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상상
이른 저녁을 끝내고 창문의 블라인드를 내린다. 창밖으론 바람이 씽씽한데 실내 공간은 더 없이 아늑하다. 난로 곁으로 바짝 당긴 의자에 엉덩이를 부린다. 부산했던 마음을 내려놓고 무심하게 앉아있는 시간, 저며 오는 것들일랑 슬쩍 밀어두고 즐거운 상상을 하며 토닥토닥, 진통제를 놓는다.
스산한 바닷가의 황량한 갯벌에 바람이 휘돈다. 뿌연 잿빛안개가 일렁이는 파도를 무참히 내려누르며 이리저리 내몰린다. 차안에 있으려니 창밖 풍경은 단지 배경에 지나지 않는다.
오직 둘만 존재하는 세상, 잡힌 손의 열기에 영혼마저 숨이 막힐 지경이다. 팽팽한 긴장감에 침묵은 무겁고 어색하기만 하다. 여자는 살짝 땀이 베인 손을 뺀다.
“있잖아요. 안개가 걷히는 저쪽 어딘가에 멋진 세상이 기다릴 것 같지 않아요?”
여자에겐 삶이란 늘 안개 속을 헤매는 일인 것 같다. 미로와 같은 안개를 빠져 나가기만 하면 그쪽 어딘가에 행복이 기다릴 것 같은 몽상, 그러나 한 번도 안개 속 생의 미로를 벗어나본 적이 없었으리라. 그래서 여자의 행복은 항상 저 너머에 있을 수밖에 없다.
"멋진 세상이라. 그건 어떤 세상일까?”
상대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다. 현실과 몽상의 경계를 남자는 결코 넘고 싶지 않다.
“맑은 햇살이 가득하고 눈앞에 낮은 언덕들이 제 색깔을 드러내는 곳, 그 언덕을 10년도 넘은 지프차 한 대가 헐떡거리며 진입하고 있어요. 차 트렁크엔 틀림없이 소주며 맥주, 머루주, 복분자, 심지어 와인까지 가득 차 있겠죠. 대 여섯의 술꾼 친구들이 내 이름을 소리쳐 부르며 스카프를 흔들고 있어요. 난 대답을 하느라 양손을 번쩍 들고 흔들면서도 머릿속에 온갖 색깔의 안주들이 춤을 추며 들락거리죠.”
몽롱한 여자의 시선은 저만치 상상의 언저리에 가 있다.
“모닥불을 만들어야겠네.”
남자도 여자에게 쿵짝을 맞춘다.
“살짝만 취해 와인 잔을 손에 얹고 조르바 같은 춤을 춰야겠어요."
여자의 볼이 붉어진다.
“새벽녘 싸늘한 산기운이 잦아들 무렵 지친 나그네들은 하나 둘씩 누울 곳을 찾고……”
“마지막 남은 불길에 한대야 가득 물을 뿌리면 우리의 축제는 끝나겠지."
남자가 빙그레 웃으며 상기된 여자의 볼을 살짝 꼬집는다.
“그래도 찾아온 친구들인데 아침 해장국은 준비해 놔야 하지 않겠어요. 원추리 된장국 정도면 되겠지요.”
여자는 남자에게 꼬집힌 볼을 문지르며 살포시 웃는다.
“그런 어느 하루가 내 미래였으면요.”
여자가 수줍은 미소를 흘린다.
“그런 산속에서 뭘 먹고 살지?”
남자가 짓궂게 묻는다.
“와, 정말 현실적이다. 노령연금 그것으로 충분.”
철없는 여자는 진심을 다해 대답한다.
"노령연금, 고거 참. 너무 멀지 않나?”
“피피피피피……”
잿빛안개가 바람에 내몰려 꼬리를 감추자 멀리 희미한 섬들이 드러나고 홀로 앉아있는 여자의 몽롱한 시선은 방향도 없이 서성인다.
즐거운 상상을 해야겠다고 시작한 문장들은 또 이렇게 끝나고 말았네. 상상마저도 쓸쓸하다니, 술이나 한 잔 마시고 잠이나 자야겠다.
Erik Satie : "Je te veux" par Patricia Petib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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