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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에세이

「알랭 바디우의 사랑론과 문학적 사유」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25. 6. 11.

 

 

 

 

「알랭 바디우의 사랑론과 문학적 사유」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사랑에 대해 쓰기 시작했다. 그것은 누군가를 사랑하기 전부터 이미 내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감정이었다. 꼭 누군가가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나는 오래도록 사랑을 사유했고, 그 사유는 때로 시나 소설, 에세이의 첫 문장이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알았다. 내가 계속해서 쓰고 있었던 것은 ‘사랑’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랑이 일으킨 세계의 변화였다는 것을. 사랑은 내게 '한 사람의 시선에서 벗어나 세계를 다시 보는 일'이었고, 그 낯선 시선의 충돌 속에서 내가 몰랐던 나의 일부가 빛을 얻곤 했다.

이번 학기 문학연구방법론 수업에서 알랭 바디우의 『사랑 예찬』이라는 단어가 펼쳐졌을 때, 나는 내 삶의 긴 문장 속에서 반복되어 온 단어 하나를, 마치 어떤 오래된 노래처럼 떠올렸다.

“사랑은 세계를 함께 바라보는 두 시선의 오랜 건축이다.” 라는 문장을 마주한 순간, 나는 내가 줄곧 사유해 온 이 감정이 철학의 언어로도 존재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사랑이란 주제를 학문적으로 다룰 수 있을까 의문을 가졌던 나의 의심은, 그 한 문장 앞에서 서서히 녹아내렸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직감했다. 이 글은 단지 감상문이 아니라, ‘사랑’을 둘러싼 문학과 철학, 나아가 존재에 대한 방법론적 탐색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바디우는 사랑을 ‘진리의 절차’라 명명했다. 정치와 과학, 예술과 더불어 사랑 역시 새로운 진리를 만들어내는 네 가지의 힘 중 하나라고 했다. 이 문장은 내 안의 오래된 감정들을 다른 빛으로 조명했다. 사랑은 문학 속에서 수없이 반복되어 온 주제였지만, 우리는 그것을 때로 너무 쉽게 소비하거나 낭만화하거나 혹은 지나치게 개인의 서사로만 환원시켜 왔다. 하지만 문학연구는 사랑이 그저 ‘사랑 이야기’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이 어떻게 하나의 앎의 구조로 조직되고, 서사 속에서 어떤 윤리적 충돌과 의미를 만들어내는지를 묻는 일이어야 한다.

나는 이 글을 통해 사랑이라는 감정이 문학 속에서 어떻게 사건이 되는지를 사유하고자 한다. 그것은 한 편의 시나 에세이를 혹은 소설을 쓰는 일이기도 하며, 동시에 사랑이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침묵하는지를 분석하는 비평의 일이기도 하다. 문학은 늘 인간의 가장 깊은 고백을 담아왔고, 사랑은 그 고백의 가장 오래된 이름이었다. 바디우가 말한 사랑의 윤리, 사랑의 지속, 사랑의 정치학을 문학적 서사의 결 속에서 더듬어가며, 나는 다시 한 번 이 감정의 이름을 불러보고자 한다. 그리고 조용히, 이 소풍의 끝자락에서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나의 영원한 주제는, 사랑이다.”

 

1. 왜 바디우의 『사랑 예찬』은 에세이의 주제가 되어야 하는가?

사랑은 흔히 감정의 영역, 혹은 개인적인 체험의 차원으로 환원되어 왔다. 문학에서도 수많은 사랑 이야기가 반복되었지만, 그 대부분은 만남과 이별, 욕망과 상실이라는 서사의 구조 안에서 소비되어 온 면이 있다. 그러나 알랭 바디우는 이러한 통념에 정면으로 저항하며, 사랑을 단지 감정이나 사적인 로맨스가 아니라, 진리를 생성하는 하나의 절차라고 말한다. 사랑은 예술, 과학, 정치와 더불어 진리를 구성하는 네 가지 방식 중 하나이며, 그 자체로 세계를 새롭게 구성할 수 있는 존재론적 힘을 갖는다고 그는 주장한다.

바디우의 사랑론은 기존의 사랑 이론과는 전혀 다른 자리에서 출발한다. 그는 사랑을 단순한 만남이나 우연한 끌림이 아닌, '차이의 지속을 견디는 사건'으로 본다. 두 존재가 각자의 고유한 배경, 기억, 세계를 지닌 채 서로를 만날 때, 그 만남은 하나의 '사건'이 되고, 그 사건을 지속하려는 시도가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다. 사랑은 그 자체로 세계를 둘의 시선으로 재구성하며, ‘하나의 주체로부터 벗어난 진리의 형성’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연다. 사랑은 '나'가 아니라 '우리'로 세계를 바라보게 만드는 감각이며, 그것은 철학과 문학 모두에게 중요한 윤리적 실천의 형태로 작동한다.

그렇기에 바디우의 『사랑 예찬』은 단순히 사랑에 대한 철학적 찬사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문학이 사랑을 어떻게 다루어왔는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사유할 수 있는가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우리는 이 글을 통해, 사랑을 다시 발명해야 한다는 바디우의 요청을 하나의 문학적·이론적 질문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사랑의 윤리가 점점 더 사라져가는 세계 속에서 더욱 절실한 문제이기도 하다. 나는 그래서 이 글을 쓴다. 사랑은 내게 늘 글쓰기의 시작이었고, 이젠 사랑이 글쓰기의 방법론이기도 하다. 어쩌면, 나의 글쓰기 전체는 사랑의 긴 편지였는지도 모른다. 그 편지의 끝에서 나는 다시 묻는다. 우리는 사랑을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지속할 것인가.

 

2. 사랑과 자본주의: 리스크를 견디는 윤리

우리가 사는 세계는 모든 것을 계산하고, 측정하고, 안전하게 만들려 한다. 사랑조차도 예외가 아니다. 바디우는 오늘날의 사랑이 ‘리스크 없는 사랑’을 추구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안전한 만남, 취향이 맞는 사람, 상처받지 않을 확률이 높은 관계. 이제 사랑은 개인의 행복과 효율성을 위한 합리적 선택지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사랑이 지닌 예측 불가능성과 우연성, 그로 인해 생기는 고통과 변화 가능성은 점점 제거되고, 남은 것은 프로필과 조건의 정합성뿐이다.

그러나 바디우는 말한다. 사랑은 원래부터 불확실한 것이며, 그 불확실성을 감내하는 용기 속에서만 진실이 시작된다고. 사랑은 일종의 ‘사건’이다. 그 사건은 단 한 번의 만남으로 그치지 않고, 두 사람이 함께 겪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반복적으로 재구성되며, 예기치 않은 상황들에 부딪혀가며 공동의 세계를 만들어간다. 바디우가 말한 '지속의 형이상학'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사랑은 우연한 마주침 이후, 그 우연을 끊임없이 선택하는 일상적 실천이다. 그것은 곧 ‘지속 가능한 차이’를 감당하는 윤리이며, 결코 감정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세계의 구축이다.

문학은 오랫동안 사랑을 노래해 왔지만, 이제는 그 사랑이 ‘어떤 구조 속에서 작동하는가’를 질문할 때이다. 사랑이 상품화되고, 감정이 거래되고, 관계마저도 효율성의 논리에 따라 소비되는 시대에, 바디우는 말한다. 우리는 사랑을 다시 발명해야 한다고. 그 발명은 단지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차이를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감각, 그리고 그 차이로 인해 생성되는 새로운 감정과 언어, 삶의 방식 전체를 포함한다.

사랑은 더 이상 감정의 홍수나 낭만의 유희로만 남을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자본주의가 가장 두려워하는 지속성의 감정, 예측 불가능한 관계 맺기의 시도이며, 상처와 기쁨을 동시에 받아들이는 하나의 윤리적 사건이다. 이 윤리를 감당할 수 있는가, 사랑의 리스크를 견딜 수 있는가? 문학은 그 물음을 다시 꺼내야 한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 물음을 꺼내고 있는 중이다. 한 사람을 향한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을 통해 열리는 새로운 진리의 문법을 쓰고자 한다. 어쩌면 문학이란, 언제나 그 문법의 변주였는지도 모른다.

 

3. 사랑의 정치성과 문학적 윤리

사랑은 사적인 감정이지만, 바디우는 그것을 철저히 정치적인 사건으로 바라본다. 왜냐하면 사랑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고유한 진리를 생성해 내고, 그 진리는 기존의 질서와 충돌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함께 살아가려는 결정, 차이를 감당하고 지속하는 실천에서 그 진짜 윤리가 발생한다. 이 실천은 곧, 개인을 넘어 공적인 존재로 나아가는 첫 걸음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사랑은 하나의 공동체 윤리로 확장된다. 단 둘만의 세계로 움츠러드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의 시선으로 세계 전체를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일. 바디우는 이것을 “세계에 대한 이중적 관점의 구축”이라 말한다. 이는 곧, 나 아닌 타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려는 시도이며, 그 시도 자체가 타자 윤리의 실천이 된다. 사랑은 따라서,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내가 누구인지 다시 쓰게 만드는 존재론적 사건이며, 문학은 바로 이 ‘다시 쓰임’을 끊임없이 수행해 온 언어의 장이었다.

문학은 늘 타인의 목소리를 빌려 나를 말해왔다. 연인, 가족, 낯선 자, 침묵하는 자, 그 누구든 타자의 시선을 통해 주인공은 다시 쓰인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바디우가 말한 ‘진리의 절차’로서의 사랑을 목격하게 된다. 문학 속에서 사랑은 결코 완전한 이해로 귀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를 오해하고, 다투고, 떠나고, 다시 돌아오는 그 반복 속에서 새로운 감정의 언어가 탄생한다. 그것은 상처받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깊이 이해하게 만드는, 윤리적 감각의 탄생이기도 하다.

사랑은 그래서 문학에서 결코 낡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관계의 감정이 아니라, 문학의 말들이 다시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급진적인 힘이기 때문이다. 바디우는 말한다. 사랑은 우연 속의 선택이고, 그 선택을 지속하는 과정이다. 문학은 그 선택이 얼마나 고통스럽고도 아름다운지를 끊임없이 보여주었다. 그리고 나는 그 말들 위에서 다시 쓰고 싶다. 사랑이라는 감정의 정치를, 문학이라는 윤리의 언어로.

 

4. 감정의 형식, 사건의 언어: 사랑은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침묵하는가?

문학에서 사랑은 감정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때로 그것은 어떤 인물의 돌연한 선택으로, 혹은 한 문장의 주저하는 고백으로, 또는 끝내 말해지지 못한 침묵의 여백으로 등장한다. 그 감정은 단순히 등장인물의 상태가 아니라, 서사를 변화시키는 하나의 사건이 된다. 사랑은 문학 속에서 어떤 세계의 구조를 교란시키며, 인물의 존재론을 다시 쓰고, 내면의 시선을 전복한다. 이때 사랑은 하나의 서사적 전환점이자, 사유의 가능성을 여는 장치가 된다.

바디우가 사랑을 ‘사건’이라 말했을 때, 그는 사랑이 세계를 새롭게 바라보게 만드는 존재론적 충돌이라고 보았다. 그것은 단지 마음이 움직이는 일이 아니라, 그 감정이 새로운 윤리와 진리의 형태로 조직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동반한다. 그러므로 작가에게 사랑은 하나의 체험이자 동시에 언어화의 과제다. 작가는 그 사랑을 직접 겪기도 하고, 타인의 목소리로 대리 말하기도 하며, 결국은 그 감정을 말할 수 없는 것과 말해지는 것 사이에 서서 조율한다. 문학은 그 조율의 흔적이며, 그 흔적을 우리는 ‘형식’이라고 부른다.

문학적 사랑은 늘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침묵하는가를 질문하게 만든다. 말해진 사랑보다 말해지지 못한 사랑이 더 오래 남는 것도, 아마 그 침묵 속에 감정의 진실이 더 가까이 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사랑은 비평의 대상이기도 하다. 문학 속 사랑은 누구를 말하고, 누구를 지우며, 무엇을 불러오고, 무엇을 억압하는가? 그 말과 침묵의 경계에서 비평은 말한다. 사랑은 단지 감정이 아니라, 언어의 형식이며, 형식 너머에서 진동하는 존재의 정동이다.

내게도 사랑은 늘 말과 침묵 사이에 있었다. 쓰고 싶으면서도 쓸 수 없었던 감정, 닿고 싶으면서도 닿지 못한 이름, 그리고 끝내 문장으로 남아버린 세계. 나는 이제 사랑을 단지 쓰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무엇을 쓰게 만드는지를 묻는다. 그리고 이 질문은 문학의 질문이자, 철학의 질문이며, 나 자신의 윤리적 질문이다.

 

5. 결론: 사랑의 진리, 문학의 삶

문학은 긴 시간 동안 사랑을 둘러싼 질문을 반복해 왔다. 어쩌면 삶 그 자체가 사랑에 대한 하나의 오래된 물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사랑은 누구에게나 찾아오고, 누구에게나 떠나는 사건이다. 아무도 정확히 설명할 수 없지만 모두가 기억하는 감정. 나는 그 사건의 가장자리에서 여러 번 머물렀고, 사랑의 가능성과 불가능 사이에서 오래도록 살아왔다.

바디우는 사랑을 세계의 재구성이라고 말했다. 오직 한 사람의 시선으로 굳어 있던 세계가 어느 날 타자의 시선을 만나 균열을 일으키고, 그 틈새에서 전혀 다른 풍경이 태어난다. 그 풍경은 단 한 번의 계시가 아니라, 끊임없이 선택되고 재선택되는 지속의 형식 속에서 존재한다. 사랑은 찰나의 마주침에서 시작되지만, 그 찰나를 끝까지 감당하는 일은 충실성의 몫이다. 그리고 문학은 바로 그 지속 가능한 감정, 그 충실성의 기록이 되어왔다.

한 문장의 고백, 말과 말 사이의 침묵, 차이를 감싸는 시선. 문학 속의 사랑은 낭만적 환상이 아니라, 고통을 껴안은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조용한 혁명이었다. 바디우는 말한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윤리이며, 진리이며, 정치적 선택이다. 문학은 그 선택의 언어를, 그 진리의 형식을 끊임없이 발명해온 장르다. 나는 지금 그 언어 위에 다시 서 있다. 누군가를 향한 사랑이 아니라, 그 사랑이 가능하게 만든 세계의 균열, 존재의 재배치를 응시하고 있다. 바디우의 언어는 내게 철학이 시가 될 수 있음을, 사랑이 이론이 될 수 있음을 가르쳐주었다.

사랑은 나의 오래된 주제였고, 지금도 여전히 가장 멀고도 가까운 언어다. 문학을 쓴다는 것은 어쩌면 사랑의 지속을 꿈꾸는 또 다른 방식일지도 모른다. 하나의 사랑이 끝나고, 다시 새로운 사랑의 시간이 시작된다. 이제 나는 안다. 사랑은 다시 시작될 수 있으며, 그 시작은 언제나 글 속에서 도래한다. 그러므로 나는 또다시 써 내려간다. 사랑에 대하여. 그것은 나의 철학이며, 문학이며, 존재를 건 고백이다.

사건은 삶을 바꾸고, 충실성은 그 생을 마무리한다. 사랑도 그랬다. 한 사람을 만나고, 그를 통해 세계의 낯선 얼굴을 처음 마주한 순간. 그것이 나에게 사랑의 사건이었다. 그러나 사건은 순간이고, 그것을 지속시키는 일은 충실함의 몫이다. 오래된 진리 앞에서 흔들리는 감정을 감싸 안는 구조. 바디우는 그것을 '충실성의 형이상학'이라 불렀다.

나는 오랫동안 사랑을 갈망했고, 그 사랑 안에서 울고 웃었다. 이제는 사랑이 나의 마지막 희망이 되기를 바란다. 사랑은 반복되지 않고, 동일하지 않으며, 언제나 새롭게 다시 쓰인다. 나는 그 다시 쓰여지는 언어를 붙잡고 싶다. 사랑으로 사랑을 대체하며, 그 사랑이 나에게 닿고, 당신에게도 닿기를. 그것이 나의 유일한 충실함이며, 사랑의 진리를 끝까지 감당하고자 하는 한 인간의 문학적 몸짓이다.

나는 아직 이 언어 안에 머물러 있다. 이 문장들 속에서, 누군가를 부르듯, 누군가를 기다리듯, 한 사람의 사랑과 삶을 오래도록 증언하고 싶다. 사랑은 삶을 바꾸고, 충실함은 그 생을 완성시킨다. 그러니 지금 이 문장을 읽고 있는 당신. 당신이야말로 내가 끝내 닿고 싶은 사랑의 이름이다.

눈부신 이 계절 속에서 나는 어쩌면 아직 오지 않은 사랑(?)을 기다리고 있다. 언젠가 아주 어두운 사랑 이야기를 쓰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그보다 먼저, 정말 강렬한 사랑을 살아내게 될지도 모르겠다.

사랑은 언제나 찰나의 사건이지만, 그 사건을 감당하는 시간은 너무 길고 고요하다. 그 시간 속에서 우리는 말하지 못한 것들, 끝내 닿지 못한 마음, 너무 늦게 도착한 진심들을 품은 채 살아간다.

그리고 어느 날, 박찬욱의 영화 《헤어질 결심》의 그녀처럼, 사랑을 품은 채 스스로의 자리를 파고 들어갈 지도.

“당신이 나를 찾지 못하도록”

사랑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하는 것이며, 남는 자가 끝내 다 듣게 되는 침묵의 언어이기도 하다. 그런 사랑을 나는 알고 싶고, 쓰고 싶고, 겪고 싶다. 그것이 다시 한 번, 나를 바꾸는 사건이 되기를, 그 충실함 속에서 사랑의 진리를 끝까지 감당할 수 있기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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