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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23. 2. 21.

(필사 완성 자랑질)

 

 

2000년 문학과사회 등단한 이후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2003), <우리는 매일매일>(2008), <훔쳐가는 노래>(2012)를 차례로 선보이며, 감각적인 은유와 선명한 이미지로 낡고 익숙한 일상을 재배치하는 한편 동시대의 현실에 밀착한 문제의식을 철학적 사유와 시적 정치성으로 풀어내온 진은영 시인이 10년 만에 시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를 펴냈다. (알라딘에서)

 

 

 

 

 

 

 

그럼에도

나는 시인 진은영을 잘 알지 못한다.

 

하늘은 무척 높았으나

스산한 바람이 낙엽을 굴릴 무렵이었던 지낸 해 어느 날,

길을 걷다가

쓰윽, 동네서점에 들러,

 

요즈음 가장 핫한 시집 하나를 추천해 주세요라는 제안을 했고

내 손에 들린 시집이

2022년 딱 그 즈음에 출간된 그의 시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였다.

 

그러나 이 시집은 그 후에도 여전히

내 백 팩 안에서 지루한 꿈을 꾸며

이리돌림 저리돌림을 했을까?

 

이제 비로소 필사의 맛보기로 선택되어 며칠간

나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대체로 시집을 감상하는 나의 태도는

우선 눈으로 쓰윽,

마음에 드는 구절들이 있다면

입으로 몇 번 웅얼대다

 

끝내 마음으로 스며들면

비로소 전 편을 낭독해보기도 하는데

이번엔 필사까지 이르렀으니

시집에 대한 예우를 다하는 것 같아

나름 흐뭇하다.

 

마지막으로 이 시집 속 시 한 편쯤은 암기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의무감으로

 

가장 잘 알려졌다고 생각되는 표제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를 간과할 수 없어서 망설였지만

사랑합니다를 선택한다.

 

나의 가장 큰 아킬레스건 중 하나는

사랑합니다를 차마 발설하지 못하는 낯 간지러움이 있는데

언젠가 꼭 사랑합니다말하고 싶은 그 날이 오면

이 시를 낭독해야겠다, 는 멋진 꿈을 꾸며

 

사랑합니다/진은영

 

내 모든 게 마음에 든다고

너는 말했다

남색과 노랑의 대비처럼

 

사막을 걷는 중이라고

너는 말했다

환상의 바다를 쏟으면서

 

너는 말했다

시간은 가득한 거야

달콤한 과일 속에 검은 벌레들로

 

내 심장은 밀랍 사과

약속의 심지가

네가 뱉은 노래의 입속에서 타오른다

 

너는 말했다

아름다운 밤들이 모래처럼 쌓인

사막이 있을 거야

밤이 에나멜 구두처럼 반짝거렸다

맨발로 어디든 -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시집 속에는 세월호를 겪은 시인이 오랜 시간 얼마나 많이 문장들 사이를 서성거렸는지 짐작하게 하는 지점들이 있었는데, 잊어가는, 어쩌면 내 무의식 속에서 애써 피하고 싶은 고통을 다시 환기시키며 얼마간, ‘너무 아파 잊고 싶었던내 마음의 부끄러움, 혹은 비겁함을 꾸짖는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형철님이 인생은 아름답지도 논리적이지도 않지만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꿈을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시인 진은영의 시들 속에서 찾았던 사랑과 저항, 사랑과 치유의 힘을 믿어보기로 한다.

 

 

문학평론가 신형철님은 진은영의 시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해설편에서 시인 진은영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1.    좋은 시는 rhyme(미적인 것)reason(논리적인 것)을 겸비하는데 진은영의 좋은 시들은 대체로 라임과 리즌의

       절묘한  교직물이다.

 

2.  진은영은 사랑의 시인이었다.

 

3.  사랑과 저항은 하나이고 사랑과 치유도 하나라고 이 시집 전체가 작게 말하고 있을 뿐, 어떤 시도 직접적으로

     크게 말하고 있진 않다.

 

4. 진은영의 정련된 이미지들 뒤에는 얼마나 많은 사유와 감정이 들끓고 있는가, 더 중요한 것은

    사유와 감정이 하나의 언어로 표현할 줄 아는 시인이다.

 

5. 진은영은 좋은 시인은 잘 싸우는 사람이고 진은영의 시는 분쟁으로 가득한 장소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사람이다.

 

 

6. 정혜신은 인간은 아름다움을 경험할 때 온전한 존재가 되려는 힘이 강해지기 때문에, 삶이 부서진 어떤 사람에게

   예술적 자극은 곧 치유의 작극이 된다는 것이라는 말을 인용하며 그렇다면 아름다움(예술)인간을 해결하는

   사랑의 작업이 되고, 그렇게 치유되면서 우리는 해결되지 않는 분쟁과 다시 맞설 힘을 얻게 된다.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꿈을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아름다움 진은영는 그런 것을 가졌다.

 

그의 모든 질술에 고개를 끄덕이며

 

 

 

계획했던 10권의 시집 필사를 끝마친 후에

내년 1월쯤엔 진은영의 나머지 시집들을 우선 사야겠다고, 창문으로 스며드는 아침 빛에

나는 속삭이듯 말했다

 

손가락이라도 걸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