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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

시간의 빛깔을 한 몽상/밤을 채우는 감각들/민음사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23. 1. 28.

 

일단 내 공간을 재즈로 채워넣고
커피 향기 가득한 카페인양,
모양떨며 하는 숙제,
필사의 즐거움을 안긴 책,

민음사판 세계시인선 필사책
밤을 채우는 감각들 3부

시간의 빛깔을 한 몽상 /마르셀 프루스트

 

 

 

시간의 빛깔을 한 몽상 /마르셀 프루스트

 

1. 베르사유 궁전

 

저녁 6시쯤, 어두운 하늘 아래 온통 잿빛으로 헐벗은 튈르리 공원을 가로질러 갈 때면, 어스름한 나뭇가지들마다 강렬하게 스며 있는 절망이 느껴지고, 이때 갑작스레 눈에 띈 이 가을꽃 덤불은 어둠 속에서 풍요로운 빛을 발하며, 타 버린 재 같은 계절 광경에 익숙해진 우리 눈에 격렬한 관능적 쾌감을 안겨 준다.

 

2. 산책

시월의 아름다운 밤, 실연과 우울로 죽을 것만 같은 창백하고 지친 하늘이 아니라,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랗게 빛나는 발랄한 하늘. 이곳을 스쳐 지나가는 것은 상념으로 무거운 구름 그림자가 아니라, 회색, 파랑, 분홍빛으로 반짝이는 농어와 장어 또는 빙어의 미끄러지는 지느러미들이다. 기쁨에 취한 물고기들은 하늘과 풀밭 사이로, 그리고 봄의 정령이 마치 인간의 숲인 듯 마술을 걸어 놓은 초원 안에서, 나무 숲 밑에서 달려가고 있었다. 물고기들의 머리 위로, 아가미 사이로, 배 아래로 시원하게 미끄러지는 강물은 하늘의 물길도 줄거이 달려가도록 노래하며 길을 내주었다.

 

3. 음악을 듣고 있는 가족

음악의 찬란한 무한함과 그 신비스러운 어둠은 노인에게는 삶과 죽음의 광막한 장면이요, 아이에게는 미지의 바다와 육지에 대한 간절한 약속이다. 사랑하는 이에게는 신비로운 무한이자 사랑의 눈부신 어둠이 된다. 생각이 깊은 사람은 자신의 정신적 삶이 통째로 전개되는 것을 보아, 약해진 선율의 추락에서 자기 자신의 쇠약과 전략을 확인하게 된다.

 

4. 꿈으로서의 삶

욕망은 영광보다 더 우리를 도취시킨다. 욕망은 모든 것을 아름답게 꽃피우지만, 일단 소유하게 되면 모든 게 시들해진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삶을 꿈꾸는 것이 현실에서의 삶보다 더 낫다. 되새김질하는 짐승의 우매하고 산만한 꿈처럼, 어둡고 무거워 신비감이나 명확성이 떨어질지라도 꿈은 좋은 것, 삶 자체가 어차피 꿈꾸는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5. 유물

즐겁거나 신경질적인 그녀의 손길로 구겨진 주름들을 간직하고 있는 너희. 독서나 생활의 슬픔으로 그녀가 흘렸던 눈물들을 어쩌면 여전히 너희는 간직하고 있을지도 몰라, 그녀의 눈을 빛나게 했거나 눈부시게 했던 햇살 때문에 너희는 누렇게 변색되었지. 너희의 비밀이 혹시나 드러날까 봐 안절부절못하며, 손을 떨면서 말없는 너희를 어루만진다, 아아! 어쩌면 매혹적이지만 취약한 존재인 너희처럼, 그녀도 자신의 우아함에 대해 무관심하고 알아채지 못했을지 몰라, 그녀의 아름다움이 실상은 나의 욕망 안에서나 존재했기 때문이지, 그녀는 자신의 삶을 살았지만, 어쩌면 나 혼자만 그녀의 삶을 꿈꾸었기에.

 

6. 우정

마음이 울적할 때 따뜻한 침대에 누우면 기분이 좋아진다. 머리까지 이불을 뒤집어쓴 채 더는 힘들게 애쓰지 말고, 가을바람에 떠는 나뭇가지처럼 나지막이 신음 소리를 내며 자신을 통째로 내맡기면 된다. 그런데 신기한 향기로 가득 찬 더 좋은 침대가 하나 있다, 다정하고, 속 깊고, 그 무엇도 끼어들 수 없는 우리의 우정이다. 슬프거나 냉랭해질 대면, 나는 거기에 떨리는 내 마음을 눕힌다.

 

7. 두 눈이 하는 약속

사랑으로 끊임없이 타오르는 그들의 눈은 이슬 한 방울로도 촉촉해져서 눈물에 둥둥 떠다니거나 잠기기도 하면서 반짝거린다. 그러나 꺼지지 않는 그 눈빛은 때로는 비극적 불길로 세상을 경악하게 할 수 있다. 영혼의 소리를 따르지 않는 두 개의 쌍둥이 구체, 영원히 식어버린 우주 속 뜨거운 위성들인 이 사랑의 눈동자들은 생명이 다할 때까지 계속해서 기만하는 광채를 엉뚱하게 뿜어낼 것이다. 마치 가짜 예언처럼,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사랑을 약속하는 거짓 맹세 같구나.

 

8. 달빛에 비추는 것처럼

사랑은 꺼져 버렸고, 망각의 문턱에서 나는 두렵다. 그러나 모든 지나가 버린 행복들과 치유된 고통들은 진정되고, 조금은 희미해지고, 아주 가까이 있으면서도 멀어져, 여기 달빛에 비추인 것처럼 어슴푸레해져서 지그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이들의 침묵이 나를 감동시키는 동안, 그들의 멀어짐과 어렴풋한 창백함이 슬픈 시처럼 나를 취하게 한다, 하여 이렇게 마음속 달빛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일을 나는 멈출 수 없으리.

 

9. 바다

대지와는 달리 바다는 인간들의 노동과 삶의 흔적들을 지니지 않는다. 어떤 것도 머물지 않으며 스치듯 지나가기에, 바다를 건너는 배들의 항적은 그 얼마나 빨리 자취를 감추던가! 이로 인해 지상의 사물들은 감히 꿈도 꾸지 못하는 바다의 엄청난 순수성이 생겨난다. 곡괭이를 필요로 하는 딱딱한 대지보다 바다라는 순결한 물은 훨씬 더 섬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