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없는 오늘도 삶은 계속된다>
소수집단은 우리와는 다르게 보고 행동하고 생각하는 사람이며, 우리에게 없는 결함을 가진 사람일 겁니다. 우리는 소수집단이 보고 행동하는 방식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고, 소수집단의 결함을 싫어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소수집단을 좋아하지 않거나 미워한다고 인정하는 것이 가짜 자유주의의 감상주의로 우리 감정을 속이는 것보다 낫습니다. 우리가 스스로의 감정에 솔직하면, 안전밸브가 생깁니다. 안전밸브가 있으면, 박해를 덜하게 됩니다. 이른 이론은 아직 널리 퍼지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 모두가 믿으려고 애쓰는 바는, 무엇을 오래 무시하면 그냥 사라질 것이라는 믿음인데...<76 쪽>
우리는 여기, 조지의 몸이라 알려진 몸을 보고 있다. 침대에 누워서 꽤 크게 콜ㄹ 골며 잠든 몸, 눅눅한 바다 공기가 코에 영향을 미친다. 어쨌든 술을 마신 뒤에는 특히 더 크게 코를 곤다. 짐은 조지의 몸을 발로 차서 깨우곤 했다. 조지의 몸을 옆으로 돌리기도 했다. 때로 화를 내며 침대에서 나가서 서재에서 자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여기 있는 것이 조지의 전부일까?
북쪽, 해안으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 절벽 아래 화산암 암초에는 물웅덩이가 많다. 썰물 때에 그곳에 갈 수 있다. 웅덩이는 제각기 다르다.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라면 웅덩이마다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조지, 살럿, 케니, 스트렁크 부인. 조지를 비롯한 사람들을 각기 하나의 전체라고 가정한다면, 웅덩이 하나를 하나의 전체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물론 웅덩이는 전체가 아니다. 그 물을, 가령, 의식이라고 생각하면, 우울한 걱정, 입을 앙다문 탐욕, 생생한 직감, 껍질은 깨어져도 결코 떨어지지 않는 습관, 깊은 곳에서 반짝이며 숨은 비밀, 신비하고 위협적으로 빛이 있는 표면으로 움직이는 무서운 단백질 유기체등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그렇게 다양한 것들이 어떻게 한데 존재할 수 있나?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물웅덩이를 이룬 바다는 그 세계를 모두 담고 있다. 그리고 썰물 때에는 그 개체 모두는 서로를 전혀 모른다.
그러나 마침내 긴 하루가 끝나고, 밀물 때인 밤이 온다. 바닷물이 밀려들어서 웅덩이를 뒤덮듯, 잠든 조지와 사람들도 다른 바닷물, 의식의 바닷물에 잠긴다. 특별히 어는 한 개인의 것이 아닌 의식, 모든 사람과 모든 것,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담은 의식, 가장 높이 뜬 별까지 쭉쭉 뻗는 의식, 우리는 직감으로 분명히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만조의 어둠 속에서 이 생명체들 몇몇은 웅덩이를 빠져나와서 더 깊은 바다로 떠돌아다닌다고. 그러나 떠돌던 생명체들은 낮이 되어 물에 빠지면 되돌아올까? 무엇이 그 생명체들을 잡아들일까? 그 생명체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자기가 다녀온 여행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줄 수 있을 까? 아니, 그 생명체들에게, 바닷물은 웅덩이 물과 다름없다는 이야기를 빼고, 이야깃거리가 있기나 할까?
침대에 있는 이 육체 안에서, 큰 펌프는 쉬지 않고 계속 작동한다. 조용히 맥박이 뛰는 이 탈것 안에서 두되를 맡은 일꾼들은 미세한 조정을 한다. 그 맨 위에서 일하는 일꾼들은 위험 신호밖에는 모른다. 대부분은 틀린 신호다. 겁에 질린 뇌간이 빨간 불빛을 깜박거리면, 냉정한 대뇌가 ‘이상 무’의 청신호로 조용히 맞선다. 지금은 자동으로 작동된다. 대뇌는 꾸벅꾸벅 졸고 있고, 뇌간은 가끔 나타나는 악몽만 알아챈다. 지금부터는 아침까지 이렇게 늘 하듯 정해진 동작만 할 것 같다. 어떤 사고가 벌어질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 탈것은 무척 안전하다.
그렇지만 따져보자....
몇 년 전 언제로 돌아가자. 조지가 스타보드사이드에 들어서서 처음으로 짐을 본 때, 아직 죽지 않은 짐은 해군 군복을 입고 더할 수 없이 멋진 모습이다. 마찬가지로, 조지의 관상동맥의 주요 혈관 하나로 들어가자. 노화가 시작되는 혈관, 어찌어찌하여 - 의사조차 정확히 설멍할 수 없는 이유로 - 혈관 안은 거칠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조금씩, 매끈해야 할 내피 세포가 거칠어진 곳 위로, 혈액에 실린 칼슘 이온이 쌓이기 시작하고... 그렇게 서서히, 보이지 않게, 아주 비밀스럽게, 죄에 있는 늙은 일꾼들에게는 조금의 힌트도 주지 않고, 자극적인 멜로드라마 같은 상황이 꾸며진다. 동맥이 막히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저 가정하는 것이다.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누구나 생각한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수천 달러를 쓸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일은 5분 뒤에라도 일어날 수 있으며, 그럴 가능성도 아주 높다.
좋다. 오늘밤이 바로 그때라고 가정하자, 바로 그 시작, 예정된 그 순간이라고.
침대 위의 육체는 조금 뒤척인다. 그러나 비명을 지르지도, 깨어나지도 않는다. 순간적으로 괴멸할 마비가 일어날 징후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대뇌의 뇌간은 어둠을 틈탄 인디언 암살자 같은 속도로 살해된다. 산소를 공급받지 못한 심장은 오그라들어서 멈춘다. 동력이 끊긴 폐도 죽는다. 몸 전체의 혈관이 수축된다. 관상 동맥이 이렇게 철저히 막히지 않았다면, 더 작은 혈관이 막혔다면, 대뇌의 일꾼들은 그 일에 대처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대뇌의 일꾼들은 기적을 이룰 수 있으니까. 그런 경우라면, 대뇌 일꾼들은 길을 정비하고, 새로운 통신망을 만들고, 손상된 부위를 막는다. 그러나 그럴 시간이 전혀 없다. 대뇌 일꾼들은 제자리에서 사전 경고도 받지 못한 채 죽는다.
몇 분 안에, 육체의 바깥쪽 부위에 있는 세포들에서 생명이 빠져나간다. 그리고 하나씩 불빛들이 꺼지고, 완전한 어둠만 남는다. 이 최후의 발작이 일어나는 순간, 우리가 조지라고 부르는, 더 이상 총체가 아닌 이 육체의 어느 부분이 그 육체 안에 머물지 않고 먼 바다로 떠나 있다면, 그 부분은 돌아온 뒤에야 집이 사라진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 부분은, 여기 이 침대에서 코도 골지 않고 누워 있는 저 육체와 이제 더는 연결될 수 없다. 그 부분은 이제 뒤뜰에 있는 쓰레기통의 쓰레기와 사촌이다. 그 부분과 쓰레기, 둘 다 머지않아 멀리 끌려가서 버려져야 한다.<214쪽>
<daum에서>
상실감에 젖은 하루, 슬픈 일상 속에서 발견하는 찰나의 경이
2009년 베니스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 영화 〈싱글맨〉의 원작 소설
연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견뎌야 하는 한 남자의 상실의 하루를 그린 영화 〈싱글맨〉의 원작 소설이다. 어느 날 함께했던 여행길에서 자동차 사고로 애인이 죽은 후, 주인공 조지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고 만다. 그의 일상은 애인이 죽기 전이나 후나 같지만, 조지의 하루는 모든 인간의 상실과 극복에 관한 이야기를 대변한다.
조지는 하루의 시작부터 죽음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애인의 죽음을 애달파하지만 실은 조지도 죽음이 두려운 것이다. 하지만 조지는 거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슬픈 일상 속에서 해안가의 물웅덩이에 우리 개개의 삶을 비유한 찰나의 경이를 발견한다. 그것은 동성애가 이성애와 다르지 않고 노년의 사랑이 젊은이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삶의 경이이다.
탁월한 문학적 성취와 유려한 문장으로 유명한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의 대표작인 이 작품은 특별한 사건 없이도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 평범한 남자의 하루를 놀랍도록 섬세하게 그려놓았다는 점, 그리고 주인공이 동성애자임을 당당히 드러내는 최초의 소설 중 하나였다는 점 때문에 크게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동명의 영화가 2009년 베니스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과 감독상인 퀴어 라이온 상을 수상하면서 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2009년 베니스영화제 남우주연상(콜린 퍼스) 수상, 영화 〈싱글맨〉의 원작소설
그가 없는 오늘도 삶은 계속된다
내 인생에 대단한 영감을 불러일으킨 책
- 톰 포드(〈싱글맨〉 감독, 패션 디자이너)
연인을 잃은 한 남자의 하루를 그린 영화 〈싱글맨〉. 2009년 베니스영화제의 심사위원들은 잔잔하고 고요한 이 이야기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싱글맨〉의 감독인 톰 포드에게는 퀴어 라이온상이, 주연배우인 콜린 퍼스에게는 남우주연상이 주어졌다. 처음 출간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40여 년간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왔고, 20세기 최고의 소설 중 하나로 꼽히는『싱글맨』은 마침내 문학적 감동을 넘어 스크린으로도 만나 볼 수 있게 되었다.
연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견뎌야 하는 한 남자의 상실의 하루
어느 날 애인이 죽었다. 그의 여자친구와 함께했던 여행길에서의 자동차 사고 때문이다. 그리고 조지의 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외로움과 상실감에 젖은, 무서운 일상이 시작된 것이다.
아침에 깨어 용변을 보고 출근을 하며, 강의를 준비하고 동료들과 점심을 먹고, 병문안하고 헬스클럽에 간다. 조지의 일상은 애인인 짐이 죽기 전이나 후나 같다. 그렇지만 갑자기 어른의 모습을 다 벗은 채 어린아이처럼 몸을 뒤틀면서 혼자서 낄낄거리는 것,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까? 애인의 여자친구였던 도리스의 병실을 방문하여, 죽어가는 육신을 혐오의 눈길로 바라보는 조지의 심정은 어떻게 설명할까? 19세 젊은 제자와 지적이면서도 서로를 유혹하는 대화를 즐기고 싶은 58세 중년의 교수 조지가 찾은 희망은, 그리고 느껴야만 했던 미망은 무엇인가?
‘당당한’ 동성애 소설, 그러나 결국 모든 인간의 상실과 극복에 관한 이야기
탁월한 문학적 성취와 유려한 문장으로 유명한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의 이 작품은 출간되자마자 독자와 평단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특별한 사건 없이도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 평범한 남자의 하루를 놀랍도록 섬세하게 그려놓았다는 점, 그리고 주인공이 동성애자임을 당당히 드러내는 최초의 소설 중 하나였다는 점 때문이다.
주인공 조지는 이방인이다. 미국에 사는 영국인이고, 이성애자 세상에서 사는 동성애자이고, 세속적인 취향을 가진 이웃 사이에 사는 특별한 취향을 가진 사람이다. 작가는 조지를 통해 성(sex)과 젠더(gender)에 관한 인간적 관찰, 그리고 소수자의 삶과 인권에 관한 솔직한 주장을 공감 있게 그려냈다. 하지만 이 소설이 단지 ‘동성애 소설’에만 머물지 않는 이유는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후 인간의 고단한 현실을 단순하고 진솔하게 그려냈기 때문이다.
2009년 베니스영화제와 토론토영화제에서 연이은 찬사를 불러일으킨 영화 〈싱글맨〉의 감독이자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 톰 포드는 “이 영화는 게이 영화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사랑과 상실에 관한 이야기이며 이것은 성정체성을 떠나 인간의 보편적인 성정일 뿐이다”라고 설명한다.
상실감에 젖은 하루, 슬픈 일상,
그 속에서 찾아낸 찰나의 경이에 관한 소설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이 육신에게는 ‘있다’와 ‘지금’만이 떠오른다. 그리고 육신이 옷을 입을 때쯤, 육신에게는 ‘조지’라는 이름이 붙는다. 작년에 젊은 애인을 교통사고로 잃어야만 했던 중년의 동성애자이자 대학교수이다. 소설은 그곳에서부터 일상생활을 이어나가는 싱글맨의 의식을 따라간다.
아침. 조지는 일상 곳곳에서 사고로 죽은 연인, 짐을 떠올린다. 여자친구인 샬럿과는 즐겁고 재미있는 대화를 나누지만 그가 동성애자이기 때문에 연인 관계가 되지 못한다. 영문학 교수로서 뛰어난 강의를 하고 있지만 제자들과 제대로 된 관계를 맺지 못한다고 느낀다.
오후. 조지는 짐의 여자친구였고 함께 교통사고를 당한 도리스를 방문한다. 그녀는 지금 위독한 상태이다. 한때 연적 관계였던 도리스를 보며 비탄과 승리감에 사로잡힌다.
저녁.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한다. 열네 살짜리 소년과 윗몸일으키기 경쟁을 벌인다.
밤. 타인과 완전한 교류를 나누기를 바라던 조지는 어느 해변 바에서 제자인 케니와 우연히 만난다. 58세의 교수와 19세의 청춘은 지적이면서도 상대를 유혹하는 듯한 대화를 즐긴다. 결국 두 사람은 조지의 집으로 향하고…….
케니가 돌아가고 육신은 이제 다시 ‘싱글맨’으로 돌아온다. 하루라는 일상이 지나고 ‘싱글맨’은 그저 언제 괴멸해 버릴지 모르는 ‘침대 위의 육체’가 될 뿐이다. 작가는 이제 ‘침대 위의 육체’가 조지의 전부일까란 물음을 던진다. ‘작가’라는 자아는 ‘조지’라는 객체를 관찰하면서 어떤 결론에 이르렀는가?
조지는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의 자전적 모습이다. 조지는 소설의 객체이지만 동시에 작가의 분신이기도 하다. 조지와 마찬가지로 작가 역시 노년에 막 접어든 지식인 동성애자이다. 그렇기에 소설을 이끌어가는 동안 작가는 객관적 시각을 유지하면서도 주인공과 자신을 수시로, 더욱, 일치시킨다. 조지는 하루의 시작부터 죽음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갑자기 모든 것이 끝날까봐 두려워”라는 조지의 독백. 짐의 죽음을 애달파하지만 실은 조지도 죽음이 두려운 것이다. 작가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러고 보면, 조지가 하루의 일상을 지나고 ‘침대 위의 육체’가 된 순간 깨달았던 찰나의 성찰은, 노년을 마주하고 선 작가가 느꼈던 생의 깨달음과 같다. 그래서 작가는 해안가의 물웅덩이에 우리 개개의 삶을 비유하여, 조지가 깨달은 작은 경이를 대신하여 들려준다.
개개의 삶은 해안가의 물웅덩이이다. 그 각각의 웅덩이에 조지, 샬럿, 짐, 도리스 등의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이 물웅덩이들은 썰물 때면 하나하나 드러나지만, 밀물 때면 전부 바다에 잠긴다. 그리고 바닷물이 밀려와 웅덩이를 휩쓸면, 모두 잠겨 하나(전체)를 이룬다. 작가는, 이렇게 하나가 되었을 때엔, “어느 한 개인의 것이 아닌 의식, 모든 사람과 모든 것,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담은 의식, 가장 높이 뜬 별까지 쭉쭉 뻗는 의식”을 직감으로 느낀다는 것이다. 그 전체의 의식이 보편적인 인간의 이야기이며, 그 보편 의식은 언제나 개체의 삶을 보듬는다.
물론 조지의 일부는 짐을 그리워하여 애상의 늪에 잠겨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동성애가 이성애와 다르지 않고 노년의 사랑이 젊은이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삶의 경이를 알게 된 조지는 과거의 애상에만 매달려 있지 않을 것이다. 이제 조지는 새로운 짐(애인)을 찾을 것이다. 과거 속의 짐이 아닌, 그리고 과거 속의 샬럿이 아닌, 그리고 미래의 케니가 아닌……. 현재에 조지는 살아야 한다고 『싱글맨』은 말한다. 작가는 ‘상실’이란 삶의 의외성에서 이 작품을 시작하지만, 그래도 사랑할 줄 아는 이에게는 삶이 지속된다는 생의 경이로움을 작품의 말미에서 그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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