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戀書시리즈 - 독후감

은희경 『타인에게 말 걸기』를 중심으로 본 여성 서사의 자리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25. 4. 30.

 

 

 

 

 

 

말걸기의 주체는 누구인가?

은희경 『타인에게 말 걸기』를 중심으로 본 여성 서사의 자리

 

 

복수전공으로 듣는 국문과 현대소설론 수업에서 오랜만에 은희경 작가의 단편 타인에게 말 걸기를 읽고 깜짝 놀랐다.

예전에는 미처 몰랐어요. 이토록 여성 서사가 비참한지.”

아무래도 세월의 무게와 더불어 여성적 위치가 내 이념 속에서 커다란 변화를 거듭해 왔음에,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시대착오적인 여성상에 대해 할 말이 많아졌다. 여성인 작가가 여성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다는 것에 대한 분노랄까? 그때의 여성상의 오류에 나는 좀 비난하고 싶어졌다. 문학 작품은 시대상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기에, 1990년대의 사회적 분위기, 가부장제의 미세한 균열, 여성 주체성에 대한 모색과 갈등이 그대로 이 작품 안에 새겨져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지금의 시선으로 보면, 그런 반영조차 여전히 제약과 한계를 안고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타인에게 말 걸기속 여성은 끊임없이 말을 건다. 그러나 그 말은 상대방을 향해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자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장치에 가깝다. "친절하지 않은 사람에게 말을 걸면 거절당해도 덜 아프다"는 그녀의 진술은 똑똑하고 전략적인 문장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예측 가능한 상처를 택함으로써 자기 존엄을 간신히 유지하려는 고립의 기술이다.

나는 이 여성 인물의 말걸기를 처음엔 의외로 능동적인 언어로 착각했지만, 곧 그것이 고립과 자기기만의 구조 속에서 반복되는 말의 연극, 혹은 감정의 소비 구조라는 사실을 감지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무엇보다 주목할 부분은, 작품 속 여성 인물에게 이름이 없다는 사실이다. 작품의 서두에서 은희경은 "등 뒤에서 남에게 말을 걸 때 우리는 이름을 사용한다. 이름은 그래서 필요하다. 이름이라는 공용어가 없다면 서로 다른 언어를 가지고 있는 수많은 타인 가운데 그 자신이 불렸다는 것을 어떻게 알게 할 것이며, 더욱이 어떻게 그의 눈길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길 수 있을 것인가.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관계를 맺는 첫 번째 단계로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상대방에게 자기 이름을 대는 일인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이다."라고 쓴다. 이름이란 곧 존재의 고유성을 가리키는 언어이며, 타자의 시선이 아닌 자아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근간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 작품의 여성 인물은 끝내 이름을 갖지 못하고, 오직 그녀라는 삼인칭 지시어로만 불린다.

이름 없음은 단지 지칭의 생략이 아니라, 존재 자체의 미분화, 혹은 서사적 고립의 강화를 뜻한다. 누군가를 이름으로 부른다는 것은 그 사람을 이야기의 중심으로 호명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녀로만 불리는 이 인물은 말걸기를 계속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이름조차 획득하지 못하는 인물로 머무른다. 그녀는 말을 많이 하지만, 그 말은 서사의 주도권으로 전환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이 작품은 이름을 통해 정체성이 성립된다고 서두에서 말하지만, 여성 인물에게는 그 정체성 성립의 조건조차 허락하지 않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또한, 익명성은 종종 해방의 상징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이 작품 속 그녀의 이름 없음은 목소리 없음, 서사 밖으로의 추방에 가깝다. 그녀는 끊임없이 말을 걸지만, 누군가에게 호명되지 않음으로써 계속해서 주체가 아닌 타자로서, 관찰의 대상 혹은 감정의 실험장에 머문다. , 이름 없음은 여기서 타자성의 상징이며, 서사의 안쪽 언어로 진입하지 못한 자의 징후다.

그리고 그녀라는 명칭은 한편으로는 아무나일 수도 있고, 모든 여자일 수도 있다. 이는 은희경이 이 인물을 하나의 구체적인 개인으로 그리지 않고, 90년대 여성 감정 구조의 대변자로 일반화하는 효과를 낳는다. 그녀는 누군가가 아니라 그런 식의 감정을 가진 어떤 여성’, ‘이해받지 못한 채 말하는 여성이라는 이미지로 정형화된다. 이는 곧 여성의 익명화와 전형화, 동시에 말의 무력화와 위치 상실로 이어진다.

결국 타인에게 말 걸기는 말걸기를 수행하는 여성에게 이름을 부여하지 않음으로써, 말의 주체로 설 수 있는 언어적 위치 자체를 봉쇄한다. 그녀는 말하지만 듣지 못하고, 움직이지만 중심에 서지 못하며, 끊임없이 존재를 증명하려 하지만 끝내 이름조차 불리지 못한 채, 언어의 바깥에서 서성이는 존재로 남는다. 그로 인해 이 작품에서의 말걸기는 진정한 관계의 시작이 아니라, 고립의 증명이 되어버린다.

은희경의 절제된 문체는 이러한 구조를 더욱 세련되게 포장한다. 건조하고 냉소적인 문장, 감정을 농담처럼 비트는 서술. 이런 문체는 당시로서는 파격이었지만, 지금 보면 상처를 회피하는 방식, 혹은 감정을 전시하는 전략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고독은 스타일로 소비되고, 여성의 언어는 반응 없는 감정의 잔향처럼 허공에 맴돈다.

나는 자연스레 동시대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떠올렸다. 김애란은 감정의 언어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말하는 타이밍을 스스로에게 묻는 인물들을 그린다. 비행운이나 침이 고인다속 여성들은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말이 손에 들어오는 과정을 치열하게 감지한다. 편혜영은 말 자체를 거부한다. 침묵은 무력함이 아니라 선택된 거부이고, 여성은 그 침묵 속에서 세계를 견디며 지켜낸다. 정세랑은 가장 대조적이다. 그녀의 여성들은 관계를 정리하고, 기억을 공유하며, 연대의 언어를 기획하는 말의 설계자들이다. 시선으로부터,피프티 피플속 여성들은 대답을 요구하고, 서사를 만들어가고, 더 이상 침묵에 감금당하지 않는다.

이 작가들의 인물들은 더 이상 말을 걸고 거절당하는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서로에게 말을 걸고, 말을 듣고, 함께 말의 장을 만들어나간다. 바로 며칠 전에 읽은 강보라의 단편 바우어의 정원속 여성 캐릭터들은 또 어떠한가? 그들은 더 이상 고립되지 않고,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말의 가능성을 확장해 나간다. 은희경의 인물들이 고립된 감정 안에서 말의 패배를 반복한다면, 김애란과 정세랑은 그 말을 어떻게 다르게 말할 것인가, 어떻게 다시 묻고 응답받을 것인가를 서사의 중심에 둔다.

이제 나는 이 작품을 단지 시대를 반영한 문학으로 남겨두고 싶지 않다. 문학은 시대의 거울이지만, 때로는 그 거울을 넘어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야 할 책무를 지닌다. 타인에게 말 걸기는 그 시대의 거울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그 거울에 금을 내고 싶다. 그리고 그 금 사이로, 더 나은 말하기, 더 정확한 듣기, 더 정중한 응답의 서사가 피어나기를 바란다.

현재 여성 서사에 대한 나의 소박한 바람은 주체적인 여성 서사, 그러나 주체적이라는 말이 고립된 독립성으로만 읽히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자기 마음에 솔직하고, 타인의 마음에 정중하며, 감정의 언어에 예민한 여성 인물을 좋아한다. 그녀는 성별이라는 틀에 갇히지 않고 낭만을 그리워하되, 낭만 속에 갇히지 않는다.

나는 그런 여성 서사를 더 많이 읽고 싶다. 말을 걸고도 대답받지 못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말을 건네고, 응답이 오고, 그 속에서 서로가 변화하는 이야기들을 만나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런 이야기를, 나 자신의 문장으로도 써보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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