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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에세이

신식민주의, 오리엔탈리즘, 그리고 옥시덴탈리즘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25. 6. 6.

 

 

 

 

신식민주의, 오리엔탈리즘, 그리고 옥시덴탈리즘

 

 

어제 문학 연구방법론 수업에서 교수님께서는 신식민주의와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현대 문학 담론을 설명하셨다. 지난 2학년 2학기 동양철학 시간에 이미 한 번 배운 내용이어서 훨씬 이해가 빨랐다. 이번 강의는 단순한 이론 소개를 넘어,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문화와 문학 속에 스며든 권력 구조와 시선의 문제를 되짚어보게 했다. 특히, 에드워드 사이드가 제시한 오리엔탈리즘 개념은 서구가 동양을 어떻게 타자화하고 재현해 왔는지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담론을 바탕으로, 나는 교수님의 강의 자료를 중심으로 신식민주의와 오리엔탈리즘의 개념을 정리하고자 한다. 더불어, 오리엔탈리즘이 서구의 동양 재현이라면, 그 반대의 경우인 옥시덴탈리즘 즉, 동양이 서구를 어떻게 재현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함께 살펴보겠다.

이러한 상호작용을 통해 동서양의 관계를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하고, 문학 속에서 이러한 담론이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를 특히,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이 서로를 어떻게 반영하고 재생산하는지를 분석함으로써, 문학이 권력과 이데올로기의 장으로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지를 사유해 보고자 한다.

 

<오리엔탈리즘: 서구의 동양 재현>

에드워드 사이드는 그의 저서 오리엔탈리즘에서 오리엔탈리즘을 단순한 학문적 연구가 아니라, 서구가 동양을 지배하고자 하는 권력 의지의 표현으로 보았다. 그는 오리엔탈리즘을 서양이 동양 위에 던진 일종의 투영도라고 정의하며, 동양을 지배하고자 하는 서양의 의지 표명이라고 주장하였다.

서구는 동양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서양과 대비되는 감성적이고 비합리적인 존재로 묘사하며, 이를 통해 동양을 타자화하고 재현하였다. 이러한 재현은 문학, 예술, 학문 등 다양한 분야에서 나타났으며, 동양을 신비롭고 이국적인 대상으로 묘사하거나, 미개하고 열등한 존재로 그리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사이드는 이러한 담론이 단순한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권력과 지식의 관계를 형성한다고 보았다. ,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에 대한 지식을 생산하고, 이를 통해 동양을 지배하는 권력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담론은 동양을 침묵하는 존재로 만들고, 서양의 시각에 따라 동양을 재현함으로써 동양의 현실을 창조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현대에도 오리엔탈리즘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미디어, 영화, 문학 등에서 동양은 여전히 신비롭고 이국적인 이미지로 재현되거나,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존재로 묘사되곤 한다. 예를 들어, 할리우드 영화에서 동양인은 종종 무술의 달인이나 신비로운 현자로 등장하며, 이는 동양에 대한 고정된 이미지를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또한, 서구의 시각에서 제작된 다큐멘터리나 여행 프로그램에서도 동양은 종종 전통적이고 변화가 없는 공간으로 묘사되며, 이는 동양을 정체된 존재로 인식하게 만든다.

이러한 오리엔탈리즘적 재현은 동양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형성하고, 서구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데 기여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담론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동양을 주체적인 시각에서 재조명하는 노력이 필요하겠다.

 

<신식민주의와 탈식민주의: 독립 이후의 지배와 그에 대한 비판적 성찰>

신식민주의(Neocolonialism)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특히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탈식민화 과정에서 등장한 개념으로, 표면적으로는 독립을 이룬 국가들이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외세의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영향력 아래에 놓여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전통적인 식민주의가 군사적 점령과 직접적인 통치를 통해 지배를 행사했던 것과 달리, 보다 은밀하고 간접적인 방식으로 지배가 지속되는 형태이다.

경제적 지배

신식민주의의 경제적 지배는 다국적 기업과 국제 금융 기구를 통한 영향력 행사로 나타난다. 선진국의 다국적 기업들은 개발도상국의 자원을 착취하고, 이익을 본국으로 이전함으로써 경제적 종속을 심화시킨다. 또한, 국제통화기금(IMF)이나 세계은행(World Bank)과 같은 국제기구는 개발도상국에 대한 금융 지원을 조건으로 구조조정이나 시장 개방을 요구하여 경제 주권을 제한한다. 이러한 구조는 개발도상국의 자립적 경제 발전을 저해하고, 세계적인 불평등 구조를 고착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문화적 영향력

문화적으로는 서구 중심의 가치관과 생활양식이 미디어, 영화, 문학 등을 통해 확산되면서 문화적 종속을 초래한다. 이러한 문화 산업은 서구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개발도상국의 전통 문화와 가치를 폄하하거나 주변화시킨다. 그 결과, 개발도상국의 국민들은 자국의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상실하고, 서구의 문화를 모방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정치적 간섭

정치적으로는 선진국이 개발도상국의 내정에 간섭하거나, 특정 정치 세력을 지원함으로써 정치적 종속을 유지한다. 이는 군사적 동맹 체결, 군사 기지 설치, 정치적 압력 행사 등을 통해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프랑스는 과거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군사 협정을 통해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러한 신식민주의의 다양한 양상은 개발도상국의 자립적 발전을 저해하고, 세계적인 불평등 구조를 고착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신식민주의의 실태를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이는 경제적 자립성 강화, 문화적 정체성 회복, 정치적 주권 확립 등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반면, 탈식민주의(Postcolonialism)는 식민주의의 역사와 그로 인한 문화적, 정치적, 사회적 영향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식민 지배로 인해 형성된 권력 구조와 담론을 해체하려는 학문적 접근이다. 이는 문학, 역사, 철학, 사회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루어지며, 식민주의가 남긴 상처와 그로 인한 정체성, 언어, 문화의 혼종성 등을 탐구한다.

정체성의 재구성: 식민 지배로 인해 왜곡된 자아와 문화 정체성의 회복

담론의 해체: 식민주의적 시각에서 형성된 지식과 권력 구조의 비판

문화적 저항: 식민 지배에 대한 문학적, 예술적, 철학적 저항과 표현

탈식민주의는 단순히 식민주의의 종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유산과 지속적인 영향력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저항의 과정을 포함한다.

이러한 두 개념은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 있다. 신식민주의가 독립 이후에도 지속되는 외부의 지배 구조를 지적한다면, 탈식민주의는 이러한 지배 구조가 문화와 정체성에 미친 영향을 분석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이론적 틀을 제공한다. 따라서 문학 작품 분석 시에도 이러한 이론적 틀을 적용하여 작품 속 담론과 권력 구조를 깊이 있게 탐구할 수 있다.

 

<옥시덴탈리즘: 동양의 서구 재현>

옥시덴탈리즘(Occidentalism)은 오리엔탈리즘의 반대 축에서 작동하는 개념으로, 서구를 타자화하거나 부정적으로 재현하는 담론을 의미한다. 이 개념은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이 제기한 서구의 동양 재현에 대한 비판 이후, 그 반응으로서 형성되었다. , 동양이 서구를 어떻게 인식하고 묘사해 왔는지를 살펴보는 방식이다.

옥시덴탈리즘은 단순한 '()오리엔탈리즘'이 아니라, 서구 중심적 가치와 권력 구조에 대한 비판적 응답으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이는 동양의 문학, 예술, 정치 담론 등에서 나타나는 서구에 대한 이질화와 경계 짓기의 시선으로 표현된다. 다시 말해, 서구를 탐욕스럽고 냉정하며 물질주의적인 존재로 재현하는 것이 하나의 전형적인 옥시덴탈리즘의 양상이다.

이 담론의 기원은 근대화 과정에서 서구의 제국주의적 침투에 대한 반감과 저항에서 비롯되었다. 식민 지배를 경험한 동양의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은 서구를 타자로 규정함으로써 자문화의 정체성을 수호하고자 했다. 이러한 시도는 정치적, 문화적 맥락 속에서 서구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형성하게 했으며, 특히 냉전기 이후 반미 감정이나 반서구 담론으로 확장되기도 하였다.

현대 문학과 대중문화에서도 옥시덴탈리즘은 다양한 방식으로 구현된다. 일부 동양 영화나 소설에서는 서구 사회를 인간 소외, 정신적 공허, 도덕적 해체의 공간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서구 도시의 고독한 삶, 가족 해체, 과도한 기술 의존 등이 문학 속에서 반면교사로 사용되는 경우가 그것이다. 또한, 서구 중심의 세계 질서나 글로벌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서사는 동양 내부의 자각을 유도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옥시덴탈리즘 역시 단순한 거울상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또 다른 고정관념과 이분법을 만들어낼 위험이 있다. 서구를 악마화하거나 절대적 타자로 설정하는 방식은 오히려 오리엔탈리즘의 구조를 반복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따라서 옥시덴탈리즘 역시 비판적으로 성찰되어야 하며, 대립과 타자화의 반복을 넘어서려는 시도가 필요하다.

이러한 점에서 옥시덴탈리즘은 단지 '동양이 서구를 어떻게 그리는가'라는 질문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는 누구인가', '자기 정체성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라는 물음과 맞닿아 있으며, 문화 간 권력의 비대칭성과 세계 인식의 윤리를 함께 성찰하게 하는 담론적 장치이다.

 

<타자화의 근원: 인간은 왜 서로를 타자화하는가>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은 단지 동서양의 문화 충돌이나 정치적 대립의 문제가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인간이 타자와 자신을 구분 짓는 방식을 드러낸다. 이러한 타자화의 욕망은 인간이 '자기(self)'를 인식하기 위한 하나의 조건처럼 작동한다. , ''를 정의하기 위해 '' 혹은 '그들'이 필요하다는 구조, 그것이 타자화의 심리적 기초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세계--존재(Dasein)”라 하며, 존재는 항상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지닌다고 보았다. 이때 타자는 함께 있음을 구성하지만, 동시에 불안을 유발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는 인간이 타자를 경계하거나 대상화하는 심리를 내포한다.

레비나스에게 타자는 윤리적 관계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우리가 타자를 말하고, 이해하고, 규정하는 순간 타자의 타자성을 훼손하게 된다고 경고한다. 오리엔탈리즘이 그렇듯, 우리가 타자를 말하는 그 행위 자체가 지배의 시작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푸코는 권력과 지식이 분리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타자에 대한 지식은 중립적이지 않다. 그것은 항상 권력을 수반하며, 재현의 방식은 통제의 방식으로 이어진다.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을 이해하려는 지식의 서구가 어떻게 그것을 통치 가능한 타자로 구성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옥시덴탈리즘 역시 이 대칭적 관계를 전복하려는 시도지만, 때로는 반대로 서구를 타자화함으로써 또 다른 고정관념의 함정에 빠지기도 한다. 인간은 자신이 속하지 않은 세계를 불완전하거나 불온한 것으로 규정함으로써 자기 존재의 완전함을 구축하려는 심리적 충동을 품고 있는지도 모른다.

결국 타자화의 반복은 인간이 자기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한 불안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타자를 통해 나를 확인하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왜곡과 억압을 낳는다. 오늘날의 문학이, 철학이, 윤리가 이 타자화의 메커니즘을 비판하고 해체하려는 것은 바로 그러한 반복을 넘어설 가능성 때문이다.

 

<영화 설국열차: 타자화의 순환 속에서 재구성되는 세계 질서>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2013)는 빙하기 이후 인류의 생존을 상징하는 하나의 열차를 무대로, 세계의 구조를 축소적으로 재현한 디스토피아 서사이다. 이 열차 안에서 벌어지는 계급의 위계, 생존의 윤리, 타자화의 기제는 신식민주의, 오리엔탈리즘, 옥시덴탈리즘 담론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분석될 수 있다.

우선 이 영화는 가장 전형적인 신식민주의의 구조를 내부화하고 있다. 꼬리칸에 위치한 하층민들은 형식상 생존 공동체의 일부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철저한 자원 통제와 폭력을 통해 억압당한다. 단백질 블럭, 자녀의 징발, 그리고 반복되는 봉기 진압은 신식민주의가 다국적 자본과 국제기구를 통해 개발도상국에 행사하는 조건부 생존의 은유처럼 작동한다. 선진국의 이익을 위해 개발도상국의 주권이 제한되는 현실과 유사하게, 열차의 논리는 효율과 질서를 빌미로 권력을 유지한다.

이와 함께, 영화는 오리엔탈리즘적 재현 방식에 대한 은유적 장치를 내포하고 있다. 열차 중반부에 등장하는 민수와 요나는 미지의 언어를 사용하고, 직관적 감각과 예언적 능력을 지닌 존재로 묘사된다. 그들은 시스템에 균열을 내는 열쇠를 쥔 인물이자, 기존 서구적 주체(커티스)의 합리주의와 대립하는 위치에 놓인다. 이는 동양인이 신비롭고 초월적이며, 설명 불가능한 존재로 재현되는 오리엔탈리즘적 코드의 반복이기도 하다. 다만 이 반복은 봉준호 특유의 비틀림을 통해 드러난다. 민수는 침묵하거나 조력하는 인물로만 머무르지 않고, 열차 밖으로의 탈출이라는 결정적인 선택을 이끈다. 이러한 점에서 동양적 타자성이 소극적 대상이 아니라 전복의 기점이 되는 역전 가능성을 내포한다.

동시에 영화는 서구 문명에 대한 옥시덴탈리즘적 비판을 명백히 드러낸다. 열차의 설계자이자 유일한 질서 유지자인 윌포드는 서구 근대 이성의 화신으로, ‘전체를 위한 희생’, ‘질서의 유지를 절대선처럼 설파한다. 그러나 그의 세계는 불평등과 억압, 통제의 산물이다. 이때 민수는 열차 자체를 부정하고 바깥의 가능성을 탐색하자고 제안한다. 이는 서구 중심의 문명관을 넘어서는 상상력이며,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는 인식론의 전환으로 읽힌다. 문명화된 세계의 끝에서 비문명화된 바깥이 오히려 희망의 장소가 되는 전도된 구조는 옥시덴탈리즘적 탈주의 가능성을 상징한다.

설국열차는 이처럼 타자화의 담론이 한 방향으로만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꼬리칸의 사람들은 열차 질서에서 타자화되지만, 윌포드 역시 민수와 요나의 시선 안에서 비윤리적이고 잔혹한 타자가 된다. 커티스는 이 양 극단 사이에서 분열하고, 타자화의 반복이 인간성을 어떻게 훼손하는지를 고백한다. 결국 이 영화는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이 서로를 반영하며, 때로는 서로를 닮아간다는 아이러니를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설국열차는 단순한 계급극이 아니라, 지구적 타자화의 구조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탈식민주의적 우화이다. 봉준호는 이 영화를 통해 타자를 통제하고 분리해 온 문명의 논리를 해체하며, 타자를 향한 새로운 윤리적 상상력을 요청한다. 이 영화는 질문한다. 우리는 누구를 타자라 부르며, 누가 우리를 타자라 부르고 있는가.

 

<탈식민주의적 시각의 필요성>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은 서로 반대되는 담론처럼 보이지만, 실은 서로를 반영하고 반복하는 구조 안에서 작동해 왔다. 전자는 타자를 열등하게 위치 지움으로써 주체를 정당화하고, 후자는 그러한 타자화를 거꾸로 되비추는 방식으로 동일한 이분법을 고착화한다. 이러한 재현의 방식은 결국 타자없는 의 정의가 불가능하다는 인식론적 불안을 배경으로 삼는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더 이상 타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주체성의 가능성을 물어야 한다. 그 시작은 자기 인식과 비판적 사고에 있다. 내가 타인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타인은 나를 어떤 시선으로 타자화하고 있는가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이야말로, 타자화의 고리를 끊는 첫 걸음이다. 특히 문학과 영화는 이러한 비판적 성찰을 유도하는 중요한 담론적 장치이며, 재현의 윤리를 묻는 공간이기도 하다.

또한,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서사, 대안적 문화 생산이 필요하다. 이는 단지 동양을 긍정적으로 그리자는 반응적 재현을 넘어, 주체와 타자의 경계를 흐리고, 경합하고, 재구성하는 이야기들을 만들어가는 데서 출발한다. 한 방향의 응시가 아닌, 응답하는 시선이 요구된다.

위에서 언급한 설국열차와 같은 텍스트는 그 자체로 완전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기존의 문명 질서와 문화 담론이 누구를 배제해 왔는지를 묻게 한다는 점에서, 탈식민주의적 시각의 가능성을 연다. 이제 담론은 타자를 말하는 방식이 아니라, 타자와 함께 말하는 방식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이처럼, 이 글이 말하고자 한 것은 하나다. 타자를 지배하거나 거부하는 대신, 우리가 서로를 다시 보려는 감각과 윤리를 가질 수 있다면, 그 자체가 탈식민의 시작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타자화 담론을 극복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첫째, 비판적 문해력의 교육과 확산이 필요하다.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 모두 특정 시선의 반복과 강화에서 비롯되며, 이는 일상 속 소비되는 이미지, 이야기, 관념 속에 잠재되어 있다. 따라서 교육 현장과 대중 담론에서 타자 재현에 대한 비판적 감수성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문학과 영화를 분석하는 교육은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재현의 윤리와 권력 관계를 질문하는 훈련이어야 한다.

둘째, 다성적 서사의 창작과 확산이 요구된다. 타자를 배경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타자 자신이 서사의 주체가 되는 이야기를 발굴하고 확장해야 한다. 이는 젠더, 민족, 계층, 지역, 이주 등의 경계를 넘나드는 목소리들을 문화산업 중심부로 끌어들이는 작업이다. 예를 들어, 기존 헐리우드 중심의 서구 영화 산업뿐 아니라, 주변부의 독립영화나 문학, 다큐멘터리의 유통과 소비가 장려되어야 한다.

셋째, 지리적·문화적 타자와의 대면을 위한 공존적 플랫폼의 구축이 필요하다. 다문화 사회 속에서 타인을 단지 관찰하거나 수용하는 관광객의 태도가 아니라, 경청하고 응답하는 윤리적 공간이 필요하다. 예술, 학문, 커뮤니티 중심의 교류 프로그램은 서로를 대상이 아니라 응답 가능한 타자로 만날 수 있게 한다.

넷째, 자기 해체의 용기, 즉 스스로가 구성한 이데올로기적 안정을 질문할 수 있는 비판적 자의식이 요청된다. 오리엔탈리즘이나 옥시덴탈리즘은 늘 타자를 문제시하지만, 사실 그 담론의 중심은 늘 자기 정당화에 있다. 따라서 이 담론을 극복하는 것은 타자를 재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위치와 시선을 끊임없이 성찰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이제 이러한 담론들인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 그리고 신식민주의는 단지 학문적 개념이 아니라,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방식이자 타자와 관계 맺는 윤리의 문제로 다가온다. 나는 그것이 누구의 시선이든, 누군가를 고정된 이미지로 환원시키고, 그의 고유한 목소리를 지워버리는 방식이라면 멈춰 서서 질문해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타자를 대상화하지 않고도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다른 존재의 고통에 반응하면서도, 그것을 함부로 해석하지 않는 언어를 사용할 수 있을까?”

나는 경계 바깥에 있는 존재들을 침묵시키지 않는 언어, 타인의 삶에 귀 기울이는 감각, 내 안의 권력을 성찰할 줄 아는 시선을 품고 살아가고자 한다. 그것은 대단한 이상이 아니라, 매일의 선택 속에서 조금씩 실천해 가는 태도일 것이다. 이 글을 맺으며 살펴보았던 담론 앞에 서 나의 질문은 이것이었다.

나는 어떤 존재로 살아가고자 하는가, 그리고 당신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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