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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에세이

주디스 버틀러: 비탄의 윤리와 응시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26. 4. 21.

주디스 버틀러: 비탄의 윤리와 응시

 

“We are not separate beings who then decide to come together, but beings whose very existence is bound up with the existence of others.”

— Judith Butler, Precarious Life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1956~)는 클리블랜드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유대교 회당의 랍비에게 철학 교육을 받았다. 그 교육의 주제 중 하나는 홀로코스트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였다. 버틀러는 훗날 그 질문이 자신의 철학 전체를 만들었다고 회고했다. 거대한 폭력 앞에서 인간이 어떻게 응답할 수 있는가, 누구의 죽음이 애도받을 자격이 있는가. 이 질문들이 그녀의 철학적 출발점이었다. 예일 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헤겔을 연구했다. 현재 UC 버클리의 교수로 있다.

 

버틀러 철학의 핵심 질문은 누구의 삶이 애도 가능한가이다. 그녀의 저서 『위태로운 삶』과 『전쟁의 프레임』을 관통하는 화두다. 우리는 인식하지 못한 채 애도를 차별적으로 배분한다. 어떤 죽음은 전국민적인 슬픔의 대상이 되고, 어떤 죽음은 통계 수치로만 남거나 아예 기록되지 않은 채 사라진다. 버틀러는 이 차이를 만드는 것이 권력이라고 본다. 권력이 특정 생명의 고통은 가시화하고 다른 생명의 고통은 보이지 않게 만든다. 그녀는 이것을 프레임(Frames of War) 개념으로 설명한다. 우리가 고통을 인식하는 방식 자체가 이미 권력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버틀러가 말하는 취약성(Precarity)은 인간이 타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타인의 돌봄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존재다. 이 근원적 취약성은 우리를 공격받기 쉬운 상태로 만들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타자와 연결될 수 있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취약성이 연대의 조건이라는 것이 버틀러의 핵심 통찰이다. 상처받을 수 있는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타인의 상처를 이해할 수 있다. 취약성은 극복해야 할 결핍이 아니라 윤리의 토대다.

 

타자의 고통을 목격할 때 우리가 느끼는 당혹감이나 슬픔을 섣불리 제거하려 하지 말라고 버틀러는 말한다. 그 비탄의 감정이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끝까지 지켜보라고 한다. 타자의 비극 앞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응시는 그를 나의 이해관계나 지식의 틀 안으로 가두지 않는 것이다. 그가 처한 고통의 심연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타자의 고통이라는 무게를 침묵으로 함께 견뎌내는 것, 그것이 버틀러가 말하는 비탄의 윤리다.

 

응시의 윤리는 타자를 나와 같은 범주로 환원하지 않는 것에서 출발한다. 버틀러는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사유를 빌려 타자의 얼굴이 나에게 가해오는 윤리적 명령에 주목한다. 타자의 고통받는 얼굴은 나에게 나를 외면하지 말라는 무언의 호소를 건넨다. 이 호소에 응답하는 방식은 화려한 위로의 말이 아니라 그 고통의 장소에 함께 머무는 현존이어야 한다. 타자의 아픔이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는 것을 버틀러는 용기라고 말한다. 타인의 고통이 나의 평온한 일상을 무너뜨리는 것을 막지 않는 용기가 응시의 윤리를 가능하게 한다.

 

버틀러는 비탄이 지닌 비개인적 성격에도 집중한다. 누군가를 잃었을 때 느끼는 상실감은 내가 누구와 연결되어 있었는지를 사후적으로 깨닫게 해준다. 상실은 나를 구성하던 타자의 자리가 비었음을 의미한다. 그 빈자리가 주는 통증은 우리가 결코 독립된 주체가 아님을 증명한다. 군산 근대미술관의 차가운 전시실 벽면을 흐르는 적막은 과거 수탈의 역사 속에서 소멸해 간 타자들의 빈자리를 감각하게 하는 공간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버틀러가 말한 상실의 연대를 경험한다. 내가 알지 못하는 타자의 고통이 어떻게 나의 역사와 얽혀 있는지를 응시하게 된다.

 

2001년 9.11 이후 버틀러는 미국 정부의 전쟁 수행 방식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죽어간 민간인들의 죽음이 미국 언론에서 어떻게 비가시화되는지를 분석했다. 그 비판은 많은 적을 만들었다. 반애국자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버틀러는 멈추지 않았다. 애도 가능한 생명의 범위를 국경 너머로 확장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윤리적 응시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한강이 제주 4.3의 죽음들을 역사의 어둠 속에서 끄집어낸 것처럼, 버틀러는 미디어의 프레임 바깥에서 죽어간 이들의 얼굴을 응시하라고 요구했다. 프레임을 깨는 애도가 저항의 시작이라고 말했다.

 

버틀러의 비탄의 윤리는 언론, 예술, 교육이라는 세 영역에서 각각 다른 방식으로 실천될 수 있다. 언론에서 이 윤리는 보도 방식 자체를 질문하는 것이다. 사망자 수를 전달하는 대신 그 중 한 사람의 하루를 복원하고, 피해자를 맥락 없이 소비하는 대신 그가 처한 구조적 조건을 함께 가시화하는 것이 프레임을 깨는 저널리즘이다. 예술 앞에는 다른 종류의 딜레마가 놓인다. 타자의 고통을 재현하면 그것을 소비 가능한 이미지로 만들 위험이 있고, 재현하지 않으면 그 고통은 다시 비가시화된다. 버틀러의 윤리는 이 딜레마를 해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긴장 안에 머물라고 한다. 한강의 소설이 광주를 직접 묘사하지 않고 그 주변을 맴돌며 독자를 고통의 언저리에 세우는 방식, 클로드 란츠만이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증언을 재연 없이 오직 현재의 얼굴로만 담아낸 방식이 재현하지 않으면서 증언하는 예술의 윤리를 보여준다.

 

교육에서 이 윤리는 역사의 피해자를 통계가 아닌 얼굴로 가르치는 것이다. 숫자는 사실을 전달하지만 얼굴을 지운다. 그 숫자 안에 있던 한 사람의 구체적인 삶을 복원하고, 그가 무엇을 먹었고 누구를 사랑했고 어떤 말투를 가졌는지를 상상하게 하는 것이 학생을 역사적 피해자와 동일한 취약성의 지평 위에 세운다.

 

침묵은 그 복잡한 연결망을 감지하기 위한 가장 정밀한 감각이다. 타자의 고통을 성급하게 정의 내리지 않고 그 모호하고 아픈 상태를 함께 견뎌내는 방식이다. 버틀러의 철학은 우리를 익숙한 확실성으로부터 끌어내어 타자의 불안정한 생 곁에 세운다. 그 곁에서 우리는 타자의 얼굴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비명보다 더 강렬한 침묵의 연대가 거기서 시작된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버틀러의 이 윤리와 정면으로 부딪힌 적이 있다. 개복동 참사를 소설로 쓸 때였다. 열 개가 넘는 버전을 썼다 지웠다. 매번 막히는 지점은 같았다. 시점이었다. 살아남은 자의 눈으로 죽음을 바라보는 순간, 그 죽음은 내 문장의 소재가 되었다. 그것이 틀렸다는 것을 감지할 때마다 나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결국 내가 선택한 것은 죽은 이들의 시점이었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본 것, 마지막으로 느낀 것, 미처 하지 못한 말을 살아있는 문장으로 복원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응시였다. 그 선택은 위험하다. 죽은 자의 목소리를 빌린다는 것은 언제든 도용이 될 수 있다. 그 위험을 알면서도 그 시점을 택한 것은 살아남은 자의 시선이 아무리 정교해도 결국 타자의 고통을 나의 프레임 안으로 가두는 행위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버틀러가 말한 것처럼 타자의 고통이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 글을 쓰는 사람에게 가능한 비탄의 윤리다. 완성이 아니라 매번의 망설임 속에서, 열 번째 버전을 버리고 열한 번째를 시작하는 그 행위 안에서 그 윤리는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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