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 『문학치료』 변학수
오전 중 그리운 이들과의 점심 만남을 위해 호수변을 느리게 걸어 도착했다. 아직 바람 끝이 차가웠는데, 탱탱하게 올라오는 벚꽃 망울이 너무 귀여워 나도 모르게 실실 웃음이 나왔다.
“아이들아, 애쓰는구나.”
절로 말을 걸었더니,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 가지들이 살랑거렸다.
“기다려주세요. 곧 꽃을 피울게요.”
그 순간 문득 파블로 네루다의 시가 떠올랐다.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시가 / 나를 찾아왔어.”
— 파블로 네루다, 「시(詩)」
시는 목소리도 말도 침묵도 아닌 어떤 것으로 찾아왔다고, 길거리에서, 밤의 가지에서, 불 속에서, 얼굴도 없이 건드렸다고 네루다는 썼다. 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어느 날 문학이 내게로 왔구나.”
아득한 시절이지만, 문학이 성큼 내 안에 들어왔던 그때의 기억이 다시 살아났다. 바로 그 시기에 나는 변학수가 쓴 『문학치료』(학지사, 2005 초판 / 2007 개정판)를 만났다.
이 책에서 저자는 문학치료를 한마디로 ‘읽기와 쓰기를 통한 치료’로 정의한다. 그리고 그것이 두 축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하나는 독서치료(Bibliotherapy), 즉 책 읽기를 통한 치유다. 시, 소설, 에세이, 나아가 영화나 인생경험담에 이르기까지, 이미 만들어진 이야기를 매개로 감정을 건드리고 자신을 들여다보는 과정이다.
다른 하나는 글쓰기 치료(Poesietherapie), 텍스트를 직접 만드는 행위다. 일기, 시, 산문, 편지, 고백록 같은 형식으로 내면을 언어화하며 스스로를 치유하는 것이다. 읽기가 타인의 이야기에서 나를 발견하는 과정이라면, 쓰기는 나의 이야기를 언어로 끄집어내는 과정이다. 두 가지는 분리되지 않고 서로를 깊게 한다.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이 구분이 낯설지 않았다. 이미 오래전부터 나는 읽고 쓰는 행위를 통해 삶의 균형을 유지해 왔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문장에서 불현듯 내 감정에 이름이 붙여지는 순간, 혹은 아무도 없는 새벽에 일기장에 무언가를 쏟아내고 나서 가슴이 한결 가벼워지던 경험. 그것이 바로 독서치료이고 글쓰기치료였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비로소 이론적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이미 스스로를 치료하고 있었던 셈이다. 다만 그것을 '치료'라고 부를 줄 몰랐을 뿐이다.
변학수는 또한 문학치료가 의학적 임상 치료의 대안이 아니라, 인간이 언어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고 타인과 연결되는 본질적인 행위임을 강조한다. 문학은 억압된 감정을 배출하는 카타르시스의 기능을 할 뿐 아니라, 인식과 통찰을 통해 삶을 다르게 바라보게 하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그 말이 맞다. 무너질 듯한 마음을 붙잡아 주었던 것은 약도, 누군가의 충고도 아니었다. 한 편의 시였고, 백지 위에 쓴 내 문장이었다.
책 속의 한 대목이 오래 마음에 남아 있다. 얼굴 없이 홀로 살아가는 존재에 대한 서술이었다. 무엇을 말해야 할지도 모르고, 이름을 댈 수도 없이 그저 어떤 것에 건드려지던 그 시절에 문학은 불쑥 다가와 잊었던 감정을 깨웠고, 흐릿한 자아에 윤곽을 그어주었다.
시처럼, 불처럼, 바람처럼. 그것이 치료였는지, 구원이었는지, 아니면 그냥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하지만 문학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이처럼 문학이란, 혹은 예술이란, 살아가면서 만나는 너와 나의 관계 자체가 아닐까 싶다. 우리가 서로에게 건네는 말, 함께 나누는 기억, 때로는 침묵 속에서 전해지는 온기까지도 모두 문학의 한 장면일 수 있다.
『문학치료』는 책 속의 언어를 통해 나를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읽고 쓰는 행위 속에서, 그리고 너와 나의 관계 속에서 다시 살아나는 언어와 감정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오늘 호수 변에서 벚꽃 망울이 건네준 살랑이는 대답처럼, 문학은 늘 그렇게 우리 곁에서 조용히 응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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