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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23학번 대학 새내기의 분투기

문학연구 방법론, 푸코, 들뢰즈, 데리다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25. 5. 27.

 

 

 

 

 

요즘 국문과 수업 중에 가장 기다려지는 시간 중 한 과목은 문학연구 방법론이다. 복수전공이라 처음엔 낯설고 긴장도 됐지만, 생각보다 훨씬 깊고 재미있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전공 수업에서는 잘 다루지 않았던 현대 철학자들을 이 수업을 통해 더 가까이 만나고 있다는 점이다.

푸코, 들뢰즈, 데리다. 이름만으로도 낯설게 빛나는 이 철학자들의 사유가, 문학과 어떻게 만나는지를 배우고 있다. 문장이 사유를 담고, 사유가 또다시 문장을 밀어내는 그 흐름 속에서 나는 매번 작은 감탄을 한다.

지난 겨울, 현대 철학의 흐름을 혼자 조심스럽게 개관했던 시간이 있었는데, 그때의 공부가 지금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그 조용한 준비가 이제야 꽃처럼 피어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말시험이 곧 다가오고 있어서, 오늘은 그동안 배운 것들을 간단히 정리해보려고 한다. 마음은 조금 분주하지만, 그래도 기쁜 마음이 크다. 요즘 나는 철학과 문학이 어떻게 맞닿는지를, 수업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매일 조금씩 배워가는 중이다.

 

문학연구 방법론

 

미셸 푸코(1926~1984)

담론의 독창성/진부성을 거부하고 담론의 규칙성/무규칙성에 관심

푸코는 전통 철학이 전제해온 진리의미를 고정된 실체로 바라보는 관점을 철저히 의심했다. 그는 의미란 어느 한 개인의 독창적 사유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시대와 제도, 권력, 규율이 교차하는 담론(dispositif)의 장 안에서 형성되고 구성되며 통제되는 체계적 산물이라고 보았다.

그가 주목한 것은 무엇이 참인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어떻게 그것이 참으로 여겨지게 되었는가’, 무엇이 말해질 수 있으며, 무엇은 침묵 속에 갇히는가를 결정짓는 담론의 보이지 않는 규칙성이었다.

푸코에게 있어 지식은 축적되거나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말하기의 조건속에서 허용되거나 억압되는 규칙들에 의해 구성되는 담론의 장치이며, 그것은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질서 속에서 끊임없이 생성되고 해체된다.

그는 개인의 창조적 천재성을 강조하는 해석을 경계하고, 오히려 말이 어떻게 말될 수 있었는가’, 다시 말해 어떤 시대, 어떤 공간, 어떤 제도 속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말이 구성되었는지를 묻는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그가 일관되게 추적한 지식의 고고학(archéologie du savoir)이라는 방법론과 연결된다.

푸코는 말해진 것 그 자체보다, ‘말하게 만든 구조와 조건에 관심을 두었다. , 담론의 독창성이나 진부함보다 그 담론이 가능하게 한 권력과 지식의 얽힘, 그리고 그로부터 벗어나는 침묵과 균열의 가능성에 주목했던 것이다.

이러한 푸코의 사유에 대해 질 들뢰즈(Gilles Deleuze)는 다음과 같은 찬사를 남긴다:

푸코는 가장 완전한, 어쩌면 유일한 20세기의 철학자이다. 그는 19세기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철학자다.”

질 들뢰즈, 푸코서문 중

이 말은 푸코가 계몽주의와 주체 중심 사유의 19세기적 유산에서 단절되어, 사유의 구조 자체를 새롭게 재배열한 철학자라는 평가다.

반대로 푸코 역시 들뢰즈의 사유에 대해 깊은 경외를 표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언젠가 20세기는 들뢰즈의 이름으로 기억될 것이다.”

미셸 푸코, 1970년대 인터뷰 중

이는 들뢰즈의 차이와 생성의 철학, 그리고 사유의 격렬한 자유에 대한 푸코의 극찬이자, 두 철학자 사이의 비판적 연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문장이다. 푸코가 권력과 담론을 해체하며 사유의 조건을 탐사했다면, 들뢰즈는 차이와 운동을 통해 사유의 열림과 창조를 밀어붙였고, 그들은 서로의 철학을 가장 깊이 있게 이해한 동시대의 반향자였다.

 

지식의 고고학

푸코는 지식이 축적되고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과 제도의 얽힘 속에서 말해짐의 조건에 따라 구성되는 역사적 산물이라고 보았다. 그는 이러한 관점에서 지식의 계보를 탐색하는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했는데, 이를 고고학(archéologie)’이라 명명했다. 고고학은 과거의 사유가 남긴 무의식적 층위의 구조들, 다시 말해 지식이 말해질 수 있었던 조건 자체를 발굴하는 시도이다.

푸코의 대표 저작들은 이 고고학적 관점을 바탕으로, 우리가 정상이라고 여겨온 사유의 기반들이 얼마나 폭력적이며 역사적으로 구축된 것인지 폭로한다.

1) 광기의 역사(1961)

광기의 역사는 푸코의 초기 대표작으로, 고전주의 시대 이후 광기가 어떻게 사회적 배제의 대상이 되었는가를 추적한 책이다. 푸코는 이 책에서 중세에는 광기가 일종의 신적 신비나 진실의 매개로 받아들여졌지만, 근대에 들어서는 이성의 이름으로 격리되고 수용소로 내몰리는 존재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 광기의 개념은 고정된 본질이 아니라, 권력과 제도가 구성한 역사적 산물이다. 그는 데카르트적 이성과 계몽주의 합리성이 만들어낸 정상/비정상의 이분법이 어떻게 광기를 통제와 억압의 대상으로 만들었는지를 철저히 해부한다.

이 책에서 드러나는 푸코의 문제의식은 단순히 정신의학적 진단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누가 무엇을 광기라 부를 권력을 가졌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에 다가서는 것이다.

광기의 역사는 이후 푸코 철학의 핵심 개념인 담론, 권력, 배제의 장치들이 어떻게 등장하게 되는지를 예고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2) 지식의 고고학(1969)

지식의 고고학은 푸코의 방법론을 본격적으로 정식화한 이론서이다. 그는 이 책에서 철학이나 사학에서 전통적으로 사용되던 해석 방식 즉 작가의 의도, 시대정신, 정신사적 연속성 같은 것들을 거부한다. 대신 그는 담론 분석을 통해, 개별 텍스트들 사이에 흐르는 말의 규칙들, 담론 형성의 법칙을 추적하고자 한다. 이 책에서 푸코는 텍스트들에 내재된 말해짐의 조건들’, 발화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체계, 그리고 지식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적 환경에 주목한다.

고고학이란 이름은 지층을 파헤치듯 사유의 무의식을 파고드는 작업을 상징한다. 푸코는 이를 통해, 철학이 더 이상 진리를 탐색하는 학문이 아니라, 진리가 어떻게 생산되는지를 탐사하는 역사적 실천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푸코 철학의 방법론적 전환점으로 평가되며, 이후 계보학(généalogie)과 권력론 연구로 넘어가는 다리를 놓는다.

 

3) 말과 사물(1966)

말과 사물은 푸코의 고고학적 방법이 본격적으로 적용된 대표 저작으로, 서구 지식의 인식론적 단층(rupture)을 세 시기로 나누어 설명한다:

르네상스적 유사성의 시대 → ② 고전주의적 재현의 시대 → ③ 근대의 인간 중심 시대.

푸코는 각 시대마다 지식이 어떤 방식으로 구성되었고, 어떤 에피스테메(episteme, 지식의 무의식적 체계)가 지배했는지를 추적한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그는,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근대의 발명품이며, 언젠가는 해변의 모래 위에 쓰인 글자처럼 사라질 존재일 뿐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근대의 발명이며,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다.”

― 『말과 사물

이 문장은 근대 인문학의 자기중심적 관점에 대한 철저한 해체이자, ‘인간개념의 종말에 대한 철학적 선언이다.

말과 사물은 단순한 사유의 분류사가 아니라, 말이 세계를 조직하는 방식, 그리고 그 방식들이 어떻게 권력에 따라 바뀌어 왔는지를 보여주는 철학적 지도이다. 이 책은 이후 성의 역사와 같은 권력·주체·성과의 문제로 확장되는 푸코 사유의 전환점을 제공하며, 그 자체로 20세기 사유의 획기적인 분절선으로 평가된다.

 

3. 계보학적 단계

푸코는 지식의 고고학이후, 구조에 대한 분석만으로는 지식과 권력의 실제 작동을 설명하기에 불충분하다고 판단하고, 보다 역사적이고 실천적인 분석 방법론으로 전환한다. 그는 니체의 도덕의 계보에서 영향을 받아, ‘기원을 묻지 않고, ‘생성의 조건을 파헤치는 역사적 실천으로서의 철학을 지향한다. 이를 푸코는 계보학(généalogie)’이라 불렀다.

1) 담론의 질서(1971년 콜레주 드 프랑스 강연, 동명의 소책자)

이 강연은 푸코의 계보학적 전환을 알리는 선언문 같은 작품으로, 지식과 진리가 어떻게 권력의 명령과 배제의 장치 속에서 형성되는지를 드러내는 텍스트이다. 푸코는 여섯 가지 핵심 축을 통해 담론이 작동하는 방식을 분석한다.

배제의 외부적 과정들

금지(taboo): 특정 주제나 말하기 자체가 금지되며, 금기는 항상 권력과 욕망과 얽혀 있다.

분할과 배척(division and rejection): ‘광기와 같이, 어떤 주체는 합리성 밖으로 내쳐지며 정상/비정상의 이분법이 형성된다.

진위의 대립(true/false): 진리는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특정 제도와 장치 속에서 선택적으로 생산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배제의 내부적 과정들

주석(commentary): 담론이 재생산되는 방식으로, 특정한 말들은 계속해서 반복되고 설명되며 권위 있는 진리의 형태로 고착된다.

저자(author): ‘저자라는 개념은 담론의 생산자를 특정하고, 지식의 경계를 규정짓는 기능을 한다.

과목들(subjects/disciplines): 지식은 특정한 학문 제도 안에서만 합법적으로 말해질 수 있으며, 담론은 학문적 규율 안에서 재생산된다.

주체의 희박화

푸코는 말하는 주체가 자율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담론의 구조에 의해 형성되고 통제된 결과임을 지적한다.

주체는 말의 기원이 아니라, 담론 속에서 산출된 효과다.

선험적 주체의 철학들 비판

칸트 이후 철학은 주체를 사유의 중심으로 전제해 왔다. 그러나 푸코는 이를 해체하며, 주체는 역사적 제도, 권력 장치, 담론 속에서 구성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방법상의 원리들

푸코는 개시성(외부의 충격), 불연속성(단절), 특수성(보편성의 해체), 물질성(담론의 제도적 기반) 같은 개념들을 중심으로

고정된 해석에서 벗어난 계보학적 분석의 네 가지 원리를 제시한다.

비판과 계보학

푸코에게 비판이란 권력과 진리의 결합을 의심하고 해체하는 실천이다. 그는 철학을 진리를 말하는 학문이 아니라, 진리가 말해지는 방식을 질문하는 실천적 작업으로 전환시킨다. 계보학은 바로 그런 비판의 도구이다.

2) 권력/지식: 통치의 기술이 행사되는 방식

푸코는 지식과 권력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 서로를 생산하고 강화하는 관계에 있다고 본다. 그는 이를 권력/지식(power/knowledge)’이라 부르며, 지식은 항상 어떤 통치 기술의 일부로 작동하며, 권력은 지식을 통해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한다고 본다.

: 정신의학, 생물학, 인류학, 범죄학은 중립적 지식이 아니라, 인간을 규율하고 감시하는 기술로 기능한다.

, 지식은 권력의 언어이며, 권력은 지식의 지층 속에 숨어 있다.

3) 파놉티콘(Panopticon): 감시 권력의 은유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파놉티콘이라는 벤담의 감옥 설계를 차용해, 근대 권력의 본질이 감시를 통한 내면화임을 설명한다.

파놉티콘에서는 한 명의 감시자가 모든 수감자를 항상 볼 수 있는 구조를 만든다.

감시자가 실제로 보고 있지 않아도, 수감자는 스스로를 감시하게 되고, 이는 자발적인 순응으로 이어진다.

이것은 물리적 억압이 아니라, 시선의 권력이다.

이 모델은 감옥을 넘어 학교, 병원, 군대, 공장 등 근대 사회 전체로 확장된다. 파놉티콘은 근대 권력이 어떻게 몸을 규율하고, 주체를 구성하는가를 상징하는 탁월한 개념이다.

4) 저자란 무엇인가(1969)

푸코는 이 짧은 글에서 저자(author)’라는 개념 자체가 권력의 산물이며, 지식의 관리와 통제 장치임을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저자는 단순히 글을 쓴 사람이 아니라, 어떤 말이 지식이 될 수 있는지 정하는 통과의례다.

저자 기능(author-function)’이란 텍스트가 어떤 규칙, 소속, 권위를 갖게 되는 방식을 말한다.

이는 곧 지식의 배제 구조와 연결되며, 어떤 말은 익명성속에서는 진리로 간주되지 않게 되는 체제를 보여준다.

5) 계보학적 비판

푸코의 계보학은 단순히 역사를 다시 쓰는 작업이 아니라, 역사를 통해 현재를 낯설게 보고, 권력의 작동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실천적 철학이다.

계보학은 기원을 묻지 않는다. 대신 우연, 단절, 비규칙성, 균열의 역사를 발굴한다.

왜 우리는 오늘 이렇게 생각하는가?’라는 물음을 통해, 푸코는 현재의 당연함을 해체하고, 다른 가능성의 사유 공간을 열어젖힌다.

이는 철학이 더 이상 본질을 탐색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을 해체하고 경계를 밀어붙이는 작업이 되어야 한다는 푸코의 선언이다.

6) 성의 역사1: 성 개념의 형성사를 통한 권력/지식 관계 규명

이 책은 성(sexuality)에 대한 억압의 역사가 아니라, ‘성에 대해 말하게 만드는 권력의 전략을 분석한 계보학적 작업이다.

푸코는 단순히 성이 억압당했다고 보지 않고, 오히려 19세기 이후 성에 대한 말하기가 급격히 증가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를 그는 성에 대한 담론의 폭발이라 부른다.

근대는 성을 숨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말하고, 기록하고, 분류하며, 통제하려는 욕망을 키워왔다.

이 과정에서 성은 생명정치(biopolitics)의 중심이 되었으며, 성에 대한 지식은 몸과 인구를 통제하는 기술로 작동하게 된다.

성은 단순한 욕망이 아니라, 근대 사회의 규율-권력의 핵심 축이다.

성의 역사는 권력과 지식, 담론, 주체 형성의 총체적 결합을 보여주는 푸코 후기 사유의 집대성이며, 이후 자기 배려와 주체 윤리학으로 이어지는 철학적 이행의 기점이 된다.

 

4. 윤리학적 국면

1) 근대의 생체정치: 순정하는 신체

푸코는 성의 역사1권과 감시와 처벌등에서, 근대 권력의 특징은 단순한 억압이나 처벌이 아니라, 삶과 몸을 직접 통제하는 생체정치(biopolitics)라고 보았다. 생체정치는 인간의 몸과 생명을 생산적 자원으로 간주하여, 보다 효율적으로 통치하는 기술이다. 인간은 죽게 내버려 두는 존재가 아니라, ‘살게 하되, 특정 방식으로만 살도록 길들여지는 존재가 된다. 학교, 병원, 군대, 감옥 등은 모두 이런 규율의 장치이며, 신체는 이 권력 안에서 복종과 순응을 학습하는 대상이 된다.

푸코는 이처럼 근대가 탄생시킨 순정하는 신체’, ‘내면화된 주체를 드러내고 해체하는 데서 철학을 시작했지만, 후기로 갈수록 그는 통제된 신체를 넘어서는 자유의 실천, 자기의 윤리에 관심을 갖는다.

2) 비판이란 무엇인가: 비판은 복종하지 않을 용기

푸코는 비판을 단순한 이론적 분석이 아니라, 지배적인 권력과 진리 체계에 복종하지 않을 용기를 실천하는 행위라고 정의한다. “비판은, 복종하지 않을 용기이다.” 이 글에서 그는 계몽이란 더 이상 이성의 보편성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사유 조건을 묻고, 현재를 문제화하는 능력이라고 주장한다. 비판이란 곧 다르게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여는 실천”, 즉 철학을 삶의 형식으로서 실천하려는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행위이다.

3) 성의 역사2, 3: 자기의 윤리와 실천

말년의 푸코는 윤리의 문제를 타인에게 행하는 행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형성하는 방식으로 재정의한다.

그는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윤리적 실천 속에서, 자기를 통치하고, 자기의 진실을 말하고, 자기 자신을 조형하는 방식에 주목한다.

2쾌락의 활용: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쾌락은 억압의 대상이 아니라, 적절히 관리되어야 할 삶의 기술이었다. 주체는 자제력과 균형을 통해 쾌락을 자기 형성의 재료로 사용했다.

3자기 배려: 로마 후기 사회에서 강조된 것은 자기 돌봄(epimeleia heautou)이었다. 이는 단순한 자기애가 아니라, 자기 성찰, 자기 절제, 자기 훈련을 통해 자신을 윤리적 존재로 만들어가는 실천이었다.

푸코는 이러한 고대의 윤리적 실천에서 현대인의 윤리적 자율성과 저항 가능성의 단서를 발견한다. 그는 윤리란 규범의 내면화가 아니라, 자기를 형상화하는 미학적 실천임을 강조한다.

4) 자신을 예술 작품으로 창조하자 "존재의 미학"

푸코의 철학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만들어가는 삶으로 귀결된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하나의 예술작품처럼 만들어야 한다.”

푸코, 자기 배려관련 인터뷰 중

이는 정해진 윤리적 규범에 순응하는 삶이 아니라, 스스로 규율을 구성하고 그 속에서 자신을 창조하는 삶을 지향하는 것이다. 푸코에게 윤리는 금지의 윤리도, 보편의 윤리도 아니다. 그것은 자기-형성(self-forming)의 기술이며, 주체란 사회가 주는 틀에 갇히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삶의 스타일을 만들어가는 존재이다. 삶은 철학이 되어야 하고, 철학은 삶의 방식이 되어야 한다.

 

정리: 고고학 계보학 윤리학으로

구분                     내용 중심                                                           저작

고고학적 국면      지식의 말해짐을 가능케 하는 조건 분석             광기의 역사, 지식의 고 고학, 말과 사물

계보학적 국면      지식/권력의 작동 방식, 통제 장치의 계보 분석    담론의 질서, 감시와 처 벌, 성의 역사 1

윤리학적 국면      자기 통치의 미학, 주체의 자기 창조                   비판이란 무엇인가, 성 의 역사 2, 3, 자기 배려

 

 

 

해체론

1. 자크 데리다의 해체론 (Jacques Derrida, 1930~2004)

1) 음성중심주의, 로고스 중심주의, 백인 중심주의 비판

데리다는 서구 형이상학 전통을 관통하는 중심주의(logocentrism)의 구조를 비판한다. 그 구조란 언제나 중심을 세우고 주변을 배제함으로써 의미를 안정화시키려는 움직임이다.

음성중심주의는 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말은 살아 있는 주체와 연결되어 있고, 글은 부재의 흔적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데리다는 모든 말도 이미 기표의 흔적이자 반복 가능한 차연의 구조를 따른다고 본다.

로고스 중심주의는 진리, 이성, 주체, 기원과 같은 개념에 중심을 부여하고, 이로부터 철학적 폭력과 배제가 발생한다고 본다.

백인 중심주의는 서구-남성-이성의 시각을 보편화하여 타자(여성, 유색인, 비서구, 비정상)을 배제하는 사유체계로, 데리다는 이를 탈식민적·탈구조적 사유로 전환시킨다.

2) 흔적(trace)

데리다에게 흔적은 의미가 항상 다른 기표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구성된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핵심 개념이다. 하나의 기호(sign)나 말은 그 자체로 완전한 의미를 담을 수 없으며, 이미 지나간 기표들의 잔향(), 아직 도래하지 않은 기표들의 예감 속에서 끊임없이 지연되고 차이화되는 운동을 내포한다.

흔적은 단순히 과거의 잔여물이 아니라, 의미가 절대로 지금-여기에 완전히 도착할 수 없도록 만드는 비가시적 구조다.

말하자면,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 하나하나는 이전에 존재했던 수많은 언어적 맥락의 흔적을 지니고 있으며, 그 흔적은 현재의 의미를 불안정하게 하고, 동시에 미래의 의미를 유예시킨다.

데리다는 이를 통해 **현존(presence)**의 철학, 즉 의미가 지금 이곳에 온전히 있다는 믿음을 근본적으로 흔들어버린다.

흔적은 항상 다른 기호를 호출하며, 그로 인해 어떤 말도, 어떤 글도, 스스로를 폐쇄적·자족적인 의미체계로 완결시킬 수 없다.

흔적은 기원에 앞서며, 의미는 항상 그 기원을 상실한 채 자신을 드러낸다.”

이 말은, 의미는 결코 어떤 기원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항상 다른 기표들 간의 흔적적 관계에서 생겨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리고 바로 이 흔적성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말 속에서 부재하는 것의 울림, 말해지지 않은 것의 존재를 들을 수 있게 된다.

흔적은 곧 해체의 시선이다. 그것은 말이 숨기는 것, 쓰여지지 않은 것, 잊혀졌지만 여전히 작동하는 것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이는 단순한 언어철학이 아니라, 기억되지 못한 역사, 말해지지 못한 고통, 지워진 타자의 흔적을 되살리는 윤리적 실천이기도 하다.

3) 음성중심주의 (심화)

서구 사유에서 말은 현재의 말하는 자’, ‘의미를 창출하는 주체와 연결된다. 글은 그 말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되어왔다. 데리다는 이 위계를 전복한다.

모든 언어 행위는 기표의 체계 속에 얽힌 반복 가능성을 기반으로 하며, ‘살아 있는 목소리조차도 항상 타자의 흔적을 품는다.

결국 음성도 텍스트이며, 말 또한 부재의 흔적 위에 성립된 것이다.

4) 결정불가능성: 바이러스와 좀비

해체론은 항상 결정불가능한 순간을 탐색한다. 결정되지 않음의 상태야말로, 윤리적·정치적 판단의 진정한 장소라고 보기 때문이다.

바이러스는 체계 속에 침투하지만 체계 바깥의 요소이기도 하다. 경계를 무너뜨리면서도 그 경계 안에서 작동하는 이중성은 해체론의 본질을 드러낸다.

좀비는 죽었지만 살아 있는 존재다. 정체성의 모호성과 경계의 파괴는 해체론의 철학적 윤리를 상징하는 형상이다.

데리다는 이처럼 명확한 이분법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존재들을 통해, 정체성의 경직된 틀을 해체하고, 타자성과 타협하지 않는 진정한 사유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5) 반복()가능성

데리다는 반복이란 개념 자체에 근본적인 모순이 내장되어 있다고 본다. 모든 반복은 무언가 동일한 것을 다시 실행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순간의 맥락, 타자성, 차이에 의해 결코 완전히 같은 방식으로 반복될 수 없다. 예컨대 어떤 서약, 고백, 선언이 반복될 때, 그것은 이전의 그것과 같지 않다. 반복이 가능하다는 것은 형식이 존재한다는 뜻이지만, 반복이 일어날 때마다 새로운 차이, 새로운 타자성이 개입된다.

데리다는 이를 가리켜 "반복 가능성은 곧 반복 불가능성이다"라고 말한다. 이 개념은 특히 법과 정의, 약속과 책임의 맥락에서 중요하다. 법은 반복될 수 있지만, 정의는 항상 예외적인 사건으로만 존재하며, 그 사건은 다시 반복되지 않는다. , 해체는 항상 예외와 차이를 수용하는 방식으로 반복을 다시 사유하게 만든다. 문학, , 종교, 철학에서 반복이 가지는 의식적 한계와 윤리적 잠재성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이 바로 데리다의 시도다.

6) différance(차이/차연)과 대리보충(supplement)

différance는 데리다가 만든 고유어로, ‘difference(차이)’‘deferral(지연)’을 결합한 말이다. 이 단어는 프랑스어로는 말소리가 같아 발음으로는 구별되지 않지만, 글쓰기 속에서만 차이를 드러낸다. 이로써 데리다는 언어란 언제나 글쓰기의 흔적, 즉 지연된 의미의 장 안에서만 작동한다고 선언한다. 의미는 어떤 단일한 기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항상 다른 기표들과의 차이 속에서 구성되고, 그 의미의 도래는 항상 지연된다. 이는 의미가 도착하지 않음으로써만 존재할 수 있음을 뜻하며, 완전한 의미의 결정은 항상 미뤄진다.

한편, 보충(supplement) 개념은 이러한 구조를 다시 뒤흔든다. 보충이란 어떤 결핍을 메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결핍이 본래부터 있었음을 드러내는 폭로의 행위다. , 보충은 대체물이 아니라, 기원 그 자체를 생산하는 행위다.

: 말이 글을 보충한다고 여겨지지만, 사실은 글이 말의 기원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보충하는 기원인 셈이다.

7) 유령, 망령, 환영 망자들과 함께 존재하기

데리다는 마르크스를 위하여(Spectres of Marx)에서 현대 세계가 유령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한다. 이 유령(specter)은 과거의 잔재가 아니라, 아직 해소되지 않은 책임과 정의의 형상이다. 유령은 지나갔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것, 죽었지만 우리를 떠나지 않는 것, 현재를 괴롭히는 과거의 부재와 흔적이다. 이는 과거의 억압과 잊힌 고통들, 가령 식민주의, 폭력, 전쟁, 계급 불평등, 억울한 죽음 등이 여전히 우리 안에서 말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리하여 데리다는 말한다.

정의란 유령들과 함께 존재할 줄 아는 능력이다.”

유령과 함께 존재한다는 것은 지워진 타자의 목소리를 듣고, 기억을 초과하는 책임에 귀 기울이며, 죽은 자들의 이름을 다시 불러주는 윤리적 실천이다. 이것이 바로 해체의 정치성과 윤리성의 핵심이다.

8) 우정의 정치학과 (이방인의) 환대

데리다는 우정의 정치학에서 우정과 환대가 국가, 주권, 법률의 언어로 환원될 수 없는 윤리적 사유임을 강조한다. 그는 플라톤에서 아리스토텔레스, 몽테뉴, 니체, 레비나스까지 이어지는 전통을 분석하며, 우정이 항상 동일한 자들 사이의 결속으로 정의되어 왔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진정한 우정은 동일성의 강화가 아니라, 차이와 불확실성, 타자와의 거리를 견디는 것이다.

환대(hospitality)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종종 이방인을 환대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환영의 조건을 전제한 제한된 환대이다.

데리다는 말한다: “진정한 환대는 예측 불가능한 타자의 도래에 나를 열어주는 것이다.”

, 환대는 내가 집의 주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문을 열어야 하는 급진적 실천이며, 이것이 해체론의 타자 윤리이자 정치적 가능성이다.

9) 기상천외한 혁명과 문학

데리다는 문학을 단순히 허구의 장르로 보지 않는다. 문학은 철학과 법이 말할 수 없는 것, 말해져서는 안 되는 것을 발화할 수 있는 윤리적 공간이다. 문학은 자유롭기 때문에 무책임하지만, 바로 그 무책임함 때문에 가장 급진적인 책임의 장소가 된다. 작가는 상상의 힘으로 법의 바깥에서 정의를 요청하고, 침묵의 타자에게 언어를 건네는 존재이다. 문학은 또한 혁명의 가능성을 예비하는 공간이다.

문학은 가장 기상천외한, 그러나 반드시 필요했던 혁명들을 준비한다.”

그것은 국가의 언어가 닿을 수 없는 곳, 국가 바깥에서 주권을 교란하는 말의 정치학이며,

말해지지 않았던 상처, 사라진 이들의 기억, 도래하지 않은 것들의 미래를 호출하는 예언적 형식이다.

결론: 정의에 미쳐 있는 철학, 해체론

데리다의 해체론은 단순한 언어비평이 아니라, 기억을 초과하는 책임의 철학이며, 도래하지 않은 정의에 대한 무한한 약속이다.

해체는 정의에 미쳐 있다.”

그것은 의미, 주체, 기원, 진리와 같은 위계적 중심 구조를 전복하고,

오늘날 세계에 만연한 형식적 평등 뒤의 구조적 불평등, 제도화된 억압, 기념되지 않은 타자성을 끝까지 질문한다.

해체란, 계산 불가능한 것과의 만남, 말해지지 않은 것의 귀환,

그리고 역사상 유례없는 괴물과 싸우는 윤리적 사유의 행위다.

 

*결론적으로 데리다의 헤체론은 한정없는 책임감, 그러므로 반드시 기억을 초과하는 것, 계산불가능한 것과 관계가 있다. 해체론은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강력함으로 오늘날 만연한 괴물, 즉 결과적 불평등을 유지하려는 모든 것과의 전쟁을 감행한다. 해체론은 정의에 미쳐있다.

 

2.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

1) 영토화, 재영토화, 탈영토화

영토화(territorialisation): 주체나 체계가 어떤 공간, 질서, 규칙에 자신을 정착시키는 과정. 고정된 정체성, 권력의 구성, 의미의 안정화 등이 이에 해당한다.

재영토화(re-territorialisation): 탈주하거나 파괴된 정체성이나 공간이 다시 새로운 권력 질서에 포섭되는 것. 예를 들어 혁명이 체제로 귀속되는 과정이 여기에 해당한다.

탈영토화(de-territorialisation): 모든 고정된 정체성, 경계, 사유의 틀을 흐름과 운동으로 해체하는 운동. 들뢰즈의 철학은 궁극적으로 이 탈영토화의 과정들에 주목한다.

의미란 고정되지 않는다. 의미는 항상 흘러가고, 이탈하고, 탈주하는 중이다.”

2) 리좀(Rhizome) 중심 없는 생명, 탈주하는 사유

들뢰즈와 가타리는 천 개의 고원에서 철학, 언어, 삶의 구조를 전복적으로 다시 사유하기 위해 리좀(rhizome)’이라는 식물학적 개념을 끌어온다. 리좀은 수직적으로 뻗지 않고, 지면 아래에서 수평적으로 퍼지고 연결되며, 어디서든 자라고, 잘리고, 번식될 수 있는 뿌리줄기를 뜻한다. 이때 리좀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사유의 구조이자 정치적 상상력, 문학적 윤리, 그리고 존재의 조건 그 자체를 설명하는 개념적 프레임이 된다.

* 수목형 사고 vs 리좀형 사고

들뢰즈는 기존의 철학과 인문학이 대부분 수목형 사고(tree-thinking)에 갇혀 있다고 본다. 수목은 뿌리가 중심이 되고, 가지가 위계적으로 뻗어나가며, 모든 의미가 기원, 본질, 중심, 규율을 향해 조직된다. 이런 사유는 선형적·계층적·결정적이며, 결국 진리의 중심, 권력의 핵심, 주체의 동일성을 향한다.

반대로 리좀형 사고(rhizomatic thinking)는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가진다.

탈중심적: 리좀에는 시작도, 끝도, 중심도 없다. 어디든 중간이며, 어디든 접속 가능하다.

비위계적: 위아래가 없고, 주종 구조 없이 자유롭게 접속된다.

다중적: 가지처럼 분기하지 않고, 다방향적 연결과 탈주를 지닌다.

항상 생성 중: 리좀은 고정된 구조가 아니라, 끊임없이 형성되고 해체되는 흐름이다.

끊어질 수 있고, 다시 자랄 수 있음: 어느 부분이 잘려도 자기 복제와 재생산이 가능한 생명의 메커니즘.

* 리좀은 하나의 생태적 존재론

리좀은 단지 철학적 개념이 아니라, 존재와 세계의 방식을 전혀 다르게 사유하는 존재론적 전환이다. 리좀은 존재를 실체본질로 보지 않고, 접속의 상태, 운동의 과정, 에너지의 흐름으로 본다.사물과 사물은 고정된 정체성으로 연결되지 않고, 일시적 접속과 탈주, 다층적 접면을 통해 서로 되기(becoming)의 관계를 형성한다.

이러한 존재론은 생태학, 도시이론, 미학, 젠더, 퀴어 이론 등 여러 학제적 영역에서 중심 구조에 균열을 내는 탈중심적 전략으로 작동할 수 있다.

* 문학과 사유의 리좀화

문학에서 리좀은 하나의 주제, 서사, 중심 플롯에 따라 구성되는 전통적 텍스트 구조에 대한 반역이다.

리좀적 문학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다음 장을 예측할 수 없다: 텍스트는 비선형적이고, 독자는 언제든 접속 가능한 지점을 통해 텍스트에 진입하거나 탈주할 수 있다.

주체는 고정되지 않는다: 화자나 인물은 하나의 중심 자아로 통일되지 않고, 다중적 정체성과 분열, ‘되기의 장으로 구성된다.

장르와 매체의 경계를 넘나든다: 리좀적 텍스트는 서사, , 이미지, 기호, 철학적 언어들이 뒤섞여 새로운 배치(agencement)를 이룬다.

예컨대, 윌리엄 버로스의 컷-업 소설, 카프카의 파편적 텍스트, 블랑쇼와 바르트의 에세이, 현대 퀴어 서사 등은 모두 리좀적 형식의 문학 실험이라 할 수 있다.

* 리좀은 저항의 지도이고 창조의 생태다

리좀은 궁극적으로 억압적 질서에 저항하는 정치적 형식이다. 국가 권력, , 언어, 정체성은 모두 중심화된 구조를 만들고 이를 반복하며 포획하려 한다. 리좀은 그런 포획에서 벗어나 비선형적 저항, 즉흥적 창조, 돌연변이적 생성을 꿈꾼다.

리좀적 사유는 사회운동, 여성주의, 젠더 전복, 예술 실천 등 모든 탈중심적 실천에 이론적 무기가 된다.

리좀은 저항이다. 리좀은 사유의 은신처이자, 불가능한 것들의 숨구멍이다.”

정리: 리좀은 무엇인가?

속성 수목형 사고 리좀형 사고

구조 중심적, 계층적 비중심, 비위계적

운동성 고정, 전개 생성, 접속, 탈주

의미 기원과 본질 중심 흔적과 차이, 다층성

존재론 실체 기반 접속 기반, 되기 존재론

실천 , 제도, 정체성 중심 예외, 변형, 탈주 중심

예술 서사 중심, 고정된 인물 파편, 조각, 변주, 되기의 인물

 

3) 소수집단의 문학(minor literature)

카프카를 분석하며 나온 개념으로, 소수자적 위치에서 중심 언어와 제도를 비틀고 교란하는 문학을 말한다. 여기서 소수(minor)’는 인구의 숫자가 아니라, 권력으로부터의 거리, 그리고 언어적 전복의 실천을 가리킨다. 카프카는 체코의 유대인이면서 독일어로 글을 쓴다. 중심 언어를 차용하면서 동시에 그 언어의 권력 구조를 탈주하는 문학을 창조한다. 소수문학은 개인적인 것을 쓰면서도 항상 집단적 정치성을 띠고, 언어를 통해 정체성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장이 된다.

소수문학은 다른 말하기가 아니라, 말 그 자체를 다르게 만드는 행위이다.”

4) 편집증과 분열증 / 새디즘과 매저키즘

들뢰즈는 정신의학을 병리학적 범주로 보지 않고, 철학적·정치적 감각의 분할 방식으로 분석한다.

편집증(paranoia)은 질서, 규율, 고정된 기호, 중심적 권력을 열망하는 심리 기제다.

반면 분열증(schizophrenia)은 고정되지 않는 정체성, 끝없는 욕망의 흐름, 탈중심적 연결을 지향한다.

이때 분열증은 병이 아니라, 억압된 욕망이 저항과 창조의 힘으로 분출되는 구조로 읽힌다.

매저키즘에 대하여에서는 새디즘과 매저키즘이 같은 쾌락의 양극이 아니라 서로 다른 질서임을 분석한다.

새디즘은 법과 형벌의 서사를 전개하며, 관계의 위계를 유지한다.

매저키즘은 쾌락 속에서 법을 지연시키고, 질서를 연기하는 행위이다.

5) 안티 오이디푸스』 ― 질서화되지 않은 혁명적 에네르기

가타리와 공저한 안티 오이디푸스는 정신분석학, 특히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비판한다. 그들은 오이디푸스 이론이 인간 욕망을 가족 구조 안에만 가두고, 욕망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흐름을 억압한다고 주장한다. 대신 욕망은 구조화되지 않은 에너지이며, 사회는 이 욕망을 항상 통제하고 포획하려 한다.

이 책은 정신분석 + 정치경제학 + 욕망 + 혁명을 하나의 장에서 사유하며,

욕망은 체제를 파괴하는 힘”, “욕망은 저항이고 생산이며 창조라고 외친다.

욕망은 결코 결핍이 아니다. 욕망은 생산하고, 혁명하고, 탈주한다.”

6) 기호체계, 얼굴, 선분적 권력, 동물-되기, 전쟁기계, 포획장치, 욕망의 배치

이 항목은 천 개의 고원에 펼쳐진 들뢰즈의 개념군이다.

기호체계: 사회는 기호를 통해 권력과 질서를 조직한다. 기호는 단순한 언어가 아니라 권력 장치이다.

얼굴(face): 얼굴은 주체성, 신분, 규범 등을 나타내는 감시와 동일화의 장치다. 들뢰즈는 이를 기계적 얼굴성(faciality machine)’이라고 부른다.

선분적 권력(segmentarity): 사회는 직선적, 위계적 분할로 구성된다. 반면, 들뢰즈는 선분을 해체하고, 선을 휘게 하고, 탈주하는 비선형적 흐름을 강조한다.

동물-되기(becoming-animal): 인간을 초월하거나 하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 삶의 감각을 통해 자기 중심성을 해체하는 윤리적·존재론적 행위다.

전쟁기계(war machine): 국가(질서, 고정, 통제)의 논리에 대항하는 유동적 저항 체계.

포획장치(apparatus of capture): 국가, 자본, 제도는 항상 욕망과 삶을 포획하려 한다.

욕망의 배치(agencement): 욕망은 주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 관계, 사회적 흐름 간의 배치와 접속 속에서 발생한다.

7) 기관 없는 신체 (Body without Organs, BwO)

아르토에서 유래된 개념. 기관 없는 신체는 몸이 고정된 기능이나 목적, 규율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상태를 말한다. 욕망과 쾌락의 흐름이 검열 없이, 경계 없이 흐르는 가능성의 장이며, 오이디푸스적 체계나 국가적 질서로부터 벗어난 삶의 잠재력이다. 이 신체는 해방이 아니라, 항상 구성되고 해체되며, 새로운 배치 속에서 다시 생성되는 유동적 장이다.

8) 노마드적 사유

노마드적 사유는 고정된 중심, 이론, 주체에 머무르지 않는 이동적·접속적 사유 방식이다.

들뢰즈는 노마드를 단순한 유목민이 아니라, 사유의 질서 밖에서 새로운 공간을 여는 존재로 이해한다. 노마드적 사유는 지배적 언어를 벗어나고, 중심에 머무르지 않으며, 정체성의 이름을 흔드는 철학이다.

진정한 철학은, 중심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경계에서 들리는 울림을 따르는 것이다.”

노마드는 중심을 비판하는 자가 아니라, 중심에 관심이 없는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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