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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

카스테라/박민규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14. 5. 13.

 

 

 

 

 

카스테라/박민규

 

 

 

 

나는 늘 불쾌할 정도로 외로웠다.<16/카스테라>

 

 

때문에 나는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이 남자의 <강한> 발언권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물론 진심이었다. 저 정도라면, 확실히 나보다는 큰소릴 칠 만한 입장이었던 것이다.

분명, 지금도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거야.

냉장고를 보며 나는 중얼거렸다.

그것은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의 충분한 공감이었다.

냉장의 세계에서 본다면

이 세계는 얼마나 부패한 것인가.<22/카스테라>

 

 

죽은 인간들의 영혼은 어디로 가는 걸까.

아마도 우주로 올라가겠지. 무엇보다 영혼은

성층권이라는 이름의 냉장고에서 신선하게 보존되는 것이니까.

그러다 때가 되면 다시금 우리 곁으로 돌아오는 거야.

어쨌거나 그런 이유로

다음 세기에는 이 세계를 찾아온 모든 인간들을

따뜻하게 대해줘야지, 라고 나는 생각했다.

추웠을 테니까.

많이 추웠을 테니까 말이다.<33/카스테라>

 

 

인간에겐 누구나 자신만의 산수가 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것을 발견하게 마련이다. 물론 세상엔 수학(數學) 정도가 필요한 인생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삶은 산수에서 끝장이다. 즉 높은 가지의 잎을 따먹듯 - 균등하고 소소한 돈을 가까스로 더하고 빼다보면, 어느새 삶은 저물기 마련이다, 디 엔드다. 어쩌면 그날 나는 <아버지의 산수>를 목격했거나, 그 연산(演算)의 답을 보았거나, 혹 그것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즉 그런 셈이었다. 도시락을 건네주고, 산수를 받는다. 도시락을 건네주고, 산수를 받았다. 그리고 느낌만으로 <아버지 돈 좀 줘>와 같은 말을 두 번 다시 하지 않는 인간이 되었다.<73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코치 형은 이런저런 알바 자리들을 서슴없이 나에게 인계해주었다. 고마워, 형. 나는 목각(木刻)의 기러기인형처럼 딱딱하게 고마움을 표했지만, 실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새로 전지를 갈아끼운 계산기의 액정에서, 새롭고 소소한 액수의 숫자들이 깜박깜박 빠르게 점멸하는 나날이었다. 그런 느낌이었다. 어느 날 거울을 보다가, 그런 잿빛의 눈동자를 나는 보았다. 아버지와 색이 같은 두 개의 동심원, 나는 결국 아버지의 연산(演算)이었다. 3.1415926535897...그리고<85/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다릴 뻗고 고갤 젖히고, 그래서 구름이 흘러가는 걸 쳐다보며 나는 말했다. 형, 지구는 진짜 돌고 있어요. 그러냐? 이렇게 지구가 도는 게 느껴질 땐 말이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요. 뭐가? 그러니까... 정말 우중[샤... 행성 위에서 살고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이런 곳에서... 왜 고작 이따위로 사는 걸까, 라고요. 잠시 침묵을 지키던 코치 형이 뭐 좀 마시자, 라며 자릴 리어섰다. 다릴 당기고 고갤 세워, 그래서 지구가 정지하고 나자 <얼음 없음>을 눌러 양이 더 많은 미린다 한 잔이 눈앞에 떠 있었다. 정지한 지구 위에서, 또, 지금 열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87/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새벽의 전철은 늘 은하철도와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말해도 괜찮습니까? 금성의 누군가로부터 추궁을 받는다 해도, 과연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새벽은 광활하고 캄캄했으며, 혹한의 공기는 언제나 거칠었다. 말 그대로의 천자문 집宇 집宙, 넓을洪 거칠荒. 그리고 나는, 혼자였다. 사람들은 모두 자고 있겠지, 사람들은 모두 무사하겠지. 구일과 구로를 지나 신도림으로 이어지는 선로의 어둠 속에서, 나는 늘 흔들리며 생각했다. 조금씩, 열차는 흔들렸고, 조금씩, 마음도 흔들렸다. 삶은, 세상은, 언제나 흔들리는 것이었다. <89/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지구다.

누구의 입에선가, 탄성이 흘러나왔다. 지구는 전혀 둥글지 않았고, 오히려 아주 납작했다. 아아, 내 생각이 옳았어. 듀란이 소리쳤지만, 또 그렇다고 해서 평평한 것만은 절대 아니었다. 그것은 뭔가 복잡한 느낌의 납작함이었다. 현재의 위치에선 길고 긴 측면밖에 볼 수가 없었으므로, 우리는 말없이 운항을 계속했다. 두근두근. 우리가 탄 - 시속 20노트의, 물옥잠의 부레가 부풀어올랐다. 그럴수록 지구는 몸을 뒤척여, 생소하고 난감한 자신의 평면(平面)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그것은 한 마리의 거대한 개복치였다.<121/몰라몰라, 개복치라니>

 

 

인생은 새옹지마였다. 일흔세 번이나 떨어져 단련된 심장이 아니었으며, 나도 그 자리에서 쓰러졌을지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온화하지도, 슬프지도 않은 이상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치 주둥이의 페인트가 벗겨진 오리배의 표정 같았다.<134/아, 하세요 펠리컨>

 

 

배가 많이 변했군요,

그렇지? 춥기도 하고, 또 수납공간도 많이 필요해서.

수납공간이라구요?

말 마라, 사야 할 게 얼마나 많은지 아니.

그렇군요.

그렇단다. 잠시만

 

그리고 사장은, 다시 선체 속으로 들어갔다. 두더지 딸이 잠을 깻거나, 그의 아내가 아프거나, 내부의 어떤 시설에 문제가 생긴 건지 알수 없는 일이었다. 언제나 삶은 만만치 않은 거니까. 즉 그런 거니까. 새 담배를 물 때까지, 그래서 환한 봄밤의 달 아래엔 나와 펠리컨만이 오롯이 남은 느낌이었다. <149/아, 하세요 펠리컨>

 

 

 

인류는 여전히 핵실험을 하고 있다.

 

인류에게는 차마 말 못할 인류의 경향이 있었던 게 아닐까. 밀거나 당길 필요가 없는 기지의 회전문을 통과하며,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는 했다. B와 나는 나란히 F - 16편대의 조종사가 되었다. 매우 특별해 보이긴 하겠지만 - 결국 해변의 모래알처럼 평범한 인류가 되었을 따름이다. 150미터의 대왕오징어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결국 <나>란 것은 <아무나>의 한 사람이거나, <누구나>의 한 사람과 같은 것이다. 즉 그것이, 우리의 경향이다. 아무런, 나. 누구도 나.<230/대왕오징어의 기습>

 

 베란다의 창을 열자 십오층의 넓고 광활한 밤하늘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었다. 베란다의 창을 열자 십오층의 넓고 광활한 밤하늘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었다. 저 빛들은 무엇일까, 두둥실, 마치 기포와 같이 잔뜩 무리를 지어 떠 있는 저 빛들은 - 어쩔 수 없이 이 세계를 빠져나가야 했던 죽은 이들의 동정 어린 시선일까. 아니면 이 가구 家具 와 같은 삶을 잠시나마 이탈한, 살아 있는 우리들의 지치고 고단한 영혼들일까. 담배를 피며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나는 여전히 그 밀실 속에서 살고 있다는 기분이다. 또 혹시나, 우리가 소유한 이 모든 것들이 실은 <386 DX - II>와 같은 것들은 아닐까 걱정이다.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 이 모든 것들은 나나 당신에게 실로 소중한 재산이고, 또 우리는 누구나 그것을 모으고 지키기 위해 살고 있을 테니, 말이다.

  어쨋거나

그 특이한 이름의 고시원이

아직도 그곳에 있었으면 좋겠다.

이 거대한 밀시 속에서

혹시 실패를 겪거나

쓰러지더라도

또 아무리 가진 것이 없어도

그 모두가 돌아와

잠들 수 있도록.

 

그것이 비록

웅크린 채라 하더라도 말이다.< 304/갑을고시원 체류기>

 

<정크 예술가, 혹은 포스트모더니즘 소설가>

 

 

박민규의 소설은 이중의 유산으로부터 출발한다. 그의 소설은 90년대 문학의 발랄하고 도발적인 전통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러나 박민규에게는 80년대 문학에 대한 부채가 남다르게 작용하는 듯도 하다. 등단작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나 <지구영웅전설>을 생각해보면 답은 더욱 분명해진다. 늘 지기만 했던 80년대의 프로야구단과 미국식 영웅주의의 원천인 DC 코믹스의 애니메이션 주인공들을 제재로 택하고 있는 소설들은 때로 다소 직설적이다 싶을 정도로 사회과학적 상상력을 먼 원광으로 채택하고 있는 소설들이다. 그러나 어느 누가 그의 소설 형식에서 80년대 소설의 냄새를 맡을 수 있을까. <대왕오징어의 기습>에 그 과정이 잘 나타나 있듯이 그의 소설은 기본적으로 7,80년대의 만개한 소년잡지와 미국 대중문화에 대한 감수성을 소설 형식의 원천으로 채택하고 있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지우고 곧바로 환상을 현실 속으로 도입하는 방식이라든가 잦은 행갈이로 소설에 대한 몰입을 차단하고 소설이 언어로 이루어진 언어적 구조물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확인시키는 방식 등은 우리가 알고 있는 80년대적인 것과는 전혀 무관하다. 오히려 이러한 특징 등은 80년대 문학이 지우고 억압한 것들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우리 소설이 주요한 흐름으로 채택한 가장 최신식의 형식적 충동이라고 할 만하다.

사정이 그러하다면 박민규의 소설은 우리 소설사의 새로운 단계라고 할 만하다. 그에겐 점점 더 개개인의 삶을 압박하는 사회 시스템을 자신이 선 자리의 언어로 새롭게 창조해내야 할 과제가 주어졌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90년대가 개발해놓은 소설 언어로 80년대의 문제의식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소위 90년대의 언어와 80년대의 주제가 기계적으로 결합하는 방식은 얼마나 진부한 한편, 섬뜩할 것인가. 박민규의 독창성은 바로 이 기계적 결합의 진부한 섬뜩함을 넘어 우리 소설의 일대 갱신을 이룩하고 있다는 데 있다. 무엇보다도 그가 설파하고 있는 장애물 넘어서기의 전략이 이 결함을 생생한 현재적 관심사로 만들어놓고 있으며, 자기 세대의 문화적 경험에서 비롯된 살아 있는 문체가 그것에 구체성을 부여했다. 그는 진정 말의 의미 그대로 우리 소설 전총의 창조적 재활용자라고 할 만하다. 그를 <정크 예술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는 소설의 폐차장에서 다양한 소설들의 부속품을 이리저리 갈아 끼워 최신식 소설을 제조해내는 엔지니어에 가깝다. 뒤죽박죽, 얼렁뚱땅, 우리는 그의 소설을 통해 소위 포스트모던 소설미학의 가장 내면화된 최신버전을 만나볼 수 있다. 그러나 너무 두려워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에게 포스트모던은 당위지 선택사항이 아니기 때문이다. 80년대와 90년대를 흘려보내고 이제 21세기에 들어와 소설을 쓰려고 하는 자가 달리 무슨 대안이 있을 수 있겠는가. 자본주의는 점점 더 그 위세를 더하고 있고 어디에도 그 그물 바깥으로 나갈 방법은 도통 보이지 않는다. 이런 시대에도 여전히 예술적 열정을 발휘하고자 하는 기류가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우리 시대의 소설로 가는 하나의 통로이기도 하다. 박민규가 그 통로를 대로로 확장하리라는 데 이견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그를 아끼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329/신수정 문학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