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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전주 팔복 예술 공장, 앤디 워홀 전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24. 5. 8.

 

 

 

 

 

<5월의 나들이>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미술가 중 한 분

실험적인 영화 제작자였고

 

 

 

 

 

 

마릴린 먼로

(Marilyn Monroe 1926~1962)같은

유명인을 아이콘화한 초상과

 

캠벨 수프 깡통같은 것을 소재로

반복적인 상품 이미지 등을 통해

미국 문화의 속성을 논평했으며

 

이들 작품을 만드는데

기계를 이용하여

원작자의 손길을 제거했고

 

실크스크린 이미지 위에

대담하고 선명한 색을 칠한

미국 팝아트의 제왕인

앤디 워홀

(ANDY WARHOL 1928~1987)

 

그의 작품이

전주에 왔다는 소식에 깜놀

 

물론 원본은 아니겠지만

연휴를 이용해

전주팔복예술 공장에 다녀왔다.

 

 

 

 

관람비마저 없고

다른 갤러리들과 다르게

컨테이너를 이용한

건물의 특색답게

자유로운 관람이었다는데 더 놀랐다.

 

사실 근엄하고 경건한

타 미술관의 관람 태도에

이제 식상할 때도 되었던 까닭에

비교적 자유로운

이 공간에서의 관람이

꽤 재미있었다능!!!

 

 

 

 

 

어린아이처럼

워홀의 작품에 기대어

내가 마치 워홀의 작품 속

이미지라도 되는 것처럼

행복한 마음으로 이런저런

포즈를 취해 봤던 시간,

 

행복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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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팔복예술공장

#마릴론먼로

#캠벨수프깡통

#국립군산대학교

#군산대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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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백과] 앤디 워홀 [ANDY WARHOL] (501 위대한 화가, 2009. 8. 20., 스티븐 파딩, 위키미디어 커먼즈

 

포스트모던 미술의 과정과 개념에 전반적인 영향을 끼친 관계로, 앤디 워홀은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미술가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그는 카네기 멜런 대학에서 미술 학사학위를 받은 후 상업미술가로서 경력을 시작했다. 워홀은 I. 밀러 같은 회사를 위해 신발 광고를 만들며 1950년대에 성공적인 삽화가로 이름을 날렸다. 또한 이 시기에 그는 책의 삽화를 그리고 무대 디자인도 했다. 1956년 뉴욕 근대 미술관에서 열린 그룹전에서 워홀은 처음으로 자신의 작품을 선보였다. 앤디 워홀은 상업 미술 분야의 광고계에 종사하긴 했지만, 그것이 그가 바라던 궁극적인 목표는 아니었다. 1960년대 초 그는 돌연히 목표를 바꾸어, 워홀은 '뽀빠이'와 '슈퍼맨' 같은 연재만화를 이용해 실험적인 회화 작품을 제작했다.

 

페루스 갤러리에서 열린 워홀의 첫 주요 개인전에서, 그는 캠벨 수프 깡통을 그린 37점의 회화를 전시했다. 이 시기에 제작한 작품들은 대량 생산되어 번호가 매겨지는, 미국 문화의 어떤 속성, 특히 넘쳐나는 상업품과 유명인 도상에 대한 논평이었다. 예를 들어 캠벨 수프 깡통 그림은 상품화에 대한 점점 더 늘어나는 무관심함에 대한 언급이며, 반면 마릴린 먼로의 이미지는 번지르르하게 포장된 천박함에 대한 언급이다. 영화계에 대한 워홀의 끈질긴 집착은 엘비스 프레슬리, 말론 브랜도,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모습을 작품으로 만들었다는 데서 잘 드러난다. 이들의 모습을 강박적으로 반복 제작한 워홀 덕분에 이 이미지들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워홀은 냉정한 관찰자로서 사진과 영화가 사람들의 현실 인식에서 행하는 눈에 띄는 역할에 일찍부터 주목해왔다. 비행기 추락과 피로 물든 인종 폭동, 시민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사납게 공격하는 경찰 등의 정치적인 작품들은 워홀의 대표작인 유명인과 상품의 이미지만큼이나 중요한 작품들이다. 특히 그의 전기의자 작품들에는 당시 논란이 되었던 사형에 관한 정치적인 함의가 담겨 있다. 또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한 후 얼마 안 되어 만든 재키 케네디의 이미지는 당시의 시대 상황을 떠올리게 해준다.

 

재키가 암살당한 남편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관 옆에서 울고 있는 뉴스 사진은 어쩌면 암살 그 자체보다 더 많은 충격을 주었다. 앤디 워홀은 이것을 여러 버전으로 사용했다. 1960년대 워홀이 만든 도상들은 모두 명성의 덧없음과 필멸적인 인간 존재에 관한 것이다. 1970년대의 대표작으로는 공산주의 지도자 마오 쩌둥의 초상과 자신의 모습을 워홀의 양식으로 영원히 남기길 원했던 유명인들의 주문작을 꼽을 수 있다. 1980년대에 워홀은 장 미셸 바스키아 같은 젊은 미술가들과 공동으로 작업했으며, 달러 기호($)의 이미지를 그려 과열된 미술시장을 조롱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