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은 한 번에 오지 않는다.」
곧 4월을 앞두고 있다. 아직 겨울의 그림자가 골목에 남아 있지만, 빛이 달라졌다. 각도가 아니라 결이 달라졌다고 해야 옳다. 그 미묘한 차이를 피부가 먼저 안다. 나는 8월에 출간될 나의 책 『재즈, 군산의 골목을 걷다』를 편집하던 중, 문득 “봄은 한 번에 오지 않는다.”라는 문구를 보며 가다머를 떠올렸다.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그것이 철학적 인식론인 줄 몰랐다. 그저 계절에 대한 관찰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에 대한 선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봄은 어느 날 갑자기 도착하지 않는다. 빛이 조금씩 달라지고, 바람의 결이 조금씩 바뀌고, 그 작은 접촉들이 쌓여 어느 순간 봄이 되어 있다. 이해도 그렇다. 같은 텍스트를 다시 읽을 때, 같은 골목을 다시 걸을 때, 달라지는 것은 텍스트도 골목도 아니다. 나의 지평이 달라진다. 달라진 나는 같은 대상에서 다른 감각을 만난다. 이해란 대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대상과의 접촉 속에서 내가 조금씩 달라지는 사건이다.
가다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해는 부분에서 전체로, 전체에서 다시 부분으로 순환한다. 해석학적 순환(Hermeneutischer Zirkel). 오늘 아침의 빛 한 줄기는 봄 전체를 예감하게 하고, 봄 전체에 대한 예감은 다시 오늘 아침의 빛을 다르게 보게 한다. 부분은 전체를 향해 열려 있고, 전체는 부분 속에서만 구체화된다. 나는 이 순환을 관계에서도 느낀다. 그와 나누었던 한마디가 우리의 관계 전체를 다시 읽게 하고, 관계 전체에 대한 나의 이해가 그 한마디를 다시 듣게 한다. 이해는 직선이 아니다. 나선이다. 매번 같은 자리를 지나는 것 같지만, 지날 때마다 조금씩 다른 높이에 있다.
그런데 나는 텅 빈 상태로 그 순환에 진입하지 않는다. 내가 속한 언어, 내가 지나온 시간, 내가 품고 있는 상처가 이미 나의 감각을 구성하고 있다. 가다머는 이것을 선입견(Vorurteil)이라 불렀다. 그가 그 개념에 도달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치 치하에서 가다머는 말하지 않는 것을 선택했다. 하이데거가 총장직을 맡고 나치즘에 협력하는 동안, 가다머는 침묵했다. 그 침묵은 비겁이었는가, 아니면 생존이었는가. 그 물음에 그는 평생 완전한 답을 내놓지 않았다. 다만 그 경험이 그에게 가르쳐준 것이 있었다. 인간은 자신이 속한 시대의 언어와 역사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 우리는 우리가 딛고 선 지반을 선택하지 않는다. 다만 그 위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선택할 뿐이다.
그 인식이 마침내 언어를 얻은 것이 1960년이었다. 가다머의 나이 예순하나. 《진리와 방법》. 계몽주의 이후 근대는 오랫동안 선입견을 제거할수록 진리에 가까워진다고 믿었다. 가다머는 그 믿음 자체가 하나의 선입견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역사 밖에 설 수 없다. 언어 밖에 설 수 없다. 우리가 역사와 언어 속에 있다는 사실이 이해를 오염시키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사실이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선입견의 복권. 예순하나에 쓴 첫 번째 주저. 봄은 한 번에 오지 않는다고,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그 사실 앞에서 한동안 멈추었다. 오랫동안 나는 나의 선입견을, 나의 상처와 편향을, 이해의 실패 원인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가다머에 따르면 그것은 실패의 원인이 아니라 이해가 시작되는 자리다. 형성된 나로서만 타인을 만날 수 있다. 상처를 지닌 나로서만, 기억을 품은 나로서만. 나는 바로 그 자리에서, 그 무게를 안고, 타인 앞에 선다.
문제는 대화가 닫힐 때다. 이해는 본질적으로 대화적이다. 나의 지평과 타인의 지평이 서로를 향해 열릴 때, 두 지평이 충돌하고 마찰하고 서로를 변형시킬 때, 가다머가 지평 융합(Horizontverschmelzung)이라 부른 사건이 일어난다. 그것은 두 지평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새로운 지평이, 이전의 두 지평 어느 쪽도 아닌 어떤 것이, 그 마찰의 자리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평 융합은 언제나 예측 불가능하다. 만나기 전의 나도 아니고, 만나기 전의 타인도 아닌, 제3의 지평. 이해란 그 낯선 땅에 발을 내딛는 일이다.
그러나 지평이 열려 있다고 해서 융합이 반드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1960년대, 가다머는 위르겐 하버마스와 마주했다. 하버마스는 물었다. 이해가 언제나 가능하다면, 이데올로기에 의해 왜곡된 대화는 어떻게 할 것인가. 억압된 자와 억압하는 자 사이에도 지평 융합이 가능한가. 가다머는 대화를 계속했다. 하버마스도 대화를 계속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지평은 끝내 완전히 융합되지 않았다. 논쟁은 수십 년간 이어졌고, 어느 쪽도 상대를 완전히 설득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 마찰은 두 사람 모두를 바꾸어놓았다. 닫힌 대화와 열린 대화의 차이는, 융합의 성공 여부가 아니라 마찰을 견디는 의지에 있다.
나는 오랫동안 절연된 어떤 이를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그와 나눈 말이 무엇이었는지, 나는 이제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나는 것은 말의 내용이 아니라 그 말이 놓인 공기의 온도다. 차가웠다. 차가웠지만 아직 끊기지는 않았던, 그 직전의 온도. 이후 나는 여러 번 문장을 시작했다가 지웠다. 보내지 못한 문장들이 쌓였다. 그 문장들은 지평 융합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닿을 곳이 없었다. 한쪽이 완전히 닫혀버리면, 마찰도 변형도 없다. 새로운 지평은 태어나지 않는다. 나는 보내지 못한 문장들을 아직 지우지 않고 있다. 그것들이 무엇인지 나는 설명할 수 없다. 다만 그것들이 거기 있다는 사실이, 내 지평이 아직 완전히 닫히지 않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나의 선입견이 그를 오독했는지, 그의 선입견이 나를 오독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선입견이 이해의 조건이라면, 오독도 이해의 과정 안에 있다. 오독은 실패가 아니라 해석학적 순환의 한 지점이다. 순환은 계속된다. 나는 그 닫힌 문 앞에서, 여전히 나의 선입견을 안고, 기다린다.
가다머는 2002년 봄에 죽었다. 102세였다. 그해 봄에도 빛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는 죽기 얼마 전까지 강의했고, 대화했고, 새로운 텍스트를 읽었다. 노년의 그에게 누군가 물었다고 한다. 이해가 끝나는 때가 있느냐고. 그는 답했다. 이해가 끝나는 것은 대화가 끝날 때가 아니라, 대화하려는 의지가 끝날 때라고. 백 번의 봄을 맞으며, 그는 매번 다른 봄 앞에 섰다. 지평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봄은 방향이지 도착이 아니고, 이해는 완결이 아니라 과정이다. 4월을 앞둔 이 빛은 아직 차갑지만, 결이 달라졌다. 나의 선입견도, 나의 지평도, 그 달라짐 속에서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고 말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그러나 그것 없이는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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