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최후의 진화는 모두가 나르시스가 되는 것일 것이다. 타인이 지옥인 이유는 자기도취를 방해하고 훼손하기 때문이다. 타인을 예의 바르게 자신의 바깥에만 존재하게 하는 체제야말로 완벽한 평화와 아름다움을 가져다준다."
전경린을 읽으면 전율이 인다. 가슴이 뛰고 다음 장을 넘기고 싶은 섣부른 유혹을 제지하며 몇 번을 곱씹어 보게 된다. 내 나이의 여자가 어떻게 이리 인생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폐부를 찌르는 듯한 통찰력에 몽환적이기까지 한 글들을 구사할 수 있을까?
그녀가 말했다.
"넌, 진정한 나르시시스트야."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울리는 자긍심에 마치 내 비루한 일상이 한층 up 되는 듯한 묘한 기분에 휩싸이곤 한다. 어찌 보면 주변인들보다 조금은 내 욕망에 충실하고자 하며 분명한 자기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강단이 있기 때문이리라. 이 말을 들려주는 그녀의 눈은 반짝이며 나를 향한 미소엔 따뜻함이 곁들여져 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나마저도 진정 내가 나르시시스트의 고수가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하며 나른한 온기에 젖게 된다.
"그런 널 닮고 싶어. 아니 흉내라도 내 볼 참이야."
"고래, 그럼 흉내라도 내 보시던가. 난 네 흉내라도 내볼까. 있지, 사실 난 가끔 나 자신이 혼란스러워.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가끔은 내가 누군가에게 나를 양보해야 하는 순간에 말이야. 왜 나는 늘 나 자신이 모든 가치의 기준이 될까. 내가 싫으면 싫은 거고 너희처럼 싫어도 좋은 척 그런 것 못하겠더라. 하여 더러는 미안키도 해."
"지금에 와서야 하는 말이지만 그런 네가 처음엔 이상했어. 좀 양보도 하고 싫어도 모두가 좋다 하면 그냥 좀 참지. 넌 항상 네 맘대로였지. 하여 우리 중의 누군가는 그런 너 때문에 맘을 다치기도 했고, 나도 때론 그랬지. 근데 말이야. 이처럼 한 참의 시간이 흐르고 나니, 너의 본질에 대한 이해, 물론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시간에 의해 쌇여진 관계의 어느 지점에 이르는 지금은 있지, 그런 네가 오히려 좋아. 예측할 수 있고 또 분명한 의사를 알 수 있으므로 나도 나름 대처할 수가 있겠더라고. 담백한 네가 좋아."
"네가 언젠가 그런 말을 했어. 조금씩 양보하자고. 그때 난 진정으로 내가 부끄러웠어. 아무것도 양보하려 들지 않는 내가 말이야. 그것도 쉰도 넘은 여자가 말이야. 그런데도 불구하고 난 나를 바꿀 수가 없었어. 그리고 진정한 관계란 말이야. 장식이 필요없는 정확한 의사표현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신뢰가 구축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깊은 이해가 동반되며 어쩜 남아있는 인생 여정의 진정한 동반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고 기대하는 나는 아직도 꿈꾸는 이상주의자만은 아니었나 보다. 기뻐. 네가 날 인정해 줘서. 있지. 나도 때론 언제나 절충하려고 하는 너의 노력하는 자세를 보면서 나름 부럽기도 했고 나도 그렇게 해보고자 결심하던 시간도 있었어. 하지만 바뀌지는 않더라. 하여서 이제는 나를 양보한다는 것이 아니라 같이 나아가고 싶단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나를 발견해. 이런 변화가 너에게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돼. 내 인생의 진정한 스승은 바로 "너"야."
전경린에 취한 밤, 그야말로 완벽하게 자신의 바깥에 타인을 존재케 함으로써 나 자신의 내부로 틈입할 수 없는 자족적인 삶이 가져다주는 고독을 거론하며 익어가는 와인의 향기와 관계의 꿈에 젖어드는 밤, 내 생의 한 시절, 이런 순간이 있었음에 오늘도 삶은 여전히 환희이자 축복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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