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라는 우주, 몽상이라는 윤리」— 바슐라르를 읽으며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1884~1962)는 프랑스 샹파뉴 지방의 바르쉬르오브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집안이었다. 열여덟 살에 우체국 직원으로 일을 시작했고, 야간 공부로 학위를 취득했다. 서른다섯 살에야 철학 교수 자격을 얻었다. 늦은 출발이었다. 그러나 그 늦음이 그의 철학에 독특한 질감을 부여했다. 노동자의 손으로 학문에 도달한 사람은 추상과 구체 사이의 거리를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알고 있었다.
바슐라르는 처음에 과학철학자로 출발했다. 《과학 정신의 형성》(1938), 《부정의 철학》(1940) 등에서 과학적 인식이 어떻게 형성되고 갱신되는지를 탐구했다. 기존의 앎을 부수는'인식론적 단절(rupture épistémologique)' 개념이 이 시기의 핵심이었다. 그런데 바슐라르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과학이 닿지 못하는 영역, 즉 상상력과 꿈과 시적 이미지의 세계로 방향을 틀었다. 낮에는 과학철학을 가르치고 밤에는 시를 읽었다고 스스로 말했다. 그 이중적 삶이 그의 철학을 두 개의 축으로 만들었다.
1938년부터 소르본 대학에서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가르쳤으나, 후반기의 바슐라르는 불·물·공기·대지라는 네 가지 원소를 중심으로 상상력의 철학을 전개했다. 《불의 정신분석》(1938), 《물과 꿈》(1942), 《공기와 꿈》(1943), 《대지와 휴식의 몽상》(1948)이 잇달아 나왔다. 그리고1957년, 《공간의 시학》이 출판되었다. 과학철학자가 집과 방과 서랍을 철학의 주제로 삼은 것이다. 이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필연이었다.
바슐라르는 《공간의 시학》에서 집을 ‘우주의 한 모퉁이’라고 불렀다. 인간은 세계 전체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았던 집의 구체적 공간들을 통해 세계를 기억한다. 다락방의 어둠, 지하실의 습기, 창문으로 기울어져 들어오는 오후의 빛. 이 공간들이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최초의 문법이다. 바슐라르에게 집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다. 기억이 축적되고 보존되는 하나의 기관(器官)이다.
우리가 과거를 떠올릴 때, 사건보다 먼저 떠오르는 것은 그 사건이 일어났던 공간의 질감이다. 벽의 색, 마루의 삐걱거림, 부엌에서 나던 냄새. 기억은 본질적으로 시각적이지 않다. 냄새와 소리와 촉감이 시각보다 더 깊이 우리 안에 새겨진다. 이 감각의 중층성이 공간을 단순한 배경이 아닌 기억의 형식으로 만든다.
여기에서 ‘최초의 집’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유년기에 살았던 집이 모든 이후의 집들의 원형(原型)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새로운 집에 들어설 때 느끼는 친밀함이나 낯섦은, 사실 최초의 집과의 거리를 무의식적으로 재고 있는 것이다. 바슐라르는 그 언어 이전의 영역을 철학의 대상으로 가져왔다.
바슐라르의 핵심 개념 중 하나는 ‘친밀한 광대함’이다. 작은 공간이 상상력에 의해 무한히 확장되는 현상이다. 조개껍데기 안에 바다가 있고, 서랍 안에 세계가 있다. 어린 시절의 방은 실제로는 작았을 것이다. 그러나 기억 속에서 그 방은 하나의 우주가 된다. 크기는 면적의 문제가 아니라 상상력의 문제다.
그리고 몽상(rêverie)이 있다. 바슐라르는 몽상을 꿈과 구별한다. 꿈은 의식이 꺼진 상태에서 일어나지만, 몽상은 깨어있는 의식 안에서 일어나는 자발적인 상상이다. 몽상은 논리를 따르지 않는다. 그러나 무질서하지도 않다. 몽상은 이미지에서 이미지로 흘러가는 그 자체의 내적 논리를 가진다. 바슐라르는 이 몽상이 시적 인식의 본질이라고 보았다. 시인이 쓰는 것은 개념이 아니라 이미지다. 이미지는 논증되지 않는다. 이미지는 울린다.
나는 가끔 하루 종일 몽상 속에서 헤맨다. 이상한 꿈을 꾸기도 한다. 그러다 문득 정신이 들면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 나이가 몇인데, 이런 쓸데없는 생각에 몰입해 있나. 그 목소리는 내 것이 아니다. 오랫동안 외부에서 들어온 언어가 내면화된 것이다. 너무 유아적이지 않은가, 너무 비현실적이지 않은가. 그 비판을 너무 많이 들었다.
그러나 바슐라르는 말한다. 몽상할 수 있는 능력을 잃은 사람이 세계를 가장 얕게 산다고. 몽상은 퇴행이 아니다. 바슐라르에게 몽상은 유년성과 연결된다. 그것은 어린아이처럼 생각한다는 뜻이 아니다. 세계를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열린 감수성, 아직 언어로 굳어지기 전의 경이감이 살아있다는 뜻이다. 몽상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유년성을 잃지 않은 사람이다.
내 몽상 속에는 인물들이 있다. 실재하지 않지만 나보다 더 선명하게 존재하는 사람들. 투박하지만 깊은 내면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타인에 대한 다정함을 삶의 방식으로 선택한 사람들. 나는 그들과 마음속으로 대화를 나눈다. 그들은 내가 멋있다고 생각하는 인간의 모습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인간이라는 것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붙들고 있는 형상들이다.
인간이 선하다는 것을 끝까지 믿고 싶다. 이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인지 나는 안다. 현실은 그 믿음을 매일 시험한다. 그러나 나는 그 믿음을 놓지 않으려 한다. 그것은 순진함이 아니다. 현실을 똑똑히 보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함의 가능성을 선택하는 것은 의지의 문제다. 도스토옙스키의 알료샤가 그렇게 살았다. 체호프의 인물들이 그렇게 버텼다. 그들도 몽상가였다.
바슐라르의 몽상은 공간과 이미지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의 몽상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내가 몽상 속에서 데리고 사는 인물들은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다. 그들은 내가 세계에 대해 품고 있는 윤리적 열망의 형상화다. 나는 그들과 대화하면서, 인간에 대한 믿음을 매일 다시 세운다.
《공간의 시학》이 말하는 것은 결국 이것이다. 인간은 공간 안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통해 존재한다. 그리고 몽상 안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몽상을 통해 자신이 되고자 하는 사람에게 닿는다. 집이 우리의 내면 지도를 만들듯, 몽상 속 인물들이 우리의 윤리적 지도를 만든다.
그것이 유아적이라면, 나는 기꺼이 유아적이겠다. 바슐라르의 말대로, 유년성을 잃지 않은 사람만이 세계를 깊이 산다. 그리고 나는 인간의 선함을 믿는 일을 멈추지 않겠다. 알기 때문에, 더욱 믿는다. 그것이 나의 윤리이고, 나의 몽상이다.

#바슐라르 #가스통바슐라르 #공간의시학 #몽상 #친밀한광대함 #철학 #프랑스철학 #상상력의철학 #집이라는우주 #몽상이라는윤리 #문학과철학 #이미지의철학 #유년성과몽상 #철학스타그램 #책스타그램 #북스타그램 #바슐라르읽기 #lettersfromatraveler
'철학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소멸을 노래하는 법 —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 (0) | 2026.04.04 |
|---|---|
| 소멸을 두려워하지 않는 법 — 에피쿠로스의 아타락시아 (0) | 2026.04.04 |
| 마르틴 하이데거 — 던져진 존재, 뛰어오르지 못한 삶 (0) | 2026.03.29 |
| 윌리엄 제임스의 프래그머티즘: 불완전한 나의 변명 (0) | 2026.03.27 |
| 자유가 두려운 당신에게 — 키르케고르의 불안에 대하여 (0) | 2026.03.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