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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에세이

《들뢰즈의 리좀, 나의 문장을 풀어준 그물》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25. 5. 27.

 

 

들뢰즈의 리좀, 나의 문장을 풀어준 그물

 

오늘 문학 연구 방법론 수업에서 들뢰즈의 이론을 접했다. 그중에서도 유독 리좀적 사고라는 말이 나의 마음을 두드렸다. 익숙한 언어로 설명하기 어려운 개념이었지만, 그 낯설음이 오히려 나를 붙잡았다. 나는 그 낯선 사유를, 지금 여기에서 잠시나마 끌어안고 글로 묶어보려 한다. 중심도 없고, 결론도 없고, 그저 어디서든 연결될 수 있는 어떤 문장들로.

 

나의 문장은 때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뿌리였고, 나의 사유는 균열이고 파편이었으며, 무엇보다도 나는 그 중심이라는 것에 늘 회의적이었다. 그러다 보니 나의 글쓰기는 늘 어딘가 어설펐고, 완성되지 않은 채로 떠다니는 문장들 속에서 나는 자주 열등감을 느끼곤 했다. 구조화되지 않은 사유, 매끈하게 다듬어지지 않은 표현, 단단한 논리가 빠진 글들은 타인의 눈에 쉽게 조급하고 미완처럼 보였을 것이다.

 

누군가는 말한다. “좀 더 논지를 분명히 해봐”, “조금만 더 정리해서 써봐”, “이건 감정에 치우친 것 같아라고. 그 말들이 틀렸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오히려 그 말들은 다정한 충고였고, 내가 애써 무시할 수 없는 배움의 언어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충고는 자주 내 마음속 어디쯤을 무겁게 눌렀다. 내가 애써 쓴 문장이 제대로 된 글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듯했다. 이러한 태도는 오히려 대부분은 배려 깊은 충고였고, 글쓰기를 지속하게 해 준 외부의 시선이기도 했다. 그 말들에 눌려, 나는 때때로 나 자신이 너무 흐리멍덩한 사람이 아닐까, 나의 문장은 도무지 목적지 없이 헤매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에 사로잡혔다. 글을 쓸수록 자신감보다는 주저함이 커졌고, 내 글의 방향이 어둡고 고르지 못하다는 생각이 밤마다 나를 흔들어댔다. 나는 스스로에게 나는 역시,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아닌가 보다라고 되뇌며 밤마다 베개 위에서 뒤척이곤 했다.

 

그러던 중, 나는 오늘 문학 연구 방법론 수업에서 들뢰즈의 이론을 접했다. 그중에서도 유독 리좀적 사고라는 개념이 나의 마음을 두드렸다.

리좀!”

처음 들었을 땐 낯선 단어였지만, 곧장 내 머릿속에 하나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지하 깊숙이 퍼져 있는 균사체, 서로 엉키고 흩어지며 어디로든 연결되는 생명의 그물. 그것은 내가 꿈꾸던 글쓰기, 내가 부끄러워하던 사유의 방식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그토록 기죽어 있던 그 비중심성자체가, 사실은 하나의 가능성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이렇게라도 나는 내가 쓰는 글들에 대한 변명을 찾으려 하니 어쩌면 나의 아이러니일 수도 있겠지만 일단 알아보기로 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천 개의 고원에서 사유의 새로운 형식을 제안하며, 그것을 리좀(rhizome)’이라 불렀다. 식물학에서 리좀은 감자나 생강처럼 수평으로 뻗는 뿌리줄기다. 땅속에서 보이지 않게 자라며, 어느 지점이 잘려도 다른 곳에서 다시 자란다. 그것은 나무처럼 뿌리 하나에서 줄기를 세우고 가지를 치는 방식이 아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중심도 없고 주변도 없다. 모든 지점이 다른 지점과 연결될 수 있고, 그 연결은 끝없이 열린다. 마치 무정형의 생명처럼, 리좀은 방향을 예측할 수 없으며, 그렇기에 무한한 가능성을 품는다.

 

이러한 리좀은 단순한 은유가 아니다. 그것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꿈꾼 새로운 사유의 구조이며, 세계를 바라보는 전혀 다른 시선이다. 그들은 리좀을 통해 나무적 사고 즉, 위계적이고 기원 중심적인, 뿌리-줄기-열매의 서열로 이어진 사유를 전복한다. 그 대신 사유는 퍼지고 연결되며 끊임없이 생성된다. 하나의 논지에서 파생되는 결론이 아니라, 여러 겹의 사유들이 서로 스치고 엉키며 변형된다.

 

그들은 리좀적 사유에 여섯 개의 원리를 부여한다. 연결성과 이질성, 다양성, 탈기표화, 지도 제작, 탈영토화와 재영토화. 이 모든 원리는 결국 하나의 문장으로 응축될 수 있다.

 

사유란 언제나 어디서든 시작될 수 있으며, 그것은 반드시 중심을 가져야 할 필요가 없다. 이것이 나에게는 일종의 구원이 되었다. 오랫동안 체계적이지 않다’, ‘논지가 약하다는 평을 들으며 움츠러들었던 나의 사유 방식이, 실은 그 자체로 살아 있는 리좀의 형상이었다는 것. 나의 불안한 글쓰기, 나의 감정적인 단어들, 나의 논리 밖의 충동들마저도, 이 리좀이라는 사유의 토양 위에서는 하나의 가능성으로 다시 피어난다.

 

그것은 마치 내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말로 붙들 수 없었던 어떤 감각의 이름을 뒤늦게 발견한 기분이었다.

 

하여 나는 리좀이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마다 하나의 사유보다는 하나의 이미지, 하나의 몸짓이 먼저 떠오른다. 무언가를 향해 곧장 뻗어가지 않고, 사방으로 나아가며, 부유하고, 느리지만 포기하지 않는 움직임. 땅 밑에서 자라는 균사체, 도시를 가로지르는 지하철 노선도, 빗물 자국처럼 번져가는 감정의 잔상들. 그것들은 하나같이 중심 없이 자라나고, 어디선가 끊기면 다른 곳에서 다시 이어진다.

 

문학 또한 그렇지 않을까. 하나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동안, 우리는 수많은 가지로 새어 나가고, 엉뚱한 이미지와 맞닥뜨리며, 때로는 길을 잃기도 한다. 하지만 그 길 잃음이야말로 문학이 품은 생명력이다. 조이스의 율리시스나 보르헤스의 단편들, 혹은 이탈로 칼비노의 만일 어느 겨울 밤 한 여행자가같은 책은 정확히 그런 방식으로 우리를 리좀적으로 안내한다. 이야기는 중심에서부터 벗어나며, 의미는 문장과 문장 사이의 틈에서 솟아오른다.

 

한국 문학 안에서도 나는 그런 리좀의 흔적을 본다. 한강의 채식주의자에서처럼, 하나의 인물이 아니라 여러 인물의 시점이 서로 엇갈리며 이야기를 완성해 나가는 구조. 정세랑의 지구에서 한아뿐처럼, 서사의 중력에 끌리지 않고 우주의 한 점처럼 가볍게 튀어 오르는 이야기. 또는 편혜영의 소설에서처럼, 말해지지 않은 공백이 오히려 더 많은 의미를 품게 되는 서사들.

 

리좀은 문학에서 단지 구조의 은유가 아니라, 글쓰기를 구성하는 하나의 윤리이기도 하다.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하지 않고, 하나의 중심에 집착하지 않으며,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하는 것. 이질성과 파편성, 비선형성과 여백의 미학. 나는 그것을 리좀적 글쓰기라고 부르고 싶다.

 

그리고 나는 문득 깨닫는다. 그동안 내가 스스로에게 부끄러워했던 그 글쓰기의 방식방황하고, 흔들리고, 연결되지 않으며, 정리되지 않았던 문장들, 그 모든 것이 어쩌면 이미 리좀이었는지도 모른다고.

 

나 자신을 돌아보면, 나는 단 한 번도 단일한 정체성으로 살아본 적이 없었다. 나는 내가 쓴 글들의 모자이크였고, 내가 읽은 문장들의 무의식적 각인이었으며, 누군가에게 들은 말, 오래전 상처, 우연히 스친 풍경들로 구성된 존재였다. 들뢰즈가 말한 것처럼, 정체성이란 단일한 고정점이 아니라, ‘지속적인 되기(becoming)’의 과정일지 모른다. 나도 그렇게, 하나의 중심을 갖지 않은 채, 여러 결을 따라 변하고 흩어지고 다시 연결되어 왔다.

 

때로는 누군가의 딸로, 어떤 이의 학생으로, 또 다른 이의 연인으로 존재했고, 그 모두의 경계를 정확히 구분하지 못한 채 흔들리는 말들을 써왔다. 그 모든 경계들이 나를 구성했고, 나는 그 틈에서 나의 문장을 만들어왔다. 중심이 없는 내가 쓰는 문장은, 당연히 중심을 갖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제는 그 흔들림을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한다. 나는 나를 고정하려 애쓰기보다, 나를 흔들림 자체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리좀적 존재로 살아간다는 것은 곧, 고정된 위치에 안주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것은 정체성의 윤리이자, 글쓰기의 윤리다. 타자와 연결되며, 기존의 언어 질서에 저항하고, 침묵과 여백을 감당하며, 나만의 감각으로 세계를 다시 짜는 일.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실패해도, 그것 자체로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태도. 나는 지금, 그런 글을 쓰고 싶다. 그런 존재가 되고 싶다.

 

리좀은 내가 나를 설명할 수 없을 때, 나를 대신해 말해주는 하나의 언어다. 나라는 존재는 어떤 고정된 말로 정의될 수 없지만, 내가 뻗어온 방향들, 내가 흔들리며 닿았던 타자들의 자리, 내가 꺾이면서도 다시 이어낸 문장들 속에 고스란히 남는다.

 

그래서 나는 이제 묻지 않는다. ‘나는 누구인가?’ 대신 이렇게 말하려 한다. 나는 리좀이다.

하지만 때때로 이런 생각도 든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 리좀이라는 개념이, 어쩌면 나의 미숙한 글쓰기를 그럴듯하게 포장해주는 이론적 은신처가 되는 것은 아닐까. 중심도 없고 논지도 흐릿한 나의 문장을 리좀이라 부름으로써, 나는 애써 나의 부족함을 사유의 언어로 덮고 있는 것만은 아닐까. 이 사유의 끝에 서면, 나는 다시 부끄러워진다. 나의 글이 누군가에게는 설득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 내가 여전히 흔들리며 쓰고 있다는 것, 내가 확신보다 의심에 가까운 사람이라는 것을.

 

그러나 바로 그 부끄러움, 바로 그 진심이야말로 내가 다시 글 앞에 서게 하는 힘이다. 나는 완벽한 글을 쓰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다만 정직하게 흔들리고 싶다. 그리고 그 흔들림을 통해 누군가의 마음에 닿을 수 있다면, 그 연결이 곧 나의 리좀일 것이다.

 

리좀 이후의 글쓰기는 중심 없이 살아가는 존재들을 위한 노래다. 고정된 주체를 거부하고, 되기의 불안을 감싸 안으며, 중심 대신 결의 윤리로 타자를 만나는 문장. 나는 그 문장을 쓰고 싶다. 그리고 그 문장을 통해 나의 존재 또한, 끝내 정체되지 않고 흔들리는 무언가로 남고 싶다.

그래서 다시,

나는 중간에서 시작한다.

언제나 처음처럼.

언제나

어디서든

연결될 수 있는

리좀처럼.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중심이 없는 이 글쓰기가, 어쩌면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기를. 정리되지 않은 이 말들이, 어떤 감정의 결을 건드리기를. 내가 흔들리며 써 내려간 이 문장들이, 타인의 마음 한 구석에서 작은 울림으로 살아남을 수 있기를.

 

리좀은 확산이다. 되기의 운동이며, 타자와의 접촉면에서 벌어지는 감응이다. 그러니 글쓰기는닫힌 문장이 아니다. 그것은 관계의 시작이며, 타인과 나를 함께 흔드는 느린 떨림이다.

 

나는 오늘도 그 떨림을 믿으며, 어딘가로 번져갈 문장을 다시 적는다. 완성이 아닌 연결을 위하여. 정답이 아닌 되기를 위하여. 말이 아닌 감응을 위하여.

 

어떻게?

흔들리며.

멈추지 않으며.

한 방향으로 말하지 않으며.

침묵을 품고, 여백을 감싸며.

타자의 언어에 귀 기울이며.

내 문장이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불안조차, 껴안으며.

그렇게 나는 쓴다. 그렇게 나는, 다시 중간에서 시작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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