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파 호수 공원을 걸었다
은파 호수 공원을 걸었다. 바람은 살살 불어 나뭇잎을 흔들고, 호수 위로 빛은 잔물결처럼 흩어졌다. 나는 천천히 걸으며 그 빛을 바라보았다. 서두르지 않았다. 어디에도 닿으려 하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문득 깨달았다. 내가 죽어도 세상은 여전히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겠구나. 존재의 끝은 두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을 더 선명하게 만드는 빛이었다. 사라진다는 사실이 지금 여기를 더 또렷하게 했다.
그러나 아름다움 속에서 나는 씁쓸함을 느꼈다. 내가 연연하며 붙잡아온 것들이 사실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씁쓸함이었다. 집착은 바람에 흩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워지고, 의미를 부여하려 애쓰던 것들은 호수의 물결처럼 사라졌다. 오래 붙들고 있던 것들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을 그저 바라보았다. 남는 것은 단지 지금의 감각뿐이었다.
쓸모없음을 인정하는 일은 마음을 저리게 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해방이다. 더 이상 증명할 필요도, 움켜쥘 이유도 없다. 세상은 내가 없어도 아름답고, 바람은 내가 붙잡지 않아도 불어온다. 그 사실이 처음에는 나를 작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작아지는 것이 곧 가벼워지는 것임을 알았다. 그 씁쓸함 속에서 나는 자유를 배운다.
삶은 결국 거대한 성취가 아니라, 바람 한 줄기와 빛 한 조각을 감각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호수는 아무것도 붙잡지 않는다. 빛이 오면 빛을 담고, 바람이 오면 물결을 만들고, 그것으로 끝이다. 나도 그렇게 걸었다. 은파 호수 공원을 걸으며 나는 그것을 알았다. 씁쓸함과 평온이 함께 머무는 그 순간, 세상은 충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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