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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

불의 잔/오정희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14. 5. 12.

 

 

 

<오정희의 불의잔>

 

 

 

  우리들의 몸짓에서, 검은 자줏빛으로 시들어가는 꽃병에 꽂힌 꽃에서, 우리가 함께 살아온 그 두터운 시간의 부피 속에서, 우리들의 대화에 묻어나는 입김 속에서, 우리가 소비하고 있는 시간 안의 숨막힐 듯한 범속함을, 잊었던 풍경을 떠올리듯 새삼스럽게 느끼기 때문이다. 그가 저녁마다 또는 새벽마다 실밥처럼 묻혀 들여오는 일터의 냄새는 무서운 삼투력으로 우리의 11평 아파트의 공기를 동화시키고 있다.<15/불의강>

 

  굿판이 벌어지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푸른 저고리, 붉은 치마, 남색 괘자에 검은 전립을 쓰고 부채와 방울을 든 어머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유난히 키가 크고 걸대가 센 어머니는 날이 시퍼렇게 선 작두 위에서는 살 끝 하나 베이지 않고 펄펄 뛰다가도 굿판이 거둬지면 일어서질 못했다. 다리가 굳어져 앉은걸음을 하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조금도 예쁘지 않았다. 광대뼈가 튀어나온 심하게 각이 진 얼굴은 늘 푸르고 입술은 더 새파랬다. 아마 늘 궐련을 피우기 때문에 그럴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어딜 때 나는 입술이 푸르고 좀처럼 웃는 법이 없는, 작두 위에서는 비 오듯 땀을 흘리며 고통으로 쥐어짜듯 얼굴이 일그러져 마치 신장도에 그려진 화상과도 같이 변해버리는 어머니가 나를 낳았다는 사실은 전혀 믿어지지 않았다. 믿어지지 않았기에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103/목련초>

 

  우리 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콜라와 은빛 가느다란 독침으로 빈틈없이 꽂히는 개털이었다. 있는 건 오직 개털뿐이야. 그왼 모두 점점 텅 비어가고 그 빈 공간을 오직 개털만이 분분이 날리고 있는 거야. 나는 진저리를 쳤다. 거기에는 이상하게도 사람을 질식시키는 것이 있었다. 파삭하게 말라버린 일정한 길이와 모양의 털들. 건조하고 깔깔한 그것들이 만져지고 보여질 때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흰개미들의 무서운 침식 작용, 잘디잔 균열에서부터 집채를 도괴시키고야마는 거대한 파괴력을 느끼는 것이었으나 나는 그것에 대해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무력감에 빠져 기껏 진저리를 치는 것이 고작이었다.<118/봄날>

 

 

 

  밤은 언제나 너무 검고 진하다. 낮의 빛 속에 숨겨졌던 사물이 잔잔히 표면에 떠올라 모호한 형상은 뚜렷해지고 저마다의 빛깔과 의미를 주장한다. 좁다란 돌짝길의 발에 차이는 자갈들이 바위처럼 아뜩아뜩 막아서고 나는 밤눈이 어두워 곧잘 허뚱거린다. <186/직녀>

 

 

머리맡이 소란스럽다. 새벽이 온 것이다. 아침은 결코 고요 속으로 오지 않는다. 밤의 어둡고 은밀한 동굴을 지나는 동안 참았던 한숨을 비로소 토해놓아 시끌짝하게 오는 것이다.<189>

 

 

 

  베개 위로 손을 뻗어 라디오의 다이얼을 맞춘다. 알아들을 수 없는, 비음이 많이 섞인 여자 아나운서의 상냥한 음성이 홍수처럼 쏟아진다. 나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부드럽게 귓가에 속삭이는 외국어에 귀를 기울인다.

  빗소리가 들린다. 비가 오고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고 나는 문득 당황한다. 자분자분 땅을 울리는 빗소리 사이로 동네 어느쯤에선가 개의 울음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오고 있다. 개의 아른아른 비쳐 뵈는 늑골 사이에서 나오는 소리라고는 할 수 없이 길게 잡아 빼는 듯 한 소리는 동물성이 배제되어 자연의 음향처럼 메마르고 갈급하다.

  새벽은 형체를 잡을 수 없는 소음으로 가득차 있다.

  이윽고 교회의 종들이 울리기 시작한다. 각기 다른 음색과 내용으로 일제히 울어대서 마치 싸우는 듯, 언덕 아래의 잠든 동네를 위협하는 듯 느껴진다. 종소리, 차임벨 소리, 그 중에서 가장 뚜렷이 들리는 것은 육성의 찬송가 소리이다. 내 주여 평안을 주소서. 내 길을 인도하소서. 그것은 음질이 불량한 음반이었는지 인도하소서의 구절에서 일단 멈추어지곤 했다. 비늘 긁히는 소리, 휘어진 음반에서는 묘하게도 바이브레이션 효과를 연이 애소하는 듯 절실한 탄원으로 느껴졌다.<190/직녀>

 

 

 

 

  오정희의 소설 속에서 중요한 것은 외부적인 상황이나 사건들 그 자체의 의미가 아니라, 그 상황이나 사건들이 작중인물들의 내면에 투영되어 그들의 의식에 어떤 내부적 균열을 불러오고 있는가 라는 문제이다.<262/박혜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