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회귀가 가장 무거운 짐이라는 니체의 사상을 배경으로 거느린 우리의 삶은 찬란한 가벼움 속에서 자태를 드러낸다. 우리의 삶의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우리 삶이 지상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의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실해질까?
반면에 짐이 완전히 없다면 인간 존재는 공기보다 가벼워지고 날아가 버려, 지상적 존재로부터 멀어진 인간은 기껏해야 반쯤만 생생하고 그의 움직임은 자유롭다 못해 무의미해지는 것일까? 그렇다면 무엇을 택할까? 묵직함, 아니면 가벼움?
“당신은 묵직함, 가벼움 어느 쪽이야?”
“글쎄, 영원한 삼류인생이니 당연히 가벼움이 아닐까?”
“그래, 자신의 삶이 삼류인생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출발하는 하루라면 충분히 가벼워 져야지. 그럼 자신의 글이 삼류 글이라고 생각하면?”
그는 언제나 칼끝을 직접 들이댄다.
“삼류인생이니 삼류 글을 쓰는 것은 당연 지사. 문제는 자신의 삶 자체가 삼류이면서 일류인척 하거나 자신의 글이 삼류이면서 일류인척 하는 것이 문제지.”
정곡을 찔러오는 칼날을 받아 그를 향해 날린다.
“그럼 됐어. 삼류라는 것을 알았으면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겠어. 계속해.”
어젯밤, 시공간을 날아온 밀란 쿤데라씨가 새벽녘까지 비비적거리다 휑 사라져 버렸다.
그가 떠난 자리엔 잿빛 하늘이 내려와 있었고 곧이어 무게를 못이긴 하늘은 비를 뿌렸다.
“자네는 왜 자꾸 그런 웃음을 짓나?”
괜히 투정을 부리는 듯 이 교수는 지원의 싫지 않은 웃음에 커서를 올렸다.
“그냥요. 왠지 교수님이 오늘 밤은 꼭 엄마 말 죽어라고 안 듣고 막무가내 떼를 쓰고 있는 유치원 꼬마 같아서요. 죄송합니다.”
부드러워진 분위기 탓이었는지 그만 지원이 하지 말아야 할 말을 내 뱉고 있었다.
“허허, 강지원학생, 교수님에게 유치원 꼬마라니?”
이 교수가 비록 호통을 치는 듯 언성을 높였지만 그 목소리 속엔 다정함과 부드러움과 흥분, 아니 흥분을 넘어 야릇한 열망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지원 또한 자꾸만 학생과 교수, 20년이 넘는 나이 차이와 신분의 간격들을 잊어가고 있었다. 노라 존스의 나른한 음악들이 그들을 현실의 세계에서 멀리 또 다른 그들만의 세상 속으로 그들을 끌어가고 있었을까?
“자네 저 노래 들어본 적이 있나?”
“네, 노래는 많이 들어본 것 같은데.”
“영화 My Blueberry Nights의 주제곡인 The Story란 곡이지. 그 영화 본적이 있나. 노라 존스와 주드 로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왕가위 영화 말이야.”
“아니요, 그러나 왕가위의 다른 영화들, 중경삼림이나 화양연화, 아비정전, 해피투게더 같은 영화들은 본적이 있어요. 제 할머니가 좋아했던 영화들이었거든요.”
어쩐지 이 교수가 말한 영화를 들어본 적이 없다는 말을 하기가 쑥스러워 괜히 지원은 너스레를 떨었다.
“아, 그런가. 자네 할머니 때문에 그 영화들을 보았군. 지금 나오는 노래는 주인공이 영화 속에서 직접 부른다네. 노라 존스라는 재즈 가수이고. 그녀의 목소리는 참으로 달콤하지. 정말 불루베리를 잔뜩 올려놓은 케잌을 먹는 것처럼 말이야. 그렇지 않은가?”
지원은 사실 재즈에 대한 것은 문외한 이었다. 어쩐지 이 교수가 하는 말들이 모두 자기와는 다른 세계에 속하는 일들 같았다.
“이 영화에서 노라 존스가 분한 주인공 엘리자베스가 이런 말을 하지. ‘창문을 올려다보면서 깨달았지. 이 길이 아니란 걸.’ 나는 가끔씩 이 말을 뇌까리네. 선택의 순간이 왔을 때 말이야. 이 길일까, 저 쪽 길일까 늘 인생은 선택을 강요하니깐.”
점점 이 교수의 말들이 난해해지기 시작하자 지원은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 더 이상 모호한 세계 속에 있고 싶지 않았다. 일부러 하품을 하는 척 했다. 이런 지원을 아랑곳하지 않고 이 교수는 말을 계속하고 있었다.
“주인공 주드 로와 노라 존스는 이 영화에서 키스 장면하나를 찍기 위해 3일간을 여러 각도에서 여러 방식으로 찍었다고 하더군. 주드 로가 노라 존스의 얼굴에 묻은 크림에 키스하는 장면을 찍을 때 NG가 날 때마다 계속 크림을 바르고 또 발랐다고 하더군. 아마 주드 로는 이 한 장면 때문에 수십 리터의 크림을 먹고 말았을 거야. 반면에 노라 존스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하더군. ‘내가 주드 로의 키스를 받고 있다니, 이게 싫을 리 없잖아!’ 라고 말이야. 이 키스하는 장면이 영화의 포스터로도 제작되었고 O.S.T음반의 표지에도 올라와 있지. 어쩐지 오늘 밤엔 이런 키스를 한 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 듯 드네.“
지원은 속으로 너무 놀라서 가슴이 철렁했다. 어떻게 어린 여학생을 앞에 두고 교수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할까? 혹시라도 자신을 싸구려 취급하는 것은 아닐까? 자신의 생긴 것 때문에 자신을 얕잡아 보는 것은 아닐까 오만가지 생각이 순식간에 지원의 뇌 속을 강타하고 있었다. 지원은 더 이상 그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았다. 이 교수를 볼 때마다 늘 가슴이 콩당거리고 설렘이 일었던 순간들이 잠시 후회가 되었다. 자신을 이렇게 싸구려로 보는 사람을 두고 설렘이 일 수 있을까. 잠시나마 자신은 착각 속에 빠진 거야. 어쩜 할머니가 말한 나쁜 마녀의 속삭임에 빠졌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교수님, 저 늦어서 그만 가봐야겠어요. 사실 내일 새벽부터 아르바이트 해야 돼서요.”
지원은 일부러 핑계를 찾고 있었다. 머쓱해진 이교수는 자신이 술기운에 어린 여학생에게 괜한 소리를 한 것 같아 얼른 허리를 곧추세우며
“그런가, 그럼 어서 먼저 가보게나. 난 남아있는 와인을 다 비우고 가겠네.”
나는 유치 빤스 상큼 발랄 달콤 짭짤 종내는 씁쓸할 연애소설을 쓰고 있다. 어젯밤 늦게 시작한 글쓰기의 발동이 새벽까지 계속되더니 ‘영하’씨의 목소리를 배경삼아 늦은 아침을 맞았다. 아, 이건 또 무슨 조화속이람, 마땅히 피곤하고 우울해야 할 기분이 운동회 날 하늘에 날리던 만국기마냥 사방으로 솟구치고 있었다. 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입에선 나도 모르게 ‘솔솔솔 구두소리 빨간 구두 아가씨 똑똑똑 구두소리 어딜 가시나. 한번쯤 뒤돌아 볼만도 한데 발걸음만 하나 둘 세며 가는지 빨간 구두 아가씨 혼자서 가네.’ 음정도 박자도 무시하며 ‘말로’ 버전의 노래를 흉내 내고 있었다.
어쩐 일일까? 출근하는 길은 여느 때와 다르게 한산하였고 ‘똑똑똑’ 가을비가 한 알씩 차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봄비를 맞으면서 충부로 걸어갈 때 쇼윈도 그라스엔 눈물이 흘렀다. 이슬처럼 꺼진 꿈 속에는 잊지 못할 그대 눈동자 샛별같이 십자성같이 가슴에 어린다.”
“A C8."
그대 눈동자 샛별같이 가슴에 어린다 이 대목에선 나도 모르게 욕이 나온다.
“네가 그랬지? CRAZY 빤스 같은 놈. 뭐라고? 네 여자들의 수준을 떨어뜨리지 마라고.”
내 그대가 그랬다. 아직까지도 그때의 모멸감이 남아 찔끔 눈물이 났다.
“그래, 나 못생겼고 뚱뚱하고 그래도 세상에선 나 보다 더 널 좋아하는 여자는 아마 없을 걸, 너 두고 봐. 언젠가 틀림없이 내 생각이 절절할 걸. 엣다. 이건 저주다. 너, 그래 잘난 네 여자들이랑 섹스 할 때 절정에 순간에 내 생각이 퍼뜩 나거라. 날마다 기도 할 거라. 꼭 그 순간에 한가위 보름달 같은 내 얼굴이 생각나길...”
그렇게 복수를 하고 있는 내가 참 나도 웃긴다. 그런 생각에 젖어가는데 또 ‘말로’는 이렇게 노래한다.
“구월이 오는 소리 다시 들으면 꽃잎이 피는 소리 꽃잎이 지는 소리 가로수에 나뭇잎은 무성해도 우리들의 마음엔 낙엽은 지고 쓸쓸한 거리를 지나노라면 어디선가 부르는 듯 당신 생각뿐.”
“아이고 모르겠다. 나도 내 속을 모르겠다.”
차창으로 전에 보지 못했던 나팔꽃들이 웃고 있었다.
“어찌 날마다 지나던 이 길이었는데 오늘에서야 널 만나다니... 바로 그런 것이야. 그냥 그 놈은 널 그렇게 날마다 비켜 갔을 뿐이야. 아마도 영원히 그럴 수 밖엔 없겠지. 하여도 너는 나팔꽃 자체이고 누군가 오늘 아침의 나처럼 네 모습에 잠시 황홀할 수도 있을거야.”
그렇게 난,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 점점 빗줄기가 강해지고 있었다.
“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기쁨을 오늘 밤 나와 함께 나누지 않겠어요? 킴스에서 6,900원짜리 G7 멜롯으로 들고 오시람. 나머지 내가 쏘겠어. 두 병, 세 병...”
화살처럼 메시지는 날아가고 아직 답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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