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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에피소드 30.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논리속의 죽음과 살인의 충동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16. 5. 15.

사디즘과 마조히즘(가학과 피학) 논리


  인간계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피할 수 없는 관계를 규정짓는 핵심이다. 그러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논리를 통해  정신분석학에 접근 한다.

  지금은 포스트모던 현상 속 즉 후기 구조주의 시대에 있다. 이전 시대인  즉 구조주의 시대는 건축물을 짓는데 벽돌 하나를 빼버리면 구조 전체가 들썩인다는 관념을 적용하여 인간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이런 구조 속에 존재하므로 자기혼자는 자유로울 수도 없고, 자유로울  방법도 없다는 것이 구조주의적 관점이다.

   사디즘과 마조히즘은 구조주의가 전제가 되어야하며 권력이나 힘을 지닌 어떤 주체, 사디즘 적인 주체 속으로 다른 자아가 그 밑으로 들어가서 관계를 맺어야만 모든 것이 이뤄진다. 후조 구조주의의 라깡은 눈과 응시의 분열을 통해 이 사람과 관계를 맺으려면 이 사람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관점을 지닌다. 이 사람의 그림이라고 하면 인간이 상처를 받으면 그 상처가 가슴속에 그림으로 남아있고 인간은 이 그림에서 벗어날 수 없고 굉장히 규정을 받는다. 이 그림이라는 것의 토대는 상징계의 남성 위주의 구조라는 즉 아버지와 어머니에 의해서 자식들이 생겨나고 가정을 형성하고, 가정과 가정이 모여서 국가와 사회를 형성하는 구조에 의해 근거한 그림이다. 남자의 경우는 여자에 대한 환타지가 운명적이고 불가해하다고 느껴지지만 사실은 이 그림에 입각한 것이다라는 설이 있다. 즉 어떤 남자가 어떤 여자를 선호하는 것은 어릴 때 받았던, 가족관계를 통해 받았던 상처에 의해서 형성된 마음속의 그림에 입각한 것이며  이 사람이 갖는 여성에 대한 환타지이고 사랑의 논리이다. 사랑 그 자체는 아무것도 아닌 무이다.

  그런데 어떤 남자가 이 그림에 근거해서 의도들을 형성해나간다. 이럴 때 사랑이라는 논리를 추출해낼 수 있는데, 이럴 때만이 사랑이라는 것이 형성이 된다. 그러므로 사랑이라는 것도 별것이 아니게 한 개인의 상처에 근거하고 입각해있는 것이 사랑의 논리이고 사랑의 윤리이다. 즉 아버지가 사디즘적이었다면 그 사디즘적인 아버지의 뭔가를 극복할 수 있는 논리가 생기고 그 논리에 의해서 여자를 바라보고 여자를 자기 품속으로 수렴시키려고 하고 보호하거나 여자에게 강요하는 사랑의 논리이면서 가슴 속 그림에 입각한 환타지이며 이것이 남성적 환타지의 근거이다.

   살인충동은 어렸을 적 강압적이고 사디즘적인 부모를 만났을 때 더 많이 느끼기 마련이다.  우리의 무의식속에 아버지가 죽었으면 하는, 아버지가 차지하고 있던 권력은 아버지가 죽어야만 아들이 차지할 수 있으므로 아버지가 죽었으면 하는 무의식적인 살인충동이 그 생각의  바탕이 된다. 이 바탕에는 스스로 그런 힘 있고 강압적인 아버지가 되고자하는 의도가 숨어있다. 이런 것들은 인간으로 성장하면서 아버지적인 것을 배우고 내적 자아가 형성이 되는데 내부적으로는 초자아라는 형태로 우리의 마음자리를 마련된다. 즉 우리의 마음속에는 초자아와 자아라는 것으로 분열된다. 초자아가 마음속에 자리를 잡지 못하면 조금 비정상적인, 즉 초자아는 자아에게 명령하는 주체인데 이런 초자아가 약하다면 범죄자가 될 수 있고 줏대가 없는 사람이 된다.

초자아가 금지 명령을 느끼는데 초자아가 자기 처벌을 내리면서 즉 초자아가 자아를 처벌한다. 아버지적인 초자아가 자아를 처벌하는 과정에서 죽음 충동이 일어나고 발작이 일어난다. 아버지의 속성들이 초자아에게 부여되고 이 초자아는 사디즘 적으로 변하고 자아는 마조히즘 적인 수동성을 드러낸다.

  어른이 되어서 죽었으면 그 사람, 즉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된다. 즉 내안의 초자아가 확립이 되면서 아버지가 지나치게 사디즘 적인 강압적인 자아는 너무 약해서 아버지가 어른이 되었는데도 내면적인 초자아가 너무 강해진다. 아버지를 잃어버렸는데도 상실하지 못하고 내 안에 들어와서 초자아가 여전히 행세한다. 이럴 경우 다른 사람의 죽음을 원했던 그는 이제 바로 그 사람, 아버지가 되어서 스스로 죽으려는 죽음 충동을 느낀다. 득세한 초자아가 자아를 끊임없이 처벌하는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자아가 죽음충동을 느낀다. 이 과정 중에 느껴지는 쾌감은 초자아에게 즉 사디즘적인 초자아가 자아를 처벌하는데서 형성된다. 여기서 피할 수 없는 것은 살인 그 자체이다. 타인을 죽이든, 자신을 죽이든.

   "남에게 희생을 당할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살인을 한다. "

  이때 남은 내 안의 타자인 초자아가 죽었으면 하는 그사람, 경우에 따라서는 아버지,  어머니가 될 수 있는 데 이때 자아는 스스로를 죽이든가 남을 죽이게 되기도 한다. 살인충동은 다각적이고 다양하게 내면에서 응용이 된다. 어떤 사람이든 똑같은 패턴을 가질 수 없다. 이것이 포스트모던 현상 속의 자아이다. 구조주의는 유형별로 분류해서 똑같은 패턴으로 인간의 정신분석학을 응용하지만 포스트모던 정신분석학은 케이스바이 케이스로 작동한다. 즉 1억명의 정신분석은 1억명의 케이스를 가진 다는 것이다. 이것이 푸코의 정신분석학적 관점이다. 푸코는 독재자가 마이크로 아무리 떠들어도 우리 속으로 들어오는 경로는 다르다는 관점을 주지한다. 우리는 서로 다른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배자의 논리가 다른 방식으로 표출된다고 할 수 있다.



죽음과 살인의 충동에 대한 명쾌한 강의를 들으며 내 안의 무의식속에 존재하는 이것들의 속성에 대한 이해를 하게 된다. 늘 죽음과 가까이 있다는 어떤 충동이 몰려올 때마다 도대체 왜, 어떻게 내 안에 그것들이 존재하게 되었고 어떤 식으로 표출 될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과 두려움을 함께 가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