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뢰즈의 메저키즘적 삶과 욕망의 변증법》
지난 문학 비평 방법론 수업에서 질 들뢰즈를 다루며 그의 ‘새디즘과 메저키즘’에 대한 이론을 아주 짧게 스쳐 지나간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집에 돌아가면 이 주제를 확장해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이제 사유를 진행하며 이 글을 쓰고 있다.
들뢰즈는 『새디즘과 마조히즘』에서 두 욕망 구조를 하나의 연속선상에서 보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사디즘은 타인에게 고통을 가함으로써 쾌락을 얻는 성향으로, 폭력성과 지배욕과 연관된다. 반면 마조히즘은 타인으로부터 고통을 받는 상황에서 쾌락을 느끼는 성향으로 이해되며, 복종과 자기희생, 심지어 자아 해체와 관계된다.
그러나 들뢰즈는 이러한 전통적 이분법을 거부하고, 두 욕망 구조를 독립적인 체계로 구분한다. 그는 마조히즘을 사디즘의 단순한 반대가 아닌, 전혀 다른 ‘언어와 장르, 내적 논리’를 가진 욕망의 계열로 구분한다. 사디즘이 법을 제거하고 파괴를 통해 욕망을 실현하려는 경향이라면, 마조히즘은 오히려 ‘계약’을 통해 고통을 설정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질서를 구성하려 한다.
들뢰즈는 이 차이를 ‘아버지와 어머니의 환상’이라는 정신분석적 모델로 읽어내며, 특히 마조히스트가 어머니의 냉정하고 무정한 이미지를 통해 ‘법 이전의 상태’를 설정하고자 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여기서 고통은 처벌이 아니라 연출된 절차, 즉 반복되고 차갑게 조직된 자기 변형의 리추얼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메저키즘은 단지 고통을 추구하는 도착적 성향이 아니라, 고통이라는 매개를 통해 자아를 재형성하고 관계를 재구성하는 실천적 장치로 이해된다. 들뢰즈는 마조히스트를 연극의 감독이자 주연 배우로 본다. 그는 스스로의 시나리오를 짜고, 계약을 통해 ‘형벌’이라는 의식을 요청하며, 그 속에서 자기 존재의 새로운 질서를 구성한다. 고통은 여기서 단순한 육체적 감각이 아니라, 차가운 쾌락(cold pleasure)으로 형성되는 윤리적 감응의 체계이며, 욕망은 단지 본능의 분출이 아닌, 사유되고 연출된 형식이다.
이 점에서 메저키즘적 삶은 곧 자기 존재의 형식 실험이다. 그것은 수동성을 능동화하고, 복종의 구조를 새로운 윤리로 탈바꿈시키는 시도이기도 하다. 복종은 단순한 굴복이 아니라, 오히려 타자에게 ‘고통을 주도록 허락함’으로써 자신을 갱신하는 기묘한 윤리의 장치로 기능한다. 이와 같은 구조는 여러 문학과 영화 속 인물들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예컨대,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에서 영혜는 말하지 않고, 논리로 설명하지 않으며, 폭력적 방식으로 저항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의 고기 거부는 단호하고 선명한 윤리적 선언이다. 그것은 단순한 식단 조절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매개로 사회 규범과 남성적 권위에 맞서는, 고통을 감각하고 연출하는 자기 윤리의 실천이다. 그녀는 말 대신 침묵으로, 논쟁 대신 몸의 감각으로, 폭력 대신 고요한 거부로 자신을 지켜낸다.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선언은 그 자체로 존재의 재구성과 욕망의 탈선이며, 들뢰즈가 말한 마조히스트의 윤리 “차갑고 반복되며 무언의 계약을 통해 감각을 조직하는 삶” 과도 공명한다.
또한 박찬욱 감독의 영화 『올드보이』의 오대수는 극한의 감금과 침묵 속에서 15년을 살아간다. 그는 누군가의 욕망에 의해 고통을 부여받지만, 그 고통을 통해 스스로를 다시 만들고, 복수를 감정이 아닌 연출된 의례이자 리추얼로 수행한다. 그에게 복수는 더 이상 단순한 감정의 표출이 아니라, 삶을 구성하는 윤리적 기획이다. 복종과 폭력, 침묵과 절규의 반복을 통해 그는 결국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서사를 재편집하며, 욕망과 윤리를 교차시키는 메저키스트의 미장센을 완성해 낸다.
그리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고전적 사례가 있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속 그레고르 잠자는 자신이 벌레로 변한 이후, 더 이상 인간다운 욕망도 말도 하지 않고, 가족의 도구로만 존재하다가 결국 방 한구석에서 스스로를 소멸시킨다. 그러나 이 ‘소멸’은 단순한 퇴장이 아니라, 들뢰즈가 말하듯 비인간적인 것으로 존재하기 위한 마조히스트적 자기 제거의 절정이다. 그는 가족과 사회의 요구에 굴복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이 끝내 감당할 수 없는 타자가 됨으로써 윤리적 침묵과 감응의 방식으로 저항한다. 들뢰즈가 카프카를 “메저키스트의 작가”라 부른 것도 이 때문이다.
이처럼 메저키즘적 윤리는 자발적으로 고통을 구성하고, 그 안에서 자기를 소거하거나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 고통은 피학이 아니라 자기 존재를 다시 쓰는 윤리적, 감각적 언어이며, 침묵과 수동성을 통해 오히려 가장 급진적인 정치성을 구현하기도 한다.
지난 수업에서 교수님은 이러한 메저키즘적 삶에 대해 하나의 덧붙임을 주셨다. 영화 《노매드랜드》(Nomadland)는 2020년 9월 11일 베네치아 국제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되었으며, 이후 2021년 2월 19일 미국에서, 대한민국에서는 2021년 4월 15일에 개봉하였다. 이 영화는 중국계 미국인 감독 클로이 자오(Chloé Zhao)가 연출하였고, 프랜시스 맥도먼드(Frances McDormand)가 주연을 맡았다. 그녀는 주인공 '펀(Fern)' 역을 맡아 미국 서부를 떠도는 현대 유목민의 삶을 섬세하게 그려냈으며, 제작에도 참여하였다. 이 작품은 제시카 브루더(Jessica Bruder)의 동명 논픽션을 원작으로 하며, 대침체 이후 유랑 노동자들의 삶을 다큐멘터리적 시선으로 담았다. 영화는 베네치아 영화제 황금사자상,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큰 주목을 받았다.
영화는 바로 유목민적인 삶, 탈주하는 삶, 자본주의의 감각적 강요로부터 벗어난 삶이라는 설명이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성공이나 안정이라 부르는 것, 즉 자본주의가 제시하는 삶의 공식에 편입되지 않고, 그 경계 밖에서 살아가는 윤리적 감각. 그런 의미에서 교수님은 영화 《노마드랜드》를 언급하셨던 것이다. 이 영화 속에서 펀이라는 인물은 집도 직장도 없이 살아가지만, 결코 패배자가 아니다. 그녀는 고통과 상실을 감내하면서도, 사회가 강요하는 질서에서 탈주하는 감각적 주체로서 살아간다. 그녀는 규범의 틀 안으로 돌아가지 않으며, 오히려 폐허의 땅을 유랑하면서 다른 삶의 형식을 구성해 낸다. 이는 들뢰즈가 말하는 유목적 주체, 혹은 ‘되기(becoming)’의 운동성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이처럼 메저키즘적 삶은 우리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고통은 피해야 할 감각인가, 혹은 창조되어야 할 감각인가? 쾌락은 따뜻한 열정만으로 이루어지는가, 아니면 때때로 차갑고 단단한 윤리적 구조 속에서만 도달 가능한 것인가? 들뢰즈의 메저키즘은 우리에게 삶을 연출하고 다시 쓰는 존재론적 용기를 제안한다. 차가운 윤리는 고통을 회피하지 않되, 그것을 성찰하고 구성하고 조율하는 새로운 형식이다. 그리고 그 형식은 늘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며 자신만의 계약을 쓰고, 고통의 리추얼을 수행하며, 혹은 때로는 길 위에서, 폐허 속에서, 유랑하며 새롭게 만들어가는 무엇일 것이다.
나는 지금 철학과 문학을 공부하는 만학도이고, 하루하루 글을 쓰는 사람이다. 몸은 자주 피로하고, 인간 관계맺기는 소홀해진 지 오래다. 하지만 글을 쓰지 않고 보내는 하루는 마치 무언가 놓친 듯 허전하고 무너진다. 아마도 이승의 소풍을 서서히 정리해 가는 나의 시간 속에서, 나는 어떤 방식으로든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 조급한 마음에 사로잡혀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조급함조차, 나는 감각의 언어로 구성해 보려 한다. 그것이 바로 메저키즘의 윤리다.
바로, 침묵을 견디는 감각. 사람들은 쉽게 말하고, 말함으로써 자신을 정당화하길 원한다. 그러나 메저키즘적 윤리는 때로 말하지 않는 용기, 침묵을 견디는 감각으로부터 시작된다. 내가 살아온 시간 속에서 느꼈던 억울함이나 상처, 나이듦에 대한 사회적 차별, 혹은 ‘늦었다’는 시선 속에서 이제까지 나를 해명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면, 오늘부터라도 나는 무언가를 해명하지 않고, 그 부당함을 조용히 껴안으며, 나에게 어떤 윤리적 질문을 던지는지를 오래 바라보기를 기원해 본다. 대화보다 침묵을, 설명보다 기다림을 택하는 순간들. 이것은 비겁함이 아니라, 나를 더 깊이 성찰하게 하는 고통의 리허설이었다. 그 고요 속에서 나는 오늘도 다시 쓰기를 택한다. 고요한 새벽, 나는 나에게 속삭인다. 멈추지 말자고.
또한 나의 삶을 연출하는 감각. 나는 종종 내가 살아온 삶이 무대 위의 연극 같다는 생각을 한다. 누가 대본을 써준 것도 아닌데, 매일 같은 장면을 되풀이하며, 고통과 사랑, 실망과 희망을 연출하고 있었다. 메저키즘적 윤리는 그런 내 일상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 삶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내가 고통과 함께 연출하는 어떤 서사다.
나는 매일 아침 책상 앞에 앉아 커피를 내린다. 아무도 보지 않지만, 그 시간은 내가 나에게 주는 리추얼이다. 관계에서 오는 오해와 단절조차, 나는 이제 그것이 나에게 어떤 문장을 만들고 있는가를 묻는다. 실패와 후회는 이제 더 이상 나를 파괴하지 않기를, 그것들은 내게 있어 삶을 감각적으로 연출해가는 리허설이자, 나만의 무대 장면들임을 자각하기를.
바로 탈주하는 감각. 들뢰즈의 메저키즘은 결국 탈주선(ligne de fuite, 들뢰즈의 개념으로 ‘정해진 체계에서 벗어나는 경로’를 의미함)의 윤리와 맞닿는다. 세상이 정해 놓은 성공, 젊음, 자산, 관계, 안정이라는 말들의 껍데기들 속에서 나는 문득 나에게 묻는다. “나는 어떤 감각의 구성체로 살고 싶은가?” 나는 현실에 안주하는 대신 글을 택했고, 돈벌이 대신 사유를 택했으며,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삶이 아닌, 조용히 자판을 두드리며 나를 구성하는 삶을 선택했다. 늦은 나이에 공부를 시작했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글들을 써 내려가지만, 그 어느 순간보다 내 감각은 선명하다. 그것은 단순한 유랑이 아니다.
《노마드랜드》의 펀이 그러했듯, 나는 폐허와 고요의 풍경 속에서, 나만의 감각적 윤리를 조율하고 있는 중이다. 나는 실패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실패조차도 내가 만든 문장의 한 줄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나는 매일 한 문장씩, 나의 탈주선을 써 내려간다.
나는 상처받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나는 상처를 감각할 수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매일 삶을 연출한다. 이 세계가 정한 시나리오를 따라가지 않고, 고통을 감각하며, 침묵 속에서 나의 이름을 다시 쓰는 존재가 되고 싶다. 이것이 나의 메저키즘적 윤리이며, 내가 선택한 문장의 길이다. 오늘도 조용히, 나를 사유하며, 나를 위로하며, 나에게 파이팅을 외치며^^ 그리고 나는 안다. 이 조용한 감각의 언어들이, 언젠가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다는 것을.
나의 사랑하는 들뢰즈, 교수님,
모든 나의 과거의, 현재의, 미래의 인연들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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