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戀書시리즈 - 독후감

戀書 - 83 - 새의 선물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12. 9. 19.

요즈음 뭔가 이야기를, 내 이야기를 만들어보고 싶은 욕구에 들떠 있지만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어떤 구성을 가져야할지 막막한 심정이다. 아마도 내 얉은 소녀 취향적 자세에서 비롯된 걸림돌이리라. 때론 의욕이 넘치기도 하지만 때론 남의 글을 읽으면서 한없이 나락으로 빠져 들기도 한다. 그래도 읽어보리라 그리고 종내에는 내 식의 내 이야기를 쓰리라 그렇게 작정하고 국내 작가들의 소설을 하나 하나 읽어내려가고 있다. 내 문학서적의 독서는 고등학교때 멈춘 것 같다. 간간히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베스트셀러를 몇권 맛보긴 했지만 주로 독서의 중심은 인문학 위주였으므로 무수한 국내 작가들의 작품들을 접해볼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았다.

 

요번에 읽은 책은 은희경의 '새의 선물'

 

여섯 살에 어머니는 전쟁통에 실성하여 목매달아 자살했고, 아버지는 사라졌다. 외할머니 슬하에서 이모, 삼촌과 함께 생활하는 열두 살의 ‘나-진희’는 “세상이 내게 별반 호의 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에 열두 살에 성장을 멈췄다. 나는 알 것을 다 알았고 내가 생각하기로는 더이상 성숙할 것이 없었다.” 라고 생각하는 아이의 눈으로 보는 세상사!

 

주인공 진희가 말하는, 묘사하는 ,생각하는 세상사, 도대체 내 나이 쉰도 넘었는데 겨우 열 두살 소녀의 세계속으로 여지없이 빠져든다. 열 두살이라고 믿을 수 없는 주변세상에 대해, 주변 사람에 대해 이렇듯 세세한 묘사가 가능할까?

 

그리고 그녀가 내뿜는 인간사에 대한 그녀식의  아포리즘은 정말 압권이다.


 

 

 

 

 

 

 

내가 내 삶과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나 자신을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로 분리시키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나는 언제나 나를 본다. '보여지는 나'에게 내 삶을 이끌어가게 하면서 '바라보는 나'가 그것을 보도록 만든다. 이렇게 내 내면 속에 있는 또다른 나로 하여금 나 자신의 일거일동을 낱낱이 지켜 보게 하는 것은 20년도 훨씬 더 된 습관이다. 그러므로 내 삶은 삶이 내게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거리를 유지하는 긴장으로써만 지탱돼왔다. 나는 언제나 내 삶을 거리밖에서 지켜보기를 원한다.P12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에는 이쁘고 좋기만 한 고운 정과 귀찮지만 허물없는 미운 정이 있다. 좋아한다는 감정은 언제나 고운 정으로 출발하지만 미운 정까지 들지 않으면 그 관계는 오래 지속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고운 정보다는 미운 정이 훨씬 너그러운 감정이기 때문이다. 또한 확실한 사랑의 이유가 있는 고운 정은 그 이유가 사라질 때 함께 사라지지만 서로 부대끼는 사이에 조건없이 생기는 미운 정은 그 보다는 훨씬 질긴 감정이다. 미운 정이 더해져 고운 정과 함께 감정의 양면을 모두 갖춰야만 완전해지는 게 사랑이다.p123

 

고달픈 삶을 벗어난들 더 나은 삶이 있다는 확신은 누구에게도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떠난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서라기보다 지금의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아무 확신도 없지만 더 이상 지금 삶에 머물러 있지 않아도 된다는 것 때문에 떠나는 이의 발걸음은 가볍다. 그런 떠남을 생각하며 아줌마는 사라진 버스 쪽을 그렇게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는 것이리라.p135

 

 

가려운 곳을 긁는다는 것은 짜릿한 맛이 있다. 바로 그 맛을 위해 할머니는 매일 가려운 곳을 일부러 찾는 건 아닐까. 가렵다는 것이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가려운 곳이 없으면 어떻게 긁는 순간의 쾌감을 느낄 것인가. 할머니가 가려움증을 찾듯이 나도 일부러 그리움을 불러들이는 것인가p223

 

아무리 실연의 상심이 컷다한들 이모는 이모이고 며칠 사이에 다른 사람으로 바뀔 수는 없다. 내가 유의한 것은 이모가 변했다는 사실이아니라 이모의 내면에 다른 모습이 들어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어쩌면 이모의 내면에는 수많은 다른 모습들이 함께 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 모습들 중에 하나씩을 골라서 꺼내 쓰는 제어장치, 즉 이모의 인생을 편집하는 장치가 지금까지와 다른 방식으로 작동되면 이모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대체 우리들이 나라고 생각하는 나는 나라는 존재의 진실에 얼마나 가까운 것일까.p322

 

나는 삶의 기회에 대해 생각했다.구국의 영웅이 되는 것과 살인자가 되는것의 차이는 그에게 어떤 기회가 주어지는가에 달려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살인자가 되는 것은 그에게 살인을 할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고 배신자가 되는 것 역시 배신의 기회가 왔기 때문이므로, 그 기회를 받아들이느냐 물리치느냐 하는 선택은 스스로가 하는 것이지만 선택의 전 단계에서 어떤 기회를 제공하느냐는 순전히 삶이 하는 일이다. 배신을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지만 배신을 하도록 기회를 마련하는 것은 언제나 삶의 짓인 것이다.p 325

 

성숙한 어른이 슬퍼하는 것보다는 철없는 아이의 슬픔은 더 가슴을 아프게 한다. 그러므로 철없는 사람은 마음껏 철없이 행동하면서도 슬픔이 닥치면 불공평하게도 더 많은 사랑과 배려를 받는 것이다. 성숙한 사람은 으레 슬픔을 이겨낼 수 있으리라고 여겨지기 때문에 그같은 배려를 받지 못한다. 성숙한 사람은 언제나 손해이다. 나는 너무 일찍 성숙했고 그러기에 일찍부터 삶을 알게 된 만큼 삶에서 빨리 밑지기 시작했다.p327

 

그렇다면 내 마음속에 생겨나버린 사랑는 사라지기 위해 생겨난 것인가. 그렇게 사라질 것이라면 왜 삶은 내게 하모니카와 염소의 실루엣을 간직하게 하였는가.사랑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줄 생각이 아니라면 나에게는 어떤 기회가 준비되어 있기에 삶은 내 안에 사랑을 만들었는가. 거기에 대해 삶은 또 무슨 말인가를 할 것인다. 삶이 내게 할 말이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이 내게 일어났다. p332

 

 

사랑이 아무리 집요해도 그것이 스러진 뒤에는 그 자리에 오는 다른 사랑에 의해 완전히 배척당한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장소가 가지는 배타적인 속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랑, 새로운 사랑은 언제나 가능한 것이다. 운명적이었다고 생각해온 사랑이 흔한 해프닝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았을 때 사람들은 당연히 사랑에 대한 냉소를 갖게 된다. 그렇다면 다시는 사랑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절대 그렇지 않다. 사랑에 빠지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얼마든지 다시 사랑에 빠지며, 자기 삶을 바라다볼 수 있는 거리유지의 감각과 신랄함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집착 없이 그 사랑에 열중할 수가 있다. 사랑은 냉소에 의해 불붙여지며 그 냉소의 원인이 된 배신에 의해 완성된다. 삶도 마찬가지다. 냉소적인 사람은 삶에 성실하다. 삶에 집착하는 사람일수록 언제나 자기 삶에 불평을 품으며 불성실하다. p224

 

대부분의 어른들은 모험심이 부족하다. 진정한 자기의 삶이 무엇인지 알아내고 찾아보려 하기보다는 그냥 지금의 삶을 벗어날 수 없는 자기의 삶이라고 믿고 견디는 쪽을 택한다. 특히 여자의 경우 '팔자소관'이라는 체념관이 강하게 작용한다. 불합리함에도 불구하고 그 체념은 여자의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우연히 닥쳐온 불행을 이겨내지 않고 받아들이도록 만듦으로써 더 많은 불행을 번식시키기 때문이다.,p246

 

 

내가 알기로 세상을 서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상처받게 마련이다. 영원하고 유일한 사랑 따위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서정성 자체가 고통에 대한 면역을 빼앗아가기 때문이다.p303

 

 

이란 장난기와 악의로 차 있다. 기쁨을 준 다음에는 그것을 받고 기뻐하는 모습에 장난기가 발동해서 그 기쁨을 도로 뺏어갈지도 모르고 또 기쁨을 준 만큼의 슬픔을 주려고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너무 기쁨을 내색해도 안 된다. 그 기쁨에 완전히 취하는 것도 삶의 악의를 자극하는 것이 된다. 허석과 만난 일이 기쁘면 기쁠수록 내색을 하지 말자. 그리고 한편으로는 누구의 삶에서든 기쁨과 슬픔은 거의 같은 양으로 채워지는 것이므로 이처럼 기쁜 일이 있다는 것은 같은 양으로 채워지는 것이므로 이처럼 기쁜 일이 있다는 것은 이만큼의 슬픈 일이 있다는 뜻임을 상기하자. 삶이란 언제나 양면적이다. 사랑을 받을 때의 기쁨이 그 사랑을 잃을 때의 슬픔을 의미하는 것이듯이. 그러니 상처받지 않고 평정 속에서 살아가려면 언제나 이면을 보고자 하는 긴장을 잃어서는 안 된다. 편지를가슴에 껴안고 즐거워하거나 되풀이해서 읽으면서 행복한 표정을 짓는 내 모습을 악의로운 삶에게 들키면 안 된다. p310

 

삶도 그런 것이다. 어이없고 하찮은 우연이 삶을 이끌어간다. 그러니 뜻을 캐내려고 애쓰지 마라. 삶은 농담인 것이다. p363

 

세상에 기적이란 없다. 그러나 우연은 많다. 아니 세상의 중요한 일은 공교롭게도 모두 우연이 해결한다. 다행인 것은 우연 중에는 나쁜 우연이 더 많지만 간혹 좋은 우연도 있다는 것이다. p 372

 

 

책을 읽는 내내 이렇게 필사를 하며 나의 열 두살, 나의 20살, 40살 그리고 쉰을 넘은 시간들을 생각해봤다. 나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을까 ?  도무지 생각도 없이 그렇게 살았나...물론 은희경의 열 두살, 아니 소설을 쓸 당시의 그녀의 아포리즘을 풀어 놓은 것이겠지만 필사의 구절 구절들을 만날 때마다 아, 이럴 수가 감탄에 감탄을 한다.

 

작가 후기에서 은희경은 말한다.

 

"젊음을 다 보내버릴 때까지도 나는 네 귀가 꼭 들어맞는 도형처럼 살았다. 그러기에 젊음은 내게 아무런 거름도 남기지 않았다., 내가 성긴 투망으로 인생이라는 푸른 물을 건져 올리려고 밤새워 헛손질을 하던 가혹한 기억은 더이상 젊지도 않았던 시절이 이야기이다. 그 외로움이 소설을 쓰게 했을까...중략

세상이 내게 훨씬 단순하고 그리고 너그러웠다면 나는 소설을 쓰지 않았을 것이고, 아마 인생에 대해서 알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 같다."

 

나는 은희경처럼 비로소 내 인생의 투망질을 시작했다. 쉰이 넘고서야... 그리고 내 외로움을 깨달았고 인지하고 나니 받아들여지고 극복하는 단계이다. 그래서  어쩜 나도 인생에 대해 지금 말하고 싶은 것들이 넘쳐나기 시작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