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개봉한 마틴 맥도나의 영화 〈이니셰린의 밴시〉는 아일랜드의 작은 외딴섬을 배경으로, 가장 가까웠던 두 친구 파우릭과 콜름이 돌이킬 수 없는 결별에 이르는 과정을 그린다. 표면적으로는 단순한 우정의 파국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 작품은 사실 인간에게 근본적인 질문, “무엇이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가?”를 제기한다.
영화 속 밴시는 단순한 민속적 유령이 아니라, 죽음과 유한성의 은유이며 삶의 근원적 질문을 일깨우는 존재다. 콜름은 일상의 반복을 거부하고, 죽은 뒤에도 남을 “영원성”을 음악을 통해 추구한다. 이는 플라톤이 말한 영원한 이데아의 세계와 연결된다. 감각적 삶은 덧없지만, 예술과 이성을 통해 인간은 영원한 진리에 닿을 수 있다. 콜름에게 음악은 일상적 시간을 넘어 불멸의 흔적을 남기는 방식이었다.
반대로 파우릭은 평범한 대화와 따뜻한 관계 속에서 삶의 의미를 느낀다. 그는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가치라고 믿는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우다이모니아(행복) 개념과 맞닿아 있다. 행복은 거창한 업적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 덕을 실천하고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삶에서 비롯된다. 파우릭의 태도는 인간을 관계적·공동체적 존재로 보는 아리스토텔레스적 관점을 잘 보여준다.
밴시는 또한 죽음 그 자체를 상징한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인간은 본질적으로 죽음을 향한 존재(Sein-zum-Tode)이다. 죽음의 가능성은 인간을 일상적 가벼움에서 깨워내어 본래적 존재와 마주하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밴시는 바로 이 죽음의 목소리이자, 하이데거가 말한 ‘양심의 부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영화 속 세계는 부조리하기도 하다. 콜름의 예술 추구와 파우릭의 선함은 결국 폭력과 상처로 귀결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카뮈의 부조리 철학을 떠올릴 수 있다. 세계는 본래 의미를 주지 않지만, 인간은 끊임없이 의미를 갈망한다. 이 간극이 바로 부조리다. 카뮈는 부조리를 인식하면서도 삶을 긍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영화의 열린 결말은 우리에게 똑같은 질문을 남긴다. “부조리한 세계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한나 아렌트는 또 다른 길을 제시한다. 아렌트에게 인간은 정치적 존재(zoon politikon)로서, 사회적·정치적 관계 안에서만 자유와 의미를 발견한다. 〈이니셰린의 밴시〉에서 우정의 붕괴는 단순한 개인적 사건이 아니라 공동체의 기반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파우릭의 외로움은 곧 섬 전체의 고립을 드러낸다. 아렌트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 영화는 관계의 파괴가 인간 존재를 어떻게 뒤흔드는가를 보여준다.
〈이니셰린의 밴시〉는 작은 우정의 서사 속에 플라톤의 영원성,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 하이데거의 죽음, 카뮈의 부조리, 아렌트의 관계 철학을 불러낸다. 영화는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철학의 역할이다. 질문은 남아 우리를 괴롭히지만, 동시에 성찰로 이끈다.
“영원한 흔적을 남기는 것이 중요한가, 아니면 순간의 따뜻한 관계가 중요한가?”
“죽음과 부조리 앞에서 우리는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는가?”
밴시의 목소리는 결국 이렇게 속삭인다. 삶은 유한하다. 그러나 그 유한성을 자각하는 순간, 우리는 철학자가 된다.
나는 이 영화를 단순한 우정의 이야기로 보지 않았다. 〈이니셰린의 밴시〉는 내게 삶과 죽음, 우정과 고독, 예술과 공동체의 의미를 묻는 깊은 질문으로 다가왔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하이데거, 카뮈, 아렌트의 목소리를 불러낸 것은 단순히 철학자들의 이름을 나열하기 위함이 아니라, 이 작품 속 갈등과 침묵, 그리고 밴시의 존재가 이미 철학적 사유의 장으로 확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영화 속 콜름과 파우릭의 갈등에서 내 삶을 비추어 보게 된다. 나 역시 “영원히 남을 흔적을 남겨야 하는가, 아니면 지금의 따뜻한 관계를 지켜야 하는가?”라는 질문 앞에 서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 밴시는 죽음을 알리는 유령이 아니라, 나에게 “네 삶을 어떻게 살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철학적 목소리였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바로 그 질문을 피하지 않고 붙잡기 위해서다. 밴시가 속삭이듯, 삶은 유한하다. 그러나 그 유한성을 의식하는 순간, 나는 더 깊이 사유할 수 있고, 더 많은 철학적 경험과 함께 폭넓은 삶을 살 수 있다고 믿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