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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소원 하나 - 日常茶飯事 76 탄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13. 6. 26.

 

 

 

  방 두 칸과 마루가 없어 바로 마당으로 나서게 되었던 낮고 초라한 움막과 같았던 내 옛집이 기억난다. 마당엔 복날의 희생양이 될, 옆집에서 남은 밥들을 거둬 먹이던 똥개 두 마리와 온종일 무엇인가를 쪼아대는 몇 마리 닭새끼들의 검고 흰 닭똥냄새가 진동하던 그런 집 말이다. 노래기와 지네와 이름 모를 벌레들에 대한 공포로 뒤척였던 어린 시절을 보냈던 나는 늘, 옆 옆집에 우리집 마당만한 꽃밭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봄부터 가을까지 이름 모를 꽃들이 마치 잔치를 하는 양, 헤벌쭉 하늘을 향해, 또 어느 날인가는 나를 향해, 늘 웃고 있었다. 나는 이유모를 어떤 쓸쓸함이 몰려올 때, 심심하거나 심지어 무엇인가에 화가 나 있거나 슬픔이 또아리를 풀고 일어설때  꽃밭 앞에 쪼그리고 앉아 이름도 모를 꽃들과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럴라치면 알록달록 치장을 한  꽃들은 마치 내 이야기를 알아들은 양,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았다.  괜스레 알은체를 하느라고 그랬는지, 또 날아다니는 벌이나 나비의 꼬임에 응수하느라 그랬는지 바람이 없는 날에도 여전히 그들의 살랑거리던 품새들을 마주칠라치면 나도 그들 세계의 일원이 되어 그들과 함께 살랑거렸다.

  어쩜 그때 나는 꽃들과 연애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가장 끌렸던 꽃은 빨간 칸나였다. 왠지 이국적인 모습과 훤칠하게 큰 키의 날렵한 몸매, 진빨강 색의 꽃잎들이 하늘을 향해 저돌적으로 솟아있었던 그 모습이 어쩜 나의 이상형이었는지도. 그때는 어렸으므로 섹시하다는 말을 상상도 못했겠지만 이제야 말이지만 참으로 섹시한 매력이 돋보였던 꽃이었다.

  어느 날 인가는 얄포름했던 칸나 꽃잎을 따서 그 촉감을 느껴보니 부드럽기가 기억도 잘 나지 않던 엄마 가슴팍 그것이었다. 늘 동생들에게 밀려 잘  기억도 나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엄마의 젓을 물고 그 가슴팍을 맘껏 휘저었던 내 신생아적의  무의식은 결코 그때의 촉감을 잊지 않았으리.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빽빽 거리는 동생들을 피해 조용한 혼자만의 어떤 곳이 필요했을 때, 쪽 찐 머리에 언제나 단정한 옷매무새를 하고 다정하게 말을 걸어오던 꽃밭주인의 집으로 나는 몰래  숨어들었다. 찌를 듯 내질러대는 7월의 땡볕에도 굴하지 않고 꽃밭 가장자리에 앉아있노라면 오직 세상엔 나와 꽃들과 그 꽃들 사이를 들랑거리던 벌, 나비, 이름 모를 벌레의 세상에 불과했다. 세상의 적요가 중력으로 내려앉고 그 공간들 사이로 소통할 수 있는 것들이 있어 외롭지 않았다. 그때 내리쬐던 태양광선의 강렬함과 대비된 꽃의 색들, 초록, 빨강, 연두, 보라, 노랑, 하얀, 분홍의 세계는 가히 세상 그 어느 곳보다도 다채로운 상상의 공간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의 소원은 딱 하나였다. 우리 집 마당에도 꽃밭이 있었으면….

  그리고 정말 어느 날인가, 내 기억으로 초등학교 이 학년 아니면 삼 학년쯤엔 그 옆 옆집이 우리 집이 되었고 그 꽃밭은 나의 꽃밭이 되었다. 최초의 내 소원이 이루어지다니! 나는 꽃밭이 있는 집의 예쁜 공주, 아마도 신데렐라가 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꽃밭이 있었던 집엔 방이 세 칸이나 있었고 마루와 토방, 넓은 마당 한쪽의 꽃밭은 내 궁전이 되었다. 그 후 내 삶은 많은 질곡과 도랑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이제 다시 나는 내 꽃밭을 가지고 싶어졌다. 내 최초의 소원은  굽이굽이 세월을 건너 다시 메아리로 돌아왔다. 내 소원이 다시 이루어진다면 나는 내꽃밭, 내 궁전의 왕비로 군림하리라.  

  한쪽엔 보랏빛 수국을 심고 희고 빨간 달리아를 기억하자. 벽 쪽 가장자리로 연결된 대문에는 덩굴장미를 늘어뜨리고  그 앞쪽으론 나팔꽃씨를 뿌리겠다. 헛! 능소화 또한 잊지 말자. 물망초와 봉선화와 분꽃과 사루비아와 옥잠화, 보라빛 아이리스를 절대 빼먹을 순 없지. 백합과 수선화의 알뿌리를 묻고 맨 앞줄엔 채송화씨를 듬뿍 뿌리겠다. 마당엔 온갖 잡초들이 빼곡히 들어 찰 것이다. 어머 꽃밭 한 쪽엔 내 좋아하는 고수와 부추를 잊을 수없지. 헐, 그럼 애플민트와 바질과 로즈마리는 어떻하지? 메리골드와 데이지와 소국은? 그러나 빼꼼하게 들어찬 내 궁전의 좁은 면적을 탓하진 않으리.

  이른 잠을 깬 아침, 부석거리는 머리를 가지런히 묶고 수줍은 이슬을 가르며 보랏빛 수국이나 노란 장미 몇 송이를 꺽어 부엌 식탁, 고물 스피커 위는 물론이고 컴퓨터 옆, 화장실 거울 앞에도 꽂겠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어. 그때는 아마 오늘의 음악이 진공관 위 먼지를 깨울만큼의 볼륨으로 오늘의 음악이 흐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