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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에피소드 29. 편지 3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16. 5. 15.

    여행은 잘 하시고 계시나요?

   제가 10여년을 나라밖에서 떠돌다가 한국에 들어와 고향 말고 제일 먼저 방문한 곳이 제주도였죠. 그때 제주도에 대해 너무 많이 실망했어요. 너무 조잡한 인위적인 모습들 때문에. 지금 생각해보면 관광지 위주로 다녀서 그랬던 것 같아요. 초등학교 친구들하고 갔던 것이라. 그 뒤 남해, 통영, 거제 여행을 했는데 세상에 이렇게 예쁜 곳들이 대한민국에 있었나, 감탄했었죠.

그런데 몇 년 전 제 동생이 푸켓에 사는데 여행 삼아 남편이랑 렌트카를 빌려 제주도 자유여행을 했다고 하면서 제주도에 대해 찬탄의 말을 하더군요. 제가 본 제주도와 그 애가 본 제주도가 그렇게 다르다니, 도대체 난 뭘 봤을까? 어쩜 언젠가 한 번 쯤은 노트북에 수트케이스만 달랑 들고 제주도 어느 구석에 처박혀 글을 쓸지도...ㅎㅎ 부럽습니다.

   감독님이 보내주신 메일을 월명산 산책 중에 봤거든요. 하여 핑크 시나리오가 첨부된 줄 모르고. 고맙습니다. 쉽게 보내시기 어려웠을 텐데. 노희경이나 몇몇 작가의 드라마 시나리오는 몇 개 있는데 영화 시나리오는 처음입니다. 많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이건 그냥 제 생각인데요. 요즈음은 영화의 시나리오를 감독들이 직접 쓰는 경우가 많을 것 같아요. 감독 데뷔전 시나리오 작가였던 분도 계셨을 것이고. 또 시나리오 작가에게 지급하는 몫에 대한 영화제작비 상의 부담도 있을 것이고. 이미 메이저급 영화사에서는 내부에 시나리오 작가들을 가지고도 있을 것 같고. 암튼 저처럼 초짜가 감히 도전한다는 것이 쬐매 거시기하지만. 어찌되었던 영화 시나리오를 공모하는 곳도 있고. 1년 전 쯤 인가, 롯데에서 시나리오 공모전이 있어서...시험 삼아 한 번 써봤거든요. 지금 쓰는 제 소설을 기반으로 해서.ㅎㅎㅎ 근데? 암튼 새로운 도전은 늘 설렘을 동반하고 이 설렘이 자칫 지루할 법한 일상에 활력소가 됨은 분명해요. 무엇보다도 뭔가 조금씩이라도 내가 발전하고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과 함께.

   저번에 보내주신 파한남 영문판 리뷰 이제사 읽었습니다. 감독님께 영화 실망했다고 운운한 거 후회했어요. 리뷰를 보기 전에. 왜냐면 사람은 자기가 볼 수 있는 것만 보잖아요. 저도 그렇고. 특히나 파한남을 폭력에 관한 영화로 치부한 내 무의식의 저변에 깔린 죄의식을 발견하고, 얼마나 놀랐는지요. 연화가 남편을 떠난 것은 연화의 무지막지한 폭력이라는 가설을 세워놓은(사실 짜증이 무척났거든요. 영화보면서. 상호가 너무 불쌍하고 연화, 고년이 너무 얄미워서.ㅎㅎㅎ) 그 이면에 제가 제 엑스 남편에게 부렸던 폭력이 있더라고요. 40에 결혼해 한 십년, 근데 외항 선원이었던 남편이었던지라. 실제로 산 것은 1년 조금 넘었을 법해요. 참 착한 사람이었죠. 그리고 되게 잘 해주었는데. 제가 못된 여편네였나봐요. 말씀드린 것처럼 제 죄의식에 발목이 잡혀 남편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어느 날 갑자기, 결국 당신의 집을 나가겠다는 선포를 하고 제 짐을 꾸려 나온... 연화에게서 저를 본 것이었고 제 무의식 속에 남편에 대한 폭력이랄 수밖에 없었던 제 죄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걸... 눈물이 날 만큼 깨달았어요. 이제야.

   그런데 더 가관이었던 것은 지금 제가 쓰고 있는 900매에 달하는 소설 속에서 나도 모르게 말씀 드렸던 죄와 벌과 용서에 대한 의식이 저절로 깔리더군요. 사실 이 소설을 다시 시작할 땐 한국의 근, 현대사를 겪어내는 군산의 한 예인의 신고의 인생을 이야기하려 했는데 800매를 넘는 지점부터 와르르...그동안 참고 참아왔던 내 무의식의 욕망들이 결국 터지고 말더군요. 잔잔하던 소설적 구성이 갑자기 무너지면서 결국.

   저를 지도하시는 작가님이 잔잔한 버전으로 끝을 마무리 하는 게 좋겠다, 즉 공모전에 출품할 것을 먼저 쓰고 영화에서처럼 감독 버전을 쓰라고 충고했지만 제가 거절했어요. 제가 쓰고 싶은 방향대로 먼저 쓰고 그것이 문학적인 성과를 이룰 만한 것이 되지 못했을 때 다시 쓰겠다고. 고집을 부리다보니 이젠 완전히 900매를 넘는 소설을 헤집어 다시 구성을 해야 되는 순간이 이르게 되었어요. 그런데 말이죠. 제 맘대로 썼던 버전은 군산의 근, 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여인의 삶의 여정 속에 바로 죄와 벌과 용서에 대한 이야기가 깔리더군요. 제가 현재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과제가 바로 죄와, 벌과, 용서에 대한 문제였다는 것이죠. 참 놀라운 발견이었어요. 사실 이런 발견은 내가 나를 이해하는 길을 열어주는 것 같아요. 그것이 기쁘고, 한편으론 다행이다 싶기도 해요. 너무 늦지 않아서.

   며칠 전부터 제가 배설처럼 뱉어냈던 제 습작품들을 블로그에 방출하고 있답니다. 배설이라고 한 것은 실제 이번 소설 쓰면서 깨달은 것이고 이제는 좀 더 잘 쓸 수 있겠다 자신감이 들어서 배속을 비워내 듯 그렇게 하자, 그런 생각요. 제가 삭발을 하고 인생을 새 출발하자 맘먹은 것과 같은 맥락에서. 뭔가 가벼워지는 것 같아요. 지금도 버려야할 것이 물론 많이 있지만...ㅎㅎㅎ

인생엔 타이밍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올 해는 제 인생에 결정적인 터닝 포인트 지점을 만난 것 같은 기분 이해하실까요? 암튼 저 수다쟁이 결코 아닌데 수다를 왕창 피우게 되네요. 실제 뵙게 되면 지금처럼 이렇게 쉽게 많은 말은 못할 거 같아요. 제 말의 용량은 보통 여인네들의 1/3수준이라고 생각하시면 되어요. 어쩜 그 이하로. ㅎㅎㅎ 비논리적인 언어 구사력에 늘 실망하게 되어요. 스스로.

  즐거운 여행하시고 곧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