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티를 읽는 나의 방식: 사적인 서술에서 공적인 연대로》
오늘 나는 철학과에서 진행된 특별한 강연을 들었다. 평소 리처드 로티의 길을 조심스레 따라가고자 했던 내게, 이 강연은 오래도록 기다려온 설렘의 시간이었고, 듣는 내내 깊은 즐거움으로 가슴이 일렁였다. 다만 시간이 너무 짧았다는 아쉬움, 그리고 무엇보다 로티 사상의 가장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연대’라는 명제가 생략된 점이 못내 아쉬웠다. 그러나 이 아쉬움은 나의 언어로 정리하고, 나만의 사유로 확장해 보고 싶다. 바로 이 글을 통해.
오늘 나는 한 철학자의 이름 아래 나의 사유를 뒤흔드는 물음을 들었다. “당신의 마지막 어휘는 무엇입니까?” 리처드 로티. 그는 스스로를 철학자라기보다, ‘아이러니스트’라고 불렀다. 이 낯선 단어는 어쩐지 나를 오래도록 붙잡는다. 아이러니스트란, 자기 삶을 끝없이 재서술하고, 자기가 만든 언어로 자기의 우연한 삶을 재구성하며, 그 끝에 마지막 어휘를 찾으려는 사람. 로티는 그런 인간의 모양을 꿈꾸었다.
그는 철학의 구원을 포기한 철학자였다. 더 이상 ‘구원적 진리’는 없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리라는 성서의 문장조차, 이제는 믿을 수 없다고 그는 말했다. 대신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자유를 돌보면, 진리는 스스로를 돌본다.” 이 말은 어쩌면 한 시대의 전환을 알리는 선언처럼 들린다. 절대적 진리의 시대에서 사적인 진실의 시대로, 철학자의 시대에서 소설가와 시인의 시대로. 로티는 분석철학의 치밀한 명제들과 기호논리학의 구속에서 벗어나, 나보코프와 프루스트, 조지 오웰의 문장 속에서 새로운 철학을 읽는다. 그의 철학은 더 이상 폐쇄적인 논증이 아니라, 문학과 예술, 그리고 삶으로 열린다.
그는 존 듀이의 프래그머티즘을 계승하며, 삶을 ‘성장’의 과정으로 보았다. 듀이에게 교육은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경험을 재구성하는 능력을 키우는 일이었다. 삶이란 직선적 경로가 아니라, 매번 다시 쓰이고, 다시 엮이는 이야기. 듀이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특정한 시기에 단 한 번 결정된 직업을 평생 짊어지고 살아갈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한, 끊임없이 변할 수 있고, 변해야 한다. 로티 역시 그런 인간을 꿈꿨다. 자기 삶을 하나의 ‘드라마’로 만들 수 있는 존재. 자기가 직접 쓴 대본으로, 자기가 만든 어휘로.
그러나 로티는 니체처럼 엘리트주의를 지지하지 않는다. 그는 니체의 자율성을 계승하면서도, 그것을 더 많은 사람의 가능성으로 열어두었다. ‘각자의 삶이란 제 나름의 메타포로 맵시를 뽐내려는 시도’라 했던 그의 말은, 인생을 하나의 시적 사유로 초대한다. 정답을 찾기 위한 철학이 아니라, 자신만의 질문을 던지고, 자신만의 언어로 서사를 짓는 철학.
인간은 모델이 없다고, 그는 말한다. 우리는 이성과 욕망, 타인과의 충돌 속에서, 늘 불완전하고 고뇌하는 존재다. 그 불완전함 안에서 우리는 자꾸만 다른 어휘를 찾아 나선다. 어떤 어휘는 나를 구원하지 못하고, 어떤 어휘는 너무 늦게 도착하며, 어떤 어휘는 나를 오히려 무너뜨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쓴다. 말한다. 재서술한다. 자기 삶의 마지막 어휘를, 마지막 한 문장을 찾기 위해.
그는 철학의 전통을 향해 물었다. “왜 철학은 총체적 진리를 욕망하는가? 왜 종결을 원하며, 왜 모든 것에 이름 붙이기를 그토록 갈망하는가?” 그리고 그는 그 집요한 철학의 습관을 과감히 버린다. 대신, 삶의 복잡성과 우연성, 실패와 반복을 끌어안는다. 그것이 로티가 말한 ‘새로운 문화의 히어로’, 즉 리버럴 아이러니스트의 길이다.
나는 이 강연을 들으며 내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나는 내 삶을 어떤 언어로 말하고 있는가? 나는 과연 나만의 어휘를 가지고 있는가? 나의 서사는 내가 쓴 것인가, 아니면 남이 준 언어를 흉내 낸 것에 불과한가? 로티는 묻는다. “당신의 마지막 어휘는 무엇입니까?”
어쩌면 그 질문은, 인문학 공부가 끝내 도달해야 할 지점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정답이 아니라, 나의 삶을 재서술해 가는 문장 하나, 문장 하나를 통해 내가 누구인지를 계속해서 묻는 여정이다. 내가 나의 언어로 세계를 다시 말하고, 나만의 리듬으로 삶을 노래할 수 있다면, 비로소 나는 나의 마지막 어휘에 닿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생각한다. 나 또한 누군가의 고통에 귀 기울이는 문장을 쓸 수 있을까. 내 삶의 문장들이 단지 나만의 고백으로 끝나지 않고, 어느 이름 모를 타인의 마음에 작고 조용한 울림이 될 수 있을까. 로티의 철학은 ‘진리’라는 이름의 거대한 신전을 허물고, 그 자리에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들의 집을 짓자고 제안한다. 고통 앞에서 침묵하지 않는 감수성, 낯선 타인을 상상하는 상상력, 그리고 사소하지만 끊임없는 서술의 윤리. 그것이 로티가 우리에게 남긴 연대의 철학이다.
그렇다면 다시 물어야 한다. 나의 마지막 어휘는 무엇이며, 그것은 타인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나는 자유주의자이자 아이러니스트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싶다. 끊임없이 내 언어를 의심하고, 나의 사유를 다시 써 내려가면서도, 내가 쓰는 말이 누군가의 상처를 더 깊게 만들지 않기를, 오히려 그것이 작은 위로가 되기를 소망한다. 내 삶의 이야기가 사적인 진실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것이 사회라는 더 큰 텍스트 안에서 공명할 수 있기를, 그래서 내가 만든 언어가 타인의 언어와 겹쳐지는 교차의 장을 만들어낼 수 있기를 희망한다.
나는 로티가 꿈꾸었던 새로운 인간형, 즉 자기 삶을 드라마로 써내려 가면서도 타인의 고통에 민감한 감수성을 지닌 존재, 자신만의 어휘로 세계를 재구성하면서도 연대의 언어를 버리지 않는 존재가 되고 싶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끝내 완성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불완전함과 끝없음을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아이러니스트의 윤리는 언제나 열린 결말 속에 있기 때문이다.
로티는 말한다. “각자의 삶이란 제 나름의 메타포로 맵시를 뽐내려는 시도”라고. 나 또한 나의 메타포를 찾고 싶다. 단지 나를 위한 메타포가 아니라, 나와 함께 살아가는 세계를 위한 메타포. 나의 마지막 어휘가 단지 나의 것이 아니라, 타인과 연결될 수 있는 언어이기를, 그 언어가 누군가에게 다정한 가능성으로 남기를 바란다. 그것이 나의 윤리이고, 내가 꿈꾸는 삶의 방식이며, 리처드 로티가 말한 '연대하는 아이러니스트'로서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는 내가 지향하는 로티의 삶을 실현할 수 있을까?
첫째, 나는 매일의 사유를 기록하는 일에 게으르지 않으려 한다. 그것은 거창한 철학적 저술이 아니라, 나의 일상에서 마주친 사건, 문장, 얼굴, 감정의 파편들을 성실히 받아 적는 일이다. ‘사적인 서술’은 나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언어이며, 동시에 타인과의 윤리적 연결을 가능케 하는 실마리이기 때문이다.
둘째, 나는 내가 쓰는 언어를 점검하려 한다. 그것이 누군가를 고정된 정체성 안에 가두지는 않는지, 어떤 상처를 반복하지는 않는지, 혹은 너무 손쉽게 진실을 단언하지는 않는지를 끊임없이 되묻고 싶다. 나는 명확한 단어보다 열린 문장을 지향하고 싶다. 그 열린 문장이야말로 ‘아이러니스트의 문장’이라 믿기 때문이다.
셋째, 나는 읽고, 듣고, 공명하려 한다. 나와 다른 존재들, 다른 역사, 다른 욕망, 다른 목소리를 가진 타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나의 ‘공적인 어휘’를 확장하고 싶다. 공동체란 완전한 합의의 장소가 아니라, 서로 다른 말들이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조심스럽게 곁을 내주는 자리이기에, 나는 그 조심스러움을 나의 정치적 태도로 삼고 싶다.
마지막으로, 나는 내가 쓰는 글이 누군가에게 “너의 고통을 내가 듣고 있다”고 말해주는 문장이 되기를 바란다. 내가 쓰는 문장이 그런 연대의 가능성을 품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내가 꿈꾸는 ‘아이러니스트의 윤리’가 삶으로 구현된 순간일 것이다.
그리고 오늘, 나는 그 가능성의 입구에서 한 사람의 이름을 다시 되새긴다. 리처드 로티.
늘 화요일은 연강이 많은 날이어서 몹시 피곤한 날이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피로감보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는 설렘으로 가득 찼다. 마치 오래된 연인을 우연히 다시 만난 것처럼 어쩌면 오늘 나는 리처드 로티를 진짜로 ‘만난’ 것일지도 모르겠다.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철학자와의 만남. 이 밤, 쉽게 잠들 수 없을 것 같다. 차후 그의 서적들을 하나씩 읽어나가며, 오늘의 이 두근거림을 오래도록 간직해보고 싶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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