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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칠불사 가는 길에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13. 10. 18.

  가을빛은 지리산 계곡에 먼저 찾아왔는가? 아기주먹만한 참새들이 가을햇살을 머금은 계곡물에서 포르르포르르 개구쟁이 짓을 하고 있다. 고것들이 떨어트린  성긴 물방울들에 잠시 눈이 부시다. 북적대던 주말을 등진 동천주변은 유난히 고적하다. 막 화려한 치장에 수런거리는 벚꽃 십리길, 쉬엄쉬엄 산들바람을 앞세워 걷는다. 칠불사 팻말이 보이고 범왕계곡의 물소리가 요란하다.

 

 

 

  그래 여기서부터 계연과 성기의 야리꾸리 한 데이트가 시작되겠구나, 피식 웃음이 나온다.

 

 

 

  “계연은 당황하여, 쥐고 있던 새파란 으름 두 개를 성기의 코끝에 내어 밀었다. 성기는 몸을 일으켜 그녀의 둥그스름한 어깨와 목덜미를 껴안았다. 그리고는 입술이 포개졌다.

  그녀의 조그맣고 도톰한 입술에서는 한나절 먹은 딸기, 오디, 산 복숭아, 으름 들의 달짝지근한 풋내와 함께, 황토 흙을 찌는 듯한 향긋하고 고수한 고기(肉)냄새가 느껴졌다.

  까악까악하고 난데없는 가마귀 한 마리가 그들의 머리 위로 울며 날아갔다.”

 

 

 

  1948년 金東里 선생의 단편 소설 驛馬의 한 장면이다.

 

 

 

  하동·구례·쌍계사로 갈리는 세 갈래 길목의 화개장터에 자리 잡은 옥화네 주막에 어느 여름 석양 무렵 늙은 체장수와 열대여섯 살 먹은 그의 딸 계연이 찾아온다. 이튿날 체장수는 딸을 주막에 맡겨놓고 장사를 떠난다.

옥화는 떠돌이 중과 관계하여 아들 성기를 낳았는데, 역마살이 끼었다고 열 살 때부터 절에 보내어 그곳에서 지내게 한다. 성기는 장날이 되면 절에서 내려와 책전을 펴는데, 옥화는 성기를 계속 옆에 머물게 하기 위하여 계연으로 하여금 성기의 시중을 들게 한다.

어느 날 성기와 계연은 칠불암으로 가게 되었는데, 산나물을 캐고 산열매를 따먹기도 하면서 둘의 관계는 급속히 가까워진다. 그 뒤로 두 사람의 정은 더욱 깊어 간다.

어느 날 옥화는 계연의 머리를 땋아주다가 왼쪽 귓바퀴의 조그만 사마귀를 발견하고 깜짝 놀란다. 그리고 악양 명도에게 다녀온 뒤로 성기와 계연의 사이를 경계하게 된다. 마침내 체장수가 다시 와 계연은 아버지를 따라 여수로 떠나고, 성기는 갑작스런 이별에 충격을 받아 자리에 드러눕게 된다.

어느 봄날 옥화는 성기에게 그녀의 지난날을 이야기해준다. 체장수는 서른여섯 해 전 남사당을 꾸며 화개장터에 와 하룻밤을 놀고 갔던 자기의 아버지가 틀림없으며 자신의 왼쪽 귓바퀴의 검정 사마귀를 보여주면서 계연은 자기의 동생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어느 이른 여름날 화개장터 삼거리에는 나무엿판을 맨 성기가 옥화와 작별하고, 육자배기 가락을 부르면서 체장수와 계연이 떠난 구례 쪽 길을 등지고 하동 쪽으로 떠난다. (백과사전에서)

 

 

 

  운명적인 슬픈 사랑이야기는 마음에 한 껏 서정을 일깨운다. 저 무심한 가을하늘 한 점 구름처럼 만났다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인연들에 마음이 성긴다. 인류의 탄생과 소멸이 우주라는 거대한 캔버스를 배경으로 하듯 어떤 인연 또한 이곳 화개 땅에서 끊임없이 재연될 뿐이다. 인연 따라 흘렀는가?

 

  불현듯 東里선생을 請해,

 

 

 

“선생님,  '무녀도'를 앞에 놓고 화개 차나 한 잔 나누시지요?”

 

  오늘의 데이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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