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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고마웠어요, Lee, and R.I.P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22. 8. 16.

 

 

(상당히 긴 글이네요. 제가 말이 고픈가 봅니다.)

태국 아유타야 풍경들...(포토그래퍼 김경숙)

 

 

 

 

 

 

 

 

 

 

 

 

 

 

 

 

 

 

 

 

 

 

 

 

 

 

 

 

 

우렁찬 빗소리에 새벽잠을 깼다.

정확히 말하면
어제 도착한 방콕으로부터 보내온 카톡 사진들이
오래된 이야기들을
내 마음의 호수에서 달빛 건지듯
그렇게 낚여지더니
어느 덧 수선스럽게 자기 노래들을 부르며
이젠 당신이 읊조려야 할 차례라고
나직이 속삭인다.

포토그래퍼 경숙이 방콕여행에 대해 말할 때부터였는지도 모르겠다.

아유타야에 꼭 가보렴!!!

치앙마이나, 푸켓, 후아흰, 코사무이, 방콕보다도 나는 소박했던 아유타야가 종종 그립다. 내 젊은 날의 한 페이지 속에 그림처럼 걸려있는 어떤 이미지들, 어쩌면 퇴색해가나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이제 늙어가는 내 영혼과 맞닿아 비슷한 색조를 이루기 때문일 듯도 하다.

노태우 정권의 88올림픽을 개기로 88년 여행 자유화가 이루어졌고 89년 나는 뜻하지 않게 방콕 돈무앙 공항에 발을 내딛었다. 영어도, 일본어도, 태국어도 쥐뿔도 몰랐던 내가 용감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돈” 때문이었고 당시 돈무항 공항에 마중 나온 우본왕상이 걸어준 밥알처럼 매달린 쟈스민꽃 목걸이는 매혹적인 환상의 세계로 나를 이끌 것만 같았다.

기본 급여 500불(그때는 한화 800원정도)에 아파트 제공의 조건이라면 지구 끝 어디라도 가야했던 절박함이, 하루하루 알바를 거듭해야했던, 촌뜨기이자 몰락하는 가계의 맏딸이었던 내가 무식 용감하게 선택했던, 어쩌면 내 인생을 전복시킨 일생일대의 사건이었다, 라는 생각은 그때부터 지금까지도 변함없다.

우본왕상은 우리를 앞세워 Siam Frendship Travel Agency란 간판을 가진 2층의 작은 사무실에서 사장 피터를 소개를 한 다음, 숙소라며 같은 건물 4층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아뿔사, 60년대 낡은 초등학교 교실 같은, 시멘트 바닥을 그대로 노출한, 거기에 2개의 텐트가 설치된 허름한 실내, 난, 납치당했을지도, 왜 예쁘지도 않은 나를, 내 신장을, 허파를, 내장을 위해 끌고 온 것인가? 두려움이 엄습했던 순간, 한 텐트에서 “하지메마스떼”라며 꾀꼬리 같은 목소리의 또래의 일본 여자애가 튀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미찌꼬였는지, 하찌꼬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여하튼 그녀는 같은 사무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근무할 Korean Travel Agency와 쌍벽을 이룰 Siam Frendship Travel의 일본 쪽 파트너인 Japanes Travel Agency의 사무원이었다.

일주일 만에 약속했던 실롬의 데쪼코트, 일종의 스튜디오 룸을 배정 받아 정착한 후에도 내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원어로 읽을 정도의 일본어 실력을 갖추게 되었던 것은 오직 상냥했던, 이국인에 대한 호기심이 넘쳤던 그녀 덕분 아니었을까?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태국인들과 일본인들과 둘려 쌓여 있어 외롭거나 힘들다기 보다는 한국 음식이 그리웠고, 한국 문자가 아른댔고, 한국어가 고팠다. 화분 몇 개를 사다가 “애야, 안녕, 넌 물이 고프냐? 난 한국말이 고프다.”라고 혼잣말을 시작했고 급기야 피우기 시작한 담배는 하루 2갑을 넘겼다.

한 달 정도가 지나자 살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몰려왔고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담배를 꼬나물고 지금도 그곳에 있을 듯한 팟뽕거리 맞은편 맥도날드 매장에서 줄곧 한국말을 하는 사람들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곳에서 Lee를 발견했다. 헐, 그의 목소리가 피아노 건반을 서성대는 익숙한 멜로디로 들리다니, 운명이었을까, 내가 방콕을 떠나올 때, 아니 그 후 시드니로 도망치듯 그를 피해 달아났을 때까지도 그가 나의 세 번째 짝사랑이라는 사실을 쉽게 인정할 수 없었고 그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전할 때까지도 나는 축하한다고 말할 정도로 태연한 척 했지만, 그 소식 때문에 없는 형편에 울며불며 친구에게 하소연하는 국제 전화비로 지출한 돈이 몇 백 달러를 넘겼다는, 한인촌 캠시 근처의 캔터베리 2층 장터라는 술집에서 술에 취해 계단에서 나뒹굴었지만, 긁힌 상처 하나 없이 2층 철재계단에서 1층까지 굴러 떨어졌다는 사실을 모른 채 그는 지금 그가 가장 사랑했던 푸켓 바다 어딘가에서 파도에 실려 끊임없이 술렁대고 있을 것이다.

“푸른 파도를 가르는 흰돛단배처럼 그대 그리고 나 낙엽 떨어진 그 길을 정답게 걸었던 그대 그리고 나 흰눈 내리는 겨울을 좋아했던 그대 그리고 나...”
 


91년쯤일까? Lee는 서울에 갔다 오더니, 방콕 스쿰빗의 어느 스튜디오에서 시바스리갈을 홀짝대며 이 노래를 불렀고, 94년쯤 시드니 캠시 어느 술집에선 “어느새 바람 불어와 옷깃을 여미어 봐도 그래도 슬픈 마음은 그대로인걸 그대를 사랑하고도 가슴을 비워 놓고도 이별의 예감 때문에 노을진 우리의 만남...”이란 노래를 불렀다.

영원한 보헤미안이었던, 내 애간장을 태우며 몇 달을 사라졌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차라고 뻥을 치고 티벳의 홍차를 내밀며 나마스떼를 연발하며 손을 모았던, 삶과 죽음은 하나라며 갠지스강에서 목욕을 했노라고 마약이라도 취한 듯 황홀한 표정을 짓던 Lee는 끝내 도박과 술에, 어쩌면 마약에 취해 방콕의 갱들에 의해 살해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그의 엑스 와이프로부터 전해들은 날, 나는 골프 연습장에서 7번 아이언을 휘두르며 내 3번째 짝사랑의 남자와 비로소 이별을 고했다.

그리고 어제, 포토그래퍼 경숙의 사진들을 보며, 아니 사실 며칠 전 섬의 날 축제에 맞춰 초대된 연예인 명단에서 최성수라는 이름을 발견했을 때, 해후가 떠올랐고, 고인이 된 Lee와의 수많은 이야기들이 수런대기 시작했다는 표현이 가장 적확할 지도 모르겠다.

Lee의 엑스와이프의 재혼, 그녀의 발병, 그리고 죽음, 이제는 세상에 어딘가에 혼자 남아있을 Lee의 아들 기영, 삶과 죽음은 한 몸이라고 외치던 Lee, 이 모두가 내 시간의 무늬 속에 각자의 스토리로 기억되고, 나는 오늘 새벽잠을 설치며 눈시울을 붉히고 이 작은 이야기로 내 삶의 어느 시간을 추억해보며 고맙다, 경숙. 고마웠어요, Lee.라고 나직이 읊조린다.


이쯤에서 내 최애하는 재즈 곡 중에 하나, Nature boy가 떠오른다. 멜로디가 좋아 연주하는 이들의 자유로운 해석도 으뜸이지만, 가사 또한 내 자서전적인 이야기였고 또 내 인생의 모토와 어찌 그리 닮았는지, 처음 가사를 인지했던 순간에 깜짝 놀랐다. 아마도 이런 느낌은 나 혼자만은 아닐 것이기에 재즈와 팝 스탠더드가 되어 오늘 날에도 수많은 음악가들에 의해 연주되고 노래되겠다.

곡의 분위기와 가사의 내용 또한 어찌 그리 절묘한지, 가사에 고개를 끄덕이며 이런 진실을 깨닫기까지 어찌 그리 오래 걸렸는지, 또는 너무 늦게 깨달은 것은 아닌지,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곡이다.

Nature Boy

There was a boy
한 소년이 있었어요.
A very strange enchanted boy.
아주 이상한 마법에 걸린 것은 소년이었지요.
They say he traveled very far, very farOver land and sea,
사람들은 그가 산 넘고 바다 건너 아주 멀리 여행을 했다고 합니다.
A little shy and sad of eyeBut very wise was he.
조금은 수줍고 슬픔에 어린 눈을 하고 있지만 그는 지혜로운 소년이었지요.
And then on e day,A magic day, he passed my way.
그런데 어느 날 내가 그를 만난 기적 같은 날,
And while we spoke of many things,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했지요.
Fools and kings,
어릿광대에서 왕까지
This he said to me,
그리고 그는 나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어요.
'The greatest thing you'll ever learnIs just to love and be loved in return.'
당신이 배우게 될 일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이 답례로 온답니다.
'The greatest thing you'll ever learns just to love and be loved in return.

'And then on e day,A magic day, he passed my way.And while we spoke of many things,Fools and kings,

This he said to me,'The greatest thing you'll ever learns just to love and be loved in return


헤일리 로렌도 좋지만 특히 노르웨이 출신의 재즈 가수 Radka Toneff(1952-1982)의 우수에 찬 보컬로 듣는 것을 좋아하는데요.
https://youtu.be/fUHC7oM5nK4





오늘은 특별하게 커트 엘링의 보컬로도 들어볼까요?
https://youtu.be/iXprs8-U5nA
 
 
 
 

연주로선 마일즈 버전도 좋아하지만 오늘 링크할 Enrico Rava를 가장 좋아합니다.(사실 데이빗 보위의 버전도 좋아합니다.)
https://youtu.be/deu7sPn7Eus
 

 

참고로)

"Nature Boy"는 미국 재즈 가수 Nat King Cole이 처음 녹음한 노래입니다. 이 곡은 Capitol Records에 의해 싱글로 1948년 3월 29일 발매되었고 후에 앨범 The Nat King Cole Story에 나타났습니다. Cole이 노래를 성공시킨 후, 경쟁사는 Frank Sinatra 및 Sarah Vaughan 과 같은 다른 아티스트의 "Nature Boy" 표지 버전을 발표했습니다. 궁극적으로 Tony Bennett과 Lady Gaga를 비롯한 많은 아티스트들이 재즈 협업 앨범인 Cheek to Cheek (2014)을 녹음하여 팝과 재즈 양쪽에서 스탠더드가 되었습니다. 이 곡은 또한 The Boy with Green Hair, The Talented Mr. Ripley와 2001년도 뮤지컬, Moulin Rouge와 같은 영화나 뮤지컬에도 많이 삽입되었습니다. 특히 영국의 싱어송 라이터이자 배우였던 David Bowie가 뮤지컬 Moulin Rouge에서 녹음한 테크노 버전은 아주 유명합니다.

이 곡은 1947년 Eden ahbez가 작곡했으며 부분적으로 자서전적입니다. ahbez는 자신의 멘토인, 자연주의 철학자, Bill Pester에게 헌정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유대인 작곡가 Herman Yablokoff는 자신의 전기에서 이 곡은 그의 노래 "Shvayg mayn harts"( "Hash My Heart")에서 표절되었다고 주장하면서 1951년에 법정 소송까지 감행합니다. 아베스는 처음에 자신의 무죄를 선언하고 야블로코프에게 "캘리포니아 산에서 천사가 노래를 부른 것처럼 멜로디를 들었다.”고 설명합니다만 야블로코프에게 1만 달러를 주겠다고 제안했답니다. 그러나 야블로코프는 돈이 중요하지 않다며 자신의 노래가 도난당했다는 것을 인정하라고 주장합니다. 결국 아베스는 변호사들을 보내 야블로코프에게 2 만 5 천 달러 (2016년 달러 로 환산하며 230,673 달러)를 제안하면서 법정 밖에서 해결했다고 합니다.

이 노래의 가사는 1940년대 로스 앤젤레스에 본거지를 둔 "네이처 보이즈 (Nature Boys)"라는 그룹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 단체는 아베즈가 멤버였던 최초의 히피 문화단체 입니다. 가사는 아베즈 (Ahbez)의 음악적 자화상이며 “매우 이상하고 매혹적인 소년이 있었다. 그는 멀리 멀리 배회했다"고 말하며 결국 "당신이 배울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은 단지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이라고 끝납니다. 성인 히피족의 여행과 내면의 사랑에 관해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