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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23학번 대학 새내기의 분투기

현대소설강독 중간고사 대비 요약본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25. 4. 18.

 

 

 

 

현대소설 강독 수업의 한가운데에서, 나의 사유는 문학과 철학 사이를 유영한다

 

이번 학기, 나는 국문과 복수전공 과목인 현대소설 강독을 듣고 있다. 단순히 소설을 읽는시간이 아니라, 작품을 해체하고 그 이면의 사유 구조를 들여다보는 시간이다. 신기하게도, 지난 겨울방학 동안 나름대로 현대철학자들을 하나씩 개관해 보았던 경험이 이 수업에 큰 울림을 주고 있다.

그때는 아감벤이니 바디우니 지젝이니 하는 이름들이 막연하고 낯설었지만, 이제는 그들의 언어가 소설 속 인물들의 행위, 서사의 틈, 문장의 결에서 불쑥불쑥 얼굴을 내민다. ‘, 이게 그 말이었구나하는 순간들그 짧은 깨달음이 자주 찾아온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나 자신의 지적 미천함과도 자주 마주한다. 수업 중 튀어나오는 낯선 용어, 고전과 현대를 넘나드는 개념들 앞에서 때로는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아직 충분히 모른다. 더 읽어야 하고, 더 사유해야 하며, 더 오래 머물러야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모름자체가 내 공부의 시작점이자 원동력이 된다. 매번의 숙연함이 끝내 희열로 변모하는 순간, 나는 나의 지평이 조금씩 넓어지고 있음을 느낀다. 어떤 날은 내 사고의 깊이가 이전보다 한 층 더 가라앉아 있음을, 어떤 날은 단어 하나의 울림이 며칠을 끌고 가는 진동이 됨을 체감한다.

나는 지금 소설을 통해 철학을 만지고, 철학을 통해 소설을 다시 바라본다. 그리고 이 둘이 만나는 지점에서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인간의 존재 조건을 끈질기게 묻는다. 이는 단순한 학문적 교양이 아니라, 나라는 주체의 실존적 확장이다.

 

내가 읽는 소설은, 곧 내가 살아가는 세계에 대한 사유다

소설은 더 이상 이야기 그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나에게 삶을 보는 시각을 제공하고, 존재를 묻는 질문을 건넨다. 소설 속 등장인물의 무기력함, 그들의 혼란스러운 자기 인식, 시대의 균열 속에서 길을 잃은 목소리들이 모든 것이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라는 존재의 감정 구조와 정확히 맞닿아 있다.

바디우의 말처럼, 인간은 사건을 통해 주체가 되고, 그 사건 이후의 시간을 살아가며 진리를 지속해 나간다. 문학을 공부하는 지금 이 순간 또한, 나에게는 하나의 사건이다. 그리고 그 사건을 지속적으로 다시 읽고, 다시 질문하는 과정 속에서 나는 문학을 사랑하는 존재로, 나아가 세상을 다시 사유하려는 주체로 조금씩 형성되어간다.

 

불안은 나의 적이 아니다. 그것은 사유의 신호다

불안을 느낀다는 것은 아직 사유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 지젝이 말했듯이, 임박한 파국은 이미 시작되었지만, 우리는 그것을 외면하고자 한다. 그러나 문학은 그것을 외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면으로 응시한다. 존재의 무게, 감정의 파편, 시대의 균열을 소설은 더듬고, 해체하며, 되묻는다.

호모 노마드처럼, 나는 지금 고정된 진리나 정체성 없이 문학과 철학이라는 사유의 평원 위를 유목하고 있다. 때론 혼란스럽고, 때론 길을 잃지만, 그 미로 자체가 사유의 지형이 되고, 나의 정신적 유목의 흔적이 된다.

 

확장된 독서, 그리고 그 너머의 나

내가 지금 이 수업을 통해, 혹은 이 공부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다. 나는 내 사유의 리듬을 만들고 싶다. 내가 읽는 한 문장의 무게가 내 안에서 진동을 일으키고, 그 진동이 나의 삶의 감각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

철학자들이 말한 것들, 소설가들이 써내려간 이야기들은 내 삶과 동떨어진 추상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의 나를 통과해 의미화될 때, 비로소 살아 있는 사유가 된다.

나는 현대소설 강독이라는 작은 교실 안에서, 그 이상의 어떤 광대한 정신의 장소에 서 있다. 그곳에서 나는 묻는다.

 

나는 누구이고, 지금 어떤 시대를 살고 있으며, 소설은 왜 여전히 나를 이끌어가는가.

 

기억의 창고는 이미 포화 상태인데, 외워야 할 문장들이 홍수처럼 밀려오고, 그 사이를 길 잃은 항해자처럼 떠돈다, 나는.

 

아래 본문은 현대소설강독 중간고사 대비 요약본

 

 

<소설이란 무엇인가?>

소설이란 인간의 삶과 세상을 상상력과 서사를 통해 재구성한 문학 형식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허구를 바탕으로 하며, 작가는 인물, 사건, 배경 등을 유기적으로 엮어 하나의 일관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소설은 단순한 이야기의 나열을 넘어, 인물 간의 갈등과 감정, 사회적 상황과 철학적 문제를 다루며 독자에게 감동과 사유의 기회를 제공한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소설은 인간의 내면과 사회를 깊이 있게 탐구할 수 있는 강력한 매체로 평가받는다.

소설의 구성 요소는 이야기의 전개에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 먼저 등장인물은 독자가 감정 이입을 하게 되는 주요 대상이며, 이들의 성격과 행동은 이야기의 중심축을 형성한다. 다음으로 배경은 시간적·공간적 조건을 통해 이야기에 현실감을 부여하며, 인물과 사건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이다. 줄거리, 즉 플롯은 사건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개되는 방식을 의미하며, 도입, 전개, 절정, 결말 등의 구조를 통해 독자의 긴장감과 몰입도를 조절한다. 마지막으로 주제는 작가가 이야기 전반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사상으로, 독자에게 여운을 남기고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소설의 특성은 무엇보다도 '허구성', '서사성', '현실 반영성', 그리고 '인간 중심성'에 있다. 소설은 실제 사실이 아닌 상상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되, 현실과 밀접하게 닿아 있어 독자가 그 속에서 공감과 감동을 얻는다. 또한 사건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조직적으로 전개되며, 대부분 인간의 심리와 행동, 사회적 관계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이루어진다. 이러한 특성은 소설을 다른 문학 장르와 구별 짓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소설의 역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매우 다양하게 전개되어왔다. 서양에서는 고대 그리스·로마의 설화나 중세의 기사 문학, 르네상스 시대의 풍자적 이야기들이 그 기원을 이룬다. 이후 18세기 영국에서 리얼리즘(realism)을 바탕으로 한 근대 소설이 본격적으로 발달하며,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찰스 디킨스의 사회비판 소설 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동양에서는 중국의 삼국지연의, 수호전과 같은 고전 소설이 있으며, 한국에서도 조선 후기의 한글 소설이 대중적으로 널리 읽혔다. 근현대에 들어서면서 소설은 개인의 내면과 사회적 모순을 동시에 조명하는 장르로 발전하였으며, 다양한 주제와 형식을 실험하는 현대소설로 이어졌다.

 

소설의 가치는 단순히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소설은 인간의 감정과 사고, 관계의 본질을 탐구하고 이를 언어로 형상화함으로써 현실을 새롭게 인식하게 하는 힘을 지닌다. 또한 독자는 소설을 통해 타인의 삶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고, 자신과 다른 존재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키우게 된다. 이는 소설이 지닌 정서적·윤리적 교육 기능으로, 독자의 감수성과 상상력을 확장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더불어 소설은 시대와 사회의 변화를 담아내는 거울이 되기도 한다. 한 사회의 정치적, 문화적, 역사적 상황은 소설 속에 다양한 방식으로 반영되며, 이는 후대에 중요한 사회적 기록으로 남는다. 작가는 자신의 시선과 해석을 통해 현실을 비판하거나 대안을 제시하며, 독자는 이를 통해 현실을 새롭게 조명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소설은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문학적 방식으로 탐색하고,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예술적 산물이다. 그것은 감정과 사유를 자극하며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능하게 하고, 개인과 사회를 연결하는 중요한 문화적 매개체라고 할 수 있다.

 

<소설의 시대가 있었다.>

소설의 시대가 있었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문학 장르가 유행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소설이라는 형식을 통해 인간 존재와 세계를 이해하고자 했던 문화적사상적 중심축의 시대를 말한다. 소설은 문학의 중심을 넘어, 한 사회의 가치 체계, 인식론, 감정 구조까지 반영하고 구성하는 핵심적인 예술 형식이었다.

이러한 소설의 시대는 대체로 근대의 도래와 궤를 같이한다. 18세기에서 19세기, 즉 계몽주의와 산업혁명, 시민사회와 개인주의가 태동하던 시기, 소설은 문학의 주역으로 등장했다. 이전의 서사 형식이 신화나 종교, 궁정 문학 등 특정 계층과 세계관에 제한되어 있었다면, 근대 소설은 새로운 계층시민, 부르주아, 그리고 국민의 삶을 재현하고, 그들의 감정과 의식을 표현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이 시기의 소설은 특히 자아의 내면을 탐색하고, ‘일상성을 기록하며, 특정한 장소와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삶을 정교하게 묘사했다. 이른바 소설적인 것의 탄생은 바로 이러한 현실성, 심리성, 역사성의 결합 속에서 가능해졌으며, 이는 소설이 단순한 이야기의 연속이 아닌, 세계 인식의 한 방식으로 기능하게 했던 기반이었다.

이러한 소설의 시대 이전, 중세와 고대의 서사는 개인보다는 집단, 현재보다는 신화적 과거, 현실보다는 종교적 진리에 더 가까웠다. 이야기들은 교훈적이거나 신성한 권위에 복무하는 경우가 많았고, 등장인물들은 인격체보다는 도덕적 상징으로 등장하였다. 하지만 근대로 접어들면서 인간은 더 이상 신이나 왕의 그림자 아래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개별적인 삶, 자기결정의 가능성, 그리고 심리적 내면이라는 새로운 서사의 재료들이 등장했다.

이러한 변화의 밑바탕에는 자본주의의 발전, 주체성의 탄생, 근대 민족국가의 성립이라는 세 가지 역사적 요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1. 자본주의의 발전

자본주의는 새로운 계급의 형성, 즉 중산층(부르주아)의 대두를 가져왔다. 이들은 읽고 쓸 줄 아는 교육받은 계층으로, 인쇄술의 발달과 더불어 독자 시장을 형성하였다. 소설은 바로 이 계층의 욕망, 갈등, 정체성을 반영하면서 대중문학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상업 출판이 활성화되면서 소설은 작가에게 경제적 생존 수단이 되었고, 독자의 반응에 따라 장르와 내용이 다양화되며 본격적인 문학 시장이 형성되었다.

 

2. 주체성의 탄생

근대는 자아가 등장한 시대였다. 인간은 외부 권위에 종속된 존재가 아니라, 사고하고 판단하며 느끼는 주체로 자리매김되었다. 이러한 주체는 단순히 철학적 개념을 넘어서, 소설이라는 장르 안에서 실질적인 표현의 장을 얻었다. 근대 소설은 이러한 주체의 성장과 혼란, 선택과 책임, 내면의 분열과 통합을 섬세하게 서사화했다. 이는 근대 소설의 핵심 특징이자, 철학적 담론과 긴밀히 연결되는 지점이었다.

 

3. 근대 민족국가의 성립

근대 소설은 또한 국민의 상상된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베네딕트 앤더슨이 말했듯이, 소설과 신문은 국민이라는 존재가 서로를 알지 못하면서도 공통된 시간과 사건을 공유하는 감각을 형성하게 했다. 소설은 동일 언어권 내에서 유통되며 국어와 국민문학의 기초를 마련했고, 민족 정체성과 문화적 동질감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자본주의, 주체성의 탄생, 민족국가의 성립은 각각 소설의 물질적 조건, 표현의 내용, 수용의 방식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자본주의는 소설을 시장에서 살아남는 대중 예술로 만들었고, 주체성은 소설이 인간 내면을 표현하고 이해하는 독특한 장르로 발전하도록 이끌었으며, 민족국가는 소설을 문화 정체성의 핵심 매체로 자리잡게 했다.

결과적으로 소설은 단순한 이야기 전달 수단을 넘어, 근대 인간과 사회를 사유하고 구성하는 핵심 장르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소설의 시대란 곧, 인간이 스스로를 이해하기 위해 가장 많이 의지했던 매체가 바로 소설이었던 시대였던 것이다.

 

<소설의 시대 이후와 소설의 운명>

일본의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은 그의 저서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소설을 비롯한 근대문학이 더 이상 성립할 수 없는 시대에 진입했다고 선언한 바 있다. 그는 소설이 성립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국민국가, 국민 독자, 내면 표현이라는 삼각구도의 유효성을 들며, 이 체계가 붕괴됨에 따라 근대문학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고 진단한다. 이러한 통찰은 단지 일본 문학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관찰되는 소설의 위기와 맞물려 더 넓은 맥락에서 재조명되고 있다.

 

소설은 오랜 시간 동안 문학의 중심에 자리해 왔지만, 오늘날 이른바 소설의 시대 이후(Post-novel era)’라는 표현이 자주 사용되면서 그 운명에 대한 물음이 제기되고 있다. 이는 디지털 미디어의 확산과 대중의 독서 방식 변화, 그리고 영상 콘텐츠의 압도적인 영향력 속에서 소설이라는 전통적 서사 형식이 더 이상 절대적인 영향력을 갖지 못하는 현실을 반영한 표현이다.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소설은 인간 존재와 사회를 사유하는 가장 유력한 예술 형식이었다. 소설가는 시대의 양심이자 사상가로 존경받았고, 하나의 소설이 사회적 담론을 이끌기도 했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서며 인터넷, 스마트폰, 소셜미디어, OTT 플랫폼 등 다양한 디지털 매체가 등장하고 대중의 관심이 짧은 정보, 시각적 자극, 실시간 소통으로 옮겨가면서, 전통적인 방식의 긴 글 읽기와 서사 구조를 갖춘 소설은 점차 주류 문화에서 밀려나는 듯한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소설의 운명은 위기이자 동시에 새로운 기회의 시기로 이해될 수 있다. 먼저 위기의 측면에서 보자면, 독서 인구의 감소와 출판 산업의 침체는 소설이 향후 지속적으로 생존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낳는다. 특히 젊은 세대는 문자보다는 영상에 더 익숙하며, 짧고 직관적인 콘텐츠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그 결과 정독이 요구되는 문학 작품, 특히 장편소설은 그 소비층이 점차 한정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시대 변화는 소설의 형식과 내용에 대한 혁신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최근에는 웹소설, 장르소설, 인터랙티브 스토리 등 디지털 환경에 적합한 새로운 소설 형식들이 등장하면서 소설은 전통적 출판을 넘어 다양한 플랫폼으로 확장되고 있다. 특히 웹소설은 스마트폰 기반의 짧은 호흡, 빠른 전개, 독자와의 실시간 소통 등을 통해 현대 독자의 성향에 맞춘 새로운 서사 방식을 제시하고 있으며, 이는 소설의 생명력을 다시 확인시켜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또한 여전히 소설은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 질문과 깊이 있는 통찰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예술 형식 중 하나이다. 영상이나 게임이 주는 몰입감과 자극이 일시적인 감각의 충족이라면, 소설은 언어를 통해 사유를 유도하고, 감정의 깊이를 체험하게 하며, 삶의 다양한 층위를 조용히 파고드는 힘을 지닌다. 이러한 점에서 소설은 단순한 이야기 전달이 아닌, 인간의 정신적 공간을 탐색하는 예술로서 여전히 그 존재 이유를 갖는다.

 

결국 소설의 시대 이후란 소설이 끝났다는 선언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에 맞는 변화와 적응의 요구를 의미한다. 소설은 과거의 명성과 권위를 넘어, 보다 유연하고 창의적인 방식으로 독자와 만나는 방식을 찾아야 하며, 그 안에서 여전히 인간의 삶을 가장 깊이 있게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는 장르로 살아남을 수 있다.

따라서 소설의 운명은 소멸이 아니라 진화의 길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진화는 디지털 시대의 도구와 감수성을 품에 안은 새로운 이야기의 형식으로 나타날 것이며, 소설은 그렇게 또 다른 시대의 중심으로 향하는 문학의 본질적 열망을 이어갈 것이다.

 

<동시대 소설의 표정들>

현대, 즉 동시대의 소설은 과거 어느 시대보다도 다양하고 복합적인 얼굴(표정)을 지니고 있다. 이는 단지 소재나 형식의 다양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를 살아가는 인간과 사회가 지닌 다층적 현실을 소설이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지를 뜻하는 표현이다. 다시 말해, 현대 소설은 더 이상 단일한 방향이나 정의로 포착될 수 없으며, 다양한 문맥과 욕망, 매체와 감각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얼굴을 만들어내고 있다.

 

1. 장르적 혼종성과 경계의 해체

오늘날의 소설은 순수문학과 대중문학, 사실주의와 환상성, 고전적 서사와 실험적 형식 간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한 작품 안에 추리, 판타지, 로맨스, 정치풍자가 뒤섞이는 일도 흔하며, 웹소설과 같은 디지털 플랫폼에서는 로맨스판타지’, ‘회귀물’, ‘현대판타지등 장르적 변주가 활발히 이루어진다. 이러한 혼종성은 독자층의 다양화와 독서 목적의 변화에서 비롯된 것으로, 오늘날 소설은 더 이상 정통성과 위엄을 지키려 하기보다는 독자와의 접점을 다양화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2. 자기반영성과 메타 서사

현대 소설의 또 다른 표정은 자신이 소설이라는 사실을 의식하고 드러내는 자기반영성이다. 작중 인물이 자신의 서사 구조를 인식하거나, 작가와 독자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메타픽션적 서사가 늘고 있다. 이는 진실을 절대화하기보다는, 서사 그 자체의 조건과 가능성을 탐색하는 방식으로,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지속되고 있는 소설적 실험 중 하나다.

 

3. 내면의 깊이에서 외부의 다층성으로

전통적으로 소설은 개인의 내면을 깊이 파고드는 장르로 여겨졌지만, 현대 소설은 이제 내면만큼이나 사회적 구조, 기술 변화, 생태 위기, 글로벌 정치 등의 문제에도 집중하고 있다. 이른바 문학적 자기성찰보다는 세계 속 인간의 위치를 조망하려는 경향이 강해졌다고 할 수 있다. 탈식민주의, 젠더, 인종, 이주, 계급 등의 주제가 활발히 다뤄지는 것도 이러한 흐름의 일부다.

 

4. 디지털 플랫폼과 독자의 변화

오늘날 소설은 더 이상 종이책이라는 전통적 형식에만 머물지 않는다. 웹소설, 웹툰, 오디오북, 인터랙티브 스토리 등 다양한 형태로 재생산되고 있으며, 플랫폼 특성에 맞춘 서사 전략이 존재한다. 예컨대 웹소설은 짧은 호흡, 빠른 사건 전개, 시각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묘사 등을 통해 디지털 시대 독자의 속도감과 몰입 욕구를 반영한다. 이처럼 독자의 감각과 기대가 소설의 문법을 바꾸고 있는 시대라 할 수 있다.

 

5. 지역성과 보편성의 이중주

글로벌 시대의 소설은 로컬(local)한 이야기를 통해 오히려 더 보편적인 정서를 건드리는 경향이 있다. 한국 문학에서 김영하, 한강, 정세랑 같은 작가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지역성과 보편성을 함께 담아내듯, 현대 소설은 문화적 고유성을 지키면서도 글로벌 독자와 감정적 접속을 시도한다. 이는 번역과 출판의 활성화, 국제 문학상과 문학 축제를 통해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6. 불안한 시대의 감정들: 무력감, 우울, 공허

현대 소설은 종종 감정의 언어로 기능한다. 특히 불안, 고립, 우울, 무력감과 같은 정서가 자주 등장하며, 이는 경쟁과 속도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내면 풍경을 반영한다. 등장인물들은 소외되고 부유하며, 해결되지 않는 갈등 속에서 존재의 이유를 묻는다. 엔터테인먼트화된 소비가 지배적인 사회에서 소설은 여전히 슬로우 미디어로서의 가치를 가지며, 이러한 감정을 조용히 응시하는 공간이 된다.

요약하자면, 동시대 소설은 장르적 혼종, 메타적 사유, 사회 구조의 반영, 디지털 감각의 수용, 감정의 섬세한 포착이라는 다채로운 얼굴을 지니고 있으며, 이는 문학이 단절 없이 시대와 호흡해 나가고 있음을 증명하는 현상이다. 고전적 의미의 소설은 변화하고 있지만, 인간을 이해하고 세계를 재구성하는 언어적 실험으로서의 소설은 여전히 살아 있으며, 오히려 그 가능성을 확장하고 있다.

 

<임박한 파국>

슬로베니아 출신의 철학자이자 문화이론가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은 동시대 철학 담론에서 가장 도발적이고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그는 정치철학, 정신분석, 대중문화, 이데올로기 비판을 넘나들며 현대 사회의 불안과 모순을 날카롭게 분석한다. 특히 그가 자주 언급하는 개념 중 하나가 바로 임박한 파국(imminent catastrophe)’이다. 이는 단순히 세계의 종말을 예언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외면하거나 회피해온 구조적 위기의 현실을 직시하라는 지적이다.

 

1. 임박한 파국이란 무엇인가?

지젝이 말하는 파국은 영화적 디스토피아나 종교적 종말론과는 다르다. 그는 기후 위기, 경제 불평등, 팬데믹, 이민 문제, 인공지능과 감시 자본주의 등 여러 위기가 단절된 개별 사태가 아니라, 하나의 총체적 시스템 위기의 징후라고 본다. 이 위기들은 점점 심화되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하기보다 아직은 괜찮다는 자기기만의 이데올로기 속에 안주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래서 지젝은 말한다 파국은 이미 시작되었고, 우리는 그것을 보지 않으려 할 뿐이다.”

 

2. “기존의 정상성은 문제의 일부였다

지젝의 철학에서 파국은 단지 미래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정상(normal)'이라 여기는 것 자체가 이미 위기의 구조 속에 있다는 폭로다. 예컨대 팬데믹 이후 많은 이들이 정상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지만, 지젝은 되묻는다. “정상이야말로 우리가 이 위기에 이르기까지 방조했던 시스템이 아닌가?” 그는 이러한 상황을 이데올로기의 작동으로 분석하며, 우리가 그 어떤 불편함이나 위기를 겪더라도 근본적인 구조 변화에는 눈감으려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3. 지젝의 파국론과 마르크스주의

지젝은 라캉의 정신분석학과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결합하여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병리적 구조를 분석한다. 그는 오늘날의 자본주의가 단순한 경제체제를 넘어서 인간의 욕망, 윤리, 상상력까지 포섭하고 있다고 본다. 이 체제는 위기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위기를 이용해 자기 자신을 더 강화한다는 특징을 가진다. 이로 인해 사회는 파국으로 치닫고 있지만, 그 속에서 오히려 더 많은 소비, 더 많은 억제되지 않은 쾌락, 그리고 더 깊은 소외가 발생하고 있다.

 

4. 파국은 혁명의 기회인가, 절망의 징후인가?

지젝은 단순히 비관적 전망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는 이 파국을 통해 기존의 질서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음을 인정해야 하며, 새로운 사유와 실천의 가능성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파국은 하나의 정치적 계기로 작동할 수 있다. “우리가 변화를 원하지 않으면, 변화가 우리를 강제로 바꿔놓을 것이다.”는 그의 말처럼, 파국은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면서도 급진적 상상과 변혁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5. 오늘날의 문학과 문화에서의 파국 감각

지젝의 파국 담론은 문학과 예술, 특히 현대 소설에서도 중요한 맥락으로 작용한다. 오늘날 소설은 자주 기후 디스토피아, 사회 붕괴, 정체성의 해체 등을 다루며, 인간이 이 체제 속에서 느끼는 불안과 무력감을 전면에 내세운다. 이는 단지 유행적 소재가 아니라, 우리 시대의 불안한 구조적 조건을 반영하는 방식이며, 지젝이 말하는 파국을 통과한 뒤의 사유와 맞닿아 있다.

슬라보예 지젝이 말하는 임박한 파국은 더 이상 허구의 이야기나 먼 미래의 가능성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현실의 균열을 가리키는 이름이며, 우리가 그 안에서 어떤 인간으로, 어떤 사회로 살아갈 것인가를 묻는 철학적 물음이다. 지젝은 우리에게 종말을 공포로써 말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종말을 인식하고, 그것을 새로운 상상과 결단의 지점으로 전환할 것을 요청한다.

 

<존재와 시간: 알랭 바디우의 사건, 경험의 주체화>

존재와 시간: 알랭 바디우의 사건, 경험의 주체화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Alain Badiou)는 현대 철학의 중요한 문제존재란 무엇인가, 주체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변화는 어떻게 가능한가사건(event)’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새롭게 사유한다. 그의 철학은 하이데거의 존재론과 라캉의 주체 이론, 그리고 칸토어의 집합론에서 영향을 받아, 존재와 시간, 그리고 주체의 관계를 독자적인 방식으로 전개한다.

 

1. 존재란 무엇인가: 바디우의 존재론

바디우는 그의 주저 Being and Event(존재와 사건)에서 존재를 수학적, 구체적으로 정의하고자 한다. 그는 존재를 순수한 다의 상태, 즉 무()로부터 드러난 수학적 구조로 본다. 존재는 언어 이전의 어떤 실체가 아니라, 존재한다는 것이 드러나는 장(scene), 즉 상태(state) 속에서 파악된다. 그러나 이 상태는 항상 전체를 포괄하지 못하며, 그 균열이나 누락이 바로 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 공간이 된다.

 

2. 사건이란 무엇인가: 질서 바깥의 출현

바디우 철학에서 사건이란 단지 어떤 일이 일어났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질서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그 질서를 변형시키는 진정한 단절이자 혁명이다. 수학적으로 표현하자면 무의 자리에서 갑작스레 나타나는 것’, 혹은 상태가 포착하지 못하는 예외의 출현이다. 이 사건은 그 자체로는 의미를 가지지 않으며, 오직 그 사건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충실하려는 주체의 선택과 지속을 통해서만 의미화된다.

예컨대, 혁명, 예술적 돌파, 사랑의 만남, 과학의 발견 등은 바디우가 말하는 사건의 예시들이다. 이들은 기존의 인식 틀로는 해석되지 않으며, 완전히 새로운 진리를 호출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3. 주체는 어떻게 되는가: 사건의 경험과 주체화

바디우는 주체(subject)를 선험적으로 주어진 존재로 보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주체를 사건에의 충실성(fidelity)에 의해 생성되는 존재로 정의한다. 다시 말해, 주체는 사건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사건을 받아들이고’, ‘지속적으로 응답하는 과정속에서만 되는 것(becoming)’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주체는 고정된 정체성이 아니라, 과정적 존재, 즉 시간 속에서 실현되는 존재이다.

이러한 주체는 고통스럽고 불확실한 여정을 동반한다. 사건은 기존의 질서를 부정하지만, 새 질서는 자동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주체는 기존 질서를 벗어나 새로운 진리를 향해 나아가되, 실패와 혼란, 고독을 견뎌내며 사건의 진실을 지속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4. 시간: 사건 이후의 진리 과정

바디우에게 시간은 단지 물리적 흐름이 아니라, 진리의 전개 과정이다. 사건은 특정한 시점에 발생하지만, 그 사건이 시간 속에서 진실로서 작동하게 하려면, 주체의 끊임없는 재확인과 실천이 필요하다. 바디우는 이를 진리 절차(truth procedure)’라고 부른다. 사랑에서, 정치에서, 과학에서, 예술에서우리는 사건 이후의 삶을 살아가며, 그 진리를 시간 속에서 점차 구현해 가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결론: 바디우의 철학에서 바라본 존재, 시간, 주체

알랭 바디우의 철학은 오늘날 무수한 정보와 정체성, 이념들이 교차하는 시대에서 진정한 변화란 무엇이며, 그 변화는 어떻게 인간을 새롭게 구성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존재란 단순히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통해 새롭게 구성되는 것이며, 주체는 그 사건에 응답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창조해 나간다. 그리고 시간은 이러한 창조의 과정 속에서 진정으로 살아 있는 시간으로 탈바꿈한다.

이러한 바디우의 사유는 오늘날 예술, 정치, 철학, 사랑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경험 전반을 다시 바라보게 하며, 우리 각자가 사건을 통해 형성되는 존재임을 통찰하게 한다.

 

<호모 사케르>

호모 사케르(Homo Sacer)”는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이 제시한 핵심 개념으로, 법과 권력, 생명, 배제의 문제를 사유하기 위한 철학적 도구다. 라틴어인 Homo Sacer는 원래 고대 로마 법에서 신에게 바쳐졌지만 동시에 인간 사회로부터는 배제된 자를 의미한다. 그는 죽여도 살인죄가 되지 않으며, 제물로도 사용할 수 없는 이중의 배제 상태에 놓인 존재다.

아감벤은 이 고대 법률 개념을 현대 정치철학의 중심 개념으로 재해석하며, 현대 국가에서 인간이 어떻게 생명 그 자체로 환원되고 관리되는가를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1. 호모 사케르란 누구인가?

Homo Sacer는 공동체의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면서도 여전히 그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죽일 수 있으나 희생될 수는 없는존재이다. 그는 법의 바깥에 있으면서도 법에 의해 정해진 존재이며, 이것이 바로 아감벤이 말하는 포함에 의한 배제(exclusive inclusion)’라는 역설적 개념이다.

현대적으로 말하자면, 호모 사케르는 정치적으로 무력화된 생명, 즉 어떠한 권리도 주장할 수 없는 생명 상태에 놓인 자들예를 들어 난민, 수용소의 수감자, 무국적자, 비합법 체류자, 혹은 재난 속에서 구조되지 못한 이들을 상징한다. 이들은 국가에 의해 생명을 유지하거나 제거당할 수 있지만, 자기 목소리로 말할 수 없고, 법의 주체로 인정받지도 못한다.

 

2. 벌거벗은 생명(bare life)

아감벤은 이러한 호모 사케르 개념을 통해 정치와 생명 사이의 관계, 특히 생명을 정치적으로 조작하는 권력을 조명한다. 그는 인간을 삶을 영위하는 존재로서의 정치적 동물(존엄한 시민으로서의 존재)과 단지 생물학적 생명으로서의 벌거벗은 생명(zōē)으로 나눈다.

이 중 벌거벗은 생명은 인간이 오직 생물학적 생명으로만 존재하게 되었을 때의 상태를 가리킨다. 현대 사회는 인간을 점점 더 관리와 통제의 대상으로 만들며, 법과 권력이 인간의 생명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주권적 권한을 갖는 시스템을 구축해 왔다. 이것이 바로 아감벤이 비판하는 생명 정치(biopolitics)의 핵심이다.

 

3. 현대 사회의 호모 사케르

아감벤은 20세기 이후의 역사, 특히 아우슈비츠 수용소, 국경의 난민들, 팬데믹 상황에서의 격리자 등에서 호모 사케르의 현대적 재현을 찾는다. 이들은 국가에 의해 철저히 관리되고 통제되지만, 법적 권리의 주체로는 배제된 생명들이다. 그들은 사회 속에 있지만 정치의 언어 바깥에 존재하며, 현대 권력이 어떻게 생명을 포획하고 통제하는지를 드러내는 사례들이다.

 

4. 주권이란 무엇인가: 예외 상태(state of exception)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 개념과 밀접하게 연관된 이론으로 예외 상태(state of exception)’를 제시한다. 이는 국가가 위기 상황을 이유로 헌법이나 법률의 일시적인 정지를 선언하고 비상 권력을 발동하는 상태를 말한다. 이때 국가는 법을 정지시킴으로써오히려 법을 완전히 장악하고, 누구를 보호하고 누구를 배제할지 결정할 권한을 갖게 된다. 이 순간, 우리는 누구나 호모 사케르가 될 수 있다.

팬데믹과 같은 재난 상황, 테러에 대한 대응, 전시 체제 등에서 예외 상태는 이제 일상적 통치 수단이 되었고,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그 권력 구조에 편입되어 살아가고 있다.

결론: 호모 사케르, 그리고 우리

호모 사케르는 단지 고대 법률 용어의 복원이 아니다. 그것은 아감벤이 현대 사회 속에서 인간의 삶이 얼마나 쉽게 정치적 계산에 의해 배제되고 무력화될 수 있는가를 성찰하기 위해 고안한 철학적 경고이자 사유의 틀이다.

우리는 누구나 사회적 재난, 권력의 오작동, 혹은 세계적 위기 속에서 호모 사케르로 전락할 가능성을 안고 있으며, 이것은 곧 인간 존엄의 조건과 정치의 윤리적 한계를 되묻게 만든다.

 

<아이러니(‘신화 로망스 상위모방 하위모방 아이러니’)>

아이러니: 신화에서 아이러니로의 문학 양식 순환

문학의 역사와 서사 구조는 단절이 아닌 양식의 점진적 이동과 변형의 흐름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노스럽 프라이는 문학의 주요 서사 양식을 신화 로망스 상위모방(high mimetic) 하위모방(low mimetic) 아이러니(ironic)로 구분하며, 이는 단순한 장르의 분류가 아닌, 인간과 세계, 영웅과 현실 사이의 관계를 바라보는 인식의 변화를 반영한다고 본다.

 

1. 신화(Myth): 초월적 존재의 세계

신화는 문학의 가장 원초적 양식으로, 등장인물은 신 또는 반신적 존재이다. 그들은 인간을 초월한 힘을 지니며, 자연과 운명을 좌우한다. 이 양식에서 인간은 세계의 질서 속에 종속된 존재이며, 신화적 세계관은 절대성과 총체성을 전제한다.

: 길가메시 서사시, 그리스 신화, 창세기

 

2. 로망스(Romance): 이상적 영웅의 서사

로망스는 신화에서 인간 세계로 내려온 이상적 영웅의 이야기이다. 영웅은 일반 인간보다 뛰어나며, 모험과 시련을 극복해 정의를 구현한다. 이 양식에서는 여전히 선과 악이 분명하게 나뉘며, 세계는 회복될 수 있는 공간으로 그려진다. 로망스는 종종 기적적 사건이나 환상적 요소를 동반한다.

: 아서 왕 이야기, 돈키호테, 고전 판타지 소설

 

3. 상위모방(High Mimetic): 영웅적 인간의 비극

상위모방은 영웅이 더 이상 신적 존재가 아닌, 위대한 인간으로 묘사되는 양식이다. 그는 보통 사람들보다는 뛰어나지만 여전히 운명과 제도, 사회 질서에 구속되어 있다. 이 양식은 비극의 형식으로 대표되며, 인간의 위대함과 한계를 동시에 조명한다.

: 오이디푸스 왕, 셰익스피어의 맥베스, 햄릿

 

4. 하위모방(Low Mimetic): 일상의 인간

하위모방은 우리와 비슷한 인물, 즉 보통 인간을 중심으로 한 서사다. 등장인물은 특별한 능력도, 위대함도 없으며, 평범한 일상을 살아간다. 현실적인 갈등, 윤리적 딜레마, 사회 문제 등이 중심이 되며, 현실주의 소설의 핵심 양식이기도 하다.

: 제인 오스틴,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현대 가족소설

 

5. 아이러니(Irony): 무력한 인간의 자기 인식

아이러니는 인간이 자기 존재의 유한함과 모순, 무력함을 인식하게 되는 지점에서 등장한다. 이 양식에서 인물은 더 이상 특별하지 않으며, 오히려 현실에 눌려 고통받고, 때론 비극조차 성립되지 않을 만큼 사소한 존재로 전락한다. 아이러니는 인간의 비참함을 냉소나 유머, 풍자, 해체적 서사 등을 통해 드러내며, 고전적 영웅서사에 대한 비판과 해체의 양식으로 작동한다.

: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아이러니란 무엇인가: 몰락의 자각이자 사유의 양식

아이러니는 인간과 세계 사이의 불균형을 가장 날카롭게 인식하는 서사이다. 인간은 더 이상 세계를 통제하지 못하며, 자신조차 이해하지 못한 채 무의미한 삶 속에서 떠도는 존재로 나타난다. 이때 아이러니는 단순한 농담이나 반어가 아니라, 존재에 대한 깊은 회의와 성찰의 태도로 읽혀야 한다.

아이러니의 서사는 영웅서사의 해체이자 동시에 새로운 진리의 요청이다. 그것은 낡은 신화와 영웅을 벗어난 후, 무너진 믿음 속에서도 계속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조건을 묻는다. 현대 소설이 종종 아이러니의 형식을 취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선명한 윤리도, 확고한 목적도 없이 구성되어 있으며, 이 속에서 인간은 갈등하는 욕망, 무력한 현실, 끊어진 의미의 조각들 속에서 자기 존재를 해석해 나가야 한다.

결론: 아이러니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신화에서 시작된 서사는 아이러니에 이르러 모든 고전적 질서와 믿음을 해체한다. 하지만 아이러니는 종말이 아닌, 새로운 문학적 사유와 표현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영웅이 없는 시대, 진리가 불확실한 시대, 그리고 존재가 파편화된 시대에 아이러니는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어떻게 말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호모 노마드>

호모 노마드(Homo Nomad)”는 현대 사회와 인간 존재를 설명하는 데 사용되는 철학적·인문학적 개념으로, 기존의 고정된 정체성과 중심 질서를 벗어나 이동성과 유목성, 경계 넘기를 통해 살아가는 인간상을 가리킨다. 이는 근대 사회의 호모 파베르(Homo Faber)’도구적 인간, 혹은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이성적 인간에 대한 비판적 대안 또는 탈근대적 재서술로서 주목된다.

호모 노마드는 특히 질 들뢰즈(Gilles Deleuze)와 펠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천 개의 고원(Mille Plateaux)에서 제시한 철학적 이미지인 유목적 사유(nomadic thought)’에서 비롯된 개념으로, 단순히 물리적인 이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고정되지 않고 계속 이동하는 사유, 구조 밖의 실천, 경계의 해체와 생성의 반복을 뜻한다.

 

1. 호모 노마드란 누구인가?

호모 노마드는 중심이 없는 자, 규범에 고착되지 않는 자, 경계를 넘는 자다. 그는 일정한 장소에 정착하지 않고, 공간과 정체성, 사유 방식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이동하고 변화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인간상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

고정된 정체성의 거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단일한 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는 다층적이고 유동적인 자아를 가진다.

이질성과 혼종성: 경계를 넘는 그의 존재는 타자와 섞이고, 기존 질서와 뒤섞이며 새로운 혼종의 문화와 사고를 생성한다.

질서 바깥에서의 창조: 그는 중심 구조(국가, 자본, 이성, 도덕)의 바깥에서 새로운 질서와 의미를 발명한다.

이동과 연결: 고립된 주체가 아닌, 망과 흐름의 존재로서 다양한 장소, 사물, 주체와 연결되고 재조립된다.

 

2. 유목적 사유 vs 정착적 사유

들뢰즈와 가타리는 기존의 사유를 정착적 사유(arborescent thought)’라고 부른다. 이는 중심과 뿌리를 가진 사유, 즉 고정된 계열, 위계 구조, 이항 대립으로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이에 반해 유목적 사유(nomadic thought)’는 다중적, 비선형적, 생성적이다. 그것은 나무가 아니라 리좀(rhizome) 뿌리줄기처럼 어디서나 자라나고 연결되는 구조를 닮았다.

호모 노마드는 바로 이 유목적 사유의 구현이다. 그는 중심 없는 실천, 지속적인 경계 넘기, 정체성의 해체와 재구성을 통해 존재한다.

 

3. 현대 사회에서의 호모 노마드

오늘날 호모 노마드는 철학적 은유를 넘어 현실적인 존재 양식으로 주목받고 있다. 다음과 같은 영역에서 그 표정이 드러난다:

디지털 유목민(digital nomads): 고정된 직장 없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온라인으로 일하는 사람들. 장소와 시간의 구속 없이 살아가는 이들은 물리적 유목민의 새로운 형태다.

이주민, 난민, 디아스포라: 민족, 언어, 국경이라는 근대적 정체성을 초과하는 존재들. 그들은 정치적 경계와 문화적 차이를 넘나드는 경계적 주체이다.

젠더 및 정체성의 유동화: 단일한 성 역할, 인종 정체성, 이념적 입장을 거부하고, 복수의 자아로 존재하는 현대인의 모습.

문화 소비자의 양상: 특정 취향, 특정 소속에 묶이지 않고 다양한 콘텐츠, 언어, 관점을 오가며 자신만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새로운 문화적 소비자.

 

4. 호모 노마드의 정치성과 윤리성

호모 노마드는 단순히 떠도는 존재가 아니다. 그는 기존 질서의 주변부에서 중심을 흔들고, 균열을 만들며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존재이다. 따라서 그의 실존은 정치적인 동시에 윤리적인 행위이다.

그는 주어진 길을 따르지 않고, 경계선을 따라 새로운 길을 만든다.

그는 국가, 자본, 제도라는 고정 질서에 대한 저항의 흔적을 몸에 지니고 있다.

그는 타자와의 접속과 관계 속에서 정체성을 구성하며, 폐쇄된 동일성에 저항한다.

결론: 호모 노마드, 유목하는 존재의 시대

호모 노마드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새로운 존재 방식, 새로운 주체성의 상징이다. 고정된 진리와 정체성의 해체 이후, 인간은 더 이상 뿌리를 내리는 존재라기보다는 흐르고, 연결되고, 변이하는 존재가 되었다. 호모 노마드는 이러한 탈근대적 조건 속에서 살아남는 법, 그리고 살아가는 법을 탐색하는 존재다.

그는 모든 경계를 넘나들며, 질문하고, 혼종하고, 생성한다. 그로 인해 우리는 다시 묻게 된다.

나란 누구인가?”, “여기란 어디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프레카리아트>

프레카리아트(Precarariat)”불안정(precarious)’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 노동자 계급)’의 합성어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용, 생활, 사회적 지위 등 전반에 걸쳐 구조적 불안정성에 놓인 새로운 계층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이 용어는 영국의 경제학자 가이 스탠딩(Guy Standing)이 본격적으로 제시하면서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프레카리아트는 단순히 가난하거나 비정규직인 사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경제적·사회적 불안정성 속에서 정체성, 존엄, 미래를 잃어버린 존재들을 말하며, 이들은 21세기 글로벌 자본주의의 구조적 산물이다.

 

1. 프레카리아트란 누구인가?

프레카리아트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불안정한 일자리: 계약직, 파견직, 플랫폼 노동자, 일용직 등 정규직으로의 통로가 차단된 고용 상태

사회보장 결핍: 고용 보험, 의료 보험, 연금 등 복지 제도의 보호를 받지 못하거나 단절된 상태

직업 정체성의 부재: 자신의 일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자아 실현의 기반이 되지 못하는 구조

경제적 불안정: 미래에 대한 예측 불가능성과 지속적인 생계 위기

정치적 소외: 투표권이나 참여권은 있으나, 실질적인 정치적 영향력은 미미한 상태

이들은 전통적인 노동자 계급과 달리, 단결이나 조직화를 이루기 어려운 분산된 구조 속에 있으며, 이러한 점에서 새로운 형태의 노동의 불가시화’, ‘개인의 파편화가 심화되고 있다.

 

2. 왜 프레카리아트가 등장했는가?

프레카리아트는 신자유주의적 경제 정책과 글로벌 자본주의 체제가 만들어낸 구조적 산물이다.

고용 유연화 정책: 정리해고를 쉽게 하고, 비정규직을 확산시키는 정책이 프레카리아트를 양산함

복지 축소와 공공영역 해체: 민영화와 예산 삭감으로 인해 사회안전망이 약화됨

플랫폼 경제와 디지털 노동: 앱 기반의 노동, 프리랜서 플랫폼 등이 노동자를 자기 고용자로 포장하면서도 사실상 통제

자동화와 기술 변화: 고숙련 노동과 저숙련 노동의 이중구조 속에서 중간계층이 탈락함

이러한 배경은 단지 일자리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삶과 존엄, 공동체의 구조까지 뒤흔드는 문제로 이어진다.

 

3. 프레카리아트는 새로운 계급인가?

가이 스탠딩은 프레카리아트를 전통적인 마르크스적 계급 분류로는 포착할 수 없는 새로운 계급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현대 사회를 다음과 같이 나눈다:

엘리트: 자산과 권력을 독점하는 글로벌 상위층

살라리아트(Salariat): 안정된 고용과 연금, 사회적 신분을 갖춘 중간층

프롤레타리아트: 전통적 노동자 계층

프레카리아트: 불안정한 조건 속에 생존하며, 자율성과 안정성을 모두 박탈당한 계층

이 새로운 계층은 실질적 사회 구성원임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목소리를 내기 어렵고, 사회적 배제 속에서 고립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때문에 프레카리아트는 불안정함 그 자체이자, 현대 자본주의의 그림자이기도 하다.

 

4. 문화적·정신적 차원의 프레카리아트

프레카리아트는 단순히 경제적 현상이 아니다. 우울, 번아웃, 자기혐오, 고립감 등의 감정은 이 계층의 정서적 징후다. SNS나 미디어에서는 화려해 보이지만 실은 불안정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고, 이는 정서적 프레카리아트로 불리기도 한다.

또한 청년 세대는 노오력이라는 자조적 유행어 속에서 상승 욕망과 구조적 한계 사이의 모순을 살아내는 존재가 되었다.

 

5. 프레카리아트 이후의 사회를 상상하기

프레카리아트 문제는 단순히 복지 확대나 일자리 제공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노동의 의미, 공동체의 재구성, 삶의 존엄에 관한 근본적 재사유를 요구한다.

보편적 기본소득(UBI): 가이 스탠딩이 주장한 대안 중 하나로, 조건 없는 생계 지원을 통해 인간의 자율성과 안전망을 보장하는 방식

노동의 재정의: 노동이 단지 임금노동이 아니라, 돌봄, 예술, 자율적 창작 등 다양한 삶의 활동을 포괄할 수 있어야 함

정치적 조직화: 분산된 프레카리아트가 연대와 집단적 의사 표현의 구조를 통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어야 함

결론: 프레카리아트는 낮은 자가 아니라 새로운 인간 조건이다

프레카리아트는 낡은 산업 질서의 잔재가 아니라, 미래 사회를 구성할 인간 조건의 거울일 수 있다. 고정된 직업, 안정된 생활, 확고한 정체성이 점점 사라져가는 오늘날, 프레카리아트는 단지 약자가 아니라 우리가 모두 닿아 있는 존재적 현실의 상징이다.

그렇기에 프레카리아트의 문제는 단지 사회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과 사회의 근본적 사유를 다시 요청하는 철학적 과제가 된다.

 

<인류세>

인류세(Anthropocene)”는 지질학적 시대 구분의 하나로, 인간 활동이 지구 생태계와 지질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시기를 가리키는 개념이다. 이는 단순한 과학적 시대 명칭을 넘어, 인간 중심의 문명이 초래한 환경적, 철학적, 정치적 전환의 시대를 의미하며, 오늘날 전 지구적 위기를 이해하고 반성하기 위한 핵심 개념으로 자리 잡고 있다.

 

1. ‘인류세란 무엇인가?

인류세라는 용어는 2000년대 초, 노벨상 수상자인 대기화학자 파울 크루첸(Paul Crutzen)이 제안하였다. 그는 산업혁명 이후 인간 활동특히 화석 연료 사용과 대규모 도시화, 농업 개발, 플라스틱과 핵실험이 지구의 지질과 생물군계를 비가역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홀로세(Holocene)’라는 지질 시대 명칭으로는 더 이상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이에 따라 그는 새로운 지질 시대인 인류세의 도래를 선언한 것이다.

이 개념은 이후 생태학, 사회학, 철학, 문화이론 등 다양한 분야로 확장되며, 단지 과학적 분류를 넘어 인간 문명의 자기 성찰의 장이 되었다.

 

2. 인류세의 특징

인간의 지질학적 행위자화

인류세는 인간이 더 이상 단순한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 지구 생태와 기후, 생물 다양성에 영향을 미치는 주된 지질학적 행위자가 되었다는 선언이다.

지구 시스템의 교란

기후 변화: 이산화탄소 배출, 지구 온난화, 극한 기후 현상

생물 다양성 상실: 대멸종급 종의 소실 속도

토양과 해양의 오염: 플라스틱, 중금속, 해양 산성화

지형 변화: 도시화, 산림 파괴, 대형 댐 건설 등

인공물의 지층화

플라스틱, 콘크리트, 핵 실험의 방사성 잔류물 등은 미래의 지질층에서 인간의 흔적으로 남을 물질적 증거가 된다.

 

3. 인류세가 제기하는 철학적 질문들

인류세는 단순한 생태 위기의 명명이 아니라, 인간 존재와 문명에 대해 근본적인 성찰을 촉구하는 철학적 개념이다.

인간 중심주의의 해체

호모 사피엔스는 자연을 지배하는 이성적 주체로 여겨져 왔지만, 인류세는 이러한 인간 중심주의의 종말을 선언한다. 이제 인간은 자연을 통제하는 주체가 아니라, 위기의 중심이자 책임의 주체로 재정의된다.

책임의 정치학

인류 전체가 지구에 영향을 끼치지만, 모든 인간이 동일하게 책임지거나 고통받는 것은 아니다. 탄소 배출과 환경 파괴의 주범은 주로 산업화된 국가와 다국적 기업이지만, 피해는 취약한 지역과 계층이 더 크게 입는다. 따라서 인류세는 불평등한 책임 분배에 대한 윤리적 질문을 제기한다.

시간성의 전환

인류세는 지질학적 시간역사적 시간이 충돌하는 시점이다. 우리는 처음으로 미래 지층에 흔적을 남기는 존재가 되었고, 현재의 행위가 수만 년 뒤의 지구 환경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로 인해 우리는 심원한 시간(deep time)’에 대한 윤리적 상상력을 요구받는다.

 

4. 인류세와 문화, 예술, 문학

인류세는 학문과 과학을 넘어 문학, 예술, 철학, 영화 등 문화 전반에 걸쳐 새로운 상상력을 촉발하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에코픽션', '기후 소설', '생태 비평', '포스트휴먼 문학' 등이 부상하며, 기후 재난과 인간-비인간 관계, 생태 윤리를 다룬 작품들이 주목받고 있다.

: 김초엽의 지구 끝의 온실, 리처드 파워스의 오버스토리, 마거릿 애트우드의 오릭스와 크레이크

5. ‘인류세이후를 상상하기

인류세는 어떤 면에서는 문명의 종말을 암시하는 개념이지만, 동시에 새로운 삶의 방식을 상상하라는 요청이기도 하다.

기술 중심의 해결책(기후 공학)을 넘어서

로컬 공동체 중심의 생태적 전환

비인간 존재들과의 공존 윤리

성장과 개발 중심의 패러다임 탈피

이러한 실천은 지구 시민혹은 포스트휴먼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구상하게 하며, 인간의 행위가 더 이상 파괴가 아닌 책임 있는 공동생성(co-becoming)이 될 수 있도록 요구한다.

결론: 인류세는 인간 자신에 대한 질문이다

인류세는 단지 한 시대의 이름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존재이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묻는 시대적 거울이다. 인간은 이제 더 이상 외부 관찰자가 아니라, 지구 생태계와 미래의 동시적 구성자이자 책임자로서 행동해야 한다. ‘인류세란 곧 우리가 남긴 흔적의 시대이자, 그 흔적을 자각하는 자의 시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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