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작품을 쓰면서는 이상한 책임감이 느껴지더군요. 결코 나 혼자만의 작업이 아닌 것 같은...
처음 머리속 구상들이 엉클어지면서 끊임없이 자아성찰을 하게 되는 까닭은 어디에 있었을까?
지금까지는 쓰는 즐거움에 취해 일필휘지의 글쓰기였다면 이번 글쓰기는 그렇지 않군요.
물론 선생님의 지도 때문도 그랬겠지만 근세와 현대를 아우르는 인간들의 삶,
그것은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의 이야기이며 나 자신의 삶으로까지 연결되는...
끊이지 않는 연의 고리들...
모처럼 만에 근대 유산으로 남아 있는 것들을 눈요기 하고 왔습니다.
제 작품속 금수와 고종팔이 걸었음직한 길들...풍경들...
이 사진은 1945년 해방직후의 째보선창 부근의 모습입니다.
실제로 째보선창은 보이지 않는군요.
앞쪽이 군산바다이고 그 위에 부잔교 앞은 미곡창고들이고
오른쪽 반듯반듯한 부분들은 일본인들의 조계지 입니다.
주로 금수의 활동 영역이었겠죠.
근대역사박물관의 전시된 사진을 찍은 것이라 희미하군요.
째보선창 목선들의 정박지가 이러했을 듯...
사실 요즈음에는 째보선창앞으로는 더 이상 배가 정박하지 않습니다.
너른 논산과 강경을 지나온 금강의 황톳물은 느긋한 물살을 육지에 대기위해 부단히 철벅거리던 서해 짠물을 만나, 활처럼 휘어져 Y 자 모양의 포구를 이루었다. 그곳에 째보선창이 있었다. 하루하루 먹기 살기위해 전국에서 몰려온 어중이떠중이들이 살을 부비는 선창가 객줏집 사이사이, 허름한 오두막들이 빼곡 들어 차 있었고 오두막 너머로는 옥구, 만경, 삼례, 김제 심지어 정읍평야에서 거둬들인 볏가마들이 그득히 쌓여 있었다. 그 뒤로는 볏가마를 제분할 대형 정미소들과 일본으로 실려 갈 쌀가마로 가득 찬 창고들이 위용을 자랑했다. 강경까지 올라갔다가 화물을 싣고 내려온 중선들이 즐비하게 정박되어 있는 째보선창으로 크고 작은 목선들이 저마다 높고 낮은 돛대를 웅긋중긋 떠받고 물이 안 보이게 선창가로 빽빽이 밀고 들어왔다. 배를 맞이하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의 얼굴에는 잠시나마 세상시름을 잊은 설렘이 넘실거렸다.
제 소설 일제 말엽의 째보선창 모습입니다.
그리고 6.25후의 째보선창을 이렇게 그렸죠.
전쟁이 휩쓸고 간 상흔들이 곳곳에 남아있었지만 째보선창 목선들은 닻을 올렸다. 째보선창 갯비린내는 더욱더 짙어졌고 시절과 상관없이 바다갈매기는 끼룩거렸다. 만월표 고무신을 신은 아이들의 뛰는 소리와 그들을 쫒는 마을 개들의 컹컹거림이 째보선창을 채우기 시작했다. 만선의 깃발을 올린 조깃배들을 향해 선주들의 들뜬 목소리가 우렁찼고 객줏집 색시들의 웃음소리엔 기름기가 넘쳤다. 낯익은 얼굴도, 낯선 얼굴들도 꾸역꾸역 째보선창으로 하나, 둘 다시 모여들기 시작했다. 째보선창을 끼고 살아보겠다는 그들은 또 그렇게 금세 아웅 댔다. 그것이 째보선창의 본래의 모습이었다. 누구라도 상관없이 맨몸으로 출발할 수 있는 곳, 가진 것 없이 비벼도 배를 곯지 않는 곳. 침을 뱉으며 떠나도 내키면 언제든 다시 돌아 올 수 있는 곳, 질펀한 욕설과 섞인 웃음꽃들이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수놓는 곳, 서해의 짠물과 금강의 황톳물이 만나 이뤄지는 Y모양의 포구가 이루어낸, 째보선창만이 가질 수 있었던 생태적 특징이었다.
요즈음엔 세 개 정도의 부잔교가 남아있습니다.
일제시대 때에는 네 개가 있었다 합니다.
옥구,김제, 만경, 정읍에서 생산된 쌀들이 이 부잔교를 통해 일본으로 실려갔겠지요.
이 부잔교에 떨어졌을 땀과 눈물이 그대로 세월의 흔적으로 남아있습니다.
제 소설속 구로즈미의 모델 구마모토입니다.
금수가 구로즈미의 여름별장을 찾아가 겐조와 맺어지던 곳.
또한 금수와 고석동의 인연이 시작된 곳이기도 합니다.
일제말엽 구마모토농장의 여름별장이기도 한 곳이며
소설 속 고종팔이 태어난 곳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이영춘 박사가 구마모토의 초청으로 개정으로와
병원을 열었던 곳이 바로 이 가옥 옆에 있습니다.
해방후 이영춘박사님이 이곳에 거주하다 돌아가셨다고 하더군요.
이곳은 고석동이 구로즈미의 여름별장을 떠나 금수와 고종팔과 함께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던 신흥등 주택지입니다.
이제 이곳은 재개발 단지가 되어 사라지고 없는 동네가 되었습니다.
해망동 입니다.
전쟁후 금수는 째보선창을 떠나 종팔과 함께 새로운 삶을 이곳에서 시작하죠.
제 소설속에서는 해망동을 이렇게 표현했답니다.
해망동은 달랐다. 째보선창과 비교 되지 않을 햇빛과 바람과 냄새를 가지고 있었다. 육지의 살을 깊숙이 파고 들어온 서해짠물과 금강의 황톳물이 섞인 째보선창은 어머니의 자궁 속 양수 같은 아늑함이 있었다. 째보선창의 갯비린내가 누구랄 것도 없이 품어줄 것 같은 안온함이 있었던 반면, 해망동 햇볕과 바람과 냄새는 사나웠다. 견딜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허락된 공간, 그 공간속에 머물 수 있는 인간이라면 세상 어디에 내 놓아도 악착같이 뿌리를 내릴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비장함이 해망동 공기를 감싸고 있었다. 아무리 짓밟히고 짓밟혀도 짓이겨지지 않는 질경이와 같은 사람들만이 견뎌 낼 수 있는 곳, 해망동의 갯비린내는 유독 지독했고 더 짰다.
이제 이런 풍경은 사라졌습니다.
사람냄새와 갯내가 오묘히 조화를 이루는 곳
이 동네만 오면 왠지
산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그렇게 마음이 놓이는 곳,
이 동네출신도 아니건만
제 마음 속 동네은 바로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요?
군산시내와 해망동을 연결해주는 해망굴,
고종팔의 무대이기도 하죠.
윗 계단은 월명산으로 올라가는 곳으로
계단 오른 쪽으로
일제시대때에는 일본신사가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해볼 때
금수가 기생시험에서 일등으로 합격한 날,
필시 동료기생들과 함께
이곳으로 벚꽃놀이를 오지 않았을까 상상해봅니다.
지금은 벚꽃이 막 지고 겹복숭아가 화려하게 피어나고 있더군요.
이곳을 통해 월명산에 오르면
군산 앞바다 해망동이 바로 내려다 보입니다.
해망동의 어원은 군산 팔경중의 하나인 '해망추월'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곳에서 바라다보이는 가을 달밤의 바다는 누구라도 시인이 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가 봅니다.
월명산 위에 작은 조각공원이 있습니다.
가을 달밤,
아버지가 되어 돌아온 겐조는 샤미센을 켜고
어머니인 금수는 춤을 춥니다.
처음으로 종팔은 어머니의 춤추는 모습을 보고 황홀경에 빠집니다.
잠깐
겐조의 샤미센에 맞춰 금수가 춤을 추던 광경을 제 소설 속에서 상상해 보세요.
"유카. 이것이 샤미센이요."
들고 온 보자기를 풀며 겐조는 샤미센을 내밀었다. 얼떨결에 샤미센을 받아 든 금수의 손끝이 떨렸다.
"유카, 내 샤미센을 켤 테니 춤을 춰 보겠어요?"
금수는 퀭한 눈을 삼빡 감았다 떴다. 거문고나 가야금이라면 모를까 샤미센 소리에 춤을 추라니, 금수는 겐조의 속을 알 수 없어 잠자코 겐조의 갸름한 턱만 바라보았다.
"유카, 당신이 춤추는 것을 몇 번 곁눈으로 보았소. 당신이 춤을 출 때마다 복사꽃이 하늘하늘 지는 꿈을 꾸었소. 언젠가 내 샤미센 소리에 유카가 추는 춤을 보고 싶어서 이렇게 달려왔소."
겐조의 목소리는 충분히 달떠 있었다. 비록 한 음조가 높아진 목소리였지만 그 목소리엔 거부할 수 없는 어떤 힘이 느껴졌다.
"그리 하지요."
금수는 망설여지는 마음을 누르고 일어섰다. 샤미센 소리에 어떻게 몸을 맞출지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일단 샤미센의 울림을 금수는 기다렸다. 겐조는 한 음 한 음을 더듬는 듯 샤미센 현을 튕겼다. 자신도 모르게 섬섬옥수 금수의 손이 어깨를 타고 자드락길을 걷듯
미세하게 움직였다. 금수가 신은 버선코가 현의 선율에 급소를 밟듯 오르내렸다. 금수를 바라다보는 겐조의 눈길에도, 겐조가 타는 샤미센 선율에도, 금수의 손끝에서도, 금수의 버선코에서도 동짓달 철 잊은 복사꽃이 분분히 날렸다.
도대체 금수와 종팔의 삶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저는 요즈음,
그들과의 즐거운 데이트 중입니다.
'군산과 주변 엿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제풍경 (0) | 2014.05.29 |
---|---|
<지금 나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0) | 2014.05.28 |
군산시에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0) | 2013.10.03 |
아침 막간 여행 - 日常茶飯事 80 탄 (0) | 2013.07.04 |
은파 / 7월 첫날의 아침 - 日常茶飯事 77 탄 (0) | 2013.07.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