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다시 배운다는 것
—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을 읽으며
이순을 훌쩍 넘었으면서도 나는 여전히 ‘사랑’이라는 말에 울렁인다. 어쩌면 평생 사랑이란 것에 대해 끊임없이 사유해 왔다고 할까. 젊었을 때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그것을 안다고 생각했다. 사랑은 기술이고, 배워야 하는 것이라고. 그런데 두번, 세 번을 읽고, 요즈음 다시 펼쳐 들었을 때, 그 문장들이 전혀 다른 무게로 다가왔다.
불편했다. 젊은 날의 나는 프롬을 이해했지만, 지금의 나는 프롬 앞에서 불편하다. 그 불편함의 정체를 한참 들여다봤다. 그것은 이런 질문이었다. 나는 지금껏 사랑한다고 믿었던 것들이 과연 사랑이었는가. 사랑을 위해 노력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이기심의 발로였던 것은 아닌가. 타인을 사랑한다고 믿으면서, 실은 타인을 통제하려는 무의식이 작동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이순이 넘은 나이에 그 질문은 앞을 향하지 않고 뒤를 향한다. 지나온 삶 전체를 향해 되돌아온다. 그래서 불편했다.
프롬에게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기술이다. 배울 수 있는 것, 연습해야 하는 것, 그래서 실패할 수도 있는 것. 피아노를 배우듯, 목공을 배우듯, 사랑도 훈련을 요한다. 그런데 현대인은 이 사실을 외면한다. 사랑하는 능력을 키우는 대신, 사랑받을 만한 자신을 만드는 데 몰두한다. 더 매력적인 외모, 더 흥미로운 성격, 더 성공한 커리어. 프롬의 눈에 현대의 사랑은 두 상품이 서로의 교환가치를 협상하는 거래였다. 그 시장 안에서 인간은 사랑의 기술을 배우는 대신 사랑의 환상을 소비한다.
프롬에게 사랑의 반대말은 증오가 아니라 고립이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분리된 존재다. 타인과의 경계, 자신과 세계 사이의 단절, 그 실존적 고독이 인간을 사랑으로 이끈다. 그러나 고독을 견디지 못한 인간은 거짓 합일을 선택한다. 성적 결합, 집단에의 귀속, 타인에 대한 지배와 복종. 이 모든 것이 일시적으로 고립을 마취시키지만 근본을 건드리지 못한다. 진정한 합일은 자신을 잃지 않으면서 타인과 연결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온전히 대면하지 못한 사람은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자신의 결핍을 투사할 뿐이다.
그렇다면 사랑의 기술은 어떻게 배우는가. 프롬의 답은 단순하지만 가혹하다. 먼저 혼자가 되어야 한다. 타인의 시선을 끊고, 아무도 듣지 않는 곳에서 자기 자신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 그 고독은 도피가 아니라 훈련이다. 프롬은 이것을 집중, 인내, 관심, 규율이라는 네 가지 실천으로 정리했다. 사랑은 느끼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이고, 행하기 위해서는 반복적인 수련이 필요하다.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나는 얼마나 사랑의 기술을 익혔는가. 솔직히 말하면, 나는 사랑하는 법보다 사랑받는 법에 더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더 좋은 사람이 되려 했지만, 그것은 결국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것이었다. 프롬이 말한 시장의 논리 안에 나도 있었다. 나는 나의 교환가치를 높이려 했지, 사랑의 능력 자체를 키우려 하지 않았다. 사랑한다고 믿었던 순간들이 사실은 통제하려는 욕망이었을 수 있다는 자각, 그것이 지나온 시간을 향해 되돌아올 때 불편함은 두려움이 된다.
인간 전체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다. 나는 인간의 선함을 믿고 싶다고 말하면서, 정작 눈앞의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에 얼마나 인색했는가. 선함을 믿는다는 것은 추상적인 인류애가 아니다. 프롬의 말대로라면, 그것은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있는 구체적인 한 사람에게 집중하고, 인내하고, 관심을 기울이는 일이다. 그 수고를 감내하는 일이다. 나는 그 수고를 충분히 감내했는가.
그리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 프롬은 자기애(self-love)와 이기심을 구별한다. 이기적인 사람은 실제로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자신에 대한 결핍이 너무 커서 끊임없이 채우려 하는 것이 이기심이다. 진정한 자기애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것, 그리고 그 긍정 위에서 타인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자기애와 이기심을 혼동했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부끄럽거나 위험한 일처럼 느꼈다. 그래서 자신에게 가혹했고, 그 가혹함이 때로 타인에게도 향했다. 그것이 사랑이 아니었다는 것을, 프롬을 다시 읽으면서 비로소 인정했다.
프롬이 말한 사랑의 기술의 완성이란 결국 이것이다. 사랑을 잃어도 무너지지 않을 만큼 자기 자신이 충분히 단단해지는 것. 그 단단함은 타인을 차단하는 벽이 아니라, 타인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토대다.
나는 아직 그 토대를 다 쌓지 못했다. 아마 평생 쌓아가는 일일 것이다. 이순이 넘은 나이에 사랑을 다시 배워야 한다는 것은 여전히 도전이다. 그러나 프롬 덕분에 적어도 이것은 안다. 사랑은 찾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것이라는 것을. 배운다는 것은 실패를 포함한다는 것을. 그리고 실패하면서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 기술이라는 말의 진짜 의미라는 것을.
울렁임은 여전하다. 다만 지금의 울렁임은 젊은 날의 그것과 다르다. 그때의 울렁임이 사랑을 향한 기대였다면, 지금의 울렁임은 사랑 앞에서의 겸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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