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다반사

에피소드 40. 이 또한 지나가리라.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16. 5. 19.

소설이 나아가는 길은 무한궤도이다.



1.  고석동이 살인이 아니라 비리라던가 다른 방법으로 안일표를 궁지에 빠뜨릴 수도 있 는데도 불구하고 살인이라는 것이

     작가가 선택하고 미리 지정해 놓은 것이라면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는 보다 더 그럴듯함을 요구하기 때문에 변형이 될 수

    있다. 살인이 소설 적으로 최선이었나, 검증해 볼 필요가 있는데, 만약 살인을 소설적으로 끌고 가고 싶다 면 살인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더 만들어 가야한다.



    고석동이 안일표를 죽일 수밖에 없는 더 그럴 듯한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다가 고석동은 안일표와 금수와의 문제로

    오랜 세월 대치해왔음을 암시하는 부분들로 해결을 했습 니다. 정심의 입을 통해. 아마 고석동은 금수의 아들인

    안중근이라는 존재를 금수에게 발설하고 용서를 구하려했거나. 안중근을 금수에게 돌려주는 것으로

    (돌려주는 존재가 될 수 없겠지만)계획해왔지만 안일표가 반대하는 걸로. 안일표는 당연히 반대할 수밖에 없 었겠죠.

    자신의 아들을 끔찍이 사랑하는, 어찌 보면 자신의 허접한 인생을 아들을 통해 보상(아들의 더 높은 사회적 출세)

    받으려는 어떤 심리도 있겠고. 어쩌면 안일표는 안중 근을 통해 금수를 향해, 또 멀리까지 가 자신의 첫사랑이었던

    금수의 어머니 연실의 존 재까지를 염두에 두고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썼는데 과연 독자는 그것을 눈치

    챌 수 있을까? 아니면 저의 이런 생각을 일반적인 독자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의 문이 됩니다. 또 하나 안일표는

    끊임없이 금수를 탐하는 것으로. 그것을 참지 못한 고 석동의 우발적인 살인이 되는 걸로 만들었는데 과연 그것이

    그럴 듯한 것인지는 객관적 인 시선으로 보아야 할 것임에 선생님의 언급에 따라 더 고쳐 보겠습니다.



2. 금수가 고석동의 주검을 두고 신체적인 접촉의 장면은 무리라고 말씀하신 것에 대해 깊 이 생각해봤습니다.

    사실 저도 이 부분에 대해 계속 망설였었는데 선생님이 언급을 하시자 깨달은 것이 있습 니다. 이 부분은

   저의 무의식의 발로, 그러니까 선생님 말씀대로 상징계에서 보편화될 수 없지만 제 무의식 깊은 곳에서 금수가

   고석동을 안아주고 등을 쓰다듬는 행위에서 어 찌 보면 제가 제 자신의 등을 쓰다듬고 위로하고 받아들이는

   행위였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니까 고석동이 금수에게 지은 죄를 사함 받는 것으로 제가 살아오면서 누군가에게 

   죄를 지었던 것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의식 같은 것으로 환치되어 나온 부분은 아니었는 가, 선생님의 지적대로

  제 무의식의 폭발로 여겨졌습니다. 해서 그 장면은 선생님 말씀 대로 없애는 걸로.



3. 금수가 고석동의 목을 조르는 장면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묻고 싶습니다.

    

   첫 번째로 저는 이것은 일종의 안락사에 대한 저의 관점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구나,

   그렇게 생각 되었습니다. 이미 고석동은 죽을 수밖에 없는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고

    순간 금수는 그것이 고석동이 갈망하는 죽음의 양식이라는 것을 깨닫고 실행하는 것이 죠.

   고석동의 관점에서 보면 지금까지   금수에게 지었던 죄를 사함 받는 길은 또 금수의 손에서 죽는 것이라는,

    즉 자신의 죄에 대한 벌과 용서를 동시에 선택했던 길이라는 생 각을 했을 것 같은데 무리인가요?

    사실 느끼셨겠지만 여러 면에서 제 관점들은 좀 넘치 기도 하고 모자라기도 하는 보편성이 부족한 편이라 자신이 없군요.

    친한 친구가 늘 잔 소리처럼 저에게 하는 말은 '좀 상식적인 선에서 생각하라.'는 것인데, 그 상식선을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저번에 선생님께 저에게 NO라고 제동을 걸어 달라고 말 씀드린 것이구요. ㅎㅎ

   이 나이 먹어도 도대체 사는 것은 늘 혼돈, 그 자체입니다. 유감스럽게도.



4.  사회의 무의식도 있고 개인의 무의식이 있는데 모두 사회에서 통용될 수는 없다. 이중에 부질없는 것이라

    생각되는 것은 다  억압이 되어서 유령으로 가라앉는다. 이 무의식중에 서 쓸모가 있고 공통분모에 해당하는 게

    의식으로 대부분 떠오르고 이것이 상징계의 법 이며 이것이 관습이고 사람사이의 지켜야할 도덕이고 규칙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어떤 한 개인의 무의식이 폭발하듯 솟구쳐 오르는 것 이 모든 것은 받아들여질 수 없다.

    이 모든 것은 사회에서 통용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 들여야 한다. 소설은 상징계에 내놓 는 상품이다. 개인이 일기를

   쓰듯이 글쓴이의 욕망을 다 폭발시킬 수 있는 장이 아니다. 

   소설이라는 장르를 통해 사람들과의 약속된 것만이 받아들여질 수 있다.

 


  앞으로 소설을 쓰는데 제가 가장 염두에 두어야 할 부분인 것 같습니다. 이 소설을 쓰면 서 확실하게 깨달은 것은

  그동안 제 무의식 안에 무엇이 있었는지, 그리고 그 무의식은 얼마나 용서받고 위로받고 치유되기를 원했는지...

  사실 금수가 고석동을 안고 등을 쓰다 듬고 염을 하는 과정을 쓰면서 꽤 많은 애통의 시간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속으론 이건 뭔가,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려고 애쓰면서. 그런데 말이죠. 좀 속이 후련한 것 같습니다.

  또 생각해보니 제 인생에서 누구가에게  어깨를 기대본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늘 지나치게 씩씩,..

  표면적으론 말이죠. 그 이면에 어렸을 적 울어도 울어도 절 안아줄 수 없었던 제 엄마, (먹고 사느라고 바빠서. 

   전 외할아버지에 의해서 양육되었다고 해요.) 하여 어깨를 기대고 싶어도 거절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선뜻 손을 내밀지

  못했던 내가 있었구나. 제가 유난히 눈물이 많았는데 절대 남들 앞에선 안 울려는 심뽀가 있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구나. 뭐 그런 생각들이 물밀 듯이. 그나마 지금 선생님께, 또 누구에겐가. 조금은 살짝 기대도 되요? 물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진 것이 스스로 대견! ㅎㅎㅎ 뭐 그렇다고 부담 가지시 마세요. 가끔 이렇게 생각을 나눌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해요.  

  그런 까닭으로 나는 금수에게서. 고석동에게서., 실존의 인물이 아닌 가공의 인물 속에서라도 위로 받고자 했던

  내가 있었다니...ㅎㅎㅎ 암튼 뭐 랄까,  이 소설을 쓰면서 확실한 것은 제가 제 지난 인생을 해원했다고나 할까,

  물론 여전히 많은 숙제가 남아있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2여년의 시간이 헛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결과에 상관없이.

  이것 또한 과정이니,  제가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살아 갈 수 있을지, 희망도 조울증이라 는 선생님의 언급을 듣고 그 부분에

  대해  또 생각하게 됩니다. 견딜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도피로써 희망이라는 것을 억지로 껴안으려 하는 것은 아닌지...

  굳이 희망을 앞세우지 않더라도 만족할 수 있는 현실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샘,

   고맙습니다. 크게 염려하시지 않아도 됨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아직 저는 청춘, 어쩌면 사춘기를 겪고 있는 것 같습

   니다만. 이 또한 지나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