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철학 에세이

역설, 진리의 가장 깊은 그림자」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25. 6. 5.

 

 

🌀 역설, 진리의 가장 깊은 그림자

 

📚 이번 학기,

철학과 국문학이 나에게 남긴 건

모순이 아닌 사유의 문이었다.

 

일상의 언어는 모순을 피하고,

철학의 언어는 모순을 탐한다.”

 

그 문장 하나가,

내 한 학기를 요약했다. 🌿

 

🔍 역설에도 층위가 있다!

 

표층적 역설

찬란한 슬픔의 봄을김영랑

소리 없는 아우성유치환

말의 겉모양에 담긴 감정의 모순

 

🖤 심층적 역설

님의 침묵〉 – 한용운

떠남이 곧 남음이 되는 부재의 진실

 

🕰 시적 역설

먼 후일〉 – 김소월

잊었노라는 말로 고백되는

결코 잊지 못한 마음

 

🏛 고전 철학의 역설들

 

🤔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소크라테스

🐢 “빠른 자는 느린 자를 따라잡을 수 없다?” 제논

💀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에피쿠로스

이들은 모두 진리를 향한 모순의 여정이었다.

 

🧠 현대 철학은 어떻게 역설을 말하는가?

💬 비트겐슈타인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우리는 침묵해야 한다.”

말의 한계를 말하는 말

🪒 러셀의 이발사

자신을 면도하지 않는 자만 면도하는 이발사는

자기 수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 데리다의 차연

말은 늘 어긋나고,

의미는 늘 미뤄진다.

 

📖 문학과 예술 속 역설

🚪 카프카:

문은 항상 열려 있었지만,

그는 들어가지 못했다.”

🧩 보르헤스:

진실은 도달할 수 없기에 더 눈부시다.”

🌸 시는 말하지 않음으로 더 많은 것을 말한다.

 

🇰🇷 그리고 지금, 한국 사회는?

202412월의 내란 사태.

그리고 새 대통령의 등장.

👥 지지와 불신

🔁 보수적 외형, 진보적 감각

🌫 과거의 인물인가, 미래의 예고인가?

 

나는 지금 이 정치적 아이러니 한가운데에서,

조심스러운 설렘과 응시를 동시에 품는다. 💭🌱

 

🧵 그래서 나는 묻는다.

나는 이 역설이라는 개념을

📓 내 글쓰기에

🕊 내 일상에

어떻게 꿰어낼 수 있을까?

 

잠시 멈춰 다시 묻는 문장, 🌀

감정의 이면에 숨은 진실, 💧🫧🌘

말해지지 않는 것을 껴안는 침묵. 🌫🤍🕊

그것이야말로,

역설이 내게 남긴

가장 아름다운 질문이다. 🌈🌷💡🧠🌌📖

 

 

 

 

역설, 진리의 가장 깊은 그림자

 

1. 역설, 사유의 미로에서 만난 문

다음 주면 이번 학기의 종강이고, 기말고사가 끝나면 여름방학이 찾아온다. 이번 학기는 어느 때보다도 내 자신에게 흡족한 시간이었다. 철학도로서 국문과 수업을 병행한 경험은, 단순한 복수전공의 의미를 넘어서 나의 사유를 한층 더 단단하게 빚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철학에서 익힌 개념과 사상들이 국문과의 텍스트 해석과 글쓰기 속에서 구체적으로 살아 움직일 때, 나는 이중의 기쁨을 느꼈다. 사유의 확장이 글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경험. 말하자면, 철학이 내게 질문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면, 국문학은 그 질문에 어떻게 말할 것인가를 가르쳐주었다고 할 수 있다.

오늘은 그러한 배움 속에서 만난 개념 하나, ‘역설(paradox)’에 대해 써보려 한다. 시론 수업 시간에 다룬 이 단어는 단순히 문학적 장치로 이해되기에는 너무도 깊은 사유의 가능성을 담고 있었다.

일상의 언어는 모순을 피하려 하고, 철학의 언어는 모순을 탐한다.”

이 문장은 내가 이번 학기 배운 모든 것의 요약처럼 느껴졌다. 역설은 겉보기엔 모순된 진술이지만, 그 안에는 일상의 논리로는 도달할 수 없는 어떤 진실이 잠들어 있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역설, 비트겐슈타인이 언급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우리는 침묵해야 한다는 명제는 모두, 단순히 지적인 놀음이 아니라 존재의 문턱에서 터져 나오는 사유의 형태다.

그렇다면 묻고 싶다. 왜 우리는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역설을 거쳐야 하는가? 이 글은 이 질문에서 출발한다.

 

2. 역설의 세 가지 층위: 표층적 역설, 심층적 역설, 시적 역설

역설은 단일한 개념이 아니다. 때로는 표현의 모순으로, 때로는 존재의 비의로, 또 때로는 감정의 결절점으로 다가온다. 문학 속에서 우리는 역설을 표층적 역설, 심층적 역설, 시적 역설로 나누어 바라볼 수 있다.

1) 표층적 역설: 모순된 말 속의 직관

표층적 역설은 문장의 겉모양에서 드러나는 모순이다. 말 자체가 서로 반대되는 뜻을 담고 있지만, 그 안에 특유의 감정적 직관과 울림이 있다. 이러한 역설은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예를 들어 김영랑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에서 나오는 구절,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여기서 찬란함슬픔은 상반되는 감정이지만, 동시에 존재하며 오히려 봄이라는 계절의 복합적 정서를 선명하게 만들어낸다.

또한 유치환의 시 깃발의 구절,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에서 보듯, ‘아우성은 본래 시끄러운 외침인데, 그것이 소리없다는 말과 연결되어 절규조차 침묵 속에서 터지는 존재의 내면을 상징한다.

2) 심층적 역설: 존재의 부재 속에 숨은 진실

심층적 역설은 언어의 표면을 넘어서, 존재의 결핍, 부재, 침묵 속에 담긴 진실을 말한다. 이것은 감추어진 고통이나 말할 수 없는 감정, 즉 부재로서의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부재한 존재인 을 통해 가장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님의 침묵 한용운 전문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참아 떨치고 갔습니다.

 

여기에서 이별은 미의 창조이다.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은 떠났지만, 떠난 이후에도 시인은 보내지 아니하였다고 말한다. 이 모순은 곧 떠남이 곧 남음이 되는 존재의 역설을 보여준다.

3) 시적 역설: 시간과 감정이 교차하는 말의 여운

시적 역설은 말의 겉모양보다도, 그 말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방식에서 발생한다. 특히 시에서는 시간의 어긋남, 마음과 말의 간극, 말과 침묵의 충돌 속에서 감정이 더욱 깊이 각인된다. 김소월의 먼 후일은 이러한 시적 역설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먼 후일〉 – 김소월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면

그때에 이미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라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먼 훗날 그때에 잊었노라

 

이 시에서 화자는 줄곧 잊었노라고 말하지만, 그 말이 반복될수록 사실은 잊지 못했다는 감정이 더욱 깊게 드러난다. ‘마음이 반대로 움직이며, 진실은 말의 겉이 아니라 그 반어 속에 숨어 있다.

이처럼 시적 역설은 감정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더 선명하게 독자에게 다가오는 정서의 반전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시간과 감정이 어긋난 자리에서만 느껴지는, 문학이 만들어내는 말할 수 없는 진심의 울림이다.

 

3. 고전 철학 속 역설의 원형들

역설은 겉으로 보면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깊은 진실이 숨어 있는 말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철학자들은 이런 역설을 통해 세상을 더 잘 이해하려고 노력해왔다.

1) 소크라테스의 역설: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고 말했다. 이 말은 처음 들으면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다. 알면 안다고 하고, 모르면 모른다고 하면 되는데, 어떻게 모른다는 것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모든 것을 아는 척하지 않았고, 자신이 아직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는 그래서 더 배우고 싶어 했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었다. 이 말은 진짜 똑똑한 사람은 자기가 모르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역설은 우리에게 겸손함과 배우려는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쳐준다.

2) 제논의 역설: “달리기 경주는 절대 끝날 수 없다?”

엘레야의 제논은 또 다른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다. 그는 거북이와 아킬레우스의 달리기를 예로 들어 이상한 말을 했다. 거북이가 먼저 출발하면, 아무리 빠른 아킬레우스도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킬레우스가 거북이의 출발점까지 도착하는 동안, 거북이는 조금 더 앞으로 가 있고, 그 거리를 또 따라잡으려면 또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계속 반복하면 영원히 따라잡지 못한다는 말이다.

물론 현실에서는 아킬레우스가 이긴다. 하지만 제논의 말은 머릿속으로 계산한 시간과 실제 시간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 역설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예이다.

3) 에피쿠로스의 역설: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에피쿠로스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다. 그는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도 처음 들으면 이상하게 느껴진다. 우리는 모두 죽음을 무서워하고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피쿠로스는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죽음이 오지 않았고, 죽음이 왔을 때는 우리는 이미 세상에 없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을 절대로 직접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이 말은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야 한다는 가르침을 전해준다.

이처럼 고대 철학자들이 남긴 역설은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다. 그 말 속에는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깊은 진리가 숨어 있으며, 우리가 사유를 멈추지 않도록 이끌어주는 도구가 되어준다.

 

4. 논리와 언어의 균열: 현대 철학과 역설

시간이 흐르면서 철학자들은 더 복잡하고 정교한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려고 하였다. 현대 철학자들은 특히 언어, 논리, 의미의 틈을 살펴보며 역설이 진리의 경계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를 깊이 탐구하였다.

1) 비트겐슈타인의 역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우리는 침묵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우리는 침묵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문장은 얼핏 보기엔 아주 간단하지만, 그 안에 묘한 모순이 숨어 있다. 말할 수 없다면, 왜 그 사실을 말로 말하는가? 말할 수 없다면 그냥 침묵하면 될 텐데, 굳이 그것을 말로 표현하는 이 문장 자체가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말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언어의 한계에 대해 말하고자 한 것이다. 어떤 감정, 경험, 신비는 말로 완전히 표현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 역설은 우리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마주할 때, 철학이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2) 러셀의 역설: “이발사의 역설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버트런드 러셀은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통해 역설을 설명하였다. 어느 마을에 모든 남자들의 수염을 면도해 주는 이발사가 있다고 하자. 그런데 규칙이 있다. 이발사는 자신을 면도하지 않는 사람만 면도해 준다. 그렇다면 이발사는 자기 자신의 수염은 어떻게 할까? 그는 자기 자신을 면도해야 할까, 하지 말아야 할까?

이 질문은 아주 단순해 보이지만, 어느 쪽을 선택해도 모순이 생긴다. 이발사가 자신을 면도하면 자신을 면도하지 않는 사람만 면도해 준다는 규칙에 어긋나고, 그렇다고 면도하지 않으면 면도하지 않는 사람은 면도해 줘야한다는 규칙을 또 어긴다.

이 역설은 논리적인 규칙 속에도 모순이 숨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러셀은 이를 통해 수학과 논리 체계 속에 존재하는 틈을 발견하고, 철학이 그것을 점검해야 함을 말하고자 했다.

3) 데리다의 해체와 차연(différance): “말은 곧 사라진다

자크 데리다는 프랑스의 철학자이다. 그는 언어와 의미가 고정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우리가 어떤 말을 할 때, 그 말은 항상 다른 말들과 연결되어 있고, 그 의미는 계속 미뤄진다. 예를 들어 사랑이라는 단어를 말하면, 사람마다 떠올리는 이미지나 감정은 다 다르다. 그래서 데리다는 언어가 의미를 가리키는 것 같지만, 사실은 끊임없이 미끄러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말로 붙잡으려는 진실은 항상 조금씩 어긋난다고 설명하였다.

그는 이것을 차연(différance)”이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이 개념은 단어의 뜻이 지금 여기서 명확히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꾸 연기되고, 다른 것과의 차이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 생각은 우리가 말하고 쓰는 행위가 진실에 도달하는 길인 동시에, 진실로부터 계속 멀어지는 과정일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데리다의 역설은 언어의 불완전함 속에서도 사유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철학의 자세를 담고 있다.

현대 철학자들은 역설을 단순히 재미있는 말장난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논리와 언어의 경계를 밀어붙이며, 우리가 쉽게 당연하게 여겨온 생각들을 흔들고, 진리를 향해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는 사유의 문을 연 것이다.

 

5. 문학과 예술 속의 역설: 말로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역설은 철학자들의 언어 속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시와 소설, 영화와 예술작품 안에도 역설은 자주 등장하며, 때로는 철학보다도 더 강하게 진실을 흔들어 깨우기도 한다. 문학 속에서 역설은 어떤 감정이나 진실을 직접 말하지 않음으로써 더 깊게 전해주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1) 카프카의 부조리: “문은 항상 열려 있었으나, 그는 끝내 들어가지 못했다

프란츠 카프카는 현대문학에서 가장 유명한 역설의 작가 중 한 명이다. 그의 단편 법 앞에서에서 한 남자는 이라는 문 앞에 도착하지만, 그 문을 지키는 문지기 때문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는 평생을 그 문 앞에서 기다리다 죽음에 이른다. 그런데 죽기 직전 문지기는 이렇게 말한다.

이 문은 오직 너만을 위해 열려 있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닫는다.”

이 이야기는 이상하고도 슬픈 역설을 품고 있다. 항상 열려 있었지만, 그는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현실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독자는 이 이야기를 통해 삶의 두려움, 제도에 대한 복종, 스스로 만든 한계의 아이러니를 절실히 느끼게 된다. 카프카의 문학은 말해지지 않은 것들을 역설로 떠올리는 방식으로, 독자에게 진실을 묻게 한다.

2) 보르헤스의 미로: “진실은 도달할 수 없기에 더욱 눈부시다

아르헨티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이야기 안에 이야기를 넣고, 현실과 상상을 뒤섞으며 독자를 끝없는 미로 속에 빠뜨리는 작가이다. 그의 작품에서는 자주 이런 역설이 반복된다.

진실은 도달할 수 없기에 더욱 눈부시다.”

독자는 이야기 속 주인공과 함께 진짜에 도달하려 하지만, 언제나 그 끝은 또 다른 시작으로 미뤄진다.

보르헤스는 이를 통해 지식과 진실은 결코 완전히 도달할 수 없는 것이며, 오히려 그 미완성 속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난다고 말한다. 문학은 바로 그 미완의 여백 속에서 독자의 상상과 사유를 이끌어 낸다.

3) 시에서의 역설: “말하지 않음이 더 많은 말을 한다

시는 때때로, 가장 적은 말로 가장 많은 것을 말한다. 때로는 어떤 것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그 감정을 더 강하게 전한다. 예를 들어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웃었다라는 문장은 그녀는 행복했다는 말보다 훨씬 많은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침묵 속의 언어, 생략 속의 감정이 바로 시의 역설이다.

시는 명확히 말하는 대신, 비어 있는 곳에서 의미를 기다리게 한다. 이처럼 문학에서 역설은 부족함, 모순, 침묵을 통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느끼게 하는 표현 방식으로 사용된다.

이렇듯 문학과 예술 속의 역설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남긴다.

진실은 반드시 말로 표현되어야 하는가?”

더 많은 말보다, 더 깊은 침묵이 사유를 일으킬 수 있는가?”

이 질문들은 문학을 쓰는 나 자신에게도 돌아오는 질문이 된다. 역설은 우리가 쓰는 말이 언제나 진리를 완벽하게 담을 수 없다는 한계를 인정하는 동시에, 그 한계를 끌어안고도 계속해서 말하고자 하는 인간의 사유와 감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6. 진리의 문턱에서 만나는 역설

역설은 단지 말의 장난이 아니다. 그것은 언어의 한계 앞에서, 논리의 금 가는 지점에서, 감정이 가장 숨죽이는 순간에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사유의 문이다. 철학은 그 문 앞에 멈추지 않고 들어가려 한다. 문학은 그 문 앞에 서서 기다리는 법을 안다. 우리는 그 사이 어딘가에서, 말과 마음 사이를 건너는 법을 배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한국 사회 또한 하나의 거대한 역설로 흔들리고 있다. 2024123, 헌정 질서를 뒤흔든 내란적 사태 이후,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말을 되묻게 되었다. 정의의 이름으로 정의를 유보하고, 법의 언어로 법을 넘나든 그 시간들은 우리에게 묻는다.

진실은 언제나 명료하고 단순한가?

우리는 무엇을 보았고, 또 무엇을 보지 못했는가?

아이러니하게도, 그 정치적 혼란의 파장 속에서 등장한 새로운 대통령은 겉으로는 중도 보수의 외형을 띠었지만, 실제 정책적 성향은 진보적 결을 품고 있다. 많은 이들은 그를 낡은 체제의 연장선으로 오인하거나, 반대로 급격한 개혁의 상징으로 추앙되기도 하지만 그 인물은 상반된 기대와 오해가 겹쳐진 역설의 주체로서, 오늘의 한국 정치에 등장했다. 대중은 그에게서 안정과 쇄신을 동시에 기대했고, 과거와 미래를 한 인물 안에 투사했다. 지지와 불신, 희망과 두려움이 뒤엉킨 그 선택은, 한국 사회가 처한 정치적 역설의 결정판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믿는다. 그가 품고 있는 어떤 결, 어떤 조심스러운 방향 감각이 오히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미지의 가능성일 수 있다는 것을. 말과 침묵 사이, 과거와 미래 사이, 그 역설적 균형 위에서 그는 지금 대한민국의 다음 장을 여는 예외적 주체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그의 시대를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지금 그 아이러니의 한복판에서 질서와 혼란, 희망과 회의, 말과 침묵 사이를 건너고 있다.

우리가 진리를 향해 나아갈 때, 그 길은 언제나 곧고 직선적이지 않다. 모순되고, 어긋나며, 비틀린 그 사유의 흐름 속에서 오히려 우리는 진실에 더 가까워진다.

소크라테스가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고 했을 때, 그는 무지의 깊이에서 지혜의 빛을 발견했다. 김소월이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먼 훗날 그때에 잊었노라고 말했을 때, 그는 잊지 못한다는 말을 잊었다는 말로 남기는 기이한 진심을 건넸다.

역설은 말의 실패가 아니라, 말이 끝나는 자리에서 새로운 사유를 여는 시작이다.

질문은 멈춘다. 그러나 그 자리에 문이 있다. 그 문은, 다시 묻기 위한 입구이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에 다가가기 위해 역설을 통과해야 한다. 그것은 삶의 진실이 언제나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며, 우리가 사는 이 세계 또한 하나의 역설로 이루어진 무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 역설이라는 개념을 나의 일상 속에서, 혹은 나의 글쓰기 안에서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

당연하다고 믿었던 문장을 멈춰 다시 묻는 용기, 선명한 감정 이면의 모순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태도, 말해지지 않는 것을 침묵의 감도로 껴안는 사유. 그것이야말로 역설이 내게 남긴, 가장 아름답고도 유효한 질문이겠다. ()

 

 

#시론 #역설의철학 #문학과사유 #철학적글쓰기 #시적역설 #소크라테스 #김소월 #한용운 #카프카 #보르헤스 #비트겐슈타인 #데리다 #러셀의역설 #한국정치의아이러니 #국문과철학복수전공 #말과침묵 #아이러니의미학 #글쓰기윤리 #존재의역설 #철학하는글쓰기 #진실과모순 #국립군산대학교 #군산대국문과 #군산대철학과 #lettersfromatrave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