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살인자의 기억법》 감상문: 기억과 망상의 경계, OSMU로 확장된 감정의 서사
나는 김영하의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을 오래전에 읽었다. 한때 그의 소설에 깊이 빠져 지낸 적이 있었는데, 그 이유는 그의 글이 날카로운 상상력과 인간 심리에 대한 집요한 탐구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간결하고 절제된 문장 속에 독특한 철학적 뉘앙스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현실과 내면의 경계를 허무는 장르적 실험과 윤리적 질문들이 그의 작품의 매력이었다. 『살인자의 기억법』도 그런 인상 깊은 작품 중 하나였다. 그런데 이 소설이 영화화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처음엔 망설였다. 소설의 여운이 흐려질까 봐, 그리고 기억 속 병수의 목소리를 스크린이 덮어버릴까 봐. 그러나 이번 학기 ‘영상문학론’ 수업에서 OSMU 방식에 대한 고찰 과제를 수행하게 되면서, 마침내 영화를 보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다시 마주한 《살인자의 기억법》은, 내가 기억하던 이야기와는 다른 감각과 울림으로 다가왔다.
영화는 원신연 감독이 연출했으며, 설경구가 주연을 맡았다. 김영하의 원작 소설을 기반으로 제작되었으며, 기억을 잃어가는 노년의 연쇄살인범 김병수와 그가 의심하는 또 다른 살인자의 대립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심리 서스펜스물이다. 2017년 개봉 당시 감독판까지 나올 정도로 큰 주목을 받았고, 소설과는 다른 방식으로 감정의 깊이와 서사의 긴장감을 확장시켰다.
이처럼 영화는 원작 소설이 제시한 내면의 흐름을 OSMU 전략을 통해 감각적이고 서사적인 층위로 확장해 낸다.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은 병수의 독백과 기록으로 구성된 건조한 1인칭 시점의 서사다. 그러나 원신연 감독은 병수의 혼란과 죄책감을 시각적으로 해체하며, 병수와 민태주 사이의 서스펜스적 대립각을 강조한다. 민태주는 병수의 기억이 만들어낸 적인가, 아니면 실제 살인범인가? 병수는 끝없이 그를 추적하고, 관객은 이 긴장 속에서 기억과 망상의 경계를 끊임없이 흔들리며 체험하게 된다.
민태주의 존재는 영화화 과정에서 결정적인 서사적 힘을 얻는다. 그는 병수의 과거와 현재가 투영된 인물이며, 결국 병수 자신일 수도 있는 그림자다. 특히 감독판의 결말에서 민태주의 실체가 허상으로 무너질 때, 영화는 병수의 내면에 깊게 새겨진 죄와 망상의 잔혹한 결합을 드러낸다. 이는 단지 서사의 기법이 아니라, 기억에 기대어 존재를 증명하려는 인간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감정의 완결이다. 즉, 민태주는 영화화 과정에서 각색을 통해 새롭게 창조된 캐릭터이며, 원작의 모호성과 불확실함을 보다 극적인 갈등 구조로 바꾸기 위해 설정된 인물이다. 반면, 원작은 이러한 착오 자체가 기억의 왜곡과 죄의식, 존재의 혼돈을 드러내는 장치로 더 차갑고 명확하게 기능한다.
병수는 딸 은희를 지키기 위해 태주를 의심하고 공격하지만, 그 딸조차 실은 친딸이 아니었으며, 마지막엔 은희와의 관계마저 그가 만들어낸 환상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여기서 영화와 소설의 중요한 차이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김영하의 원작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에서 은희는 병수의 친딸이 아니라 요양보호사이다. 병수가 알츠하이머로 인해 현실과 기억이 혼재된 상태에서 그녀를 친딸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병수는 과거에 은희의 부모를 살해한 후, 고아가 된 은희를 '딸처럼' 키우며 함께 살아왔고, 치매가 심해진 현재는 그녀를 진짜 딸이라고 믿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작품 후반부에 이르러 병수는 충격적인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은희는 실제로는 병수의 딸이 아니며, 병수는 그녀의 부모를 죽인 가해자였고, 현재 곁에 있는 은희는 병수를 돌보는 요양보호사일 뿐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심지어 진짜 은희는 이미 죽은 것으로 밝혀지고, 병수는 기억 속에서 그녀를 '살려내어' 함께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설정은 영화판에서도 일정 부분 유지되지만, 영화는 감정적 몰입을 강화하기 위해 병수와 은희 사이의 관계를 보다 부성애적인 서사로 강조한다.
또한 중요한 인물 구성의 차이도 존재한다. 김영하의 원작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에는 영화에서처럼 명확한 인물로서의 '민태주'는 등장하지 않는다. 소설에는 '박주태'라는 인물이 등장하며, 병수가 자신처럼 살인자의 기운을 감지하고 의심하는 대상이다. 박주태는 경찰 출신으로, 병수는 그를 따라다니며 그의 행동을 관찰하고 위협을 느낀다. 그러나 점점 심해지는 기억의 혼란 속에서 병수는 그를 살인범으로 추적하고 공격한다. 하지만 박주태가 실제로 범죄를 저질렀는지, 혹은 단지 병수의 의심에 불과한 존재였는지는 끝내 명확히 밝혀지지 않는다. 이는 독자의 판단을 유보하게 만들며, 병수의 기억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를 드러내는 장치로 기능한다.
병수는 모든 걸 잃는다. 기억도, 사랑도, 구원도. 남은 건 오직 하나—그가 ‘누군가를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기억뿐이다. 영화는 이 ‘살인의 기억’만이 남은 상태를 감각적으로 구축하며, 기억이 진실을 말하지 않을 때, 죄는 어떻게 남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에게 유일한 정서적 연결고리는 누나 마리아였다. 성당에서 수녀가 되기를 원했던 누나. 하지만 누나는 죄책감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병수는 그녀의 부재 속에서 죄의 무게와 구원의 가능성을 더 이상 구분할 수 없게 된다. 마리아는 죽었고, 병수는 살아남았지만, 그 기억은 내내 병수의 무의식 속에 살아남아 ‘벌’을 요구했다. 영화는 이 누나의 존재를 수녀로 환원시키며, 시각적으로 구성하여, 병수의 내면에서 그녀가 어떻게 도덕과 죄의 경계를 구축했는지를 보여준다. 이 장치는 소설에서는 병수의 일기적 독백으로 처리되지만, 영화는 그녀의 부재와 환영을 영상 언어로 구현하며 감정의 밀도를 더한다.
영화의 마지막, 병수는 굴 앞 철길에 다시 서 있다. 그 자리는 영화의 첫 장면이기도 했고, 그는 다시 말한다. “이 기억은 잊지 마라. 민태주가 살아 있다.” 그러나 관객은 안다. 민태주는 죽었을 가능성이 높고, 혹은 아예 실존하지 않았거나, 병수 자신의 투영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럼에도 병수는, 자신이 믿고 싶은 진실을 ‘기억하라’고 읊조린다.
이 말은 단순한 플롯의 복선이 아니라, 철학적으로 “기억이 나를 지탱한다”는 선언이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자가 마지막까지 붙드는 단 하나의 진실. 그것이 설령 망상일지라도, 그 망상을 통해 그는 인간의 자리를 유지하려는 것이다.
“진짜로 죽어야 할 사람은 나밖에 없어.”
“난 살인자로 태어났어.”
“넌 내 딸이 아니야. 그러니까 너는 살인자의 딸이 아니야.”
“내 딸을 구해. 그것이 네가 살아있는 유일한 이유다.”
이 말들은 병수가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윤리적 자백이다. 그는 인간으로서 죄를 감당하려 하고, 최소한 사랑한 존재만은 죄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길 원한다. 이는 단순한 부성애를 넘어선, 타자를 위한 윤리적 선택, 즉 레비나스적인 타자 윤리로도 읽힌다. 병수는 마지막까지 은희를 "살인자의 딸"이 아닌 존재로 놓아주기 위해, 기억과 죄를 홀로 끌어안는다.
그리고 “오기 전에 죽어야 한다”, “은희가 오면 더 살고 싶어진다”는 말은, 병수가 기억 속에서 마지막으로 붙드는 인간다움의 조각이다. 기억을 잃기 전에 죽고 싶다는 바람은, 단지 현실 회피가 아니라, 더 이상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모르게 되기 전에, 죄를 안고 끝내고 싶다는 윤리적 본능이다.
철학적 의미의 요약:
기억과 주체성: 병수는 알츠하이머로 자신을 잃어가지만, 마지막까지 “이 기억은 잊지 마라”라고 외치며,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기억의 끈’을 쥔다. 인간은 기억을 통해 존재하며, 망각은 곧 존재의 소멸이라는 전제를 따른 것이다.
망상과 진실의 경계: “민태주가 살아 있다”는 선언은 사실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병수의 죄와 존재를 설명해주는 마지막 수단이기에 중요하다. 진실이 아니라, 그 진실을 기억하고 싶어 하는 의지가 병수의 존재를 지탱한다.
타자를 위한 윤리: “너는 살인자의 딸이 아니야”라는 말은, 사랑하는 존재에게 죄의 대물림을 끊고자 하는 가장 인간적인 윤리적 행위다. 죄의 유전이 아닌, 기억의 차단을 통해 죄의 반복을 막는 선택. 병수는 죄의 끝에 도달함으로써 스스로를 폐기하고, 타자에게 구원의 길을 남긴다.
나는 물론 오래전에 소설을 먼저 읽었지만, 오늘 다시 본 영화가 훨씬 감각적이고 감정적으로 깊은 울림을 주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을 재발견하게 되었다. 원작이 지닌 건조한 철학적 사유는 영화에서 보다 육체적이고 서사적으로 되살아난다. 병수의 기억 속 혼돈이 단지 문장으로 묘사되는 것이 아니라, 배우의 눈빛, 음향, 편집, 장면 전환을 통해 피부에 닿는 체험으로 구현된 것이다. 그 긴장감과 감정적 밀도는 분명 영화만이 해낼 수 있는 OSMU의 감정 번역이었다.
무엇보다 설경구의 연기는 이 영화의 정서적 핵심이었다. 특히 그가 기억의 단절을 예감할 때마다 왼쪽 눈 밑이 경련하듯 떨리는 장면은, 단순한 신체 연기가 아니라, 병수라는 인물의 내면적 붕괴와 죄의 자각을 하나의 육체 언어로 표현한 압도적인 순간이었다. 그 눈과 떨림은 이 영화에서 가장 잊지 말아야 할 이미지로 남는다. 그것은 인간이 죄를 짊어진 채 살아간다는 것, 기억이 사라져도 감각은 끝까지 저항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살아 있는 연기였다.
이처럼 《살인자의 기억법》은 단순한 범죄/심리 스릴러가 아니라, 기억과 망각, 윤리와 죄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감정의 철학 영화다. 그리고 영화화는 이런 주제를 시각적으로 재구성하며, 문학이 도달하지 못한 감각의 깊이까지 확장해냈다. 이것이야말로 OSMU 전략의 진정한 가능성이자, 이 영화가 강렬했던 이유다.
#김영하 #살인자의기억법 #OSMU #설경구연기 #원신연 감독 #기억과죄 #심리스릴러 #철학영화 #망상과현실 #레비나스 #영화감상문 #문학영화비교 #영상문학론 #감정의확장 #대학과제 #국립군산대학교 #군산대국문과 #군산대철학과 #lettersfromatraveler
'영화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화 《소울메이트》(2023) 감상문 (0) | 2025.05.09 |
---|---|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 감상문 (0) | 2025.05.08 |
〈소년의 시간〉, 우리는 언제 그 아이를 놓아버렸는가, 4편 관람 후기 (0) | 2025.05.05 |
전주 국제 영화제 개막작 『콘티넨탈 '25』 비평문 (0) | 2025.05.02 |
우리의 마법은? 영화 바그다드 카페에서 (0) | 2024.10.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