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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

환상의 빛/미야모토 테루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16. 8. 28.

환상의 빛


                                                                                                                           미야모토 테루




   어제, 저는 서른두 살이 되었습니다. 효고 현 아마가사키에서 이곳 오쿠노토의 소소기라는 해변 마을로 시집 온 지 만 삼 년이 되었으니 당신과 사별한 지도 그럭저럭 칠 년이나 되었네요.

   이렇게 이층 창가에 앉아 따스한 봄볕을 쬐면서 잔잔한 바다와 일하러 나가는 그 사람 차가 꼬불꼬불 구부러진 해안도로를 콩알만 하게 멀어져가는 것을 보고 있으면, 어쩐지 몸이 다시 꽃봉오리로 돌아가는 것처럼 삐걱삐걱 오그라드는 것 같습니다.

자, 보세요. 이 근방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초록색으로 널찍하게 펼쳐진 바다에 한 덩어리가 되어 반짝반짝 빛나는 부분이 있지요. 커다란 물고기 떼가 바다 밑바닥에서 솟아올라 파도 사이로 등지느러미를 드러내고 있는 것 같지만, 그건 사실 아무것도 아닌 그저 작은 파도가 모인 것에 지나지 않답니다. 눈에는 비치지 않지만 때때로 저렇게 해면에서 빛이 날뛰는 때가 있는데, 잔물결의 일부분만을 일제히 비추는 거랍니다. 그래서 멀리 있는 사람의 마음을 속인다. 고 아버님이 가르쳐주었습니다. 대체 사람의 어떤 마음을 속이는지는 확실히 모르지만, 그러고 보면 저도 어쩌다 그 빛나는 잔물결을 넋을 잃고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풍어豊漁 같은 걸 해본 적이 없는 이 근방 어부 나부랭이들의 흐리멍덩한 눈에 한순간 꿈을 꾸게 하는 불온한 잔물결이라고, 아버님은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저에게는 좀 다른 의미가 있는 듯했습니다. 그냥 그런 기분이 들었다는 것일 뿐, 그게 대체 어떤 것인지 저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소소기는 일 년 내내 해명海鳴이 울어대는 가난한 마을입니다. 겨울에는 일본해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 강해서, 세차게 흩날리는 눈조차 멀리 날려버립니다. 바닷물이 눈이나 공기보다 따뜻해서이기도 하지만, 역시 그 대부분은 쌓일 새도 없이 바람에 날아가 버리는 탓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눈이 많이 내리는 해에도 해안가에는 군데군데 쌓이는 눈이 고작입니다. 얼어붙은 바람과 함께 사나워진 파도소리와 물보라만이, 눅눅하고 시꺼먼 먼지처럼 피어오릅니다.

이웃의 지붕 너머로 보이는 것이지만, 마을 서쪽을 흐르는 마치노 강이 소소기 항으로 흘러드는 그 부근만이 이 해안가에서는 그래도 모래사장다운 곳입니다. 나머지는 설령 얕은 여울이라고 해도 바위투성이여서 해수욕에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런 바다가 서쪽 끝의 사루야마 등대 주변에서 동쪽 끝의 노로시 등대 부근까지 들쭉날쭉한 선을 그리며 이어집니다. 여기저기에 있는 어항漁港도 지금은 이름뿐이어서 고기를 잡으러 나가는 배도 거의 없습니다. 이곳 소소기 항에도 두세 척의 조그만 어선이, 배 이름도 거지반 지워진 채 모래사장에 방치되어 있습니다. 익숙지 않은 사람은, 가령 그 소리를 듣고 싶어서 일부러 이곳까지 찾아온 관광객조차 결국 ‘아, 시끄러워’ 하는 소리를 내고 말 정도의 파도 소리여서 밤중에도 잠을 깨고 맙니다. 그러던 것이 오늘은 어쩐 일인지 파도도 바람도 뚝 그쳐 모든 것이 따뜻하고 아름답게 빛나고 있습니다. 때때로 지나치는 자동차 소리나 이웃집에서 빨래를 너는 소리 이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습니다.

이런 날씨는 좀처럼 드물기 때문에 이불이나 방석도 널어야 하고 그것 말고도 할 일이 잔뜩 있기 마련인데도 이런 날은 으레 몸이 나른해져서 아무것도 할 마음이 일지 않습니다. 비 그친 선로 위를 구부정한 등으로 걸어가는 당신의 뒷모습이 뿌리쳐도, 뿌리쳐도 마음 한구석에서 떠오릅니다. 유이치를 데리고 이곳 세키구치 다미오의 집으로 시집 와 일 년이 지나고 이 년이 지나도 저는 당신이 죽은 그날부터 저도 모르는 사이에 계속해온 마음속의 혼잣말을 도저히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와지마에서 오는 버스가 소소기에 멈추더니 거기에서 이미 죽었을 당신이 내리고, 그 모습을 본 유이치가 숨을 헐떡이며 달려와 저에게 알려줍니다. 그 순간 저는 가슴이 확 뜨거워져서 왠지 모르지만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을 후들거리며 달려갑니다. 그런 어이없는 꿈같은 정경을 상상하면서 무심코 입술을 조그맣게 움직이고 있는 자신을 들키지 않으려고 주위를 살핀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이 근방에서는 한창 일할 사람은 모두 도회지로 나갑니다. 고기만 잡아서는 살아갈 수 없는 곳이고, 코딱지만 한 논에 벼농사를 짓는다고 해도 그것으로 일 년 생활비를 벌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운이 좋아 도회지 가까이에 있는 시골 관광서나 우체국 같은 곳에서 일하게 된 사람은 아주 드물고, 그 외에는 지역에 일할 만한 곳이 거의 없으니 남자든 여자든 중학교나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취직하러 먼 곳으로 떠나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만 그러는 게 아닙니다. 마흔, 쉰이 된 남자들조차 가족을 남겨둔 채 도쿄나 오사카로 일하러 나갑니다.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그래도 우리 집 식구들은 형편이 나은 편입니다. 다미오 씨는 와지마의 커다란 관광여관에서 요리사로 일하고 있고, 집에서는 봄이나 여름 시즌에만 이층의 두 방, 일층의 한 방에 민박 손님을 받고 있는데 그 일은 제가 꾸려가고 있습니다. 다미오 씨는 차분하고 부드러운 성격의 사람이고, 전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도모코도 저를 잘 따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저는 아내와 젖먹이를 버리고 멋대로 죽어버린 당신에게 이렇게 아무도 모르게 말을 걸고는 합니다.

꽤 오래전, 그러니까 우리 두 사람이 아직 스무 살이 될까 말까 할 무렵, 저의 눈 밑에 깔려 있는 주근깨를 보면서 당신이, 어딘가 다른 곳을 보고 있는 듯한 그 특유의 시선으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유미코, 다른 데도 또 주근깨를 엄청 숨기고 있지?”

그것은 어린 시절부터 친하게 지냈던 당신이 처음으로 입에 담은, 저에 대한 뭔가 수상한 말이었습니다. 저는 그 순간 명치 부근이 찡하니 아려와 부끄러운 몸짓으로 웃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때는 그 말의 의미를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자살해버린 당신을 생각할 때마다 그것은 여자의 몸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귀찮아 견딜 수 없었는데도 당신의 손가락에 맞추어가는 중에 그런 기분이 되어가는 저 자신의 여성스러운 부분을, 아직 결혼하기 전부터 알아맞혔다고 저는 믿고 있었습니다. 그 주근깨의 의미도 생각하면 할수록 복잡해져 저는 당신이 자살한 이유를 점점 더 알 수 없게 됩니다.

새로운 남편과 그럭저럭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으면서, 죽어버린 전 남편에게 이렇게 열심히 말을 걸고 있는 자신을 참 불쾌한 여자라고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습관 같은 것이 되어버리면 어느새 죽은 당신에게가 아니라, 그렇다고 자신의 마음에도 아닌, 뭔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가깝고 정겨운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는 듯해서 그만 황홀해질 때가 있습니다. 가깝고 정겨운 그 사람이 대체 누구일까, 저에게는 이것저것 다 알 수 없는 것들뿐입니다. 당신은 왜 그날 밤 치일 줄 뻔히 알면서 한신 전차 철로 위를 터벅터벅 걸어갔을까요…….

당신이 죽기 열흘쯤 전에 자전거를 도둑맞은 일이 있었습니다. 직장인 나사 제조 공장은 버스로 두 정거장가량 떨어진 곳이라 걸어가기에는 멀고 그렇다고 버스를 타기에는 좀 아깝다며 다소 무리해서 산 저전거였습니다. 그 무렵에는 왜 그렇게 돈이 필요한 일들만 이어졌을까요. 유이치가 태어난 지 세 달이 되었을 때로, 출산 비용이라든가 그 뒤의 자질구레한 비용이 겹쳐서 저금해둔 돈도 거지반 없어졌습니다. 나사 제조 공장이라고 해도 하청의 하청으로, 급료도 한심할 정도로 적었습니다.

“젠장, 도둑맞았으니 나도 훔치지 뭐.”

당신은 그 이튿날인 일요일, 휙 나가더니 저녁 무렵에는 정말 훔친 자전거를 타고 돌아왔습니다.

“이왕 훔칠 바엔 부자 것을 훔쳐야 할 것 같아서 고시엔까지 걸어갔어.”

저도 그렇게 나쁜 일을 하고 있다는 기분이 안 들었기 때문에,

“당신, 이 일에 맛 들여서 진짜 도둑이 되면 안 돼요.”

하고 웃으며 말했을 정도였습니다. 유이치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제 옆에 벌렁 드러누워서 당신은 오랫동안 천장을 가만히 노려보았습니다. 스물다섯 살치고는 늙었다는 느낌이 야윈 볼 언저리에 떠올랐는데, 그것이 어렸을 때부터 조금도 변하지 않은, 붉은 빛이 도는 입술을 더욱 빨갛게 보이게 했습니다. 저는 어쩐지 불안해져서,

“자전거, 다른 색으로 칠해서 알아볼 수 없게 해놓아야 하지 않아요? 그러다가 주인한테 들키기라도 하면 큰일이잖아요.”

하고 말했습니다. 겨울의 미적지근한 석양이 비좁은 부엌 창문으로 들어왔습니다. 올 여름은 무슨 일이 있어도 유이치를 위해 에어컨을 사지 않으면 안 되는데, 방이 작으니까 아주 조그마한 걸 사도 되겠지, 하고 멍하니 생각하면서 아파트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는 누군가의 슬리퍼 소리를 듣고 있었습니다.

“거래처인 기계업체에 스모 선수가 들어왔어.”

“어머, 스모 선수가요?”

“스모 선수라고는 해도, 가망이 없어서 그만두고 기계업체의 트럭 조수로 들어왔다나 봐. 벌써 서른이 넘었을 거야. 아직도 상투를 틀고 있는데, 열여덟인가 아홉 살짜리 어린 운전수가 턱을 까딱까딱 하면서 부려. 난 말이야. 그 상투를 보고 있으면 왠지 안됐다는 마음에 견딜 수가 없더라고.”

“으음. 왜요?”

“…….왜 그런지는 모르겠어. 그런 상투를 왜 잘라버리지 않을까?”

“여보, 고시엔까지 진짜 걸어서 갔어요?”

당신은 몸을 뒤치더니 다다미에 배를 깔고 곁눈질로 유이치를 보면서,

“그 상투를 보고 있으면 왠지 힘이 빠지거든.”

하며 웃었습니다.

“아앗, 또 사팔뜨기가 됐어요.”

뭔가를 곁눈질로 가만히 보고 난 다음에는 때때로 당신의 왼쪽 눈이 바깥으로 쏠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일시적으로 사팔눈이 되어버리는데 그때의 왼쪽 눈은 뜨끔할 정도로 바깥쪽을 향하고 있어서 저는 무심코 큰 소리로 그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당신은 서둘러 눈을 비비면서 기분이 언짢다는 듯 등을 돌려버렸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손등으로 왼쪽 눈을 비볐습니다.

“난 중학교밖에 안 나왔고 주변머리도 없어서 평생 부자가 되기는 글렀어.”

고시엔의 한적한 주택가에서 훔쳐온 자전가를 타고 이곳 아마가사키의 뒷골목으로 돌아왔으니까, 아마 기가 죽어서 그러는 걸 거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어렸을 때와 비교하면 전 결혼하고 나서 훨씬 더 행복해졌어요.”

그렇게 말했더니 당신은 천천히 이쪽으로 돌아누우면서,

“아, ……그런가” 했습니다. 빨갛게 충혈된 왼쪽 눈은 아까보다 더 바깥쪽으로 쏠려서 마치 당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얼굴 같았습니다. 여느 때 같으면 금세 원래대로 돌아오는데 어쩐 일인지 그날은 아무리 비벼도 사팔눈은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잠이 든 유이치를 아기침대로 옮기고 저는 당신을 덮치듯이 그 왼쪽 눈을 손바닥으로 누르면서 둥글게 문질렀습니다.

“때가 되면 괜찮아지겠지. 너무 문지르면 아프잖아. …… 눈동자를 움직이는 근육에 가끔 쥐가 나거든.”

“그럼 아프죠? 눈 안쪽이 아파요?”

“뭔가 묵직해지긴 해도 그렇게 아프지는 않아. 그냥 내버려두는 게 나을 거야.”

당신이 말한 대로 삼십 분도 안 되어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조금 전의, 당신이면서도 당신이 아닌 다른 얼굴이 언제까지고 마음에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때때로 그렇게 이상한 발작을 일으키는 눈이 사실은 당신의 본성일 거라고, 왜 그때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요. 그러고 나서 열흘 후에 갑자기 자살해버릴 낌새를, 왜 저는 바깥으로 쏠린 왼쪽 눈에서 알아채지 못했을까요…….

그날은 아침부터 비가 내렸습니다. 비는 저녁 일곱 시 무렵에나 그쳤고 저는 방 안에 널어둔 빨래 중에서 유이치의 기저귀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창밖에 널었습니다. 창문 아래 거리에는 세 채의 러브호텔이 줄지어 있었는데, 빨갛게 파란 네온사인이 뒤섞여 주변에 거무칙칙한 자주색 빛을 흩뿌리고 있었습니다. 비 개인 밤은 그 자주색 빛이 더욱 강해져 우리 방 안까지 기분 나쁜 색으로 물들이고는 했습니다.

당신은 열한시가 넘도록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런 일은 아주 드문 일이었는데, 저는 어쩐지 가슴이 두근거리고 진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칭얼거리는 유이치를 제 이불에 재워놓고 잠깐 옆에 눕는다는 게 전깃불을 켜놓은 채 깜박 잠이 들었습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시계를 보니 벌써 세시였습니다. 당신이 돌아온 거구나, 하면서 문을 열었더니 아파트 관리인이 경찰관과 함께 서 있었습니다. “남편은요?” 하고 관리인이 묻기에 저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대답한 순간 허리 부근에 싸하게 냉기가 돌았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구나, 당신 신상에 무슨 일이 일어났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정말 이 세상에서 그렇게 무섭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일은 다시는 없을 겁니다.

경찰관은 조그만 소리로 말했습니다.

“전차에 치인 남자가 있습니다. 혹시 확인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네? 제 남편인가요?”

이렇게 물으면서, 아아, 그 사람은 틀림없이 남편일 거야. 남편은 전차에 치여 죽어버린 거야, 하고 소름이 끼칠 정도의 확신이 들어 혀가 꼬부라지는 것 같았습니다.

“어쨌든 사체가 처참해서 얼굴로 알아볼 수는 없습니다만 옷이나 구두, 자질구레한 소지품 같은 걸로 확인해주셨으면 합니다.”

유이치를 관리인 부부에게 맡기고 저는 아파트 현관에 세워진 순찰차에 올라탔습니다. 차 안에서 경찰관은 설명해주었습니다. 바지 조각에 봉투 같은 종잇조각이 붙어 있었는데 거기에 오카지마 나사 제작소라는 회사명이 인쇄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오카지마 나사 제작소의 사원 세 사람 가운데 귀가하지 않은 사람은 댁의 남편밖에 없습니다. 그 종잇조각을 찾느라 선로를 따라 세 시간이나 돌아다녔습니다.”

구두 한 짝과 아파트 열쇠만이 유류품이었는데 그 두 가지는 당신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사체는 더 이상 복원할 수 없을 정도로 흩어져 있어서 저에게는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이튿날 아침 발가락이 발견되어 그 지문으로 사체가 당신이라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현장은 구이세와 다이모쓰 사이였는데, 전차를 운전한 사람의 말로는, 당신은 선로 한가운데를 전차가 진행하는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고 합니다. 느슨한 커브여서 사람의 모습이 조명등 안으로 들어왔을 때는 이미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거리였답니다. 경적 소리에도, 엄청난 브레이크 소리에도 돌아보지 않고 당신은 치이는 순간까지 똑바로 걷고 있었다고 합니다. 서 있던 승객 여섯 명 정도가 급정차로 튕겨나가 부상을 입었답니다.

자살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신문에도 조그맣게 그렇게 보도되었는데 저는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습니다. 경찰 측에서도 여러모로 조사를 했습니다만 아무런 동기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사체에서는 약물도 알코올도 검출되지 않았습니다. 몸도 건강하고, 술도 마시지 않고, 도박도 하지 않고, 그 밖에 여자관계도 없고, 죽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빚도 없고, 그렇기는커녕 첫 아이가 태어난 지 세 달밖에 되지 않아 남자로서는 기운이 넘칠 시기였습니다. 경찰관도 머리를 갸웃거릴 정도로 죽을 만한 이유 같은 건 무엇 하나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때 감쪽같이 정신이 나간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저는 당신이 죽고 나서의 그 며칠간을 떠올릴 때마다 생각합니다. 여우한테 홀린 것 같은, 여럿이서 누군가에게 소은 듯한, 그런 멍한 마음속에 흐느끼지도 울부짖지도 못한 채 오직 컴컴한 땅속에 가라앉아 있는 또 하나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옆에서 울고 있는 유이치를 내버려둔 채 멍하니 다다미를 쳐다보고 있는 모습이 걱정되었는지, 관리인 부부가 하루 종일 저를 지켜봐주었습니다. 남편의 뒤를 따라 가스관이라도 물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이라고, 저는 마치 남의 일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때의 저는 유이치를 데리고 죽어버릴까, 하고 생각한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생각을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저의 마음속에 있는 또 하나의 마음에, 비 그친 선로 위를 터벅터벅 걷고 있는 당신의 뒷모습이 이제 또렷이 비쳤습니다. 하늘색 와이셔츠 위에 회색 블레이저코트를 입고 약간 등을 구부린 특유의 모습으로 혼자 묵묵히 이슥한 밤의 선로 위를 걷고 있는 당신의 뒤를 좇으면서 저는 열심히 그 마음속을 알려고 기를 썼습니다.

그런 날이 며칠이나 계속되었을까요. 그러다가 제 앞을 걷고 있는 당신이 앞쪽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에 머리카락을 날리면서 가끔씩 멈춰 서서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저를 보고 있는 당신은 자전거를 훔쳐 돌아온 날 밤의 그 사팔눈이 된 다른 얼굴이었습니다. 저는 그 얼굴을 보면 그냥 무턱대고 슬퍼지고 그 자리에 못이라도 박힌 듯이 움직일 수 없게 되어, 자아지며 멀어져가는 당신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스물다섯인가. …… 젊은 과부네.”

어머니도 동생도 겐지도 올 때마다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지었습니다. 저는 두 달 정도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냈습니다. 신문의 구인 광고에서 마침 아파트 앞의 러브호텔에서 안내 겸 청소부를 모집하고 있다는 걸 보고 면접을 보러 갔습니다. 동생네서 신세를 지고 있던 어머니가 제 아파트로 옮겨와 유이치를 돌봐주기로 했습니다. 마음이 내키지 않는 일이었지만 그곳이라면 일이 한가할 때 간간이 집에 들를 수도 있고 또 가끔 팁을 주는 손님도 있어서 수입도 꽤 괜찮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였으니까 쇼와 32년(1957)이겠네요. 그해는 여러 가지로 기분 나쁜 사건이 우리 집을 휩쓸고 지나간 해였습니다.

당시 우리 가족은 아마가사키의 한신 국도 변에 있는 커다란 목조 아파트에 살고 있었습니다. 약간 색다른 구조의 아파트로, 원래 길을 끼고 늘어서 있던 나가야(長室 칸을 막아서 여러 가구가 살 수 있도록 길게 만든 집.) 위에 그대로 커다란 아파트를 올린 듯이 증축하여 하나의 건물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파트 안에 국도와 뒷골목으로 이어지는 터널이 연결되어 있는 이상야릇한 건물이었습니다. 일 년 내내 볕이 들지 않는 터널에는 항상 알전구가 켜져 있고 터널의 흙은 늘 축축하여 불쾌한 냄새가 떠돌았습니다. 터널 위는 이층 복도여서 사람이 걷는 소리가 쿵쿵 울렸습니다. 근처 사람들은 ‘마쓰다 아파트’라는 어엿한 이름이 있는데도 ‘터널 나가야’ 라고 불렀습니다.

우리 집은 많은 셋집으로 이루어진 일층 터널의 한가운데쯤에 있었습니다. 방의 남쪽 옆에는 공동변소가 있어서 일 년 내내 지독한 방취액 냄새가 흙벽을 타고 새들었습니다. 날씨가 좋은 날에 한길로 달려 나가면 너무 눈이 부셔서 한참을 가만히 서 있어야 했습니다.

북쪽 옆에는 포장마차를 끌며 라면을 팔고 있는 가족이 살았습니다. 장마가 며칠이고 계속되어 ‘옆집은 장사를 못할 테니 어렵겠지’ 라는 말이 들렸고, 어느 날 얇은 벽 너머로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아 아버지가 들여다보러 갔더니 라면집 부부는 두 명의 여자아이를 끈으로 목을 졸라 죽이고 자신들도 목을 매달아 죽어 있었습니다.

밤이 되어 아버지가 경찰서에 불려갔습니다. 유서에, 사체를 처리할 때 보탬이 될까 하여 있는 돈을 놓고 갑니다. 봉투에 넣어 책상 위에 올려놓았으니 그것으로 뒤를 잘 부탁드립니다. 라고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그 돈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첫 발견자인 아버지가 의심을 받았습니다. 아버지로서는 전혀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몸이 그다지 건강하지 못하고 겁도 많은 아버지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불러다 놓고 심한 말을 해대는 경찰의조사 방식이 어지간히 힘들었던 모양인지 그 길로 오랫동안 몸져누웠습니다.

당시 우리 식구는 아버지와 어머니, 나, 세 살 아래의 겐지. 그리고 여든세 살인 할머니, 이렇게 다섯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친할머니로, 다리와 허리는 정정했지만 귀가 잘 안 들리는데다 노망까지 들었습니다. 고치 현의 스쿠모 사람으로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아버지가 모셔와 같이 살게 되었는데, 시골의 널찍한 곳에서 살아온 분이어서 아마가사키의 축축하고 좁은 집이 너무나도 싫으신 모양이었습니다.

일 년 전쯤부터 무턱대고 집을 나가더니 결국 경찰의 보호를 받는 일까지 생겼습니다. 시코쿠의 스쿠모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길을 가르쳐 달라며 길 가는 사람에게 묻고 다니는 것을 경찰이 보호하고 있었던 겁니다. 노면전차의 선로 위를 걷는다거나 빨간 신호인데도 막무가내로 건너기 때문에 너무나 위험했습니다.

시코쿠로 돌아가도 옛날 집은 없어요.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서 가야 하니까 아무리 열심히 걷는다고 해도 할머니 발로는 돌아갈 수 없어요. 하고 아무리 가르쳐드려도 이미 노망이 들어 통하지가 않았습니다.

무더운 한여름이었습니다. 트럭이 몇 대나 땅을 울리며 국도를 달려갔고 그 시커먼 배기가스가 아파트 안의 터널에 가득 차서 저는 숨을 멈추고 한길로 뛰어 나갔습니다. 분명히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방에 누워 있던 할머니가 고베 방향으로 국도를 걷고 있었습니다. 저는 복사열의 열기로 후텁지근한 먼지투성이의 길을 쫓아가, 할머니 앞으로 가서 두 팔을 벌리며 지나가지 못하도록 길을 막았습니다. 그리고 귓가에 입을 대고 크게 소리쳤습니다.

“또 이렇게 멋대로 돌아다니면 아버지한테 혼나요. 집으로 돌아가요. 더우니까 어서 집으로 돌아가시라니까요.”

그러자 할머니는 주름투성이의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웃으시면서 알아듣기 힘든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스쿠모에서 죽고 싶으니께 시코쿠로 돌아가는 거여.”

여느 때와 달리 불문곡직한 말투로 중얼거리더니 저를 밀어젖히고는 다시 걷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한참을 그대로 선 채 할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문득 정신이 들어 서둘러 집으로 뛰어가, 그 일 이후로 내내 몸져누워 있는 아버지에게 할머니 일을 알려드렸습니다. 아버지는 깜짝 놀라 일어나 뒤쫓아 가려고 하다가는 그만 두었습니다.

“그냥 내버려둬. 누군가가 또 모셔오겠지, 뭐. 기둥에 묶어 둘 수도 없고 참.”

아버지는 기진맥진한 표정으로 어둑어둑한 방구석에 드러누워 버렸습니다. 저는 할머니를 찾아다녔습니다. 아버지가 그런 상태였으므로, 어머니는 근처 건축회사에 일을 나가고 있었습니다. 한신 아마가사키 역 앞에 빌딩 공사가 있었는데, 어머니는 그곳의 사내들 틈에서 벽돌이나 베니어판을 밀차로 현장에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밀짚모자를 쓰고 그 위로 수건으로 뺨을 감싼 어머니는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건축현장에서 밀차를 밀고 있었습니다.

헐레벌떡 달려가 말을 하려고 할 때, 한 남자가 뒤에서 어머니의 엉덩이를 걷어찼습니다.

“아무리 여자라도 농땡이 피우면 돈 못 줘!”

저는 할머니 일도 잊어먹고 그 자리에서 뒤도 안 돌아보고 쏜살같이 도망쳤습니다. 상점가 긴 아케이드 부서진 구멍으로 햇빛이 얼룩덜룩한 무늬로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를 정처 없이 계속해서 달렸고, 숨이 끊어질 듯해서 땀에 흠뻑 젖은 채 멈춰 섰더니 무릎 아래쪽이 싸악 차가워졌습니다. 열렸다 닫혔다 하는 커다란 파친코점의 유리문 사이로 냉방의 냉기가 새나오고 있었습니다. 블라우스 단추를 풀고 스커트 자락으로 땀을 닦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휘청휘청 파친코점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가슴이 큰 도깨비 같은 얼굴의 여자가 추잉검을 씹으면서 파친코를 하고 있었습니다. 파친코 기계 사이에 한동안 왔다 갔다 하다 보니 땀이 빙수처럼 차가워졌습니다. 그런데도 아랫배만은 몹시 뜨거워서 불쾌한 기분이었습니다.

제가 그날의 일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것은 파친코점 안에서 초경을 맞았기 때문입니다. 학교 보건 시간에 처치하는 법을 충분히 배우기는 했지만 정말 깜짝 놀라서 화장실로 달려갔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화장실 안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닫혀 있는 화장실을 이상하게 여긴 모양인지, 곧 파친코점의 점원이 와서 몇 번이고 문을 두드렸습니다. 저는 화장지를 잔뜩 접어서 거기에 꼭 대고는 더럽혀진 팬티를 있는 힘을 다해 끌어올리고, 시치미를 딱 뗀 채 밖으로 나갔습니다. 스커트 앞뒤를 손으로 누른 채 천천히, 천천히 걸어서 돌아갔습니다. 단발머리 앞머리에서 땀이 흘러내려 눈으로 들어가도 스커트 위를 누르고 있던 손은 절대 떼지 않았습니다.

집에 도착하자 안쪽 방으로 들어가 여기저기 구멍투성이인 장지문을 닫고 가만히 무릎을 꿇고 앉았습니다.

“유미코, 아무래도 걱정이 돼서 안 되겠다. 할머니 좀 찾아보고 올래?”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면서 장지문을 열고 들여다보았습니다. 평소와 다른 저의 모습을 알아차리고 몇 번이고 무슨 일이냐고 묻기에 저는,

“배가 아파”

하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왜 그런지 견딜 수 없을 만큼 슬퍼졌습니다. 초경이 무서웠던 게 아닙니다. 저는 그때 가난이라는 것을 태어나서 처음으로 원망했던 것입니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고 있는 국도로 사라진 할머니의 조그마한 뒷모습이나 막벌이꾼에게 엉덩이를 걷어차이던 어머니의 모습이, 한낮인데도 전구를 켜지 않으면 안 되는 축축한 방 가득히 되살아났습니다. 저는 장지문을 쾅 닫고 피가 굳어서 딱딱해진 팬티를, 스커트 위로 언제까지고 꼬옥 누르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달거리가 시작될 때면 어김없이 이유 없이 썰렁해지고 쓸쓸한 기분에 사로잡히는 것도, 아마 초경이 있었던 순간, 파친코점의 냉방으로 얼음처럼 차가워진 땀에 절어 있었던 탓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곧 어딘가의 파출소에서 연락이 오겠지, 하는 사이에 한밤중이 되어버렸습니다. 아버지는 마지못해 일어나서는 근처 파출소로 찾아갔습니다. 그런 노인이 보호받고 있다는 연락은 어디에서도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돈은 한 푼도 갖고 있지 않고 어떤 전차를 타면 어디로 간다는 판단도 할 수 없는 분이니까 그렇게 멀리는 못 가셨을 겁니다. 일단 내일까지 기다려보죠. 여름이니까 어디 길 위에서 얼어 죽을 일도 없을 테니까요.” 순경은 또야, 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한가하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이래로 할머니는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으로 갑자기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친척들한테 연락도 해보고 경찰서에서도 여기저기 찾아봐 주었지만, 한 주가 지나고 두 주가 지나도 할머니의 행방은 묘연했습니다. 어쩌면 할머니는 비상금을 숨겨두고 있다가 사람들한테 물어물어 고베에서 배를 타고 정말 기적적으로 목적지인 스쿠모까지 간 것이 아닐까요. 아버지도 어머니도 거기에 생각이 미쳤는지, 시코쿠의 친구나 지인들에게 문의하는 속달을 부치기도 했습니다. 경찰도 만약을 위해 시코쿠의 모든 경찰서에 수배하여 조사해주었지만, 그 후에도 할머니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반년이 지난 12월 중순, 얼굴이 익은 순경이 집에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디에선가 아주 기특한 사람이 신원불명인 노인을 보살펴주고 있거나 아니면 강이나 바다에 빠져 가라앉은 채 떠오르지 않거나, 이제 그 둘 중의 하나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겠네요.”

그 무렵이 되자 아버지도 어머니도 이대로 할머니가 발견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 같았습니다.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어딘가에서 죽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때까지 온화한 말투였던 순경이 갑자기 탐색하는 듯한 눈으로 말을 이었습니다.

“실은 근처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종전 후의 혼란한 상황도 아니고 요즘 같은 세상에서 몸이 불편한 노인의 행방을 이렇게 모른다는 게 있을 수 있느냐고 말이지요.”

“……예, 그야 우리도 육친인 만큼 오죽하겠습니까.” “집 안을 한번 살펴봤으면 하는데요. 괜찮겠습니까?”

“집 안을, 요?”

“다다미를 들어내고 바닥을 파보고 싶은데요.”

“저기……, 그, 그러니까 우리가 할머니를 죽여서 바닥에 묻기라도 했단 말이오, 지금?”

아버지는 깜짝 놀라서 어머니의 얼굴을 쳐다봤습니다. 어머니도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순경을 쏘아보았습니다. 일가가 동반 자살한 라면집이 남겼다는 돈 건으로 아버지에게 두어진 의심도 아직 말끔히 해소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평소 그렇게 온순하던 아버지가 그때만은 몸을 떨며 큰 소리로 순경에게 덤벼들기라도 할 듯이 말했습니다.

“아하, 그래요, 자, 맘대로 해보시든가. 집 안 어디든지 한번 찾아보시오. 만약 할머니가 나온다면 그건 내가 한 짓이 틀림없을 테니까. 게다가 어쩌면 옆집이 남겨두었다는 그 돈도 나올지 모르겠군. 찢어지게 가난하다 보면 사람은 거치적거리는 자기 부모를 죽이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의 돈도 슬쩍하게 된다는 뭐 그런 말 있잖소. 내일이 아니라 지금 당장 파보는 게 어떻겠소?”

순경은,

“그러게요. 그럼 그렇게 할까요?”

하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습니다. 세 시간쯤 지나서 순찰차와 소형 트럭이 뒷골목에 멈췄고 쥐색 작업복을 입은 경찰 대여섯 명이 삽을 들고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집 주인이 입회한 상태에서 옷장이나 찻장을 밖으로 내놓고 다다미를 걷고 바닥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나가야에 사는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모여들었습니다.

저는 어머니한테 딱 달라붙어 와들와들 떨고 있었습니다. 할머니가 한신 국도를 서쪽으로 멀어져가는 것을 분명히 보았는데도, 그때의 저는 바닥 밑의 축축하고 시커먼 흙 속에서 할머니의 사체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사로잡혔습니다.

바닥 밑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경찰관이 대충 뒤처리를 하고 찜찜한 표정으로 돌아간 것은 저녁이 다 되어서였습니다. 흙을 다시 다져넣고 나서 다다미를 깔고 변변치 않은 옷장과 찻장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나서도 여전히 흙냄새가 스며 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어머니는 방의 구석진 자리에 다리를 모아 옆으로 하고 앉아서, 드러누워 있는 제 머리를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주었습니다.

“유미코, 이제 어린애들이 있는 이런 스커트는 안 되겠다. 아가씨가 되었으니까 팬티가 보이면 창피하잖아.”

“그건 그렇지만 그 뒤로는 없는걸.”

그렇게 말하는 제 머리를 세 가닥으로 땋아보면서,

“처음에는 다 그런 거야. 그 뒤로 일 년이나 이 년까지 없는 애들도 있으니까”

하며 어머니는 웃었습니다. 어머니는 콧등과 손등만 새까맣게 타서 일 년 전에 비하면 몹시 늙어버린 느낌이었습니다.

“아빠도 내년부터는 일을 하실 거고, 엄마도 건축회사 일을 그만두고 역 앞의 ‘오타후쿠’ 라는 오코노미야키(우리나라의 부침개와 비슷한 음식) 집에서 일하기로 했어. 그동안 일하던 사람이 그만둬서 그 후임자로 와달라고 했거든.”

“와. 오타후쿠?”

“유미코와 똑같은 오타후쿠(둥근 얼굴에 광대뼈가 불거지고 코가 납작한, 추녀의 대표적인 얼굴)야.”

“저기 말이야. 나 예뻐? 아니면 못났어?”

“점점 예뻐지겠지.”

“그럼 지금은 역시 못생긴 거구나.”

다다미도 가구도 빈틈없이 제자리로 돌려놓았을 텐데도, 어쩐지 모습을 바꾼 낯선 방에 드러누워 있는 것 같았습니다. 수명이 다해 미세하게 깜박거리고 있는 형광등을 보면서 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맛보는 듯한 안도감에 휩싸였습니다. 안도감이란 아마 그때의 그런 마음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아, 할머니는 어딘가에서 죽었음에 틀림없고, 아버지도 일하고, 어머니도 이제 막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고, 저도 어엿하게 초경을 겪었고, 일순 그런 생각이 스쳐 저는 잠깐 안도감이라는 기분에 빠져들었습니다.

당신이 제 앞에 나타난 것은 그다음 날이었습니다. 뒷골목에 면한 이 아파트의 가장 구석진 자리에 있는 집에 나카오카라는 중년의 홀아비가 살았습니다. 당신은 그 집에 후처로 들어온, 자상해 보이는 여자가 데리고 들어온 아이였습니다.

제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당신은 터널 나가야 옆에 있는 높은 벽돌담에 공을 던지며 놀고 있었습니다. 파란 야구 모자를 비스듬히 쓰고 있었습니다. 본 적이 없는 남자아이가 혼자 놀고 있었으므로 저는 곁눈질로 훔쳐보면서 지나쳤는데, 어쩐지 무척이나 신경이 쓰였습니다. 특별히 이렇다 할 특징도 없는 남자아이였는데, 왜 그때는 당신이 그렇게 마음에 남았을까요. 저는 해질녘까지 혼자 벽돌담에 공을 던지고 있는 당신을 멀리서 몇 번이나 훔쳐보았습니다.

삼 년 후, 당신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과 거의 같은 무렵, 사체가 발견되지 않은 채였던 할머니의 사망 판결이 내려져 호적에서 말소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십 년 이상이 지난 지금까지 결국 할머니의 유체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만약 살아 있다면 이미 백 살이 넘었을 텐데, 그런 일이야 있을 리 없겠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그렇게 이상한 방식으로 죽은 사람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참으로 신기한 방식으로 이 세상에서 사라져 간 할머니와 교대라도 하듯 당신이 제 앞에 나타난 것에 뭔가 오싹한 두려움 같은 것을 느끼게 됩니다.

오쿠노토의 날씨는 변덕스러워서 이제 막 기분 좋게 갰는가 싶다가도 갑자기 구름이 부풀어 오르고 파도가 밀려와 주위를 밤처럼 바꾸어 놓습니다. 삼 년 전, 제가 막 네 살이 된 유이치를 데리고 처음으로 이곳에 온 날도 그런 날이었습니다. 끊임없이 갰다 흐렸다 하면서 반도 전체가 봄에서 겨울로 돌아간 것처럼 캄캄하고 추워지는 것을 저는 가나자와에서 갈아탄 나나오선 전차 안에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날은 아침 일곱 시에 아마가사키를 떠났습니다. 재혼 혼담을 주선해주었고 여러 가지로 보살펴준 집주인 부부에게 인사를 하고 나서 한신 전차 아마가사키 역까지 어머니와 함께 걸었습니다. 역 앞의 공원에 피어 있는 벚꽃이 대부분 져 버렸고, 그것이 강한 바람에 회오리쳐 올라가는 흐린 날이었습니다.

당신이 죽었을 때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던 어머니가, 표를 사고 있는 제 옆에서 울었습니다. 아침 이른 시간에 출근하는 샐러리맨들이 빠른 걸음으로 지나치면서 우리를 돌아보았습니다.

“유미코, 힘들면 언제든지 돌아와야 한다. 그때는 엄마와 같이 살자.”

“응, 싫어지면 참지 않고 돌아올게.”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한번 시집가면 그 집 귀신이 되어야지. 그런 마음이라면 처음부터 재혼 같은 건 생각하지 말았어야지.”

어머니는 종잡을 수 없는 말을 하고는 유이치를 끌어안았습니다. 동생 겐지는 자동차 판매회사에 근무하고 있고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는데,

“걱정하지 말라니까, 엄마 한 명이나 두 명쯤은 모실 수 있어”

하고 말해주었기 때문에 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안심했습니다. 오사카 역까지 배웅해주겠다는 어머니를 말리고 전 몇 번이고 계단 중간에서 돌아보며 플랫폼으로 올라갔습니다.

나고 자란 아마가사키의 거리를 저는, 사람들에게 밀리며 플랫폼에서 한참을 바라보았습니다. 왜 오쿠노토의 최북단에 있는 쇠락한 어촌으로 시집 갈 마음이 든 것인지, 저는 그때 자신의 마음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여덟 살이 되는 딸을 데리고 오쿠노토에서 일부러 맞선을 보기 위해 아마가사키까지 찾아온 세키구치 다미오라는 서른다섯 살의 남자에게 마음이 끌려서도 아니고, 공해에 찌든 연기와 사우나나 카바레의 네온사인이 가난 냄새를 풍기는 아파트를 에워싸고 있는 아마가사키라는 곳이 지겨워져서도 아니며, 아직 비린내가 가시지 않은 러브호텔의 시트를 갈아 까는 일이 힘들어서도 아니었습니다. 저는 당신이라는 사람이 따라다니는 풍경에서, 소리에서, 냄새에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그것을 깨닫자마자 제 가슴에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한신 국도를 서쪽으로 멀어져 간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이 또렷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별안간 애가 타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 아직 개찰구에 내내 서 있을 게 틀림없는 어머니한테 돌아가고 싶어졌습니다. 그때 한 씨 모자를 만나지 않았다면 저는 유이치를 안고 플랫폼을 뛰어 내려갔을 것입니다.

한 씨는 조선인으로, 여자인데도 남자처럼 뒷머리를 쳐올리고 남자 작업복을 입은 채 혼자 조그만 트럭을 운전하며 폐품을 회수하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실제로는 서른여덟 살인데 마흔일곱이나 여덟쯤으로도 보입니다. 불그레한 얼굴에 광대뼈가 튀어나온 아주머니입니다. 그 한 씨가 일곱 살짜리 사내아이와 다섯 살짜리 계집아이를 양손에 잡고 여덟 달이 된 젖먹이를 등에 업은 채 늘 입던 작업복 차림으로 전차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늘 무뚝뚝하기만 한 사람이었는데 그날은 제 얼굴을 보자마자 옆으로 다가와서는,

“어디 가요, 이렇게 아침 댓바람부터?”

하고 물었습니다. 저는 평소에 남자들처럼 담배를 입에 문 채 트럭을 운전하는 한 씨밖에 몰랐기 때문에 의외로 여자다운 친절한 말투에 당황하여,

“오쿠노토에 가요”

하고 솔직하게 말해버렸습니다.

“오쿠노토? 오쿠노토가 어딘데요?”

“……이시카와 현의 위쪽이에요.”

“그런 곳까지 뭐 하러 가세요?”

우메다행 급행이 들어와 개찰구로 내려갈까 어쩔까 망설이고 있던 저를 흘끗 보더니 한 씨는 사내아이의 손을 놓고 유이치를 달랑 안아 올리고는,

“빨리 올라가서 아줌마 앉을 자리 좀 잡아드려”

하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사내아이는 문이 열리자마자, 내릴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들 발밑을 빠져 들어가 빈자리에 벌렁 드러눕고는,

“잡았어, 엄마, 잡았어”

하고 소리쳤습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할 겨를도 없이 한 씨는 유이치를 데리고 전차에 올랐습니다. 저도 어쩔 수 없이 그 전차를 탔습니다.

“어마, 재혼한다구요?”

한 씨의 큰 목소리에 주변에 있던 승객들이 일제히 저희를 쳐다보았습니다. 저는 창피해서 화제를 돌리려고,

“한 씨야말로 이런 이른 시간에 어디 가세요?”

하고 물어보았습니다.

“덴노지 동물원에요. 오늘은 토요일이니까 오전에 한산할 때 다녀오려고요.”

“얘들을 세 명이나 데리고, 힘드시겠네요.”

“말도 말아요, 가자고 난리인데다 통 말을 들어먹어야지요.”

저는 전차에 흔들리면서, 우메다에 도착하면 그대로 아마가사키로 돌아가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우메다에 도착하자 한 씨는 오사카 역까지 저희를 배웅하겠다고 했습니다.

“너무 일찍 나와서 어떻게 시간을 보내나 했거든요. 그렇게 사양하지 않아도 돼요. 이제 헤어지면 평생 못 만날 것 같은데.”

아이의 손을 잡고 앞서서 성큼성큼 걸어가는 한 씨의 뒤를 종종걸음으로 쫓아가면서 저는 어쨌든 소소기까지 가보고, 그래도 싫다고 생각되면 정말 어머니가 말한 대로 돌아오면 된다고 생각을 고쳐먹었습니다.

라이초 2호가 오는 것을, 한 씨는 플랫폼까지 들어가 같이 기다려주었습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표정으로, 때때로 입을 떼려다가는 그대로 다물어버리는 한 씨와 꾀죄죄한 차림의 두 아이들을 보고 있었더니 저는 어쩐 일인지 눈물이 복받쳐 올랐습니다. 지금껏 한 번도 사이좋게 말을 나눠본 적도 없는 한 씨가 왜 이렇게 플랫폼까지 들어와 전송을 해주는지 묘한 기분이었습니다.

“앞으로가 여자로서 한창이에요. ……힘내요.”

무서운 얼굴로 한 씨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힘껏 가랑이로 조이면 사내들이란 맥없이 무너지거든요. 배우자의 아이를 자기편으로 만드는 게 비결이에요. 진짜, 진짜, 이제 그렇게 하는 거예요.”

열차가 들어오는 것을 알리는 방송이 있었고, 저는 예예,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플랫폼을 뛰어다니고 있는 유이치를 붙잡기 위해 달려갔습니다.

열차가 출발할 때 갓난아기를 거칠게 업고 두 명의 아이를 양손에 잡은 한 씨가 가만히 플랫폼에 선 채 금니를 빛내며 웃었습니다. 알게 된 지 십 년이나 된 한 씨가 저에게 처음으로 보여준 웃는 얼굴이었습니다.

불안감이나 답답함, 후회가 한꺼번에 밀려와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그때 제 마음에 한 씨는 대체 무엇을 쏟아부어주었을까요. 한 씨는 무슨 생각으로, 그때까지 친절하게 말을 나눈 적도 없는 저를 플랫폼까지 들어와 전송해주었을까요. 저는 때때로 한 씨 모자와 동행하여 어딘가로 놀러가는 꿈을 꿀 때가 있습니다. 다른 데는 알뜰하면서도 아낌없이 돈을 들인 한 씨의 금니가 묘하게도 꿈속에서는 고상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가나자와에서 갈아탄 나나오선 전차는 모든 역마다 서는 완행이어서 와지마까지는 세 시간이나 걸렸습니다. 처음 가는 긴 여행에 신나하던 유이치도 가나자와에 도착한 무렵부터는 지루해졌는지 좌우로 심하게 흔들리는 나나오선의 낡아 빠진 차 안을 이리저리 나뒹굴며 뛰어다녔습니다. 그러다가 나나오를 지난 무렵부터 잠이 들었는데, 저는 그제야 차분한 마음으로 바깥 풍경에 눈을 줄 수 있었습니다. 왼쪽은 야트막한 산이 코딱지만 한 논과 밭을 둘러싸고 있었고, 오른쪽으로는 아주 멀리 바다가 보였습니다. 열차가 반도의 쑥 내민 끝을 따라 나아가면서 하늘은 점점 어두워졌습니다. 약간 큰 역에 멈추면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학생이나 고등학생들이 한꺼번에 밀어닥쳤고, 그다음 큰 역에 도착할 때까지 조금씩 줄어들다가 다 내린 곳에서 다시 한꺼번에 밀어닥쳤습니다. 그들은 도회지 아이들과 똑같은, 자깝스럽고 건방진 눈으로 저희 모자를 쳐다보았습니다.

저는 와지마에 도착할 때까지 내내 바깥에 시선을 둔 채 죽어버린 당신과 이야기를 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생각도 나지 않습니다만, 그 무렵에는 저 혼자가 되면 무의식적으로 당신에게 말을 거는 버릇이 생겨버렸습니다. 그리고 제가 말을 거는 당신은, 선로를 걸어가는 뒷모습의 당신이었습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 마음이 차가워져버리는 그 뒷모습에 말을 걸면, 저의 또 하나의 마음은 분명히 무언가에 빠져들어 황홀해지는 신기한 기쁨을 느꼈습니다.

당신 입에서 저를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전 너무나 기뻤습니다. 태어나서 그때까지, 그리고 그 뒤로도 그렇게 기뻤던 적은 없었습니다.

둘 다 중학교밖에 나오지 못했습니다. 저는 동생 겐지를 어떻게든 고등학교 정도는 나오게 하고 싶었으므로, 어머니가 진학을 포기하라는 말을 했을 때도 그렇게 슬프지는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오랫동안 병으로 누워 있었기 때문에 아이 둘을 고등학교에 보낼 여유가 없다는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스스로 완고하게 진학을 거부하고 철공소에 견습생으로 들어가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피가 통하지 않은 아버지의, 이를테면 애물단지가 되고 말았다는 것을 의식해서 일부러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공부도 잘하고 용모도 단정한 남자아이였으니까 저에게는 수많은 연적들이 있었습니다. 그 연적들 대부분이 고등학교에 진학해버리자 저는 당신과 둘이서 작은 방에 들어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마음이 설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어른이 될 때까지 여러 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이런 저런 일이 있었지만 당신에 대한 저의 마음은 단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결혼하고 첫 아이를 낳은 지 세 달이 되었을 때 저는 이유도 알 수 없는 자살이라는 형태로 당신을 잃었습니다. 저는 그 후 허물처럼 살아왔습니다. 당신은 왜 자실을 했을까, 그 이유는 대체 뭐였을까, 저는 멍해진 머리로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그러다가 생각하는 데 지쳐서 아무래도 좋다는 마음이 되어 집주인 부부가 꺼낸 재혼 혼담에 어느새 휘말리고 말았습니다.

와지마에 도착하기 조금 전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건널목의 경적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다가왔다가 멀어져 갔고, 선로 옆으로 보이는 민가도 너무도 한촌寒村다운 시골티를 풍기는 느낌으로 변해갔습니다.

안개비는 강한 바람에 옆으로 들이쳤습니다. 열차 안은 난방이 잘돼서 더울 정도였으므로 와지마 역에 내렸을 때는 무심코 몸이 떨렸습니다. 4월인데도 겨울 같은 추위여서 저는 아, 대단한 곳에 와버렸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아직 꾸벅꾸벅 졸고 있는 유이치를 안고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개찰구를 빠져나갔습니다. 관광객처럼 보이는 한 무리가 개찰구 근처에서 밀치락달치락하고 있어서 마중을 나와 있을 다미오 씨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냥 돌아갈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어떻게 된 거지, 정신이 나간 거야, 그러니까 이렇게 먼 오쿠노토 구석까지 찾아올 마음이 든 거겠지, 하고 어딘가 잔뜩 긴장하면서 마음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오 분쯤 지났을 때 다미오 씨와 딸 도모코가 역으로 뛰어 들어왔습니다. 간사이에서 온 단체손님이 있어서 그 요리를 준비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고 다미오 씨는 미안하다는 듯 말했습니다. 아빠가 등을 툭 치자 미리 준비를 한 모양으로 여덟 살의 도모코는,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며 고개를 숙였습니다. 저희는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다미오 씨가 운전하는 경자동차에 올라탔습니다. 와지마 시내를 빠져나가 구불구불 구부러진 좁은 해안도로를 삼십 분쯤 달렸습니다. 시커먼 구름이 점차 갈라지더니 그 사이로 자색을 띤 파란 하늘이 들여다보였습니다. 날씨가 궂어지는 하늘인지, 개어가는 하늘인지 도저히 구별할 수 없는 듯한 구름 벽이 안개비 위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습니다. 저는 물방울에 젖은 차창 너머로 흔들흔들 요동치고 있는 광대무변한 일본해를 바라보았습니다. 몇 개의 조그마한 마을을 빠져나간 차가 다시 해안선으로 나왔을 때 제 눈은 무심코, 처음 본 소소기의 바다에 고정되었습니다. 온통 안개비에 묻힌 그때의 바다색은, 대체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요. 그것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이상하게 파도만이 새하얗게 날아오르며 넘실거리는 어두운 바다였습니다.

세키구치 다미오 씨의 집은 바다에 면한 이층집으로 새로 이은 지붕만이 새것인 옛날 그대로의 구조였습니다. 다미오씨는 장남으로 중학교를 나오자마자 오사카의 소네자키신치에 있는 음식점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십 년간 침식하며 조리사 면허를 땄습니다. 계속 오사카에서 살 생각이었지만 나이든 부모를 그냥 내버려둘 수도 없었습니다. 마침 와지마의 관광여관에서 요리사를 구하고 있기도 해서, 그렇다면, 하고 소소기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 지역 사람과 결혼한 지 삼 년 만에 아내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키구치가에는 그 밖에 오 년 전에 배우자를 잃은 예순 여덟이 되는 그의 아버지와 세 명의 동생들이 있었습니다.

다들 결혼해서 오사카나 나고야에서 생활하고 있으므로 성가신 시어머니나 시누이가 없는 셈입니다. 다미오 씨는 일단 저를 집에 데려다주고 나서 다시 여관으로 나갔습니다. 토요일은 늦은 시간까지 단체손님의 연회가 있어서, 하필이면 이런 날에 미안하다며 여관 주인으로부터 부탁을 받은 처지였던 것입니다. 될수록 빨리 돌아오겠다면서 나가버리자 저는 왠지 모르게 한숨을 놓고 아래층 방에서 무료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 이것이 해명海鳴인가, 하고 저는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습니다. 친척이나 이웃들에게 인사하는 것은 내일 하기로 하고 오늘은 편히 쉬라고, 시아버지가 알아듣기 힘든 말로 말해주었습니다. 와이셔츠 위에 솜이 든 겉옷을 입고 구멍이 난 검은색 버선을 신고 있었습니다. 저는 바느질 꾸러미가 있는 곳을 물었습니다. 이 년 이상이나 남자만 있는 집안이었기 때문에 어디에 무엇이 보관되어 있는지 시아버지도 잘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사오 년 전 가벼운 뇌일혈로 쓰러져 그 후로는 입과 오른손이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빡빡 깎은 반백의 머리와 주름투성이인 온화한 표정의 시아버지와 앉아 있으니 몸 안에 단단히 오그라들어 있던 불안감이나 긴장감이 풀리는 것 같았습니다. 낯가림이 심한 유이치가, 시아버지가 손짓하며 부르자 순순히 가서 무릎에 앉았기 때문에 저는 깜짝 놀라 바라보았습니다. 빨간 스웨터와 바지를 입은 도모코는 부엌과 붙어 있는 넓은 마루방에 혼자 앉아 노는 척하면서 저를 살피고 있었습니다. 저는 문득 한 씨의 말을 떠올렸습니다. 도모코 옆으로 가서,

“오늘부터 내가 니 엄마야”

하고 말했습니다. 그때 얼굴을 휙 들고 웃어준 도모코, 분명히 여자아이임에 틀림없는 그 아이의 냄새를 코끝으로 맡는 순간 저는 그때까지 자신 없이 웅크리고 있던 자신의 마음을 시원하게 똑바로 펼 수가 있었습니다. 이 아이는 내가 오는 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내내 기다려주었구나, 하고 생각하자 갑자기 힘이 나서 눅눅한 집안 분위기도, 아주 가까이서 들려오는 해명 소리도, 까맣게 빛나는 마루방의 냉랭함이나 잘 안 나오는 텔레비전 화면도 수년 전부터 써와서 익숙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날 밤, 바다에 면한 이층 방에 부모와 자식, 네 명의 이부자리를 나란히 깔았습니다. 긴 여행으로 피곤했을 텐데도 유이치는 언제까지고 잠들지 못했습니다. 도모코도 다미오 씨 옆에서 몇 번이나 몸을 뒤척이며 때때로 생각난 듯이 머리를 들고는 저를 보며 웃어주었습니다.

일본해에서 정면으로 불어오는 강풍이 덧문의 희미한 틈을 파고들며 피리처럼 울어대는 것을, 저는 숨을 죽이며 열심히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나가는 것이 항상 일정한 간격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매번 강약도 달랐고 넘실거리는 방식도 달랐습니다. 아아, 바람 탓인가, 이제 겨울이 되면 또 어떤 바람이 불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눈을 감고 깜빡깜빡 졸기 시작할 때쯤 다미오 씨의 손이 들어왔습니다.

저는 덧문이 덜커덕 하고 소리를 낼 때마다 눈을 뜨고 천장의 꼬마전구를 쳐다봤습니다. 대체 사람의 마음이란 어떤 걸까. 이불이나 베개, 자신의 것이 아닌 냄새에 언제까지고 익숙해지지 않은 채 저는 몇 번이고 그렇게 다가오는 상대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몸을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때만은 죽은 당신도, 당신의 뒷모습도 머릿속에 접어 넣고 요란하게 넘실거리는 바람과 파도의 한복판에서 살짝 땀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바쁜, 그러나 마음 편한 나날이 계속되었습니다. 다미오 씨는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숙박하는 손님을 위한 아침식사는 여관에서 먹고 자는 젊은 요리사가 일요일만 아침 다섯시까지 여관에 가고 그 외에는 어지간한 단체손님이 아니고서는 열시에 집을 나서면 되었습니다.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도모코는 전혀 거북해하지 않고 “엄마” 하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시아버지는 유이치가 정말 귀여운 모양으로, 저녁식사를 마치면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재워줍니다. 유이치도 마치 거기는 자기 자리라도 되는 양 놀다 지치면 곧장 할아버지의 무릎으로 달려갑니다. 저도, 뺨을 감싼 수건으로 적동색 피부를 감추고 대바구니를 짊어진 채 길을 오가는 근처의 부인들과 친해져서 때로는 같이 버스를 타고 와지마의 아침 시장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해명의 울림에도, 바람 소리에도, 멀리 바라다볼 뿐인 거친 바다에도, 뒤쪽에 있는 좀 높은 이시구로 산의 나뭇잎이 흔들리는 쓸쓸함에도, 그리고 그것들에 휩싸여 고요히 흩어져 있는 민가의 분위기에도 어느새 위화감을 느끼지 않게 되었습니다. 까마귀나 갈매기,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수많은 참새 떼, 비가 개면 어김없이 수평선에 걸쳐지는 커다란 무지개에도 저는 놀라지 않게 되었습니다. 살면서 익숙해지자 이곳 오쿠노토가 상상 이상으로 가난한 곳이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한창 일할 젊은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쓸쓸한 일인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도쿄로 일하러 간 남편과 이삼 년 동안 얼굴을 보지 못했다는 부인은 쌔고 쌨는데, 그중에는 그대로 증발해버려 생활비도 보내주지 않은 채 오 년이 지난 집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아들이나 딸도 학교를 졸업하면 취직하러 도회지로 떠나고, 그대로 그곳에서 살림을 차리고 돌아오지 않습니다. 특히 소시가나 그 부근 마을 등은 어업도 완전히 스러졌고, 아이들과 노인들만 있는 마을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던 것이 최근 몇 년간의 관광 붐으로 시즌 중에는 몰려드는 숙박객을 호텔이나 여관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오쿠노토 전역에서는 민박집을 운영하는 곳이 많아졌습니다. 도회지의 학생이나 샐러리맨은 큰 호텔이나 여관보다는 민박집에 묵고 싶어 하는 듯해서 근처의 집들에서는 목욕탕이나 화장실만 개조하고 민박협회의 간판을 현관에 내걸었습니다.

다미오 씨가 우리 집도 민박을 하면 어떻겠느냐는 말을 꺼낸 것은 가을도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습니다. “오래전부터 하고 싶기는 했지만 어쨌든 여자 일손도 없었고……” 하며 다미오 씨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슬며시 말을 꺼냈습니다.

“게다가 내가 여관에서 일하는 게 마음에 걸리기도 하고. 사업상의 경쟁자 같은 부업을 하는 셈이니까…….”

여관 주인에게 타진해본 결과 의외로 선뜻 찬성해주었다고 합니다. 여관과 민박은 손님 층이 다르고, 예고 없이 들이닥치는 거절할 수 없는 손님을 민박에 소개해주면 기뻐하니까 오히려 안성맞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당신을 오게 한 것 같아서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거든. 게다가 거의 대부분은 당신 일이 될 거고…….”

빚을 내서 어설프게 음식점을 내는 것보다 이대로 여관 주방에서 일하는 것이 더 안심할 수 있기는 한데 그것만으로는 아이들이 다 컸을 때가 걱정이라는 것이 다미오 씨의 생각이었습니다. 다미오 씨는, 도모코는 그렇다 치고 유이치는 남자니까 어떻게든 제일 위의 학교까지 보내고 싶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와지마 시내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집을 별도로 하면 이 근방에서 아들을 대학까지 보낼 수 있는 집은 거의 없습니다. 저는 다미오 씨의 생각이 기뻤고, 게다가 저 자신도 일하는 것이 좋았기 때문에 내년 황금연휴를 목표로 조금씩 집안을 수리해 나가는 것으로 양해했던 것입니다.

처음으로 맞이한 소시기의 겨울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눈과 바람과 거친 파도의 나날이었습니다. 메마른 토지와 나가는데 목숨을 걸어야 하는 앞바다만이 의지할 데였던 오쿠노토의 사람들은 도대체 지금까지 어느 정도의 지혜와 인내심으로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일까, 저는 각로脚爐를 마주하고 시아버지가 들려주는 예전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했습니다. 다미오 씨의 할머니가 짰다는, 이곳에서는 사코리라 부르는 방한복을 입고 유이치는 옅은 눈 속을 뛰어다니며 놀았습니다. 소금기를 잔뜩 머금은 찬바람 때문에 뺨은 금방 빨갛게 부어올랐고, 게다가 콧물을 문질러댔기 때문에 트고 맙니다. 아마가사키에 살았을 때는 쉴 새 없이 두리번두리번 움직였던 유이치의 눈이 부드럽게 차분해진 것을, 저는 느긋한 마음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재혼하기를 잘했구나, 하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세키구치가에서의 행복한 생활을 한 달에 한 번쯤 좀 과장될 정도로 편지에 써서 어머니에게 알렸습니다. 그런데도 부엌에서 도모코와 함께 설거지를 하면서 목욕탕에서 들려오는 다미오 씨와 유이치의 웃음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아아, 저게 당신과 유이치였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자 허리께가 싸악 차가워지면서 뭔가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두려움에 빠져들었습니다. 그것은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에 대해서가 아니라 돌연히 이 세상에서 사라진, 당신이라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왜 죽었을까, 왜 당신은 차이는 순간까지도 계속해서 선로의 한가운데를 걸어갔던 것일까. 저는 그릇을 든 손을 멈추고 설거지대 구석에 시선을 떨어뜨리면서, 지금 바로 죽으려고 하는 사람의 그 마음의 정체를 알려고 필사적으로 이리저리 생각했습니다.

설날을 열흘 앞둔, 바람이 유난히 거센 날이었습니다.

보건소에 민박에 관한 서류를 제출하기 위해 저는 유이치를 시아버지께 맡겨놓고 소소기에서 버스를 타고 와지마까지 나갔습니다. 외출할 때는 눈이 옆으로 들이쳤는데 용무를 마치고 보건소를 나설 때는 이미 그쳐 있어서 저는 오랜만에 혼자 큰 양재점에 잠깐 들르거나 화장품 가게에 들어가 자질구레한 물건을 샀습니다. 칠기 점포가 늘어서 있는 좁은 버스길을 와지마 역 쪽으로 걸어가 찻집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버스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서른 전후의 한 남자가 들어와 커피를 주문했습니다. 이 지역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한눈에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도저히 여행자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탁자에 놓인 커피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채 그 사람은 찻집을 나갔습니다. 제가 그 남자를 마음에 담아둔 것은 그 사람이 심한 사팔뜨기였기 때문입니다. 자전거를 훔쳐온 날 밤, 비비면 비빌수록 심해지던 당신의 눈과 닮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남자는 제가 탄 소소기행 버스에 올랐습니다. 체인을 감은 버스는 평소보다 속도를 줄인 채 달렸기 때문에 오카와의 마을들을 빠져나가는 데 한 시간 이상이나 걸렸습니다. 기름기 없는 가지런한 머리의 그 남자는 지친 듯 바다만 바라보았습니다. 정류소에 멈출 때마다 내릴까 말까 망설이는 것처럼 엉거주춤 일어났다가 다시 좌석에 주저앉고는 했습니다. 제가 그 남자에게서 뭔가 심상치 않은 점을 느낀 것은, 이를테면 제 감상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여기에 죽으러 온 거다, 라고 저는 생각했던 것입니다.

남자는 소소기 입구를 한 정거장 앞둔 가와라에서 내렸습니다. 내릴 때 사팔눈으로 힐끗 저를 본 것 같았습니다. 저도 서둘러 버스에서 내렸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생각도 없이 저는 그 남자의 뒤를 쫓아갔습니다. 한 정거장 전에 내렸으면서도 그 사람은 바다를 따라 난 얼어붙은 길을 소소기를 향해 걸어갔습니다.

바다가 면한 허술한 민가는 바람이나 파도의 물보라를 막기 위한, 이대로 만든 울타리로 둘러쳐져 있었습니다. 거기에 얼음처럼 굳어져 들러붙어 있던 눈이 바다에서 불어오는 돌풍으로 후두두둑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날아갔습니다. 방파제에 부딪치는 파도의 물보라가 머리 위에서 쏟아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지붕에 쌓인 눈이 날아올라, 마치 바로 지금 하늘에서 내리는 것처럼 산기슭을 향해 날아갑니다. 길에는 저와 그 남자밖에 없었습니다. 털장갑을 낀 손으로 머리에 감고 있던 머플러를 누르면서 저는 흠뻑 젖은 채 뒤를 쫓아갔습니다. 그때 아주 시커멓던 하늘도 바다도 파도의 물보라도 파도가 넘실거리는 소리도 얼음 같은 눈 조각도 싸악 사라지고 저는 이슥한 밤에 흠뻑 젖은 선로 위의 당신과 둘이서 걷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힘껏 껴안아도 돌아다봐주지 않는 뒷모습이었습니다. 뭘 물어도 무슨 말을 해도 절대 돌아보지 않는 뒷모습이었습니다. 피를 나눈 자의 애원하는 소리에도 절대 귀를 기울여주지 않는 뒷모습이었습니다. 아아, 당신은 그냥 죽고 싶었을 뿐이었구나, 이유 같은 것은 전혀 없어, 당신은 그저 죽고 싶었을 뿐이야. 그렇게 생각한 순간 저는 뒤를 쫓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습니다. 당신은 순식간에 멀어져 갔습니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마쓰모토마루라고 쓰인 어선이 방치되어 있는 모래사장 옆이었습니다. 저는 방파제 사이로 모래사장으로 내려가 조그맣고 하얀 어선 옆으로 걸어갔습니다. 앞으로 상반신을 잔뜩 구부리고 일본해의 돌풍을 뚫고 나아갔습니다. 어선에 기댄 채 넘실거리며 다가오는 시커먼 바다를 보았습니다. 머플러도 코트도 찢겨져 날아갈 것만 같았습니다. 추위도 두려움도 없었습니다. 저는 내버려진 어선에 달라붙은 채 오랫동안 겨울 바다를 바라보았습니다. 바다의 흔들림과 함께 제 몸도 흔들흔들 흔들렸습니다. 아마가사키의 그 터널 나가야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이제 아무래도 좋아, 행복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아, 죽는다고 해도 좋아. 뿜어져 올랐다가 흩어져 날아가는 커다란 파도와 함께 그런 생각이 자꾸만 가슴속에서 일어났습니다. 저는 어린아이처럼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당신이 죽었다는 것을, 저는 그때 확실히 실감했던 것입니다. 아아, 당신은 얼마나 쓸쓸하고 불쌍한 사람이었을까요. 눈물과 흐느낌, 저는 얼굴을 찡그리면서 언제까지고 울었습니다. 대체 얼마나 거기서 울고 있었을까요. 문득 옆을 보니 다미오 씨가 서 있었습니다. 저는 비명을 지르고 잠시 말도 할 수 없는 상태로 다미오 씨의 찌를 듯한 눈을 보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오. 이런 데서. 응? 대체 어떻게 된 거요?”

다미오 씨는 뒷걸음질 치는 제 어깨를 붙잡고,

“어쨌든 집으로 갑시다. 이런 데 있다가는 죽을지도 모르니까”

하고 말했습니다. 시아버지와 유이치는 각로 옆에서 자고 있었습니다. 도모코는 근처 친구 집에서 놀고 있는 듯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미오 씨는 떨고 있는 저를 안 듯이 이층으로 데려가서는 각로의 스위치를 올리고 석유스토브에 불을 붙였습니다. 저는 입가가 마비된 듯 말을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옷을 갈아입고 각로에 발을 넣고 몸을 웅크렸습니다. 떨리는 몸은 언제까지고 진정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제정신을 차릴 때까지 다미오 씨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습니다. 뜨거운 차를 끓여주었고 제가 그것을 다 마셨을 때,

“이유를 말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잖소”

하며 매섭게 노려보았습니다. 제가 입을 다물고 있자,

“이 집이,.…… 싫소?”

하고 온화한 말투로 물었습니다. 저는 고개를 옆으로 젓고, 그래도 뭐라 설명해야 좋을지 여러모로 생각했습니다.

“바다를 보고 있었더니 그냥 슬퍼져서요.”

가까스로 입을 연 저를 노려보는 다미오 씨의 눈은 그때까지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는 험악한 것이었습니다.

“춥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그냥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던 거예요.”

“왜, 그런 곳에 숨어서 바다를 보고 있었던 거요?”

왜 그때 그런 말이 입에서 나온 것일까요? 저는 한참 다미오 씨를 노려본 뒤,

“전 부인과 저 중에 누가 더 좋아요?”

제가 생각해도 놀랄 만큼 교태를 섞어 속삭였습니다. 다미오 씨의 눈에 안도의 빛이 스쳤습니다. 그리고 결혼한 이후 처음으로 거칠게 덤벼들었습니다. 어떻게 어선 너머에 숨어있는 저를 찾을 수 있었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저는 그냥 입을 다물고 갈색으로 변색된 다다미 바닥만 계속해서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혹독한 겨울이 지나고 짧은 봄도 지나 드디어 관광객들이 붐비는 5월에 접어들었을 무렵 저희는 민박을 열고 첫 손님을 맞이했습니다. 오사카에서 찾아온 세 명의 대학생들이었습니다. 그것을 시작으로 황금연휴 중에는 쉴 새 없이 바빴습니다. 처음부터 여름에만 영업을 할 생각이었으므로, 그 외의 날에 찾아오는 숙박객은 고맙기도 하고 성가시기도 하고, 어쨌든 응대하는 데는 애를 먹게 됩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을 때는 온 식구가 아래층에서 생활하지만 갑자기 손님이 찾아올 때는 서둘러 이층을 치우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돈을 받는 만큼 그만한 음식을 내지 않으면 미안하기 때문에 다미오 씨가 살짝 생선을 가져다주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여름이 왔고, 9월 중순까지는 숙박객이 계속해서 찾아왔습니다. 그해에 찾아온 손님이 다른 손님을 소개해주기도 해서 이듬해에는 식구들이 잘 방이 없을 정도로 손님이 든 날도 있었습니다. 일 년이 지나고 이 년이 지나자 제대로 된 식기나 이불도 갖추어졌고, 저도 손님들을 접대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으며, 어디서 어떻게 돈을 벌면 되는지 순간적으로 계산이 서게 되었습니다.

작년 가을, 동생 겐지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저는 도모코와 유이치를 데리고 이 년 반 만에 아마가사키로 돌아갔습니다. 처음에는 다미오 씨도 함께 갈 예정이었지만 아무래도 시아버지 혼자 두고 갈 수는 없다는 것으로 이야기가 모아져 그렇게 되었습니다.

“편지를 부지런히 보내주니까 난 안심하고 있었다. 유이치, 내년에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겠구나, 정말 많이 컸다.”

새로 이사한 맨션의 방 하나를 차지하고 어머니는 마음 편히 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겐지, 경기가 참 좋은 모양이구나. 이렇게 방이 많은 맨션을 다 얻고.”

“마누라가 피아노 선생을 하는데 학생이 서른 명이 넘는단다. 겐지보다 수입이 더 많아.”

방에 놓여 있는 커다란 피아노를 가리키며 어머니는 약간 불만인 듯이 웃었습니다.

“애들이 치는 서툰 피아노 소리를 하루 종일 듣고 있어 봐라. 머리가 다 이상해질 정도라니까.”

저는 결혼해서도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겐지의 처가 정말 고마웠습니다.

“식을 올리기 한 달이나 더 전부터 함께 살고 있단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세상의 순서 같은 건 신경도 쓰지 않으니까. .……아. 그보다 유미코,이제 안심해도 되는 거 맞지?”

“응, 안심해도 돼.”

어머니는 기쁜 듯했습니다. 도모코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할머니야. 넌 내 손녀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렇게 말하며 웃었습니다.

이튿날 결혼식이 끝나고 나서 저는 옛날에 살았던 터널 나가야가 있던 곳에 가보았습니다. 이 년 반 전, 아마가사키를 떠날 때는 아직 그대로 남아 있던 터널 나가야도 철거되어 주차 시설이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혼담을 주선해준 집주인 부부에게 인사를 한 뒤 유이치와 도모코를 데리고 공원 옆의 찻집으로 들어갔습니다. 당신이 가끔 들렀던 가게입니다. 조금도 변하지 않은 점표의 구조를 보았을 때 문득 정겨워졌기 때문입니다. 뽀글뽀글 파마머리를 한 젊은 점장은 저를 보고 깜짝 놀라 옆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는 제가 재혼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아주 반가워하면서 당신에 대한 추억담을 꺼냈습니다.

“그날 여덟시쯤 이 가게에 와서 커피를 마셨어요.”

“……그날이라면?”

“저기, 죽은 날 말이에요. 일을 끝내고 여기까지 돌아와서 커피를 마시러 들렀어요.”

“……아. ”

“특별히 평소와 다르지 않았으니까, 이튿날 신문을 보고 정말 깜짝 놀랐어요. 카운터에 앉아 우리가 하는 바보 같은 얘기를 빙긋빙긋 웃으면서 듣고 있었으니까요.”

“여기까지 돌아왔었다구요?”

저는 무심코 그렇게 되물었습니다. 당신이 그날 밤 집 근처까지 와서 커피를 마셨다니,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였습니다.

“깜빡 하고 돈도 없이 들른 것 같았는데,금방 가져온다고 해서 다음에 올 때 줘도 된다고, 그렇게 말했어요.”

“저런, 그럼 그 사람 커피 값은 아직도 안 낸 거네요?”

“점장님, 미안해요, 다음에 가져올 테니까 외상으로 달아둬요. 그렇게 말하고 돌아갔으니까 그날 밤에 자살했다는 걸 알았을 때는 정말 꿈을 꾸는 것 같았다니까요.”

당신이 외상으로 달아놓았다는 돈을 제가 지불하려고 하자 점장은,

“아니에요, 그럴 생각으로 말한 게 아니에요. 그런 걸 이제 와서 받을 생각 같은 건 추호도 없어요. 필요 없어요, 필요 없어요. 전, 절대 받을 수 없어요.”

하며 손을 내저었습니다.

저는 소소기로 돌아가는 열차 안에서, 그날 밤 집 근처까지 돌아온 당신이 거기에서 선로의 한복판으로 향했던 그 길을 계속해서 생각했습니다. 당신은 찻집을 나갈 때까지는 죽을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았어요. 그랬다는 보증은 아무것도 없는데 저는 어떤 이상한 확신을 갖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찻집을 나선 뒤 당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저는 생각이 떠오르는 대로 몇 가지 상상을 하고, 한 사람의 인간이 죽으려고 결심하기에 이르는 다양한 이유를 맞춰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당신과는 아무래도 잘 맞춰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때까지 생각지도 못했던 그날 밤 당신의 행동이 어떤 간격까지 좁혀진 것으로 생각한 것은 착각이었고, 거기에서 선로의 한가운데까지 두 시간 정도의 시간은 오히려 도저히 영문을 알 수 없는 공동空洞 같은 것이 되어갔습니다.

그해는 12월 3일에 첫눈이 왔습니다. 눈은 밤중부터 내리기 시작하여 동틀 녘에 그쳤습니다. 저는 문득 눈을 뜨고 머리맡의 시계를 보았습니다. 여섯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습니다. 봄이나 여름이라면 집 뒤쪽이나 바닷가 쪽에서 밭일이나 작은 배를 타고 고기를 잡으러 나가는 사람들의 기척이 흘러들어오겠지만, 11월이 지나면 쥐 죽은 듯 조용합니다. 그런데 그날은 집 옆으로 바다를 향해 걸어하는 느긋한 발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뽀드득뽀드득 쌓인 눈을 밟는 소리였으므로 저는 첫눈치고는 많이 내렸구나, 하고 비몽사몽간에 생각했습니다. 대체 이곳은 어디일까,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고 싶어질 만큼 파도 소리도 북풍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일어나 석유스토브에 불을 붙이고 다미오 씨의 카디건을 걸치고 덧문을 열었습니다. 한겨울이라고는 생각도지 않는 화창한 아침놀이 늪처럼 고요해진 바다를 비추고 있었습니다. 아침놀에 물들어, 불타는 숯불이 전면에 깔린 듯한,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시뻘건 첫눈이 길에도 지붕에도 방파제에도 모래사장에도 쌓여 있었습니다.

발소리의 주인은 도메노댁이었습니다. 우시쓰로 가는 국도에서 오솔길로 안쪽으로 들어간, 비늘 모양의 판자를 댄 창고에 살고 있는 중년 여성입니다. 그녀의 남편은 바로 얼마 전에 계절노동으로 돈을 벌러 오사카로 나갔습니다. 코딱지만 한 논에서 자신들이 겨우 먹을 만큼의 벼농사를 짓고, 바다가 잔잔한 날이면 가끔 엔진이 달린 작은 배를 타고 앞바다로 나가 농어나 감성돔을 잡아와 돈으로 바꾸었습니다.

도메노댁이 고개를 잡으러 나갈 정도이므로 오늘은 바다가 잔잔한 모양이구나, 하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도메노댁은 신중해서 바다가 거칠어질 염려가 있는 날에는 절대 배를 띄우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마을 노인들조차 인정하며 경의를 표할 정도로 눈이나 바람의 상태를 보고 그날의 날씨를 예측하는 능력이 탁월했습니다. 마치노 강의 물이 흘러드는 곳에는 작은 모래언덕이 있는데, 도메노댁의 배는 거기에 있었습니다. 단단히 옷을 챙겨 입고 눈이 쌓인 모래언덕을 걸어가는 도메노댁은 시뻘건 아침놀이 그 테두리를 채색하고 있어 뭔가 엄숙한 분위기를 띠고 있었습니다. 저는 에는 듯한 냉기도 잊고 정신없이 도메노댁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덧문으로 내다보는 저를 알아본 도메노댁은 멈춰 선 채 뭐라고 소리쳤습니다. 제가 되묻는 몸짓을 하자,

“게를 잡아올 건데 안 살 거야?”

하며 다시 한 번 소리쳤습니다. 도메노댁이라면 싸게 팔 테니까 저는 사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 세 개를 들어보였습니다.

“세 마리. 알았어, 세 마리면 되는 거지?”

저는 완전히 잠이 깨버려서 그 자리에서, 엔진 소리를 울리며 앞바다로 나가는 도메노댁의 배를 바라보았습니다. 해가 뜨기 시작하고 급격하게 붉은 기가 엷어져가는 해면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평소보다 훨씬 넓은 범위에서 반짝이기 시작했습니다. 하얀 파도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바람이 없는 잔잔한 바다 한가운데에 금색 가루와 같은 빛이 떠 있었습니다. 곧 도메노댁의 배는 그 빛과 같아져버렸습니다.

“이봐, 문 좀 닫아. 방 안에 고드름이 달리겠어.”

다미오 씨의 말에 저는 덧문을 닫고 다시 이불 속으로 기어들었습니다.

“눈이 많이 쌓였어요.”

“눈을 보면서 또 누구하고 비밀 이야기를 한 거야?”

저는 가슴이 철렁하여,

“누구냐니요, 누구요?”

하고 물어보았습니다. 다미오 씨는 몸을 뒤쳐 제 쪽으로 돌리고는 살짝 웃으면서,

“그거야 나도 모르지”

했습니다. 오랫동안 졸린 눈으로 저를 쳐다보았습니다. 깜박하지도 않는 멍한 눈이 점점 빛이 돌더니 이부자리 안에서 손을 살금살금 움직이며 제 잠옷의 이음매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제 엉덩이를 어루만지며 “찾았다” 하고 속삭였습니다.

“…… 뭘, 찾았다는 거예요?”

“여기에도 주근깨가 있었어. 젊은 아가씨 같은 엉덩이야.”

“거짓말. 그런 데는 주근깨 같은 게 없어요.”

“거짓말이 아냐. …… 몰랐어?”

“그럴 리가요, 전혀 몰랐어요.”

그대로 다시 슬슬 시작할 것 같은 기미였으므로 저는 다미오 씨의 손을 밀치며 일어났습니다.

“전 어렸을 때부터 가끔 혼잣말을 하는 버릇이 있어요. .……그래서 엄마한테 여러 번 혼났어요.”

“무슨 생각을 하는지, 통 알 수가 없는 여자야. .……얼굴빛이 희면 못생겨도 예쁘게 보인다잖아."

아주 집요하게 저를 가까이 오게 하려는 다미오 씨를 뿌리쳤을 때 덧문이 달그락달그락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아침밥을 준비하는 동안에도 바람은 점점 더 강해져 여느 때의 해명이 지축을 흔들 듯이 닥쳐왔습니다. 해변의 눈이 벗겨져 올라 몇 장의 얇은 종이처럼 마을을 향해 날아왔습니다.

저는 도메노댁이 마음에 걸렸고 시계가 이삼 미터밖에 안 되는 바다를 부엌의 조그만 창으로 주시했습니다. 파도가 바위에 부딪쳐 하얗게 치솟는 무수한 물보라가 작고 맹렬한 회오리가 되어 짙은 납빛 하늘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잔잔하던 바다가 한순간에 이렇게까지 돌변하다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걱정스러워하는 제 모습을 보고 시아버지께서,

“괜찮을 거다. 도메노는 불사신이야. 헤엄을 쳐서라도 돌아올 여자지”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도 그 얼굴에서는 웃음기가 사라졌습니다. 다미오 씨는 외출할 때 어업조합의 사무소에 들러 도메노 씨가 작은 배로 게를 잡으러 나갔다는 것을 보고했습니다. 모여 있던 노인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이런 바다라면 손쓸 방도가 없겠는걸”

하며 큰 소란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어쨌건 폭풍이 멎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폭풍은 저녁이 되어도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저는 소소기의 바다라고는 생각되지 않던 오늘 아침의 그 평온한 아침놀을 떠올리며, 도메노댁의 배가 한 줌의 빛이 되어 사라져간 모습을 마음속에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 무렵에는 모래사장에 쌓여 있던 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무시무시한 파도의 물보라를 뒤집어쓰고 군데군데 얼어붙어 있던 눈만 회색 혈관처럼 들러붙어 있었습니다.

그때 오타니에서 와지마로 가는 버스가 멈췄고 도메노댁이 내렸습니다. 저는 꿈을 꾸고 있는 기분으로 바깥으로 달려 나가 그 사람이 확실히 도메노댁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어업조합의 사무소까지 뛰어갔습니다.

너무 많은 노인들에게 둘러싸였으므로 도메노댁은 깜짝 놀라 한동안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앞바다에 나가기는 했는데 너무나 조용해서 점점 이상한 예감이 들기 시작하는 거예요. 분명히 무슨 일이 일어나겠구나, 그런 느낌이 오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을 때 서둘러 배를 돌리기 시작했어요. 깜빡 속을 뻔했지 뭐예요. 그만큼 빨리 알아챘는데도 마우라의 갯바위에 댈 여유조차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마우라에 간 김에 친척집에 들러, 바람이 멎기를 기다리는 버스가 출발할 때까지 잠깐 쉬었다 왔어요.”

“역시 도메노야, 이 바다의 정체를 잘 알고 있거든.” 이렇게 말하며 노인들은 제각각 칭찬을 늘어놓거나 놀리거나 했습니다. 도메노댁은 제 얼굴을 보더니 손에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불쑥 내밀며,

“당신 건 잡아왔어”

하며 시치미를 뗀 얼굴로 말했습니다. 저는 어안이 벙벙하여 세 마리의 게를 받아들고는 술 냄새가 진동하는 조합 사무소를 뛰어나와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맞으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게값을 지불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저는 저녁밥을 먹고 난 후 도메노댁을 찾아갔습니다. 눈길은 걸을 때마다 유리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났습니다. 창고의 작은 창으로 빛이 새나왔습니다. 비늘 모양의 판자를, 말려둔 감이나 무가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입구의문을 두드리자,

“누구세요, 열려 있어요.”

하는 도메노댁의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렇게 추운데 여기까지 일부러, 하며 도메노댁은 돈을 건네고 총총히 돌아가려는 저에게 따뜻한 물을 주었습니다.

“전 남편은 왜 죽었어?”

저는 그때까지 이런저런 사람으로부터 그런 질문을 받았고 그때마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대충 둘러댔지만 무뚝뚝한 도메노댁의 큰 소리에 맞춰 무심코,

“자살했어요. 전차에 치어서”

하고 대답하고 말았습니다.

“아이구, 거 참 힘들었겠네,”

도메노댁은 잠깐 뭔가를 생각했습니다. 눈썹은 팔자인데 눈이 치켜 올라가 그것이 얼굴 한가운데서 마름모꼴의 짙은 선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도메노댁이 얼굴은 얼핏 보면 부드러운 사람인지 심술궂은 사람인지 짐작할 수가 없습니다.

“세키구치 다미오 씨도 요시에 씨를 병으로 잃고 참 불쌍했지. 죽은 요시에 씨는 여기서 가까운 데라치 아가씨였어. 다미오 씨는 계속 오사카에서 살 생각이었지만 요시에 씨와 결혼하기 위해 소소기로 돌아왔지. 사랑하는 아내였는데 젊어서 죽어 참 힘들었을 거야.”

저는 집으로 돌아와서는 유이치와 도모코를 목욕탕으로 들여보냈습니다. 뭐가 사랑하는 아내야, 하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으면서 왜 또 나 같은 여자를 후처로 들인 거야.

“엄마 엉덩이에 주근깨 있니?”

저는 욕조에서 일어나 도모코의 얼굴에 엉덩이를 들이댔습니다. 도모코는 잠시 찾아보더니,

“있어, 있어. 여기 잔뜩 있어”

하며 허리에서 엉덩이의 갈라진 지점을 짚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거울 두 개를 가져와서 요리조리 각도를 바꿔가면서 저에게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거울은 곧 김이 서려 저에게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전에는 없었는데, 참 이상하네.”

그러자 도모코는 제 눈 밑의 주근깨와 엉덩이의 주근깨를 몇 번이나 비교해보고 나서,

“엄마, 엉덩이의 주근깨와는 달라. 이건 기미야”

하고 놀렸습니다. 저는 웃으면서, 와지마에 도착한 날 꾸뻑 머리를 숙이며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하던 도모코의 얼굴을 문득 떠올렸습니다. 탕에서 나와 유이치의 몸을 닦아주고 있으니 도모코가 다시 욕조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이걸 사 달라, 저게 갖고 싶다, 하며 은근히 조르기 시작했습니다. 제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도모코는 이야기를 도중에 그만두고 슬금슬금 나가려고 했습니다.

“머리를 잘 말리고 나서 이불 속으로 들어가는 거야.”

저는 도모코의 등을 찰싹 쳤습니다.

그날 밤 다미오 씨는 술에 취해 늦게 들어왔습니다. 폭풍은 잦아들었지만 한겨울의 소소기 해안은 눈이 섞인 파도와 바람에 뒤덮입니다. 귀청을 찢는 듯한 해명도 그 한복판에서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이미 소리가 아닙니다. 그저 익숙해진 평범한 소리 같은 것으로, 저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잠을 잘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술 마시고 운전하면 위험하잖아요.”

그렇게 얘기하는데도 잠옷으로 갈아입지 않고 그대로 이불로 파고드는 다미오 씨를 흔들면서, 저는 도메노 씨의 말을 떠올렸습니다. ‘사랑하는 아내’ 라는 말이 묘하게 마음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죽은 부인에 대해 질투하고 있는 자신을 도저히 억누를 수 없었습니다. 이불을 벗기고 다미오 씨를 앉혀 놓고 “거짓말쟁이!” 하고 외쳤습니다. 그런 식으로 발끈할 때의 여자의 마음이란 여자인 저조차 제대로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당신, 아버님을 혼자 둘 수는 없으니까 마지못해 소소기로 돌아왔다고 했죠?”

“……응, 그랬지.”

“전 들었어요. 당신은 전 부인과 결혼하고 싶어서 오사카에서 이곳으로 돌아왔다고 하던데요. 사랑스러운 아내였다면 서요. 그런 소중한 부인을 잃었으면서 왜 또 저 같은 여자를 후처로 들인 거예요?”

다미오 씨가 한 대 얻어맞은 모양으로 멍하니 있었기 때문에 저는 점점 더 발끈하여 무심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늘 누구랑 비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아요?”

“……누구랑, 하는 건데?”

“당신이랑, 도모코랑, 아버님이랑 얘기하는 거예요.”

그러고 나서 자신의 거짓말을 덮어 감추는 것처럼,

“전 열심히 이 집 사람이 되려고, 정말 열심히 비밀 이야기를 하면서 생각하는데, 당신은 사랑스러운 아내와 결혼하고 싶어서 일부러 소소기로 돌아왔다구요? 당신은 거짓말쟁이예요. 저를 속였어요”

하고 종잡을 수 없는 말을 외쳤습니다. 다미오 씨는 킥킥 웃으며 갓난아기를 어르듯이,

“됐어, 그 이야기는 내일 하기로 하지. 그런 무서운 이야기는, 제발 내일 하자고” 하고 속삭이며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 써버렸습니다. 그것으로 조용해진 제가 마음에 걸렸는지 다미오 씨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왜 그래, .……자는 거야?”

하고 물었습니다. 그 순간 그때까지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던 말이 스르륵 제 안에서 미끄러져 나갔습니다.

“전 그 사람이 왜 자살했는지, 왜 레일 위를 걷고 있었는지, 그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더 이상 잠을 잘 수 없게 돼요.…… 저기, 당신은 왜라고 생각해요?”

다미오 씨는 잠자코 있었습니다.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저는 잠옷으로 갈아입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꽤 긴 시간이 지나고 자신이 그런 질문을 했다는 것조차 잊어먹었을 무렵, 다미오 씨가 불쑥 말했습니다.

“사람은 혼이 빠져나가면 죽고 싶어지는 법이야.”

“……혼?”

다미오 씨는 이불 속에서 얼굴만 간신히 내밀고 그대로 숨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눈을 감고 세 사람의 숨소리를 듣고 있었습니다. 터널 나가야 시절부터 소소기의 어촌으로 돌아온 긴 시간의 변천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당신을 잃어버린 슬픔은 저 자신조차 몸이 떨릴 정도로 이상한 것으로, 그것은 언제까지고 언제까지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었습니다. 타인의 억측이 미치지 못하는, 아무런 이유도 발견되지 않는 자살이라는 형태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발을 동동 구를 만한 분함과 슬픔이 가슴속에 서리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분함과 슬픔 덕분에 오늘까지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것을 위한 각별한 노력이나 궁리를 한 것도 아닌데 다미오 씨와 도모코는 이제 저에게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었습니다. 저도 유이치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키구치 집안 사람이 다 된 것입니다. 저는 당신의 뒷모습에 말을 거는 것으로, 위태롭게 시들어버릴 것 같은 자신을 지탱해왔는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뒷모습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떠올랐습니다. 그때 제 마음에는 불행이라는 것의 정체가 비쳤습니다. 아아, 이것이 불행이라는 것이구나, 저는 당신의 뒷모습을 보면서 확실히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저는 어느덧 꾸벅꾸벅 졸며 따뜻한 바다에 떠 있는 기분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십 몇 년 전 경찰이 집의 다다미를 들추고 방바닥을 판 날,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었을 때의 그 신기한 인도감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저는 거친 바다가 울부짖는 소리도, 덧문이 심하게 흔들리는 소리도, 비 개인 레일 위를 터벅터벅 걸어가는 당신의 뒷모습도 멀리 밀쳐두고 깊은 안도감 속에 누워 있었습니다.

다시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왔습니다. 유이치도 초등학교에 들어갔습니다.

대체 무슨 생각에서 다미오 씨가 그런 말을 했는지, 그 후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저는 확실히 이 세상에는 사람의 혼을 빼가는 병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체력이라든가 정신력이라든가 하는 그런 표면적인 게 아닌 좀 더 깊은 곳에 있는 중요한 혼을 빼앗아가는 병을, 사람은 자신 안에 키우고 있는 게 아닐까. 절실하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병에 걸린 사람의 마음에는 이 소소기 바다의 그 한순간의 잔물결이 비할 데 없이 아름다운 것으로 비칠지도 모릅니다. 봄도 한창이어서 짙은 초록으로 변한, 거칠어지기도 하고 잔잔해지기도 하는 소소기 바다의 모습을 저는 넋을 잃고 바라봅니다.

자 보세요, 또 빛나기 시작합니다. 바람과 해님이 섞이며 갑자기 저렇게 바다 한쪽이 빛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어쩌면 당신도 그날 밤 레일 저편에서 저것과 비슷한 빛을 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만히 시선을 주고 있으니 잔물결의 빛과 함께 상쾌한 소리까지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이제 그곳만은 바다가 아닌,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부드럽고 평온한 일각처럼 생각되어 흔들흔들 다가가고 싶어집니다. 그렇지만 미쳐 날뛰는 소소기 바다의 본성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잔물결이 바로 어둡고 차가운 심해의 입구라는 것을 깨닫고 제정신을 차릴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아아, 역시 이렇게 당신과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기분이 좋네요. 이야기를 시작하면 가끔 몸 어딘가에서 찡하니 뜨거운 아픔이 일어 기분이 좋습니다.

시아버지의 가래 섞인 기침 소리가 들려옵니다. 배가 고프면 저렇게, 이층에서 농땡이를 피우고 있는 저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뭘 떠올리고 있는 건지, 툇마루에 앉아 싱글싱글 웃으면서 하루 온종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제 슬슬 유이치도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