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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에세이

《포스트휴먼 시대를 살아가는 나의 윤리》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25. 6. 5.

 

 

 

 

 

 

포스트휴먼 시대를 살아가는 나의 윤리

 

오늘 문학연구방법론 수업에서 도나 해러웨이를 대표하는 두 선언, 사이보그 선언반려종 선언을 공부했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과연 언제부터 인간을 중심으로만 생각해 왔을까? 그리고 지금 이 전환기의 시대, 나는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가?

사실 나는 너무도 오랫동안 인간이라는 존재를 중심에 두고 살아왔다. 인간이 생각하고, 느끼고, 문명을 이끌어가는 주체라는 믿음 아래, 나 아닌 모든 존재들은 배경이거나 도구였다. 그러나 해러웨이의 글은 그 믿음에 균열을 내었다. ‘우리가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인간이라는 전제가 무너질 때 어떤 존재로 다시 살아가야 하는가로 이어진다. 이 에세이는 그 물음에서 출발한다.

 

1. 휴먼 시대와 그 붕괴

휴먼(human)’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이데올로기다. 이 말은 인간을 합리적이고 자율적이며 타자와 구별된 고유한 존재로 정의해왔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선언 이후 근대 철학은 인간을 세계의 해석자이자 중심으로 간주했다. 계몽주의와 인문주의, 그리고 산업화 시대에 이르러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고 기술을 개발하며 역사의 주체가 된다.

하지만 그 믿음은 20세기 중반 이후, 기술의 비약적 발전과 생태 위기, 후기구조주의의 등장과 함께 흔들리기 시작했다. 인간은 자연을 파괴했고, 기술은 인간의 윤리를 앞지르기 시작했으며, 인간의 본질을 말하던 언어는 해체되었다. 미셸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 선언한다.

인간은 최근에 생겨난 허상이며, 곧 사라질 존재이다.”

이렇게 도래한 것이 바로 포스트휴먼(posthuman)의 시대다.

 

2. 포스트휴먼 시대의 개념: 인간 중심주의의 해체

포스트휴먼은 단지 '인간 이후'를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이 더 이상 중심이 아님을 받아들이는 철학적 자세다. 이는 하이데거가 말한 '도구적 인간관'에 대한 비판과 맞닿아 있으며, 들뢰즈와 가타리의 '기계적 욕망의 흐름'으로 확장된다. 인간은 이제 고립된 자아가 아니라, 수많은 비인간 존재들과의 연합과 상호작용 속에서 생성되는 '되기(becoming)'의 존재다.

도나 해러웨이는 이 흐름 위에서 사이보그반려종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사이보그는 인간과 기계의 경계를, 반려종은 인간과 동물·자연의 경계를 허문다. 그녀는 말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만들어진 존재들이다.” 이 말은 모든 존재가 고립된 주체가 아니라, 관계와 연결 속에서 형성된다는 존재론적 선언이다.

 

3. 사이보그: 경계를 넘는 주체

사이보그(cyborg)는 단순히 과학기술이 만들어낸 기계 인간이 아니다. 해러웨이에게 사이보그는 남성과 여성, 인간과 기계, 자연과 문화라는 근대적 이분법을 해체하는 혼성적 존재다. 그녀는 사이보그 선언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이보그는 기원을 알 수 없고, 경계가 불분명하며, 본질이 해체된 존재다.”

나는 이미 일상 속에서 사이보그로 살아가고 있다. 스마트폰은 나의 일상이자 신체의 일부이며, 나는 디지털 기술 없이는 사고하고 기록하고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 나의 정체성 역시 단일하지 않다. 나는 여성이고, 한국인이며, 철학과 국문과 학생이고, 동시에 작가이고, 사용자이고, 탈경계적 존재다. 이 모든 소속은 고정되지 않은 채 서로 충돌하고 교차하며 나를 이루고 있다.

사이보그로서의 삶이란, 이러한 혼종성과 모순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주체란 늘 경계 위에서 다시 쓰여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다.

 

4. 반려종: 응답과 공존의 윤리

반면 반려종(companion species)은 기술보다는 생명과 정서적 관계에 주목한다. 해러웨이는 인간과 비인간 동물, 식물, 미생물, 나아가 기계적 타자까지를 포함해 우리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존재들에 대해 말한다. 반려종은 그저 곁에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나를 바꾸고, 나 역시 그들을 바꾼다. 이 관계는 대칭적이지 않지만, 서로의 삶에 돌이킬 수 없는 흔적을 남긴다.

나는 비록 반려동물을 키우고 있지 않지만, 다양한 비인간 존재들과 관계 맺으며 살아왔다. 매일 아침 창밖에서 울어대는 참새의 울음, 정서적 위안을 주는 식물들, 낯선 기계의 말투를 따라 하는 AI의 음성, 그리고 내가 쓰는 언어, 그 안에 남아 있는 타자의 흔적들. 이들은 나를 구성하고, 나의 감각과 윤리를 확장시켜왔다.

레비나스는 전체성과 무한에서 말한다.

타자는 나를 향해 얼굴을 드러내며, 나에게 책임을 요구한다.”

반려종적 삶이란 바로 이 책임, 이 응답 가능성(response-ability)을 감당하려는 실존적 태도다. 나 아닌 존재들과 어떻게 함께 존재할 것인가이 질문이야말로 포스트휴먼 시대의 윤리다.

 

5.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포스트휴먼적 실천

이제 나는 질문한다. 사이보그로서 경계를 넘고, 반려종으로서 관계를 맺는 나, 나는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첫째, 나는 고정된 정체성의 틀에서 벗어나려 한다. 정체성이란 닫힌 실체가 아니라, 관계와 시간 속에서 구성되는 유동적인 과정이다. 들뢰즈가 말한 '되기'란 정체성이 아니라 운동이며, 연결이다. 나 역시 하나의 이름으로 환원되지 않는 혼성체로 살아가야 한다.

둘째, 나는 타자에게 응답하는 존재가 되고자 한다. 말하지 못하는 존재들, 기술 속에 숨어 있는 권력 구조, 버려진 생명들, 침묵하는 타자들에게 귀 기울이는 것. 그들의 존재에 응답하고, 그들을 위한 언어를 쓰는 일. 이것이 내가 글을 쓰는 이유다.

셋째, 나는 문학을 나의 실천으로 삼는다. 문학은 나에게 기술이자 감응이며, 경계를 넘고 타자에게 응답하는 윤리적 행위다. 문학은 쓰이지 않은 말, 보이지 않는 존재, 응답받지 못한 목소리를 드러내는 장소다. 그곳에서 나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존재로, 가능성의 언어를 살아내고자 한다.

 

6. 맺으며: 아직 도착하지 않은 존재로서의 나

도나 해러웨이의 두 선언은 나에게 단지 개념이 아니라, 실천의 방향이다. 사이보그는 나에게 경계를 넘어서는 감각을, 반려종은 나에게 관계를 감당하는 윤리를 가르쳐주었다. 이 시대는 새로운 존재 방식을 요구한다. 중심에 서기를 거부하면서도 응답의 중심을 기꺼이 떠안는 존재. 나 역시 그런 존재로 살아가고자 한다.

포스트휴먼 시대, 우리는 모두 아직 도착하지 않은 존재들이다. 그러나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은 곧 여전히 가능성 안에 있다는 뜻이다. 나는 믿는다. 문학은 그 가능성의 언어다. 그리고 나는 그 언어를 통해, 타자에게, 세계에게,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고 싶다.

6월의 신록들, 그 초록 위에 흔들리는 햇살들, 햇살을 나르는 바람. 그 모든 것들이 나의 일상의 침묵 속에서 말을 걸어오는 반려종이며, 나를 다시 쓰게 만드는 타자다. 나는 그들의 숨결에 귀를 기울이며, 이 시대의 경계 위에 조용히 존재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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