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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

Charles Mingus - Goodbye Pork Pie Hat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17. 2. 23.

<비록 사는 나라는 다르고 인종도 다르지만 재즈를 좋아하는 매니어들은 다 비슷하다는 것이었고 왠지 행동이 느리고 시대착오적이고 과묵하고 세속에 물들지 않고...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따스한 그런 인간성이 느껴지는...공통점의 발견...^^;>

윗글은 Sarah님이 쳇 베이커의 Almost blue 포스팅 분에서 재즈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특성을 언급하셨던 내용이에요. 근데 지나친 자화자찬이 아닌가, 은근 웃어요.

제가 요즈음에 줄곧 생각해오던 문제였거든요.
“나는 왜 재즈에 매료되었을까?”
제 대학시절엔 주로 팝송을 많이 들었죠. 그 후엔 샹송, 깐쪼네, 그러다 클래식에 경도되기도 했는데 얼마 지나니까, 뭔가 답답하더군요. 아마도 음악적 소양이 부족하고 해도 해도 끝없는 공부, 작곡가와 연주자와 곡명들이 매치가 안 되는 거예요. 그냥 막 즐기자, 그러다보니깐, 좀 클래식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그 돌파구로써 40초반에 간간히 들어오던 재즈에 정식 입문하게 되었는데, 또 너무 어려워 샛길로 빠졌죠. 월드 뮤직, 신세계였던 것 같아요. 또 호기심 많은 저에게 각국의 음악들에게서 엿볼 수 있는 고유한 민속성은 다분히 문학과 연관되게 되잖아요. 그런데 또 이건 끝도 안날 전쟁에 돌입하게 되는 것 같았어요. 그 있잖아요, 마구, 마구 알고 싶은데 끝이 보이지 않는 거, 해서 이것도 적당히 포기. 그냥 즐기면 될 일을, 참 어리석죠. 제가 원래 좀 아둔하고 어리석고요, 고집도 세요. 한 번 마음먹으면 돌 직구, ㅎㅎ. 그러다 다시 50 넘어 재즈에게로 자연스레. 근데 물론 어렵고 끝이 보이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죠. 그런데 신기하게도, 요번엔 아직이네요. 왜 그럴까, 묻고 또 묻고 있던 차였어요. 그런데 답이 나오더군요.
“자유”
딱 그것이었어요. 막힘이 없는 광활한 우주를 유영하는 분야, 자유 분망하면서도 일종의 룰을 지키며 하모니를 이루는, 한편으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어쩌면 제 모습과 가장 많이 닮아있는 것은 아닐까, 은근 웃어요. 오늘 수다는 요기까지.


오늘은 콜트레인에게서 잠깐 벗어나 볼까요? 오늘의 주인공은 찰스 밍거스. 저도 잘 몰라요. 그래서 함께 들어보자고요.

요건 약삭빠르고 당당하게 Yes24에서 훔쳐왔어요.

재즈계의 ’보스’(Boss) 찰스 밍거스(Charles Mingus)는 전방위 재즈 뮤지션이었다. 비밥을 시작으로 모던재즈와 실험적인 빅밴드까지 관통하는 그의 연주 여정은 일반적인 베이스 연주인의 영역을 넘는 것이었다. 비밥 혁명의 주역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찰스 밍거스는 그의 전성기인 1950-60년대 중반까지 힘 있고 박진감 넘치는 베이스 플레이어로, ’ Good-bye pork pie hat’ (1959)를 위시해 수많은 재즈 연주를 작곡한 작곡자로, 소울 빅밴드(Soul Big Band)의 리더로서 스윙에 한정되지 않는 한층 복잡다단한 현대적인 재즈 오케스트라를 확립한 음악 감독이었다. 이런 음악적 열정과 더불어 밍거스는 그가 활동하던 당시인 1950-60년대 재즈 음악계에서 당시로선 보기 드문 흑인 실력자였다. 흑인 재즈 뮤지션으론 처음으로 1952년, 드러머 맥스 로취와 자신의 음반사인 ‘Debut’을 창립했고, 빅밴드를 이끌던 1960년엔 ’재즈 아티스트 길드’(Jazz Artist Guild)란 조직을 창립시키며 뉴욕 클럽 지역에서 활동하던 흑인 재즈 뮤지션들과 연대해 클럽 주인들의 부당한 대우에 적극 대응하기도 했다. 흡사 보스를 연상시키는 그의 외모처럼 그의 인생은 가히 보스다웠다. 인종문제에도 관심이 많았던 밍거스는 1961년 미국 뉴욕 카네기 홀 앞에서 맥스 로취를 비롯한 흑인 뮤지션들을 주축으로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동하기도 했다. 이러다보니 백인들 사이에선 그는 경계해야할 흑인 뮤지션 블랙리스트에 단연 선두를 자리 잡았고, 재즈 뮤지션들도 흡사 ‘재즈 정치인’과 같은 그의 음악외적인 활동에 대해 못마땅해 한다. 기인에 가까울 정도의 이런 그의 급진적인 행동은 음악으로도 표출된다. 대표적으로 늘 거론되는 < Mingus Ah-um > (1959) 의 수록곡 ’Fables of Fabus’에서 ‘Fabus’는 당시 ’리틀 룩 사건’이란 인종차별 사건으로 악명 높았던 아칸사스 주의 주지사의 이름을 써 풍자적인 연주로 표현했고, ’Oh Lord, Don’t Let Them Drop That Atomic Bomb on Me’ 와 ’Remember Rockefeller at Attica’ (1974) 역시 제목이 암시하듯 흑인의 입장에서 느끼는 억압의 굴레를 파격적인 연주로 한풀이하고 있다. 흡사 지사와도 같은 이런 밍거스의 모습은 하지만 그가 창조해 낸 풍성한 연주 세계에 비할 바 아니다. 스윙과 비밥을 근간으로 한 그의 연주세계는 하드밥과 가스펠, 소울의 영향이 짙게 깔린 소울 빅밴드 연주를 창조해냈다.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으로 대변되는 전통적인 빅밴드의 차원을 넘어서 밍거스는 10인조미만의 소 편성으로도 얼마든지 충만한 사운드를 만들어 낼 수 있음을 증명했다. 멤버들의 솔로 기량을 앞세우기 보단 작, 편자의 의해 악보에 근거한 밍거스 빅밴드의 사운드는 빅밴드가 스윙을 벗어나 프리/아방가르드에까지 영역을 넓힐 수 있게 된다. 밍거스가 씨를 뿌린 소울 빅밴드의 유산은 훗날 프로그레시브 빅밴드란 스타일로 이어지며 베이시스트 찰리 헤이든, 베이시스트 데이브 홀랜드, 피아니스트겸 작곡가 칼라 블레이와 같은 수많은 추종자들을 양산하며 현대 빅밴드의 선구자와 같은 위상을 점유한다. 1922년 미국 아리조나주에서 태어난 찰스 밍거스는 L.A 지역에서 어린시절을 보내면서 교회를 출석하면서 어께너머로 피아노, 트럼본, 첼로 등 다양한 악기를 섭렵했다. 고등학교 시절 지역을 방문한 듀크 엘링턴 빅밴드 연주를 관람한 밍거스는 재즈에 매료됐고 특히 밴드의 베이스 주자였던 지미 블랜튼(Jimmy Blanton)의 연주에 큰 감동을 받고 베이스 연주인이 되기로 결심한다. 베이스에 빠른 두각을 보인 밍거스는 1940년, 이런 저런 밴드를 거쳐며 본격적으로 베이스 연주인으로 나선다. 키드 오리(Kid Ory),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 라이오넬 햄프튼(Lionel Hampton) 밴드에선 초기 뉴 올리언즈와 스윙을 연주했고 40년대 중반부턴 뉴욕 52번가에서 바야흐로 막 물이 오르던 비밥 열풍에 동참하며 찰리 파커와 버드 파웰 밴드에서 베이스를 연주한다. 1950년대 초, 걸출한 흑인 재즈 뮤지션들이 대다수 슬럼프에 빠져있던 것과 달리 밍거스는 기타리스트 탈 팔로우, 테너 색소폰니스트 스탄 게츠 등 백인 뮤지션들과 협연을 했고, 이런 기회를 통해 주류 재즈 무대에 지속적으로 자신을 알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그리고 1953년엔 ‘비밥의 종언’이라고까지 불리는 명연 < Live at Massey Hall > 을 비밥의 동료였던 찰리 파커, 디지 길레스피, 맥스 로취, 버드 파웰과 함께 ‘더 퀸텟’이란 밴드 멤버 자격으로 녹음해 자신이 설립하게 될 레이블 데뷔를 통해 발표한다. 이렇게 화려한 사이드 맨 시절을 통해 얻은 자신감으로 밍거스는 1952년, 드러머 맥스 로취와 의기투합해 자신의 레이블인 ‘Debut’을 창립한다. 여기에 1953년부턴 정기적으로 클럽을 빌려 작곡한 연주를 발표하는 식의 재즈 컴포저스 워크숍(Jazz composer’s Workshop)이란 행사를 개최했다. 재즈 워크숍은 흑인 연주인들 사이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호레이스 실버, 델로니어스 몽크, 아트 블레이키, 맥스 로취와 같은 하드밥의 주역들이 그의 워크숍에 동참한다. 음악인답지 않은 그의 비즈니스적인 면모를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비밥에서부터 실험적인 사운드까지 폭넓게 아우른 그의 음반사업은 그러나 경영 악화로 결국 1955년 그가 설립한 Debut 레코드는 문을 닫고 만다. 음반사업을 정리한 밍거스는 어트랜틱을 통해 첫 리더작 < Pithecanthropus Erectus : 직립 원인 > (1956)을 발표한다. 새로 조직한 퀸텟 ‘재즈 워크숍’의 첫 작품이기도 한 앨범에서 타이틀 곡 ‘직립원인’은 두 발로 걸어 다닐 수 있게 된 위대한 인간이 어떻게 타락해 가는가를 변화무쌍하고 익살스런 편곡으로 그려낸다. 심오하기까지 한 블루스와 가스펠의 연주 영역을 제시한 ‘직립원인’을 계기로 찰스밍거스 재즈 워크숍은 향후 10년간 ‘흑인에 흑인을 위한 흑인의 빅밴드’라 할 소울 재즈 빅밴드의 주역으로 등장한다. 어틀랜틱 레코드를 통해 밍거스는 특유의 당차고 힘 있는 재즈 앙상블로 명반행진을 이어간다. 시종일관 우렁찬 혼 섹션으로 위풍당당한 재즈 앙상블을 소화한 ‘Haitian Fight song’ (1957), 박수소리와 때창, 고함소리를 활용해 흑인 교회 수요 예배의 전경을 이색적으로 표현한 ’Wednesday night prayer meeting’ (1959)을 연이어 발표한다. 베이스 주자이면서 동시에 훌륭한 피아노 연주자이기도 했던 밍거스의 유일한 피아노 연주 앨범 < Oh Yeah! > (1962) 또한 어틀랜틱 시대에 빼놓을 수 없는 명연이다. 이런 가운데 그의 재즈 워크숍은 5인조에서 7인조라는 확장된 편성되고 그의 밴드 연주에서 편곡은 더욱 중요한 구심점이 되어간다. 그의 또 다른 수작으로 추앙되는 ‘밍거스 아 움’ < Mingus Ah-Um >(1959) 도 바로 새로 정비된 7인조 편성으로 녹음됐다. 메이저 레이블 콜럼비아를 통해 발표된 < 밍거스 아 움 >은 향후 트럼펫터 마일스 데이비스와 명콤비로 활동하게 된 프로듀서 테오 마세로(Teo Macero)가 프로듀싱했다. 앨범에선 재즈 명 스탠더드 ‘Goodbye pork pie hat’를 히트시켰고 당시 막 불거져 나오기 시작한 인종차별 문제를 건드린 ’Fables of Fabus’ 또한 주목받았다. 60년대 접어들면서 그의 밴드 재즈 워크숍은 11인조라는, 가히 빅밴드다운 위용으로 변모했다. 오넷 콜먼(Ornette Coleman)이란 프리 재즈 전도사의 등장으로 재즈뮤지션, 그중에서도 흑인들도 프리 적인 사운드에 차츰 심취해갔고 밍거스 또한 이런 사운드에 관심을 갖게 된다. 임펄스(Impulse!) 레이블을 시작으로 한껏 볼륨을 높인 밍거스의 재즈 워크숍엔 당시 한창 줏가를 올리던 프리-아방가르드 사운드의 주역들이 포진돼 있었다. 만능 리더주자 에릭 돌피(Eric Dolphy)를 위시해 롤랜드 커크(Rolnad Kirk), 잭키 맥린(Jackie Mclean)와 같은 명연주인들이 그의 밴드를 거쳐갔다. 기존 그의 발표한 곡들과 스탠더드를 11인조 앙상블로 리메이크해 녹음한 < Mingus,Mingus,Mingus,Mingus,Mingus > (1963)를 시작으로 같은 해 발표된 < The black saint & the sinner lady > 로 밍거스는 또 한번의 일가를 이뤄낸다. 앨범서 밍거스의 밴드는 연주의 자유로운 즉흥성을 배가시키며 멤버 개개인 자발적인 사운드가 충돌하면서 빚어지는 불협의 매력을 제시했다. 이름 하여 총체적 즉흥(Collective Improvisation)을 통해 재즈 빅밴드가 한층 모던한 사운드로 탈바꿈해 가는 순간이었다. 물론 당시 오넷 콜먼의 프리 재즈처럼 불협으로 일관하는 무형식의 난해한 사운드가 아닌, 불협과 앙상블을 오가며 기승전결의 형식미가 돋보이는 프리 사운드였다. 음악적으로 한창 정점에 달달한 찰스 밍거스는 그러나 이때를 기점으로 차츰 쇄락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다. 음악 외적으로 ‘아티스트 길드’를 조직해 흑인 재즈 뮤지션의 권리 보장에 앞장섰지만 그의 의도처럼 상황은 개선되지 않고 있었다. 여기에 출간하기로 했던 자서전의 계약이 무산으로 돌아갔고, 무리한 밴드 운영으로 인해 빚은 눈덩이처럼 커져만 갔다. 여기에 거래 은행의 도산과 신경쇄약까지 이어져 밍거스는 60년대가 끝나갈 시점까지 이렇다 할 후속 작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 돈이 필요해 다시 음반 작업에 나선 밍거스는 역작 < 밍거스 아 움 >의 제작자 테오 마세로를 찾아간다. 그리고 테오와 다시 손을 잡고 찰스 밍거스는 콜럼비아에서 발표한 < Let my children here music > (1971)으로 다시 한번 혁신적인 사운드를 일궈낸다. 클래식 오케스트라에 버금가는 풍성한 관악기편곡이 돋보인 앨범서 ’Adagio ma non troppo’로 주목받는다. 문제되던 재정문제도 해결 돼 그가 창립했던 Debut 레코드를 판타지 레이블에서 인수해 밍거스는 다시 창작의 안정적인 기반을 되찾을 수 있었다. 말년에 접어든 1974년, 초기 퀸텟 사운드로 돌아간 밍거스는 대니 리치몬드(드럼), 돈 풀렌(피아노), 잭 왈라스(트럼펫), 조지 아담스(색소폰)처럼 당시 신예 뮤지션들을 불러 모아 < Changes 1&2 > 를 발표한다. 치밀한 계산과 프리적인 연주가 강화된 작곡은 그의 후기 명연으로 기록된다. 영화음악에도 관여해 밍거스는 < Cumbia & Jazz Fusion > 의 스코아를 맡으며 창작열을 불태웠다. 이런 열화와 같은 노익장에도 불구, 1977년 밍거스는 파킨스씨 병을 얻고 만다. 휠체어 신세가 된 밍거스는 이듬해부턴 사지가 마비돼 더 이상 베이스 연주를 할 수 없게 된다. 사망 1년 전인 1978년, 그의 마지막 프로젝트가 예비 돼 있었는데, 그 주역은 찰스 밍거스와 포크 가수 조니 미첼이었다. 당시 재즈 퓨젼의 물결에 동참하고 있던 조니 미첼은 평소 밍거스의 자유분방하고 호방한 사운드에 깊은 애정을 갖고 있던 차에 밍거스의 육성을 담아 자신의 독집 앨범에 담게 된다. 1979년 1월 밍거스는 파란만장한 재즈 일대기에 종지부를 찍으며 57세 나이로 숨을 거둔다. 같은 해 그의 음악성에 깊은 오마주를 담은 조니 미첼의 < Mingus > 가 발표됐고 밍거스의 분신과도 같은 스탠더드 ‘Goodbye pork pie hat’은 망자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며 조니 미첼의 체념하는 듯한 목소리로 울려 퍼졌다. 재즈 음악 이상의 족적을 남긴 찰스 밍거스를 기념하기 위해 미망인 슈 밍거스(Sue Mingus)는 그가 남기고 간 전 재산을 투자해 밍거스 재단을 설립한다. 그가 불철주야 매달렸던 재즈 뮤지션들의 저변확대에 기여한 재단은 차츰 규모가 커져 1991년엔 밍거스의 음악을 사랑하는 젊은 재즈 뮤지션들이 모여 밍거스 빅밴드(Mingus Big band)를 창립하기에 이른다. 랜디 브레커, 케니 드류, 잭 왈라스 등 재즈계에 내노라 할 실력파 뮤지션들이 포진된 밍거스 빅밴드는 1993년 첫 앨범 < Nostagia in time sqaure > 를 발표하고 현재까지도 전 세계를 무대로 활발한 연주 활동을 통해 밍거스의 유산을 이어가고 있다.

자료제공: IZM (www.izm.co.kr)

오늘 링크할 곡은 찰리 밍거스의 Goodbye Pork Pie Hat.
이 곡은 1959년에 밍거스 작곡의 재즈 스탠더드로써 밍거스의 식스텟에 의해 녹음된 그의 앨범 “Mingus Ah Um”에 포함해 발표했답니다. 밍거스는 그와 함께 녹음을 진행하다 2달 전에 사망한, 넓은 테두리를 가진 포크 파이 모자를 자주 썼던 색소포니스트 Lester Young에 대한 엘레지(비가)로서 작곡했다고 하네요. 그 후 밍거스의 대표작 중의 하나가 되어 많은 재즈, 그리고 퓨전재즈인들에 의해 녹음 되었으며 밍거스의 죽음 2달 전에 함께 작업했던 팝 가수 Joni Mitchell(194년생, 캐나다/전에 언급했던 노래 Both Sides Now의 주인공 )에 의해 가사가 지어졌답니다. 그 당시 투병 중이던 밍거스는 조니 미첼의 노래 "Paprika Plains'를 듣고 그녀와 함께 일하길 원했다네요. 미첼은 그에게서 6개의 싱글을 받았고 밍거스가 죽은 후에도 이곡들은 인기를 누렸다네요. 해서 미첼은 이 곡의 가사를 붙이고, “God Must Be a Boogie Man"과 함께 밍거스에게 헌사를 했답니다. Rahsaan Roland Kirk(1935 – 1977 미국의 멀티 플레이어 재즈맨) 또한 자신의 앨범인 The Return of the 5000 Lb. Man 속에 스스로 작사를 해서 포함시켰답니다.




Charles Mingus - Goodbye Pork Pie Hat - YouTube

http://me2.do/5MXjC16Y




Charles Mingus - Goodbye Pork Pie HatFrom The Essential Mingus Big Band there is this awesome song. I'm not actually sure who the saxophone player is, so if anyone knows please tell me.www.youtube.com


이 곡은 5:42의 길이로써 Producer(s) Teo Macero에 의해 레이블 Columbia에서 발매 되었네요.

John Handy – tenor saxophone
Booker Ervin – tenor saxophone
Horace Parlan – piano
Charles Mingus – bass
Dannie Richmond – drums

인트로 테색, 너무 웃기지 않아요? 지 맘대로 갈기다가 또 한없이 벨벳처럼 부드럽고 또 호탕하고 귀엽고. 존 핸디와 부커 어빈, 누가 연주했을까요? 레스터 영을 기리는 것이라 하니, 레스터 영의 색소폰 연주가 그랬을까요? 함 자세히, 들어봐야겠어요. 성질머리 장난 아닌 밍거스의 이 부드러움은 또 무엇일까요? 참말로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결국 이렇게 서로가 조율하며 하모니를 이룬 장엄함이 비가다운 느낌을 자아내긴 하네요. 그런데 어찌 이 곡은 색소폰의 향연 같죠. 당연히 그렇겠죠. 레스터 영은 천상에서 수줍은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을 것 같죠. 부럽, 부럽!
사실 저는 밍거스의 Work song과 Adagio Ma Non Troppo를 더 좋아해요. ㅎㅎ


조니 미첼의 보컬로도 함 들어보시길.
Del Album "Mingus", 1979.

Joni Mitchell - guitar, vocals
Jaco Pastorius - bass, horn arrangement on "The Dry Cleaner from Des Moines"
Wayne Shorter - soprano saxophone
Herbie Hancock - electric piano
Peter Erskine - drums
Don Alias - congas
Emil Richards - percussion




Joni Mitchell - Goodbye Pork Pie Hat - YouTube

http://me2.do/FKSLx43a




Joni Mitchell - Goodbye Pork Pie HatDel Album "Mingus", 1979. Joni Mitchell - guitar, vocals Jaco Pastorius - bass, horn arrangement on "The Dry Cleaner from Des Moines" Wayne Shorter - soprano saxophone Herbie Hancock - electric piano Peter Erskine - drums Don Alias - congas Emil Richards - percussionwww.youtube.com


조니 미첼의 목소리 너무 슬프네요. 제 마음처럼.


정신을 너무 집중했나보아요. 머리가 지끈거리고 눈도 빠지는 거 같고, 으스스 몸살기가. 오늘은 일찍 취침. 아이고, 나이는 못 속여요.

밴친님들도 굿나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