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전공 중인 국문과의 현대소설론 수업에서는 매주 한 편씩 주로 1970~1990년대의 단편소설을 읽고 토론한다. 어떤 작품들은 시대적 배경이 강하게 반영되어 오늘날의 정서와는 다소 이질적인 느낌을 주기도 했지만, 이번 차에 읽은 이청준의 단편 『떠도는 말들』은 전화기와 혼선이라는 오래된 소재에도 불구하고, 그 주제만큼은 여전히 깊은 울림을 남겼다.
하이데거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고 말했듯, 이 작품은 단지 말의 혼선을 넘어서, 말이 본래의 장소를 잃고 존재가 흔들리는 상황을 정교하게 묘사한다. 특히 자서전 대필 작가 윤지욱이 겪는 말의 부재와 고독은, 메를로퐁티가 말한 ‘세계에로의 열림으로서의 언어’가 봉인된 상태이자, 데리다가 말한 기표의 미끄러짐 속에서 방황하는 존재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전화기 너머 존재하지 않는 여성, 그리고 끝내 이루어지지 않는 만남은, 레비나스가 말하는 '얼굴 없는 타자'와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윤리적 호출을 상기시킨다. 나는 이 소설을 언어 존재론과 타자 윤리라는 철학적 틀을 통해 분석해 보고자 한다.
『떠도는 말들』과 언어의 윤리, 존재의 철학
이청준의 단편소설 『떠도는 말들』은 1973년에 발표된 작품으로, 같은 해 출간된 작품집 『자서전들 쓰십시다』에 수록되어 있으며, 부제로 ‘언어사회학서설’이라는 명제를 달고 있다.
소설 『떠도는 말들』은 언어의 본질과 소통의 불가능성, 그리고 말과 말 사이에서 고립되어가는 인간의 고독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언어를 직업으로 삼은 자서전 대필 작가 윤지욱은, 어느 날 잘못 걸려온 전화 한 통을 받으며 낯선 여인과 알 수 없는 대화를 시작하게 된다. 그녀는 그를 ‘윤 선생님’이라 부르며 그의 직업과 존재에 대해 묘하게 알고 있는 듯하지만, 실제 만남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녀는 감기에 걸려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말만 남기고 사라진다.
이 사건은 단순한 착오가 아니라, 윤지욱의 존재와 언어에 대한 세계관을 뒤흔드는 계기가 된다. “모든 전화들이 어찌 된 심판인지 거개가 다 혼선 아니면 오접, 착각 아니면 고의에 의한 장난 전화들뿐이라는 사실”에 그는 전율하고, 더 나아가 이렇게 자각한다.
“모든 말들이 길을 헤매고 있다. 사람들은 말들을 혹사했고 배반했고 기진맥진 지쳐나게 했다. 말들은 고향을 잃어버렸고 그들의 고향에 대한 감사와 의리를 잃어버렸다.”
이청준은 여기서, 언어가 본래의 자리, 즉 진정한 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자기 목적적으로 소모되고 있다는 비극을 그려낸다. 『떠도는 말들』은 언어가 본래의 의미를 잃고 떠돌게 되는 현대 사회의 언어적 혼란을 반영하며, 이를 통해 언어의 진실성과 인간 사이의 소통에 대한 깊은 성찰을 제시한다. 이 작품은 이청준 문학 세계에서 ‘말’이라는 주제에 천착해온 흐름 속에 위치하면서도, 특히나 현대사회의 실시간 혼란과 ‘말의 유령화’를 날카롭게 포착한다.
현상학자 메를로퐁티나 하이데거처럼, 말은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이라는 관점에서 이 소설을 해석할 수 있다. 이청준의 ‘떠도는 말들’은 단지 떠도는 정보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뿌리째 흔들리는 상태를 말한다. 윤지욱은 존재의 붕괴를 경험하는 인간이자, 말이라는 ‘세계 열기의 통로’를 상실한 채 살아가는 말 이후의 인간이다. 그는 단지 엉터리 전화를 받은 인물이 아니라, 하이데거가 말한 ‘말은 존재의 집’이라는 테제를 역으로 증명하는 인물이다. 말이 길을 잃자, 존재는 붕괴하고, 관계는 불가능해지고, 고독은 철학이 된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윤지욱이 그 전화가 엉터리임을 알면서도 기다린다는 점이다. 그는 상대의 말이 환영일지도 모른다는 불안 속에서도, 그 말을 통해 다시금 누군가와 연결되길 바란다. “역시 유령이었어. 정처 없고 허망한 말들의 유령. 바야흐로 복수를 꿈꾸기 시작한 말들의 유령. 하지만 아아 살아 있는 말들은 그럼 이제 다신 어디서도 만날 수가 없단 말인가. 이제는 더 이상 기다려 볼 수도 없단 말인가.”
그가 기다리는 것은 사실 특정한 상대가 아니라,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살아 있는 말’—진정성과 윤리를 가진 말, 그 말로 연결되는 인간의 가능성이다. 이는 단순히 언어의 붕괴를 넘어, 말과 존재를 잃지 않으려는 마지막 고투이자 애도다.
윤지욱은 전화기 너머 존재하지 않는 타자에게 끝끝내 응답하려 한다. 전화 너머의 여성은 끝내 등장하지 않지만, 그녀는 윤지욱을 계속 기다리게 하는 '얼굴 없는 타자'로 존재한다. 이는 레비나스의 타자 윤리와도 연결된다. 타자는 도달하지 않지만, 도달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끝내 응답해야 할 윤리적 상태에 놓인다. 레비나스의 말처럼, 타자는 내게 다가오지 않음으로써 윤리적으로 나를 호출한다. 윤지욱이 기다리는 것은 단지 한 여성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응답의 가능성이다. 떠도는 말들 속에서조차 그는 타자와의 관계 윤리를 절박하게 수행하고 있다.
결국 윤지욱은 혼선된 전화 속 대화에서 유령들이 쉴 새 없이 교미하는 듯한 장면을 듣고 절망에 빠진다. “그것은 실로 음흉스러운 유령들의 교미였다. 음란스럽고 허망하고 정처 없는, 그리고 이제는 그 자신들끼리도 서로서로 복수를 꿈꾸고 있는 음흉한 말들의 교미였다.”
이 장면은 바르트의 ‘말의 죽음’ 개념과도 연결된다. 롤랑 바르트는 ‘말은 지배의 도구가 되었으며, 의미는 늘 이미 정해져 있다’고 비판했는데, 이청준의 소설은 말이 어떻게 기표로서의 자율성을 상실하고, 복제되고 혼선된 채 주체를 침묵시키는지를 보여주는 문학적 증언이다. 윤지욱의 고독은 말이 자신을 표현하는 도구가 아니라, 자신을 지우는 체계가 되었을 때 발생하는 고독이다. 그는 이제 말이 더 이상 의미를 전달하지 않고, 혼선된 채 자기 자신과 타자를 모두 지워버리는 시대의 주인공이다. 그가 기다리는 것은 말이 아니라, 의미를 되찾을 수 있는 말의 ‘죽음 이후’의 말이다.
더 나아가 이 작품은 데리다의 해체 개념을 문학적으로 재현한다. “말들은 기진맥진 지쳐나게 되었다”는 문장은 기표와 기의의 해체적 분열을 암시한다. 데리다의 해체 개념을 적용하면, 윤지욱은 부재와 지연 속에서 의미를 찾아 헤매는 해체된 주체이다. 그가 듣는 말들은 더 이상 중심을 향하지 않고, 끝없이 미끄러지며 그 자체로 현존하지 않는 존재가 된다. 소설 속 ‘떠도는 말들’은 데리다가 말한 ‘미끄러지는 기표’의 집합이다. 윤지욱이 마주한 것은 의미의 실종이며, 그는 의미화 불가능한 말들의 잔해 속에서 고독을 살아간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지욱은 끝끝내 기다린다. 그 기다림은 말에 대한 신념이 아니라, 말의 가능성을 지우지 않으려는 고독한 인간의 마지막 윤리다. 유령의 말을 들으며 그는 무너지고 있지만, 여전히 고독 속에서 말의 귀환을 바라는 윤리적 주체로 남는다. 그래서 이 소설은 말의 배신을 고발하는 동시에, 말을 기다리는 자의 고독과 책임을 윤리적으로 묘사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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