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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네가 아닌 다른 존재로 살 수 있겠니?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12. 11. 3.

"제가 선택한 삶, 타인의 자리가 거의 없는 삶이요,

사람들 대부분이 서로를 엮고 지내는 그런 관계라는 것이 전혀 없는 삶이라면,

그런 고립된 삶을 살면서까지 쓰고 싶었던 글을 실제로 쓸 수 있을 때만 납득이 되겠죠.

그런 삶의 조건이 고난이었다고 말하는 건 잘못된 표현일 거예요.

제 속의 무언가가 자연스럽게 저를 그런 부대낌에서 비껴나게 했고,

우연적이고 설명할  수 없는 현실보다는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의미가 충만한 허구를 선호하고,

다른 사람의 논리와 흐름에 제 생각을 맞춰야만 하는 고된 소통보다는

형체를 알 수 없는 자유를 선호하게 했죠.

 

김연수가 응용한 문장 - 니콜 크라우스의 소설 '그레이트 하우스' 중에

 

이 글을 읽고 작가인 김연수는 전적으로 동감했다고 한다.

 

그런데 난 작가도 아니고 그렇다고 많은 글을 쓰는 사람도 아님시롱

왜 이 말들이 절절히 나를 헤집는 것일까? 

실제로 사춘기 시절의 나의 꿈은 시인이 되는 것이었기는 하지만

살다보니  그런 꿈따윈 먼 추억의 한 장처럼 제켜져 있었고

 다만 건조한 내  현실을  장식하는 인테리어에 불과했는데...

 

그러던 어느 날 그러더라.

사십 고개를 넘어 50고개에 이르를 즈음

내 지금의 삶이 내 미래의 삶이 될 수 있을까?

너무나 예측가능한 건조한  내 내일,

가보지도 않은 미래의 삶이 그려지자   난 질식할 것만 같았다.

뭐랄까, 영화 '파리 텍사스'의 한 장면인 사막을 걷는 듯한 느낌,

흙먼지만을 이끌고  가끔씩 찾아오는 바람이외에는

오직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혼자서만 끝도 없는 길을 걷는 다는 느낌,

차라리 영화 속 주인공은 그 길을 걷는 목적이라도 있지,

난 뭔가?

 

뭔가 새로운 나를 찾고 싶었다.

아니 생각해보면 난 살고 싶었을 것이다.

9층 베란다 너머로 보이는 모든 풍경들이  내 주검의 배경이 되지 않았을까

캄캄한 거실에서 그렇게 쪼그리고 앉아 있었던 긴 시간들...

영화 '디 아워스의' 니콜키드먼이 놓고간 시냇가의 신발들이 있던 장면을 돌리고 또 돌리며

울다가 울다가 급기야 영화의 볼륨을 있는데로 올리고 통곡했던 시간들...

허허 웃고 떠들며 파티의 여왕자리를 고수하며 우아한 사모님의 그 이면에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던 죄의식과

외로움,( 이 글을 쓰다보니 괜실히 센치해지누만...)

이런 것들은 이제 다 옛일이 되었다.

 

그래서 시작한 일이 글쓰기 교실에 등록을 하는 것이었다.

뭔가 토해내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조급함이

서투른 언어들로  나열되었을  부끄러움도  나에겐 약이 되었고

남의 생각을 조금씩 베켜가며 나의 열등감을 감추고 싶었던 비참함조차

어느 날 연고가 되어 나를 치유하고 있더라.

무식이 용감하다고 어느 선생님말씀처럼 난 함부로 글나부랭이들을 쏟아냈다.

글에 대한 예의라는 것이 있는 것 조차 몰랐던...

 

그러던 차에 가게를 오픈하고 이런 저런 사연들이 탄생하고

현실에 적응하느라 나를 잊는 시간들이 계속되고...

 

그렇게 시간은 흘러 지금의 내가 되었다.

 

"난, 왜 항상 남들과 다르게 살아야 할까?"

스스로 선택된 삶의 모습이었음을 까많게 잊고 그렇게  투덜거리며 비스꾸무리하게

다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남들처럼 그렇게 지지고 볶고 알콩달콩 살아보고 싶은 욕심에

에먼 놈에게 애걸복걸 하던 시간도 지났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요즈음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선택한 삶, 그 자리엔 타인의 자리가 없더라."

 연민스럽기도 하지만 당당하고 빛나는 나 혼자 만의 자리, 나 혼자만의 공간,

비로소 진정한 내 모습이 아닐까, 두렵고 슬프지만 자꾸 그런 생각이 들더라.

그런 미래의 내 모습을 상상하며 정말 슬퍼 몇 밤을 울었다.

쉰하고도 둘이나 된 내가,

 

그러던 어느 날 부터 나는,

위의 작가의 말처럼

우연적이고 설명할 수 없는 현실보다는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의미가 충만한 허구를 선호하고,

다른 사람의 논리와 흐름에 제 생각을 맞춰야만 하는 고된 소통보다는

형체를 알 수 없는 자유를 선호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더라.

 

현실속에서 이루어 질 수 없는 나의 모든 꿈들,

내 세계들을 현실화 시킬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이란

바로 내가 그리고 싶은 세계를 스스로 그리는 것이라는 자각,

그리고 그러한 자각이 조금은 두렵고 설레이기도 하다.

 

세상에서  고립될 것 같은 두려움,

영영 허구의 세계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닐까하는 불안감,

가장 큰 두려움은 뭐니 뭐니해도

내가 설정한 허구속으로 내가 스스로 함몰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될 것같은 예감이다.

 

왜냐면 내 비극중의 하나인  지상에 발을 딛지 못하고 떠도는 오래된 습성이 있기 때문이다.

 

가끔씩 사람들은 말한다.

"님은 이상주의자 이신 것 같아요.

님의 글을 읽으면 헛갈려요.

어려워요. 재미 없어요." 등등... 

 

 

다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한편

"글의 여백을 읽지 못하는 사람은 내 글을 읽을 자격이 없어.

장님인가.  눈 떠도 안 보이나?"

그런 생각이 들때도 있다.

그런데 김연수조차 그런다고 한다.

하면서 또 덧붙인다.

"속도를 낮추십시오. 어느 날 그것들이 인생의 조언같기도 하답니다."라고...

 

어디다 감히 김연수를 붙이는가 쬐께 죄송하기도 하지만

김연수의 많은 생각의 부분들이 어쩜 나와 같을까 깜짝 깜짝 놀랠 때가 많았다.

김 연수의 '지지 않는 다는 말'을 읽는 내내  말이다.

 

 

 

 

내가 내 잡문들을 끄적이는 시간들...

마치 급하게 먹다보니 체하고 되고 체하게 되니 급기야 토할 수 밖에 없는 내 모든 말들이

때론 쓰레기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때,

나는 그렇게 위로한다.

타인을 위한 글이 아니라, 나 자신 어쩔 수 없는 한계를 가진 내 발설일 뿐이라고...

어떤 이는 이런 조언도 서슴치 않는다.

"자기의 것, 사적인 것을 너무 노출하는 것 아니에요?

글의 품위를  좀 높이시면 어떨까요?"

ㅋㅋ

뭔 지랄맞은 품위, 내 것이 내 것인가?

도대체 내 것을 쓰지 않으면 그 글들이 진실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자위들...

 

그런데 말이다.

김연수도 그랬다더라.

일본 어느 신사에 들러 소원을 빌었는데...

 

"예측할  수 없이 변하는 날씨처럼, 늘 살아서 뛰어다니는 짐승들처럼,

잠시도 쉬지 않고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들처럼,

그처럼 단 한 순간도 내가 아는 나로 살아가지 않기를,

그러니까 내가 아닌 다른 존재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고,

나를 사로잡는 것들이 있으면 그 언제라도 편안한 자리에 일어나 떠날 수 있기를 바란다고." 그렇게...

 

요즈음 긴 잠을 자지 못한다.

한, 두 시간 잠깐씩, 집에서, 가게에서 그렇게...

뭔가 안정을 하고 싶은데 머리속에서 수없는 이야기들이 지랄을 떤다.

나도 뭐가 뭔지 정리가 되지 않는 것들이 날라리부루스를 춘다.

뭐 작가도 아님서, 그럴듯한 글쟁이도 아님서...

가끔씩은 허구속의 내 모습때문에 질리기도 함서...

 

나도 먹고 살아야 쓰겄는디

자판을 두드리는 시간엔 손님도 귀찮아하는 나를 발견한다.

부엌에는 산더미처럼 일거리가 쌓였는데

멍하니 소파에 드러누어 공상에 잠긴다.

 

삶의 균형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간이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폼만 잡다가는 인생이 되고 싶지는 않은데

이쪽도 저쪽도 나를 끌고 가려는 것 같다.

내가 나를 끌고 가는지,

존재모를 뭔가가 나를 끌고 가는지...

지금은 잘 모르것다.

 

 

또 얼마쯤 가야 내가 나를 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