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戀書시리즈 - 독후감

이혜경의 『대낮에』를 읽고: 빛 아래 드러난 것들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25. 5. 16.

 

이혜경의 『대낮에』를 읽고: 빛 아래 드러난 것들

 

 

국문과 현대소설론 수업의 다음 주차에는 이혜경의 단편소설 대낮에를 읽고 토론하는 시간을 갖는다. 이 작품은 가족주의라는 이름 아래 은폐되어 온 폭력과 상처, 그리고 그로 인해 생겨난 감정의 그늘을 섬세하면서도 날카롭게 그려낸다. 대낮에는 이혜경의 두 번째 소설집 꽃그늘 아래(창비)에 수록된 작품으로, 한 여성이 사회복지사의 전화를 통해 잊고 지냈던 시아버지의 존재를 다시 마주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 순간부터 그녀는 오랫동안 봉인해 왔던 가족사를 다시 열어보게 되고, 동시에 공황장애를 앓기 시작한 남편, 감정적으로 불안정한 딸 희영 사이에서 자신을 둘러싼 삶과 관계들을 하나씩 들여다보게 된다. 시아버지를 받아들일 것인지 외면할 것인지, 가족이라는 틀을 유지할 것인지 끊어낼 것인지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화자는 전화번호를 바꾸고, 주민등록을 옮기며, 말없이 절연을 선택한다. 그러나 그러한 단절은 결코 단순하거나 가벼운 선택이 아니다. 그것은 상처 입은 자가 감정적으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실천이며, 동시에 윤리적 결단에 가까운 것이다.

대낮에는 독자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진다. 피로 맺어진 관계는 반드시 윤리적 책임을 수반해야 하는가? 시아버지 김경선은 생물학적으로 아버지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다시 가족으로 호출된다. 그러나 그가 남긴 과거는 회복 불가능한 폭력이었다. 이때 우리는 되묻게 된다. 단지 피가 흐른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누군가를 용서하고 수용해야 하는가? 아니면, 오히려 피로 맺어졌기 때문에 더욱 절연할 권리를 가져야 하는 건 아닐까?

폭력은 어떻게 유전되는가? 나는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운가? 딸 희영의 반복적인 분노, 감정 폭발, 잔인한 표현들은 단지 병증의 문제가 아니라, 억눌린 감정과 기억이 유전되어 다시 재현되는 폭력의 그림자다. 화자는 딸의 얼굴에서 시아버지를 떠올리고, 남편은 아들을 낳는 것 자체를 거부한다. 이 소설은 말한다. 폭력은 단지 사건이 아니라 기억의 구조이고, 침묵의 체계이며, 무의식의 유전이다. 나는 그 유전을 끊기 위해, 얼마나 내 안의 침묵에 민감하게 깨어 있었는가?

도망은 비윤리적인가, 혹은 하나의 윤리인가? 화자는 전화번호를 바꾸고, 주민등록을 옮기며, 시아버지를 외면한다. 이는 많은 독자에게 너무하다”, “그래도 가족인데라는 판단을 불러올 수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은 반문한다. 가해자가 살아 있다는 이유로 피해자가 끝없이 대응하고 포용해야 하는가? 도망은 비겁함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한 감정의 주권일 수 있지 않은가?

어떤 관계가 나를 구성하고 있으며, 나는 어떤 관계로부터 나를 지켜야 하는가? 이 소설은 피로 이어진 관계보다, 정서적 연대와 윤리적 실천이 더 중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시아버지를 외면한 화자가 노숙자에게 손을 내미는 장면은 이 소설의 윤리적 전환점이다. 나는 나를 해치는 관계를 끊어낼 수 있는가? 그리고 그 끊어진 자리에 새로운 관계, 혹은 책임을 세울 수 있는가?

어쩌면 나는 이런 식으로 대답하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가족이라는 이름 앞에서 한 번도 내가 주체였던 적이 없었다. 오래도록 타인의 결정에 묻혀, 혈연이라는 감옥 속에서 정체되지 않으려 애쓰며 살아왔다. 그래서 이 소설의 화자가 전화번호를 바꾸고, 주민등록을 옮기는 장면을 나는 도망이 아니라 선언으로 읽었다. 상처 입은 자가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작고 명료한 방식. 나도 언젠가 그런 선택을 하기를, 혹은 지금 그런 선택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 소설을 통해 조금은 덜 미안해해도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희영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다시금 묻는다. 나는 내 안에 전이된 폭력을 감지할 줄 아는가? 나의 말투, 나의 무관심, 나의 침묵, 혹은 나의 사랑조차도 누군가에겐 상처로 전달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래서 나는 내가 나를 가릴 수 있을까?”라는 화자의 질문 앞에서, 나 역시 내 안의 가해성을 지우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더 불편한 질문을 꺼내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출소에 노숙 할머니를 신고한 화자의 몸짓처럼, 나도 언젠가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실천할 수 있다면, 누군가의 무너진 자리에 연민을 놓을 수 있다면, 그걸로 된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대낮은 모든 것이 드러나는 시간이지만, 그 밝음 때문에 모든 감정이 더 날카롭게 느껴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나 역시 나의 대낮을 견디며, 내가 만든 가위표들 앞에서 망설일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계속 수를 놓을 것이다. 가위표든 십자가든, 나의 방식으로.

이 작품의 핵심 은유 가운데 하나는 십자수. 화자는 남편의 생일을 맞아 정성스럽게 십자수를 놓지만, 중반부쯤 이렇게 고백한다. “칸마다 채워가는 십자가, 우리 집을 넘보는 무엇을 막아내는 십자가라도 되는 듯이 나는 열심히 수를 놓았다. () 하지만 그건 십자가가 아니라 가위표였다.” 겉으로는 사랑과 정성처럼 보이는 그 행위는 실은 단절, 삭제, 차단의 몸짓이다. 십자수는 화자가 시아버지를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결심을 형상화한 무언의 저항이며, 관계 회복이 아닌 자기 방어를 위한 상징이다.

초반부의 지붕 색깔도 그러하다. 화자는 지붕을 초록색 계열로 수놓은 뒤 후회한다. “연녹색에서 진녹색까지 농담을 두어가며 지붕을 절반쯤 수놓았을 때 이미 그르쳤다는 걸 알았다.” 초록은 일반적으로 생명과 안정의 색이지만, 이 소설에서는 눅눅한 감정의 곰팡이, 오래된 기억의 퇴적층을 환기한다. 빨강이라는 강렬한 감정을 피해 선택한 회피적 색감이 오히려 실패로 돌아간다는 점에서, 이 장면은 화자의 회피적 태도가 서사 전체에 어떻게 부메랑처럼 되돌아오는지를 암시한다.

대낮에라는 제목 자체도 역설적 은유다. 통상 밝음과 진실, 드러남을 상징하는 대낮은 이 작품에서 오히려 숨을 곳 없이 고통이 드러나는, 감정의 해부대와 같은 시간이다. “햇빛이 꿀 것 같이 환한 대낮에라는 구절은 단지 미화된 순간이 아니라, 거칠게 비추는 현실의 실체가 드러나는 공포의 시간으로 작동한다. 모든 것이 드러나는 그 밝음 속에서, 화자는 자신이 만든 가위표 앞에 선 채 살아 있는 관계와 죽은 감정을 구분해야만 한다.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구절 중 하나는 우리 가족은 실종 중이었다라는 말이다. 실종은 법적으로 존재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부재한 상태를 뜻한다. 이 말은 단지 우회적인 표현이 아니라, 감정적·윤리적·심리적으로 해체된 가족 구조를 그대로 드러낸다. 실종이란 이름의 가족은 더 이상 보호도, 책임도, 소속감도 보장하지 못하는 상태이다. 각자는 자신의 내면에 갇혀 있고, 외부로 향하는 손길은 끊어졌으며, 남아 있는 것은 기억을 잃은 공동체뿐이다.

폭력의 유전성은 희영의 행동을 통해 극적으로 드러난다. 어느 날 딸이 아무렇지도 않게 배추벌레를 짓밟는 장면에서 화자는 공포를 느낀다. “희영은 제 신발 밑바닥을 보도블록에 비벼가며 짓이겨진 배추벌레를 천연덕스럽게 떨어내고 있었다.” 그 단순한 장면은 유년의 잔인함을 넘어, 폭력의 전이와 대물림을 상징한다. 화자는 아이의 성질에서 시아버지를 떠올리고, 남편은 아들의 탄생을 거부하며 그 피를 끊고자 한다. 그러나 폭력은 언어로 억제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기억과 침묵을 매개로 유전된다는 사실은, 이 소설이 가장 차갑게 조명하는 현실이다.

그러나 이 모든 상처와 절연의 서사 속에서, 단 한 번 등장하는 조용한 윤리적 실천이 있다. 화자는 길에서 쓰러진 노숙 할머니를 발견하고, 외면하지 못한 채 파출소에 신고한다. “그 할머니에게도 혈육이 있었을 거라는 생각에 가슴 저리면서도 나는 어감 없이 동사무소로 향하고 있었다.” 이 장면은 단지 동정이나 사회적 도리의 표현이 아니다. 이는 화자가 시아버지에게 끝내 건넬 수 없었던 연민을, 아무런 연고도 없는 노인에게 실천하는 윤리적 전이의 순간이다. 상처를 준 관계를 끊은 대신, 아무 죄 없는 타자에게 책임을 지는 실천은 우리가 가족이라는 제도에서 잃어버린 윤리를 다시 상기시킨다.

대낮에는 말한다. 어떤 고백도 완전하지 않고, 어떤 관계도 끝내 회복되지 않으며, 어떤 기억도 말끔히 지워지지 않는다고.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내야 한다. 가위표든, 십자가든, 자기만의 방식으로 감정의 무늬를 다시 꿰매야 한다고. 나 역시 그렇게 내 대낮을 견디고 있다. 눈부신 햇살 아래서 모든 게 드러나고 마는 그 시간 속에서, 나는 여전히 수를 놓고 있다. 숨고 싶지만 사라질 수 없는 시간. 나는 나의 방식으로, 한 땀씩 꿰매며 살아가고 있다.

어디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 나 혼자뿐인가? 우리 모두 그러할 수밖에 없고, 이것이 우리의 운명일지도 모르겠다. 나의 운명, 너의 운명이 그러할진대, 우리는 어떻게 서로를 연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연민하면서도 자신 몫을 차지하기 위한 분투, 그 분투가 행여 타자를 향한 잔인함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 바로 그것이 우리가 끝내 감정의 윤리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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