안 그가 쓰고 버린 물건들로 어질러져 있었다. 그 더럽고 누추한 아파트 내부의 광경을 보고 사람들은 경악했다. 모든 창의적인 예술가들이 그러하듯이 사티도 음악에서의 전통적 형식이나 조성 구조조차 버리고 독창적인 제 길을 걸어갔다. 악보에는 통상적인 연주 기호 대신에 ‘중병에 걸리듯이’ ‘계란처럼 가볍게, ‘이가 아픈 꾀꼬리 같이’와 같은 알쏭달쏭한 말들을 써놓곤 했다. 1차 세계대전 초기에 만난 장 콕토는 사티 음악의 숭배자가 되었다. 장 콕토는 사티의 음악을 두고 “군더더기 없이 쇄신된 건강하고 새로운 음악”이라고 찬사를 보냈지만, 청중들은 당대의 평균적 감각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난삽한 사티 음악에 야유와 욕설을 보내면서 모독을 서슴지 않았다. 사티는 59세가 되던 해인 1925년에 성 요셉병원에서, 아내도 없고 아이도 없이 고독한 삶을 끝냈다. 에릭 사티는 죽고 난 뒤, 세월이 많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현대음악을 연 천재적인 작곡가 반열에 올랐다. 빈센트 반 고흐가 그랬고, 프리드리히 니체가 그랬듯이 사티의 가치는 뒤늦게 재발견되었던 것이다. 묻혀 있던 그를 다시 발견한 것은 프랑스 영화감독 루이 말이었다. 1963년, 루이 말 감독은 자신의 영화 <도깨비불>의 영화음악으로 사티의 피아노곡을 사용했다. 영화가 개봉되자 ‘정신이 아찔해질 만큼 아름다운 이 음악은 대체 누가 작곡한 거지? 뭐? 사티라고? 도대체 그가 누구야?’ 하며 전 세계가 깜짝 놀랐다. 마치 두껍고 푹신한 카펫이 깔려 있는 계단을 올라가듯 툭툭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 큰 소리로 외치는 게 아니라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피아노 소리. 에릭 사티의 음악을 글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사티는 그 기발한 상상력과 창의력으로 시대를 앞지르며, 뒤에 올 스트라빈스키나 존 케이지의 길을 먼저 열어갔다. 나는 이 낮고 낮은 땅에 왜 왔을까. 즐기기 위해서? 형벌로? 무언가 알 수 없는 임무를 띠고? 휴식 삼아? 아니면 그냥 우연히? 나는 갓난아이 때부터 내가 작곡한 음들을 흥얼거리고 노래 불렀지. 그래, 내 모든 불행은 거기서 시작된 거야... _ 에릭 사티의 <일기> 중에서(영화 <사티와 쉬잔>의 마지막 대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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