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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에세이

오늘도 한숨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25. 11. 14.

 

 

 

거울은 모든 것을 비춘다. 노란 것을 더 노랗게, 쓴 것을 더 진하게, 고요를 더 깊게 비춘다. 표면 위에 놓인 것들은 자신의 그림자를 아래에 두고 존재한다. 우리가 보는 것과 그것이 드리우는 것, 실재는 언제나 이중이다.

 

누군가는 안경을 벗는다. 선명함을 포기하고 본질을 본다. 카페인은 각성을 주지만, 진정한 깨어 있음은 흐릿함 속에 있다. 순수한 표면. 아무것도 흡수하지 않는 자만이 모든 것을 비출 수 있다.

 

하지만 작가는 안다. 아무리 정교한 언어로 이 노란 빛을 묘사해도, 결국 그것은 레몬이 아니라는 것을. 아무리 쓴맛을 형용해도, 그것은 혀 위의 각성이 아니라는 것을. 언어는 언제나 유리판 아래의 반영일 뿐, 위에 놓인 실재가 될 수 없다.

 

나는 더 절실히 깨닫는다. 평생 갈고 닦은 문장도, 심혈을 기울인 은유도, 끝내 그 투명한 경계를 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영원히 유리 아래에서, 위를 향해 손을 뻗는 그림자일 뿐이다. 투명함은 공허가 아니다. 그것은 도달할 수 없음의 다른 이름이다.

 

처음 소설을 써야겠다고 결심한 후 10여 년이 훌쩍 넘었다. 단편과 장편을 쉴새 없이 써댔고, 간혹 지쳐 또 몇 년은 허송세월을 보내곤 했다. 그럼에도 이 욕망은 좀체 줄지 않았다. 이제는 끝까지 가보겠노라고, 일상의 대부분을 작품 쓰기에 할애하고 있다.

 

전에는 이러한 선택이 무료한 일상을 견디는 방편이자, 스스로를 위로하는 지혜로운 선택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욕망이 커질수록 내 삶에 한 획을 기어이 긋고야 말리라는 이상한 오기가 생긴다. 아마도 인생에 한 번도 이렇다 할 성공을 맛본 적 없는 루저의 마지막 발악 같은 것. 그런 생각조차 드는 즈음이다.

 

어제는 오랜만에, 8년쯤 전에 초고를 쓴 중편 동화를 꺼냈다. 틈틈이 손을 보아 원고 400매 퇴고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AI에게 철저히 비판해 달라는 점검을 의뢰했다.

 

총평이 돌아왔다.

 

이 소설은 선한 의도가 과잉된 나머지 오히려 문제적인 작품이 되었습니다. 작가는 다름의 수용’, ‘장애 인식’, ‘세계의 고통에 대한 공감같은 중요한 주제들을 다루려 했지만, 그 과정에서 실제 비극들을 교육적 도구로 전유하고, 복잡한 문제들을 단순한 개인의 깨달음으로 환원했으며, 피해자에게 용서와 극복을 강요하는 서사 구조를 만들어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작가가 이야기를 통제하려는 욕망이 너무 강해서, 캐릭터들이 살아 숨 쉬지 못하고 메시지 전달의 도구로만 기능한다는 점입니다. 분량의 10분의 1로 줄이고, 한 곳에 집중하며, 설교를 빼고 행동으로 보여주는 방식으로 전면 개작이 필요합니다.

 

어쩔 수가 없다.

 

 

그럼에도 나는 쓴다. 거울 아래에서, 위를 향해 손을 뻗는 그림자처럼. 그것이 닿지 않음을 알면서도, 닿으려는 행위 자체가 나를 살아 있게 한다. 그것이 문학의 본질이라면, 나는 아직 그 본질을 향해 걷고 있는 중이다.

 

퇴고를 마친 동화를 AI에게 넘기던 순간, 나는 이상하게도 안도했다. 혹독한 비판이 나를 무너뜨릴까 두려웠지만, 동시에 그 비판이야말로 내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살아 있다는 것은 여전히 배울 수 있다는 뜻이고, 배운다는 것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나는 아직 끝내고 싶지 않다.

 

작가는 결국 실패를 기록하는 존재다. 완성된 문장은 언제나 미완의 감각을 남기고, 가장 정교한 은유조차 실재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실패를 반복하며, 나는 점점 더 투명해질 것이다. 더 많은 것을 비추기 위해, 나를 지우기 위해. 그렇게 나는 깨지기 쉽지만 언젠가는 세계를 온전히 담아낼 수 있는 거울이 되어가기를 희망한다.

 

오늘도 나는 책상 앞에 앉는다. 커피는 식었고, 문장은 여전히 불완전하다. 하지만 나는 안다. 이 불완전함 속에 내가 있다는 것을, 이 흐릿함 속에 내가 깨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깨어 있음이야말로 내가 글 쓰는 자로, 창작하는 자로 살아가는 이유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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