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방학 동안 고민해 왔던 발터 벤야민의 사상과 철학을 드디어 하나의 논문으로 완성했다. 제목은 “발터 벤야민의 문학적 사유: 역사, 정치, 그리고 예술의 상호작용”이다. 비록 겉핥기식의 개관일지 모르나, 여하튼 충만된 마음으로 이 작업을 마무리했다. 마지막 글자를 찍으며, 오랜 시간 동안 벤야민과 함께 산책하듯 다시금 나의 다짐을 되새겼다.
“쓰는 일이란, 언제나 말해지지 않은 것의 가장자리를 걷는 일이다. 침묵의 언저리에서 언어는 비로소 윤리가 된다.”

"아마도 우리에게 동일한 기능을 가진 사람들에게 우리를 계속해서 이끌어주는 길들이 존재할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우리 삶의 가장 다양한 시기마다, 우리를 친구에게, 배신자에게, 사랑하는 이에게, 제자나 스승에게로 이끌어주는 그런 통로들이다."
— 발터 벤야민 (Walter Benjamin)
발터 벤야민의 문학적 사유: 역사, 정치, 그리고 예술의 상호작용
목차:
Ⅰ. 서론
1. 연구 배경과 목적
2. 발터 벤야민의 문학적 사유의 중요성
3. 문학과 역사, 정치의 교차점: 벤야민의 접근법
4. 논문의 구성과 연구 방법
Ⅱ. 발터 벤야민: 생애와 철학적 배경
1. 발터 벤야민의 생애와 지적 여정
2. 벤야민의 철학적 뿌리
1) 마르크스주의와 역사적 유물론
2) 유물론적 역사주의의 문학적 해석
3) 문화비평과 예술의 정치적 가능성
3. 역사와 정치에서의 벤야민의 철학적 위치
Ⅲ. 발터 벤야민의 문학 이론
1. 문학과 혁명적 가능성: 벤야민의 역사적 재현 이론
2. 문학과 예술의 정치적 잠재력: 과거와 현재의 상호작용
3. 대중 감각과 문학: 벤야민의 영화 이론과 텍스트의 관계
Ⅳ. 역사와 문학: 벤야민의 역사적 물질주의와 문학의 관계
1. 역사적 유물론과 문학: 벤야민의 문학적 해석학
2. 문학에서의 시간 개념: ‘메시아적 시간’과 혁명적 가능성
3. 벤야민의 역사적 시간과 문학적 재현: 과거와 현재의 상호작용
Ⅴ. 정치적 문학: 예술과 정치적 잠재력
1. 문학과 정치의 교차점: 벤야민의 예술적 정치성
2. ‘폭력’과 ‘법의 중지’: 벤야민의 정치적 이론과 문학적 실천
3. 예술과 혁명: 벤야민의 문학적 언급과 사회적 변혁의 잠재력
4. AI 시대와 예술: 벤야민의 문학적 사유와 기술적 변혁
Ⅵ. 문학을 통한 비판적 사유: 벤야민의 문학적 언급의 현대적 의의
1. 현대 문학에서 벤야민의 이론의 적용 가능성
2. 벤야민의 문학적 사유가 현대 사회에 미친 영향
3. 문학을 통한 정치적 반성: 벤야민의 유산
4. 벤야민의 기술 복제 이론과 AI 창작: 예술의 새로운 정치적 잠재력
Ⅶ. 결론
1. 벤야민의 문학적 사유의 핵심 정리
2. 역사, 정치, 예술의 상호작용의 중요성
3. 벤야민의 문학적 언급에 대한 향후 연구 방향
4. 벤야민식 사유에 대한 비판: 현대적 한계와 가능성
Ⅷ. 문학적 고찰의 끝에서: 벤야민의 철학과 나의 창작의 길
발터 벤야민의 문학적 사유와 AI 시대: 역사, 정치, 예술의 미래적 상호작용
Ⅰ. 서론
1. 연구 배경과 목적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20세기 문학 이론과 철학에서 독창적인 사상가로, 그의 철학은 예술, 정치, 역사의 상호작용을 탐구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벤야민은 특히 예술의 재현과 정치적 잠재력의 관계를 연구하면서, 예술이 단순히 표현의 수단이 아닌 사회적 현실과 변혁적 가능성을 내포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이론인 기술 복제 이론은 예술의 재현 가능성을 논하며, 기술이 예술의 정치적 역할을 어떻게 확장할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특히 AI(인공지능)의 급격한 발전은 예술 창작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AI 시대의 도래는 예술 창작에 있어 기술적 혁명을 일으켰으며, 벤야민의 기술 복제 이론이 AI 창작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에 이르렀다. AI는 예술의 창작 방식을 기술적 확장뿐만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잠재력의 재구성으로 이끌고 있다.
본 연구의 목적은 벤야민의 문학적 사유를 중심으로 그의 철학적 이론들이 AI 시대의 예술과 창작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것이다. 이 연구는 벤야민의 이론이 AI 시대의 문학과 기술적 혁명 속에서 여전히 유효한지 검토하고, AI와 문학의 관계에 대한 정치적, 사회적 의미를 새롭게 정의하려는 시도를 담고 있다. 또한, 벤야민의 예술적 정치성과 AI 창작의 교차점을 다루며, 기술 혁명이 예술의 정치적 가능성을 어떻게 확장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논의할 것이다.
이 연구는 벤야민의 문학 이론을 AI 시대의 문학과 기술적 변혁이라는 현대적 맥락에 맞추어 비판적 사유를 진행하며, 문학이 AI 창작과 정치적 반성을 통해 어떻게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지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할 것이다.
2. 발터 벤야민의 문학적 사유의 중요성
발터 벤야민은 20세기 문학과 철학에서 중요한 사상가로, 그의 문학적 사유는 예술, 역사, 정치의 상호작용을 탐구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벤야민의 문학 이론은 단순히 문학 작품을 분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예술이 정치적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힘을 지닌다는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그의 대표적인 개념인 기술 복제 이론은 예술이 어떻게 대중 매체와 기술적 변혁을 통해 정치적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며, 이는 현대 사회에서 예술의 기능과 사회적 역할을 새롭게 정의할 수 있는 기초가 된다.
벤야민의 문학적 사유는 역사적 유물론을 바탕으로 문학을 통해 과거와 현재, 기억과 혁명의 관계를 탐구한다. 그는 문학이 단순히 사회적 현실을 재현하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문학은 과거의 숨겨진 진실을 드러내고, 현재를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며, 미래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중요한 도구로서의 역할을 한다. 메시아적 시간이라는 벤야민의 개념은 문학이 시간의 흐름을 재구성하여 역사적 변혁의 가능성을 열 수 있다는 중요한 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의 이론은 예술의 재현성과 정치적 잠재력을 강조하면서, 예술이 어떻게 사회적 의식을 변화시키고, 정치적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탐구하였다. 벤야민은 예술과 문학을 사회적 변화를 위한 중요한 도전이자 기회로 바라보았다. 그의 이론은 AI 시대에 문학과 예술이 기술적 혁명 속에서 정치적 잠재력을 어떻게 재조명할 수 있을지에 대한 중요한 사유의 기초를 제공한다.
따라서 벤야민의 문학적 사유는 그 시대를 넘어 오늘날의 문학 이론과 예술적 실천에도 큰 영향을 미쳤으며, AI 시대의 문학적, 철학적 논의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지침이 된다. 벤야민의 이론을 통해 문학이 사회적, 정치적 반성을 이끌어 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 본 연구의 주요 목적 중 하나이다.
3. 문학과 역사, 정치의 교차점: 벤야민의 접근법
발터 벤야민의 철학에서 문학은 단순히 사회적 현실을 반영하는 예술적 표현이 아니다. 문학은 역사와 정치의 중요한 교차점에서 존재하며, 벤야민은 이를 통해 과거와 현재, 사회적 구조와 정치적 현실을 분석하고, 예술이 변혁적 잠재력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그는 문학이 단순히 시대를 반영하거나 역사적 사건을 재현하는 도구가 아니라, 역사적 사건의 재구성을 통해 사회적 현실을 비판하고 정치적 변화를 촉진하는 역할을 한다고 믿었다. 벤야민에게 문학은 역사를 다루는 중요한 방식으로, 역사적 시간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정치적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특히 벤야민은 ‘메시아적 시간’이라는 개념을 통해 역사와 문학의 관계를 혁명적으로 재구성했다. 메시아적 시간은 선형적인 시간 흐름을 거부하며,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미래의 혁명적 가능성을 여는 시간을 의미한다. 이는 단순히 미래를 향한 희망적 예측이 아니라, 과거의 억압된 진실을 현재에서 드러내고, 그 속에서 미래의 변화를 예고하는 혁명적 잠재력을 지닌 시간이다. 벤야민에게 있어 문학은 과거의 고통과 억압된 진실을 현재 시점에서 새롭게 드러내며, 미래의 변화를 촉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메시아적 시간은 문학이 과거와 현재를 얽히게 하여, 미래의 가능성을 여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문학은 선형적 역사관을 넘어, 중단된 시간이나 침묵의 시간을 드러내는 매개체로 기능한다. 이를 통해 벤야민은 문학이 기존의 역사적 시간 구조를 재편성하고 사회적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또한, 벤야민은 예술의 고유성과 복제성에 대해 논하면서, 예술이 대중화되면서도 여전히 정치적 의식을 일깨울 수 있음을 강조했다. 벤야민은 예술이 정치적 변혁을 촉진하는 중요한 도구로 작용할 수 있다고 보고, 문학은 그 변혁의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따라서 벤야민의 접근법에서 중요한 점은 문학이 단순히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정치를 비판적이고 혁명적인 방식으로 재구성하는 능력을 갖춘다는 것이다. 문학은 과거의 억압된 역사를 현재의 사회적 조건과 정치적 상황에서 재조명하며, 이를 통해 미래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중요한 매개체로 기능한다. 벤야민의 문학 이론은 역사적 물질주의와 문학적 해석학을 통해 문학이 역사를 어떻게 다시 쓸 수 있는지에 대한 중요한 철학적 통찰을 제공한다. 벤야민은 문학이 사회적, 정치적 실천으로서의 역할을 하며, 예술과 문학을 통해 역사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김금희의 『너무 한낮의 연애』는 벤야민의 메시아적 시간 개념을 잘 드러내는 작품이다. 필용과 양희는 과거의 상처와 현재의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자신들의 삶을 재구성하려 한다. 필용은 과거의 사랑을 회상하며, 그 기억을 현재로 끌어들여 다시 살아가려 한다. 이 과정에서 메시아적 시간이 구현된다. 과거의 고통은 현재와 얽히며, 시간의 중단을 경험하게 된다. 이는 벤야민이 말한 것처럼,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를 재구성하고, 그 속에서 미래의 가능성을 열어가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과거와 현재가 얽히면서, 이 소설은 사회적 변화와 개인의 변화를 동시에 일으키는 장면을 그린다.
서구 문학에서는 F. Scott Fitzgerald의 『위대한 개츠비』도 메시아적 시간의 예시로 유용하다. 개츠비는 과거의 사랑을 이상화하며, 현재의 자신과 그 사랑을 연결하려 한다. 그러나 그 이상은 결국 현실 속에서 실현되지 않는다. 개츠비의 삶은 과거와 현재의 충돌을 그리며, 미래의 꿈을 실현하려는 욕망을 지닌다. 그의 시간은 과거와 현재의 교차 속에서, 미래의 변화를 기대하며 시간의 왜곡과 중단을 경험하는 것이다. 벤야민의 메시아적 시간은 단순히 시간을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진실을 드러내고 현재의 변화를 일으키며, 미래의 혁명적 가능성을 여는 시간이다. 문학 속에서 과거와 현재의 교차점에서 발생하는 시간의 왜곡은 사회적 변화의 촉진제 역할을 하며, 미래의 변혁을 위한 잠재적인 공간을 창출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4. 논문의 구성과 연구 방법
이 논문은 발터 벤야민의 문학적 사유를 중심으로 역사, 정치, 예술의 상호작용을 탐구하고, 그 이론을 현대 문학과 AI 시대의 예술적 변화와 연관짓는 작업을 진행한다. 본 논문의 첫 번째 부분에서는 벤야민의 문학적 사유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그의 이론이 문학, 역사, 정치의 교차점에서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분석한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벤야민의 역사적 유물론을 바탕으로 한 문학 이론을 다루며, 그가 제시한 '메시아적 시간' 개념을 문학에 적용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이 과정에서 벤야민의 문학적 해석학이 문학과 역사, 정치가 어떻게 결합될 수 있는지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세 번째 부분에서는 벤야민의 철학적 접근법을 현대 문학과 비교하면서, 그 이론이 현재 사회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문학과 예술의 역할을 어떻게 재구성할 수 있는지를 논의한다. 이 장에서는 벤야민의 문학적 사유가 현대의 정치적, 사회적 변혁을 어떻게 이끌 수 있는지에 대한 중요한 논점을 제시한다. 또한, AI와 기술적 변혁이 예술과 문학의 창작 과정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고, 벤야민의 이론이 이 변화에 어떻게 반응할 수 있는지를 다룬다.
본 논문은 벤야민의 이론을 문학 분석뿐만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맥락에서 그의 철학적 사유가 갖는 의미를 현대적 관점에서 재조명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본 논문은 문학 텍스트 분석, 벤야민의 철학적 개념 해석, 그리고 AI 시대의 예술적 실천과의 비교를 주요 연구 방법으로 채택한다. 문학 텍스트 분석은 주로 벤야민의 문학 이론을 적용하여 과거의 텍스트와 현재의 문학 작품 간의 관계를 탐구하며, 이를 통해 문학이 사회적 변화를 어떻게 반영하고 촉진할 수 있는지에 대해 논의한다. 또한, 벤야민의 이론을 AI 창작과 연결시켜 예술적 혁명과 변혁적 잠재력을 논의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Ⅱ. 발터 벤야민: 생애와 철학적 배경
1. 발터 벤야민의 생애와 지적 여정
발터 벤야민(1892-1940)은 20세기 독일 철학의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그의 철학적 작업은 예술, 역사, 정치, 그리고 언어의 관계를 깊이 탐구하며 그 당시 유럽 지성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벤야민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났으며, 그가 성장한 시대는 제1차 세계대전과 독일의 사회적, 정치적 변화가 혼재된 시기였다. 그의 초기 학문적 관심은 주로 문학과 역사에 집중되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적 역사주의, 문화비평 등 다양한 철학적 전통을 탐색하게 된다.
벤야민의 대학 시절은 유럽의 혼란스러운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형성되었다. 그는 프랑크푸르트 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했으며, 특히 역사적 유물론과 문화 비평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의 철학적 작업은 사회적 조건이 인간의 인식과 역사적 경험을 어떻게 구성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벤야민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통해 사회적 변화를 분석하려 했지만, 동시에 그가 탐구한 이론에는 미학적, 예술적 차원에서의 해석이 항상 존재했다. 그는 예술이 단순한 감각적 체험에 그치지 않고, 정치적 및 사회적 해석을 제공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역사철학의 테제』에서 벤야민은 ‘역사적 유물론’을 채택하면서, 역사적 사건의 재구성과 그로 인한 사회적 변화에 대한 혁명적 비전을 제시했다. 특히, 그는 ‘메시아적 시간’의 개념을 통해 과거와 현재의 얽힘을 강조하며, 문학과 예술이 사회적 변혁을 이끄는 중요한 도전이 될 수 있음을 주장했다. 이러한 벤야민의 이론은 단순히 철학적 추상에 머물지 않고, 실질적인 정치적 행동과 변화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데 집중되었다.
벤야민의 철학적 여정은 그가 죽기 전까지, 특히 나치 정권의 위협 속에서 지속되었다. 그는 1933년 나치의 승리 이후 독일을 떠나, 파리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나치의 압박은 그를 결국 죽음으로 내몰았다. 1940년, 벤야민은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탈출하려다 체포되었고,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그가 남긴 유산은 철학과 예술에 대한 독창적이고 혁신적인 접근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의 작업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학자들과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벤야민의 철학적 여정은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제대로 평가되지 않았지만, 그의 사후, 특히 1960년대 이후 그의 작품은 새로운 의미를 얻고 다양한 분야에서 재조명되었다. 그가 남긴 유산은 단지 철학적 사유에만 국한되지 않고, 현대 문학, 예술 이론, 정치 이론에까지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 그의 작품은 많은 지성인들에 의해 여전히 중요한 연구 대상으로 다뤄지고 있다.
2. 벤야민의 철학적 뿌리
1) 마르크스주의와 역사적 유물론
발터 벤야민의 철학에서 마르크스주의는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벤야민은 마르크스주의를 단순한 경제적 이론으로만 이해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회적 현실을 해석하고 역사적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중요한 사유 체계로 수용했다. 그의 마르크스주의적 접근은 특히 역사적 유물론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사회 구조와 역사적 발전을 분석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도구로 기능한다.
벤야민은 마르크스주의가 제시하는 경제적 기반과 그것에 따른 상부 구조(정치, 문화, 예술 등)의 관계를 중요하게 다뤘다. 그는 사회의 발전이 단순히 경제적 요인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화적, 정치적 변화들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즉, 벤야민은 마르크스주의를 사회 전체를 구성하는 복합적인 힘들이 상호작용하는 시스템으로 이해했다. 그는 역사적 유물론을 통해 인간의 역사와 사회의 발전을 물질적 조건과 계급 투쟁에 의해 결정된 것으로 보았지만, 이와 함께 그 시대의 문화와 예술 역시 역사적 발전과 상호작용하는 중요한 요소로 간주했다.
역사적 유물론에 대한 벤야민의 독특한 해석은 특히 “역사적 시간”에 대한 그의 접근에서 나타난다. 그는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사유를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이 지나치게 경제적 결정론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적이었다. 벤야민은 역사적 발전이 단지 경제적 발전의 결과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억압된 진실들이 시간이 흐르며 드러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현대 사회와 문화의 다양한 면을 포괄하는 더욱 복잡한 분석 틀로 확장하고자 했다.
벤야민은 역사적 유물론을 통해 문학, 예술, 문화적 표현이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현실을 어떻게 반영하며, 그 반영이 어떻게 변혁적 잠재력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 깊이 탐구했다. 그의 철학은 단순히 역사적 사실들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억압된 진실을 끄집어내고, 그것이 어떻게 현재의 사회적, 정치적 상황과 연결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그는 또한 역사적 사건을 재구성하는 작업을 통해, 그 사건들이 어떻게 사회적 변화를 이끌 수 있는지를 탐색했다.
특히 벤야민의 작업에서 중요한 점은 “역사적 물질주의” 개념을 통해 역사적 사건들을 단지 시간적인 흐름으로서가 아니라, 그 사건들이 발생한 물질적, 사회적 조건과의 관계 속에서 해석하려는 노력이었다. 그는 사회적 혁명과 변화를 일으키기 위한 문학과 예술의 잠재력을 인식하고, 그것이 마르크스주의적 맥락 안에서 어떻게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강조했다. 벤야민에게 역사적 유물론은 단순히 과거의 사실들을 기술하는 방법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비판적 도구였다.
벤야민의 마르크스주의적 접근은 그의 역사적 해석에서 중요한 기초를 형성하며, 그가 문학과 예술을 분석하는 방식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는 역사적 유물론을 단지 이론적 틀로서가 아니라, 문학과 예술을 분석하는 데 중요한 실제적 도구로 사용했다. 그가 말한 ‘역사적 물질주의’는 단순히 경제적 조건만을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조건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며 역사적 발전을 이끌어내는 지에 대한 깊은 이해를 제공하는 이론적 기초가 되었다.
2) 유물론적 역사주의의 문학적 해석
발터 벤야민은 유물론적 역사주의를 문학 이론에 적용하면서, 문학이 단지 시대의 표면적 재현이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구조의 변화를 드러내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다. 유물론적 역사주의는 역사적 물질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사회적 발전을 경제적 조건과 계급 투쟁을 통해 설명하는 마르크스주의적 접근법을 따른다. 벤야민은 이를 문학 분석에 도입하여, 문학 작품이 단순히 사회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어떻게 촉진할 수 있는지에 대해 탐구했다.
벤야민에게 문학은 단순한 예술적 창작물이 아니다. 그는 문학을 역사적 사건을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바라보았으며, 문학이 사회적 변화를 이끄는 중요한 촉매로서의 역할을 한다고 믿었다. 그의 유물론적 역사주의에서 문학은 단지 과거의 사건을 반복하거나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맥락을 재조명하고 그 속에 억압된 진실을 드러내는 중요한 장치로 기능한다. 이 과정에서 벤야민은 문학이 과거의 고통과 불완전한 진실을 현재의 사회적, 정치적 상황에서 새롭게 재구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고 주장했다.
벤야민은 문학이 특정 시대의 이데올로기를 반영하는 동시에, 그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적 거리를 두고 있다고 봤다. 그는 문학을 사회적 현실을 비판하는 도전적인 실천으로 이해했으며, 특히 문학이 지닌 역사적 잠재력을 강조했다. 문학은 역사적 사건을 다룰 때, 단순히 그 사건의 결과나 사건 자체에 대한 서술을 넘어, 그 사건이 발생한 사회적 조건과 이를 둘러싼 정치적 힘의 관계를 탐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문학은 사회적, 정치적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며, 과거의 역사적 경험을 현대 사회에 적용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
벤야민의 유물론적 역사주의에서 중요한 점은 ‘시간’에 대한 개념이다. 그는 시간을 단순히 선형적인 흐름으로 이해하지 않고, 그 안에 억압된 진실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역사적 사건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 본래의 의미가 왜곡되거나 감추어지게 되며, 문학은 이러한 왜곡된 역사적 경험을 드러내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벤야민은 문학이 역사적 시간의 왜곡을 풀어내고, 과거의 진실을 현재로 끌어와 사회적 반성을 일으키는 데 필수적인 도구라고 주장했다.
또한, 벤야민은 유물론적 역사주의를 통해 문학의 정치적 가능성을 강조했다. 그는 문학이 단지 사회적 현실을 재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사회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실천으로 기능할 수 있다고 봤다. 문학은 단순히 사회적, 정치적 상황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상황을 극복하려는 혁명적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는 특히 예술과 문학이 그 변혁적인 잠재력을 발휘하는 데 있어, 대중적 접근을 통해 사회적 의식을 고취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벤야민은 문학이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며, 그들로 하여금 사회적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하고, 정치적 변화를 추구하도록 자극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이와 같이 벤야민의 유물론적 역사주의는 문학을 단순한 반영적 재현이 아니라, 사회적 변화를 촉진하는 중요한 도전으로 간주한다. 그는 문학이 과거와 현재, 사회적 구조와 정치적 현실을 엮어내며, 그 속에서 미래의 혁명적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보았다. 벤야민의 문학 이론은 역사적 유물론을 바탕으로 한 사회적, 정치적 실천으로서 문학을 재정의하며, 그 문학적 해석이 가진 변혁적 잠재력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제공한다.
3) 문화비평과 예술의 정치적 가능성
발터 벤야민은 예술과 문화가 단순한 미적 경험에 그치지 않고, 정치적 의미와 변혁적 잠재력을 지닌 중요한 사회적 도구라고 보았다. 벤야민의 문화비평은 그가 살았던 시대의 사회적, 정치적 조건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며, 예술이 그 속에서 어떻게 사회 변화를 촉진할 수 있는지에 대한 깊은 고민을 담고 있다. 그는 예술이 시대를 반영하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예술의 고유성과 복제성을 통해 정치적 가능성을 탐구했다.
벤야민의 문화비평에서 핵심적인 요소는 예술의 ‘복제성’이다. 그는 예술작품이 대중화되면서, 예술의 ‘오리지널리티’가 상실되고 복제된 형태로 대중에게 전달되는 과정을 분석했다. 벤야민은 이 복제성을 예술의 퇴화나 무력화가 아닌, 오히려 정치적 잠재력이 자아내는 중요한 지점으로 보았다. 특히, 영화와 같은 대중 예술이 복제된 예술작품을 대중에게 전파하는 과정에서 정치적 의식을 일깨우고, 대중이 사회적 현실을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다. 예술의 복제성은 예술이 대중에게 다가가고, 그들로 하여금 정치적 의식을 갖게 만드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
벤야민의 ‘기술적 복제’ 이론은 예술이 대중화되는 과정에서 그 정치적 의미를 어떻게 전개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중요한 키워드로 작용한다. 그는 예술이 대중화됨으로써 ‘아우라’를 잃게 된다고 보았다. 전통적인 예술작품은 그 고유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이 작품에 깃든 ‘아우라’라는 독특한 힘을 부여했다. 그러나 대중화된 예술, 특히 영화와 같은 대중 예술은 그 ‘아우라’를 잃게 되며, 이는 예술을 더 넓은 사회적, 정치적 맥락에서 경험하게 만든다. 벤야민은 예술이 ‘아우라’를 잃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를 예술이 대중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중요한 전환점으로 해석했다.
이와 같은 벤야민의 시각은 예술이 단순히 개인의 내면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문제를 제기하고 그에 대한 비판적 접근을 촉진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예술의 사회적 기능을 중시한 벤야민은 예술이 그 본질을 상실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중과의 연대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고, 이를 통해 사회적 변혁을 가능하게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예술이 정치적 변혁의 중요한 도전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예술은 그 자체로서 정치적 현실을 변화시키지는 않지만, 정치적 의식을 자극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기존의 사회적 구조와 그에 대한 반응을 새롭게 바라보도록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벤야민은 예술이 특정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도구로만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그 이데올로기를 도전하고, 사회적 조건을 변화시키기 위한 비판적 실천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예술을 통한 문화비평은 사람들에게 권력 구조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제공하고, 그들이 기존의 현실을 넘어서는 새로운 가능성을 상상하도록 자극할 수 있다.
벤야민의 예술의 정치적 잠재력에 대한 생각은 그가 문학과 예술을 혁명적 잠재력을 지닌 도전적인 사회적 실천으로 바라본 데에서 기인한다. 예술은 기존의 사회 질서를 그대로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으며, 오히려 그 질서를 넘어서는 혁명적 변화를 위한 촉매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철학적 입장은 예술이 단순한 미적 표현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변화를 추구하는 정치적 행위로 발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문학과 예술은 변화의 가능성을 엿보며, 그 과정에서 기존 권력과 이데올로기를 비판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힘을 지닌다.
따라서 벤야민의 문화비평은 예술이 정치적 도전으로서 기능하는 가능성을 강조하며, 예술을 통한 사회적 반성은 현대 사회에서 예술의 중요성을 더욱 부각시키는 요소로 작용한다. 예술이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들의 정치적 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있어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는 벤야민의 주장은 여전히 현대 예술의 중요한 이론적 기초를 형성하고 있다.
3. 역사와 정치에서의 벤야민의 철학적 위치
발터 벤야민은 역사와 정치의 관계를 탐구하면서, 그가 살았던 시대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기존의 역사적 해석 방식을 넘어서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그의 철학은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적 유물론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단순한 경제적 결정론을 넘어 인간 경험의 복잡성과 그것이 반영되는 예술적, 문화적 표현을 중시했다. 벤야민의 철학적 위치는 역사와 정치가 어떻게 얽히고, 그 안에서 예술과 문학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깊은 고찰을 바탕으로 한 독창적인 시각을 제공한다.
벤야민은 역사적 물질주의와 정치적 분석을 통해 인간의 역사를 그 자체로 단순히 과거의 재현이 아닌, 현재의 정치적 현실과의 관계에서 다시 쓸 수 있는, 혁명적 가능성을 지닌 과제로 보았다. 그는 전통적인 역사 해석이 사회적 구조와 정치적 힘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고 비판하며, 과거의 사건들이 그 당시의 권력 구조와 얽혀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벤야민은 역사적 사건이 그 당시의 사회적, 정치적 맥락을 넘어서, 현재와 미래의 변화를 위한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고 믿었다. 즉, 그는 역사를 선형적인 흐름이나 단순한 사건의 나열로 보지 않고, 그 속에 숨겨진 가능성과 의미를 드러내려 했다.
그의 메시아적 시간 개념은 역사적 사건을 분석하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며, 이는 벤야민의 정치적 분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메시아적 시간은 선형적 시간의 흐름을 거부하고,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미래의 가능성을 여는 혁명적 시간을 말한다. 벤야민은 역사를 단지 과거의 사실들로 해석하지 않고, 그 과거가 현재의 상황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며, 그것을 통해 미래의 변화를 예고할 수 있는지에 대해 사유했다. 이와 같은 역사적 해석은 단순히 과거를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현재와 연결시키고 미래의 사회적, 정치적 변화를 위한 기회를 여는 방식으로 사고하는 것이다.
벤야민의 역사와 정치에 대한 철학적 접근은 혁명적 잠재력을 강조한다. 그는 사회적 변화를 위한 실천이 문학과 예술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으며, 이러한 실천이 정치적 혁명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주장했다. 그는 예술이 단지 미적 경험을 넘어, 사회적 현실에 대한 비판적 사유와 정치적 반성을 이끌어낼 수 있는 중요한 도구로 작용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철학에서 예술은 정치적 상황을 재구성하고, 사회적 조건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며, 이를 통해 정치적 혁명에 대한 가능성을 열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벤야민은 역사적 사건들을 단순히 과거의 사실들로 취급하지 않고, 그것들이 현재의 정치적 현실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를 파악하는 중요한 방법론을 제시했다. 그는 역사적 사건을 분석할 때 그 사건을 구성하는 다양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요소들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그 속에서 억압된 진실을 드러내려 했다. 그의 역사적 물질주의는 사회적 변화와 역사의 재구성을 위한 중요한 이론적 틀을 제공하며, 그가 문학과 예술에서 말한 혁명적 잠재력과 맞물려, 정치적 변혁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벤야민의 철학적 위치는 역사와 정치의 관계를 단순히 이론적 논의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사회적 변화와 연관지으며 이를 통한 정치적 실천을 강조하는 데 있다. 그의 사유는 예술과 문학을 통해 정치적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으며, 그가 남긴 철학적 유산은 오늘날까지도 정치적 사유와 문화적 해석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벤야민의 역사와 정치에 대한 철학적 접근은 단순히 과거를 이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재와 미래를 대비하며 사회적, 정치적 변화를 위한 실천적 동기를 제공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Ⅲ. 발터 벤야민의 문학 이론
1. 문학과 혁명적 가능성: 벤야민의 역사적 재현 이론
발터 벤야민의 문학 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문학이 단순히 사회적 현실을 반영하는 도구가 아니라, 역사적 재현을 통해 혁명적 가능성을 여는 중요한 수단으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벤야민은 문학을 과거의 사건을 단순히 재현하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문학이 역사적 사건을 혁명적으로 재구성하며, 정치적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도전적 요소로서의 역할을 한다고 강조했다. 역사적 유물론을 기초로 한 그의 이론은 문학이 사회적 변화의 촉매가 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벤야민은 문학이 과거를 단순히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의 사회적, 정치적 맥락을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문학을 통해 과거의 억압된 진실을 드러내고, 그 진실을 현재의 정치적 맥락에서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려 했다. 벤야민의 이론에서 문학은 선형적인 시간의 흐름을 넘어서, 혁명적 시간으로서 과거와 현재를 교차시키며 미래의 정치적 가능성을 여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문학은 벤야민에게 있어 역사적 사건의 재구성을 통해 사회적 변화를 촉발하고, 그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는 방식으로 작용한다. 혁명적 재현이라는 개념은 문학이 과거의 사건을 새로운 시각에서 재구성함으로써 사회적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벤야민에게 문학은 정치적 실천이자 역사적 실천으로서, 과거의 사건을 재구성하며 그 속에서 혁명적 가능성을 찾아내는 중요한 도전이 된다.
이렇게 벤야민은 문학을 혁명적 가능성을 여는 예술의 한 형태로 보고, 그 문학적 재현이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문학은 단순히 사건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재구성하고, 그 속에서 새로운 정치적 의미와 사회적 현실을 열어주는 역할을 한다. 이를 통해 벤야민은 문학이 단순한 예술적 표현을 넘어서, 정치적 변화를 이끄는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2. 문학과 예술의 정치적 잠재력: 과거와 현재의 상호작용
발터 벤야민의 문학 이론에서 문학과 예술은 단순한 미적 경험이나 감상적 재현을 넘어, 정치적 잠재력을 지닌 중요한 실천으로 기능한다. 벤야민은 문학을 역사와 정치의 맥락에서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수단으로 바라보았다. 특히, 그는 문학이 과거와 현재를 어떻게 교차시키며, 그 속에서 미래의 가능성을 열어갈 수 있는지에 대해 강조했다. 벤야민의 이론에서 문학은 시간의 왜곡과 침묵의 시간을 드러내며, 역사적 재구성을 통해 정치적 변화를 촉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메시아적 시간이라는 개념에서 벤야민은 과거의 진실이 현재와 결합되는 지점에서 미래의 혁명적 가능성이 열린다고 보았다. 그는 문학이 단순히 과거를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결합하여 새로운 정치적 현실을 창출할 수 있는 힘을 지닌다고 주장했다. 이 개념은 문학이 선형적 역사관을 넘어서, 시간의 중단과 왜곡을 드러내며, 그 속에서 사회적 변화의 촉진제로 작용하는 방식을 제시한다.
벤야민은 예술의 고유성과 대중화된 예술이 정치적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 지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부여했다. 예술이 대중적 재현을 통해 정치적 의식을 일깨울 수 있다는 점에서, 문학 또한 대중의 감각을 자극하며 정치적 비판의 중요한 도구가 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그의 이론은 문학이 대중화되었을 때, 대중적 정치적 잠재력을 지니고 있으며, 그 잠재력은 변혁을 이끄는 촉매 역할을 한다는 점을 명확히 한다.
따라서 문학과 예술은 과거와 현재의 상호작용을 통해 새로운 정치적 의미를 창출하고, 그 속에서 사회적 변화를 위한 잠재적 가능성을 발견하는 중요한 매개체로 기능한다. 벤야민은 문학이 역사적 사실을 재구성하면서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고, 이를 통해 미래를 향한 새로운 정치적 가능성을 열어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관점은 문학이 단순히 재현의 도구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변혁을 위한 핵심적인 실천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3. 대중 감각과 문학: 벤야민의 영화 이론과 텍스트의 관계
발터 벤야민은 영화 이론을 통해 대중 예술과 그 정치적 잠재력에 대해 깊은 통찰을 제공했다. 특히 그는 대중적 예술, 특히 영화가 어떻게 대중 감각을 형성하고 그것을 정치적 실천으로 전환할 수 있는지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의했다. 벤야민은 예술이 대중화되면서도 여전히 그 고유한 정치적 의식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으며, 이와 같은 생각은 문학에도 적용될 수 있다. 문학 역시 대중적 감각을 자극하고, 정치적 비판과 사회적 변화를 촉진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예술 형식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벤야민은 영화가 대중의 감각을 변형하는 방식에 대해 설명하면서, 영화가 텍스트를 재구성하고 그것을 대중적 형식으로 기술적으로 복제함으로써 시각적 재현을 가능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그는 영화가 대중적 감각을 형성하면서도 여전히 정치적 의식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다. 문학도 마찬가지로 대중 감각을 자극하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으며, 텍스트의 재현이 어떻게 정치적 의식을 자극하고 사회적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할 수 있다.
예시로, 조지 오웰의 『1984』를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전체주의 사회에서의 국가 통제와 감시 사회를 묘사하며, 대중 감각을 어떻게 조작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오웰은 ‘빅 브라더’라는 존재를 통해 감시와 통제가 어떻게 일상화되고, 개인의 자유가 어떻게 억압되는지를 그렸다. 이 작품에서 대중 감각은 모든 개인이 감시를 당하고 있다는 인식으로 형성되며, 국가의 권력은 이를 통해 대중을 통제한다. 벤야민의 기술적 재현 개념을 이 작품에 적용하면, 『1984』는 기술적 수단을 통해 대중 감각을 변화시키고, 이를 정치적 의식으로 전환하는 방식으로 문학의 정치적 잠재력을 드러낸다.
또 다른 예시로,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기다림과 무의미의 주제를 중심으로, 대중 감각과 그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무기력감을 표현한다. 베케트는 대중적 감각이 어떻게 불확실성과 기다림의 상태에서 형성되는지를 보여준다. 이 작품은 기술적 재현의 개념을 문학에 적용한 예로 볼 수 있으며, 일상의 의미 없음과 사회적 역할의 무력함을 강조하며 대중에게 새로운 정치적 의식을 일깨운다. 또한, 베케트는 대중이 경험하는 감각을 변화시키고, 정치적 의식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가능성을 문학을 통해 제시한다.
이렇게, 벤야민의 영화 이론과 문학의 관계를 이해할 때, 문학은 기술적 재현과 대중 감각을 자극하며, 정치적 의식을 고취시키는 중요한 수단임을 보여준다. 문학은 대중에게 정치적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며, 사회적 현실을 비판하고 변화시키는 촉매로 작용할 수 있다. 벤야민은 예술이 대중화되어도 여전히 고유한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문학은 이를 통해 대중의 감각을 변화시키고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능력을 지닌다. 이러한 관점은 문학이 단순한 예술적 재현을 넘어서, 사회적, 정치적 실천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핵심적인 의미를 지닌다. 벤야민의 이론은 영화뿐만 아니라 문학에서도 대중 감각을 자극하고, 그것을 정치적 실천으로 전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며, 문학이 사회적 변화의 중요한 촉매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Ⅳ. 역사와 문학: 벤야민의 역사적 물질주의와 문학의 관계
1. 역사적 유물론과 문학: 벤야민의 문학적 해석학
벤야민의 역사적 유물론은 단지 계급 투쟁의 도식적 서사를 규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지워지고 억압된 기억의 파편들을 현재 속으로 소환하는 비판적 실천으로 전환된다. 그는 1940년 프랑스 망명 중에 집필한 유고 「역사 개념에 대하여」(독일어 원제: Über den Begriff der Geschichte)에서 이러한 역사 인식의 핵심을 제시한다. 이 텍스트는 총 18개의 단문으로 이루어진 철학적 테제 형식의 글로, 그의 사후인 1950년에 발표되었다. 벤야민은 이 글에서 진보적 역사관의 연속성을 비판하고, “과거의 이미지가 위기 속의 현재에 번쩍 빛나는 순간(blitzhaft aufscheint)”을 역사 인식의 계기로 제시한다. 여기서 역사는 더 이상 과거에 종속된 연대기가 아니라, 현재 속에서 돌연히 출현하는 파편적 진실이며, 이로써 억압된 자들의 기억이 복권되고 해방의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이러한 역사 인식은 문학 해석에서도 동일하게 작동한다. 벤야민에게 문학은 단순한 허구나 자율적 미학의 산물이 아니라, 억압된 삶의 흔적이 언어의 형태로 응축된 역사적 파편이다. 그는 문학 텍스트를 시간의 연속적 흐름 안에서 이해하기보다, 특정한 순간에 돌연 빛을 발하는 지금-여기(Jetztzeit)의 장치로 읽는다. 문학은 과거를 현재에 불러들이는 장이며, 그 불연속적이고 파편적인 형식 속에 망각된 감각과 말해지지 못한 고통의 흔적이 새겨져 있다. 따라서 벤야민의 문학 해석학은 단순한 의미 분석이나 미학적 감상의 차원을 넘어, 역사의 균열 속에서 살아남은 잔여들의 정치적 복원으로 나아간다.
이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보들레르에 대한 분석이다. 벤야민은 『보들레르의 몇몇 주제에 대하여』(1939)와 미완의 프로젝트인 『파사젠베르크』(The Arcades Project)에서 19세기 자본주의 도시 파리의 구조 속에서 시인의 감각과 언어가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추적한다.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산책자(flâneur)’ 개념은 도시를 방랑하는 인물이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라,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시각적 감시와 상품 소비의 구조 속에 포섭된 주체이자 객체임을 드러낸다. ‘산책자’는 파리의 아케이드를 유영하며 도시적 감각을 흡수하는 존재이지만, 감각과 지각의 방식 자체가 상품화되는 시대에 대한 비판적 감수성을 함축한 인물이기도 하다. 벤야민은 이 산책자의 감각적 체험 속에서, 역사적 조건이 개인의 감정과 언어, 심지어 인식 방식에까지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탐색한다. 그는 문학 텍스트를 자율적 미학의 산물이 아니라, 역사적 삶이 응축된 표상으로 읽어내며, 그 안에서 억압된 주체의 감각과 기억의 정치학을 끌어올린다.
이러한 해석은 다시금 「역사 개념에 대하여」로 되돌아간다. 벤야민은 이 테제들에서 역사를 단지 승자들의 기록으로 보지 않고, 기억되지 못한 존재들의 해방을 위한 실천의 장으로 사유한다. 문학 역시 이러한 실천의 가능성을 내포한 공간으로서, 과거의 잔여를 현재로 소환하고, 지금-여기에서의 감각적·정치적 실천으로 되살아나는 구조물을 이룬다. 이로써 문학은 역사와 미학, 감각과 정치가 교차하는 장소가 되며, 벤야민의 역사적 물질주의는 문학 텍스트 해석에 있어 급진적인 감각의 윤리를 요청하게 된다.
2. 문학에서의 시간 개념: ‘메시아적 시간’과 혁명적 가능성
벤야민의 역사철학에서 시간은 연속적이고 진보적인 흐름이 아니라, 단절과 파열을 통해 의미화되는 파편적 구조를 가진다. 그는 시간의 흐름을 절대화하는 전통적 역사관을 비판하며, 그 자리에 메시아적 시간(Messianische Zeit)이라는 급진적 개념을 제시한다. 「역사 개념에 대하여」에서 제시된 총 18개의 테제 중 18번째 테제에서 그는 “각각의 지금은 메시아적 시간이 열릴 수 있는 작은 문이다”라고 말한다. 이때 ‘지금’은 단순한 현재가 아니라, 억눌린 과거의 진실이 위기의 순간에 번개처럼(blitzhaft) 현재 속으로 돌연히 출현하는 ‘지금-여기(Jetztzeit)’를 의미한다. 메시아적 시간은 종말적 예언이나 신학적 기다림이 아니라, 기존 질서의 정지를 통해 역사의 흐름을 끊고 다른 시간의 가능성을 여는 급진적 계기로 작동한다.
이러한 시간 개념은 문학에서의 시간 구성 방식과 깊이 있게 교차한다. 벤야민에게 문학은 단순히 시간을 따라 흐르는 내러티브 구조가 아니라, 시간을 비트는 실천이자 기억의 불연속성을 드러내는 감각적 형식이다. 그는 『보들레르의 몇몇 주제에 대하여』(1939)에서 보들레르의 시적 이미지들이 파리라는 도시 공간에서 발생하는 감각적 충격(Chockerlebnis)의 결과로 등장한다고 분석한다. 이러한 충격은 시간의 흐름을 일시적으로 중단시키며, 과거의 기억이 현재 속에서 감각적으로 재현되는 순간을 열어 보인다. 이때 시적 언어는 과거의 사건을 재현하지 않으며, 오히려 과거의 억압된 감각을 지금-여기의 체험으로 전환한다. 문학은 이렇게 시간의 연속성을 해체하고, 파편화된 기억과 감각의 결절점 속에서 과거의 가능성을 현재에 다시 여는 메시아적 장치로 기능한다.
이러한 시간성과 문학적 실천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마들렌의 향기를 통해 불쑥 떠오르는 기억의 장면은, 연대기적 회상이 아니라 감각적 접촉을 통한 시간의 탈주를 보여준다. 벤야민은 이 기억의 방식이 ‘지금-여기’의 형식과 상통한다고 보며, 문학이 시간을 따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틈을 열어 비선형적인 진실을 드러낸다고 이해한다. 『일방통행로』(1928)에서도 그는 파편적인 형식과 단속적 이미지들을 통해 문학 자체가 시간을 비트는 공간이 될 수 있음을 실험한다. 이러한 비선형적 서술 구조와 이미지의 분절은 단지 형식적 실험이 아니라, 기억되지 못한 역사와 억압된 감각을 복권하는 문학적 윤리의 실천이다.
문학은 이러한 점에서 메시아적 시간의 잠재성을 구현하는 장이 된다. 문학 속에서 시간은 더 이상 흐르는 것이 아니라, 정지하고 충돌하며, 새로운 인식의 가능성을 낳는 역동적 장치가 된다. 메시아적 시간은 단순한 종교적 구원이 아니라, 억눌린 과거가 현재에 파열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지배적인 시간 질서에 균열을 내고, 감각과 인식의 구조를 정치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벤야민에게 문학은 이 메시아적 시간의 가장 감각적이고 정교한 구현이며, 그 안에 현실을 전복할 수 있는 혁명적 각성의 잠재력이 내재해 있다. 문학은 바로 그 때문에 미학적 자율성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으며, 시간 자체에 개입하는 철학적·정치적 실천의 장소로 자리매김된다.
3. 벤야민의 역사적 시간과 문학적 재현: 과거와 현재의 상호작용
발터 벤야민의 역사철학은 시간과 재현의 문제를 전통적 인식론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그는 「역사 개념에 대하여」(1940)에서, 기존의 역사 서술이 지닌 연속성과 진보의 신화를 비판하며, 그 자리에 단절, 파편, 침묵의 시간을 사유의 중심에 위치시킨다. 특히 테제 6번과 17번, 18번 등에서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것은, 과거의 이미지가 위기의 현재에 번쩍이며 출현할 수 있다는 생각, 즉 지금-여기(Jetztzeit)의 개념이다. 이는 역사란 단순히 과거의 사실을 축적하는 행위가 아니라, 현재 속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감각되고 해석될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 정치적 사건이라는 관점에서 나온다. 이때 시간은 선형적으로 흐르지 않으며, 오히려 파열의 순간에 과거의 억압된 진실이 현재를 덮치듯 출현하고, 그 순간은 곧 메시아적 시간으로 전환된다.
벤야민은 이러한 사유를 단지 추상적 명제로 남기지 않는다. 그의 미완의 저작 『파사젠베르크』(The Arcades Project)와 『보들레르의 몇몇 주제에 대하여』에서는 이론이 구체적인 문화적 장면과 예술작품에 적용된다. 그는 보들레르의 시를 분석하면서, 시적 이미지가 연대기적 질서 속에 있지 않고, 산책자(flâneur)의 도시적 경험처럼 단절적이고 충격적인 감각의 단위로 구성된다고 보았다. 이 감각의 순간은 과거의 경험이 현재 속에 ‘번개처럼’ 출현하는 장면이며, 시인은 그것을 언어로 포착하는 자이다. 이때 문학은 시간의 흐름을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 그 자체를 정지시키고 다른 층위의 시간을 열어 보이는 매개 장치로 작동한다.
문학은 이러한 벤야민적 시간 인식의 실험장이 된다. 문학 텍스트는 과거를 회상하는 공간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가 충돌하는 교차점이자, 기억되지 못한 자들의 목소리가 현재 속에서 재현되는 정치적 장소가 된다. 문학의 재현은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역사적 진실을 ‘지금 여기’로 다시 호출하는 감각적 실천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는 벤야민의 시간 개념과 문학의 윤리에 정교하게 호응하는 동시대적 실천 사례로 분석될 수 있다.
이 소설은 제주 4·3 사건이라는 역사적 국가폭력의 장면을 중심으로, 그 기억의 구조를 현재의 감각과 언어를 통해 복원하려는 시도를 전개한다. 그러나 복원은 단순한 사실의 기술이 아니라, 파괴된 장소, 침묵한 증언자들, 불에 탄 풍경의 감각적 파편들을 통해 과거의 억압된 진실이 지금 이 순간, 독자의 감각에 도달하도록 구성된다. 화자는 체험하지 않은 과거를 탐문하지만, 그것은 문서화나 사실 확인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감각과 윤리적 응답을 통해 지금 이곳의 현실에 침투하는 사건이 된다.
예컨대, 학살이 일어난 마을을 방문하며 땅의 냄새와 색, 침묵한 증언자들의 얼굴을 감각하는 장면에서, 과거는 박제된 연대기가 아니라 감각의 층위에서 현재화되는 기억으로 다시 등장한다. 한강은 이를 ‘재현’하지 않는다. 오히려 말하지 않음, 중단, 단절, 침묵 같은 벤야민적 시간 구조를 따르며, 독자로 하여금 과거의 진실과 불온한 감각에 직접 닿게 만드는 문학적 메시아성을 구현한다. 이는 과거의 구체적 이미지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미지의 결여 자체가 하나의 언어이자 윤리적 요청이 되는 방식이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이러한 방식으로 벤야민이 말한 “역사의 구원을 위한 투쟁”을 문학적 감각의 층위에서 실현한다. 억압된 자들의 말해지지 않은 진실을 지금-여기에서 다시 읽고 응시하게 함으로써, 문학은 시간을 따라 흐르지 않고, 시간의 결을 거슬러 역사의 숨은 구조를 드러내는 정치적 실천이 된다. 한강의 문학은 그렇게 메시아적 시간이 열리는 작은 문이 되고, 말해지지 않은 자들과의 ‘작별하지 않음’이라는 윤리적 태도로 독자를 초대한다.
Ⅴ. 정치적 문학: 예술과 정치적 잠재력
1. 문학과 정치의 교차점: 벤야민의 예술적 정치성
—프란츠 카프카의 『소송』과 『성』을 중심으로
발터 벤야민에게 문학은 미학적 자율성을 넘어서는 정치적 잠재력을 지닌 실천의 장이다. 그는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작품』(1936)에서, 예술은 감각의 구조를 재편하고, 기존 질서를 뒤흔드는 매체로 기능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술이 정치화되지 못할 때, 파시즘은 오히려 정치를 미학화한다고 경고하며, 예술은 대중의 참여를 촉발하고, 현실에 대한 인식을 갱신하는 장으로 존재해야 한다고 본다. 벤야민의 이런 예술관은 직접적으로는 연극이나 영화에 대한 사유 속에서 전개되었지만, 문학 역시 그에게 감각을 정치적으로 전환시키는 가장 정교한 실천으로 간주되었다.
그는 프란츠 카프카를 이러한 문학의 정치적·윤리적 잠재성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작가로 보았다. 1934년 발표한 「프란츠 카프카 ― 천사, 번역자, 블록의 암호」에서 벤야민은, 카프카의 세계를 단순히 부조리하거나 비현실적인 것으로 간주하지 않고, 근대 권력의 익명성과 체제의 비가시적 폭력 속에서 고통받는 주체의 윤리적 몸짓으로 해석한다. 특히 『소송』과 『성』은 명확한 이유 없이 탄압하고 침묵하는 체제의 질서 앞에서, 개인이 어떻게 끝없는 응답의 요구와 실패 속에 놓이는지를 형상화한다. 벤야민은 이러한 카프카의 인물들이 기적을 기다리는 자가 아니라, 응답할 수 없음 속에서도 끝내 말을 건네려는 존재라고 보았다.
『소송』에서 K.는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법정에 소환되고, 체계에 매여 죽음에 이르는 인물이다. 그가 마주하는 것은 가시화되지 않는 권력과 규칙이며, 그것은 법이라는 이름의 무규칙성과 의미의 과잉 속에서 완강하게 침묵하는 체제이다. 벤야민은 K.의 행동을 실패한 저항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의미 없는 질서에 반복적으로 다가가고, 그 안에서 의미를 생성하려는 행위 자체가 정치적이라고 본다. 이러한 행위는 어떤 결과를 낳지 않더라도, 의미 부재의 세계에서의 윤리적 시도이며, 그 자체로 체제를 균열 내는 미세한 실천이다.
『성』에서도 주인공 K.는 성(城)이라는 체계에 도달하려 하지만, 그에 대한 응답은 끊임없이 연기되거나 왜곡된다. 이 작품에서 ‘성’은 단지 억압적 권위가 아니라, 끊임없는 지연과 침묵, 정보의 불투명성이라는 방식으로 개인을 통제하는 구조로 작동한다. 카프카는 이러한 통제의 방식 속에서 주체가 실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윤리적 가능성, 즉 말을 잃지 않는 것, 자리를 떠나지 않는 것을 탐색한다. 벤야민은 이 점에서 카프카의 문학을 구원의 부재 속에서 메시아적 순간을 추구하는 실패의 윤리학이라고 이해한다. 그것은 초월적 구원의 약속이 아니라, 말해질 수 없음을 감수하면서도 말하려는 행위, 응답받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문을 두드리는 행위 자체에서 발생하는 정치적 감각이다.
카프카의 문학은 이처럼 정면으로 체제를 비판하거나 혁명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 대신, 억압의 체계가 작동하는 감각적 구조 자체를 드러내며, 거기서 벗어나기 위한 언어의 가능성을 미세하게 탐색한다. 벤야민에게 이는 문학이 수행할 수 있는 가장 급진적이고 세밀한 정치적 실천이다. 의미의 결핍 속에서도 언어를 포기하지 않고, 실패할 수밖에 없는 대화를 반복하며 체제의 균열을 끌어내는 이 문학적 행위는, 벤야민이 말하는 예술의 정치화가 비로소 구현되는 장면이다.
2. ‘폭력’과 ‘법의 중지’: 벤야민의 정치적 이론과 문학적 실천
—소포클레스 『안티고네』를 중심으로
발터 벤야민은 「폭력 비판을 위하여」(Zur Kritik der Gewalt, 1921)에서 법, 정의, 폭력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사유하려는 급진적 시도를 전개한다. 그는 이 글에서 법을 정초하는 폭력(gründende Gewalt)과 법을 유지하는 폭력(erhaltende Gewalt)의 구분을 도입하며, 기존의 폭력 개념들이 놓치고 있는 정의의 가능성으로서의 폭력, 즉 ‘신적 폭력(göttliche Gewalt)’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벤야민에 따르면, 대부분의 제도화된 폭력은 결국 법을 창출하거나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동하며, 이 두 폭력 모두 수단-목적의 연쇄 구조에 갇혀 있다. 법을 정초하는 폭력은 새로운 질서를 세우기 위해 행사되는 원초적 폭력이고, 법을 유지하는 폭력은 그 질서를 지키기 위해 일상적으로 행사되는 제도적 폭력이다. 이 둘 모두는 본질적으로 정치 권력의 자기 보존과 관련되며, 궁극적으로는 폭력이 법을 정당화하고, 법이 폭력을 승인하는 순환 구조 속에 있다.
이에 반해 벤야민은 정당하지 않지만 정의로운 폭력이라는 개념으로서 신적 폭력을 상정한다. 이 폭력은 법을 정초하거나 유지하지 않으며, 기존의 법 질서를 급진적으로 중단시키는 힘이다. 신적 폭력은 목표를 갖지 않으며, 수단과 목적의 질서 자체를 무화시킨다. 그것은 초월적 규범에 근거한 새로운 법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법 자체를 침묵시키는 중지의 계기로 작동한다. 벤야민에게 신적 폭력은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말해질 수 없는 정의를 실현하는 비가시적·비제도적 개입이다. 이 개념은 윤리와 정치의 접점을 비가시적인 차원에서 재사유하도록 요청하며, 법이 무력해지는 순간 발생할 수 있는 예외적 정의의 가능성을 문학적 상상력의 영역으로 확장한다.
이러한 이론적 사유는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에서 놀라울 만큼 정교하게 문학적으로 구현된다. 이 고대 비극은 국가의 법과 신의 법, 공적 권위와 사적 윤리, 제도화된 폭력과 초월적 정의 사이의 긴장을 극적으로 형상화한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크레온과 안티고네라는 두 인물이 대립하고 있다. 크레온은 테베의 왕으로서 폴뤼네이케스의 매장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며, 국가 질서와 공적 권위를 법의 이름으로 정당화한다. 반면 안티고네는 신의 법과 혈연의 윤리를 근거로 그 명령을 거부하고, 형의 시신을 매장하려는 시도를 감행한다.
이때 크레온의 법은 벤야민이 말하는 법을 정초하고 유지하는 폭력의 전형이다. 그는 새로운 정치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죽은 자를 둘로 나누고, 반역자의 시신은 매장조차 허락하지 않음으로써 국가의 힘을 과시하는 폭력적 선언을 수행한다. 이 선언은 폭력에 의해 세워지고, 지속되며, 그 권위를 침해하는 자는 다시 폭력적으로 처벌된다.
반면 안티고네의 행위는 그 법에 대한 저항이지만, 새로운 법을 세우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녀는 어떤 제도적 변혁을 기획하지 않고, 다만 죽은 자의 권리를 보호하고, 인간 존재의 존엄에 대한 감각적 진실을 실현하려 할 뿐이다. 특히 그녀는 왕의 명령보다 핏줄에게 당기는 윤리를 따른다. 그녀가 매장을 강행하는 것은 단지 형제에 대한 감정이나 관습적 충성이 아니라, 피를 나눈 존재가 죽음 이후에도 모욕당해서는 안 된다는 존재론적 윤리 감각에 근거한 것이다. 이 윤리는 개인적 정서나 종교적 신념의 차원을 넘어서며, 국가의 법이 무효화하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 관계를 지키려는 시도이다.
이러한 안티고네의 행위를 벤야민의 개념으로 해석하면, 그녀는 법을 정초하지 않으며, 유지하지도 않는—그러나 바로 그 법을 중단시키는 ‘신적 폭력’의 매개자로 기능한다. 벤야민에게 있어 신적 폭력은 초월적이되 구체적인 인간의 행위 속에서 출현하며, 정치적 목적을 향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기존 질서를 무력화하는 중단의 힘을 지닌다. 안티고네는 형의 시신을 매장함으로써 크레온의 법을 무너뜨리는 새로운 질서를 세우지 않는다. 그녀는 말하지 않고, 요구하지 않으며, 다만 죽은 자에게 도달하려 한다. 이것이 바로 벤야민이 ‘신적 폭력’이라 부르는 윤리적 중단, 말해질 수 없는 정의의 순간적 현현이다.
안티고네는 죽음이라는 극단적 결과를 받아들이면서도, 자신의 행위가 윤리적 응답임을 확신한다. 그녀의 저항은 무력하고, 결과적으로 실패하지만, 그 실패 자체가 법의 정당성을 붕괴시키는 윤리적 근거로 기능한다. 크레온은 자신의 권위가 파국에 이른 뒤에야 법의 폭력성을 인식하며,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손실 앞에서 절망하게 된다. 이처럼 『안티고네』는 폭력이 정의를 대체하는 순간, 그리고 정의가 폭력을 중단시키는 순간을 동시에 보여주는 비극이다.
벤야민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안티고네』는 법이 지배하는 세계 속에서 정의가 어떻게 비가시적이고 초월적인 방식으로 현현할 수 있는가를 묻는 문학적 실험이다. 신적 폭력은 제도적 해방을 약속하지 않지만, 기존 질서가 정지되는 틈 속에서 말해질 수 없는 정의가 잠시 드러나는 순간을 가능케 한다. 『안티고네』는 바로 그 순간을 포착하며, 문학이 윤리와 정치, 법과 폭력의 경계에 대한 사유를 어떻게 구현할 수 있는지를 극적으로 제시한다. 이로써 벤야민의 정치적 이론은 문학적 재현을 통해 폭력의 비판을 넘은 정의의 감각을 구현하는 방식으로 확장된다.
3. 예술과 혁명: 벤야민의 문학적 언급과 사회적 변혁의 잠재력
—황정은 『디디의 우산』과 조지 오웰 『1984』를 중심으로
발터 벤야민에게 예술은 단순한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감각의 구조를 전복하고 인식의 틀을 뒤흔드는 혁명적 실천의 장이다. 그는 예술이 갖는 사회적 잠재력을 감각, 시간, 언어, 이미지의 차원에서 정밀하게 사유했으며, 예술은 체제에 대한 비판이나 이상을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라, 현실을 감지하고 구성하는 감각 자체를 정치적으로 재구성하는 장치라고 보았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1936)에서 벤야민은 ‘아우라’의 붕괴를 통해 예술이 제의적·전통적인 권위에서 벗어나 대중에게 개방되는 과정을 설명한다. 그는 영화, 사진 같은 기술 복제 매체를 중심으로 예술이 수동적인 감상에서 벗어나 능동적인 현실 인식의 도구로 전환된다고 보며, 감각의 구조 그 자체가 정치적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예술은 더 이상 고립된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현실을 감각하고 구성하는 새로운 방식의 조직화이다. 이 감각의 재조직은 단순한 미학적 실험이 아니라, 사회 변혁의 잠재 조건이 된다.
『역사 개념에 대하여』(1940)에서 그는 이러한 사유를 시간의 차원으로 확장한다. 벤야민은 역사란 연속적 시간 속의 진보가 아니라, 억압된 과거가 ‘지금-여기(Jetztzeit)’의 형식으로 돌연히 현재 속에 출현하는 혁명적 계기라고 주장한다. 예술은 이러한 시간의 파열을 구현하며, 역사적 진실이 다시 말해질 수 있는 순간의 감각을 창출한다. 『보들레르의 몇몇 주제에 대하여』(1939)에서는 도시적 감각의 분열과 충격, 파편화된 경험이 문학적 이미지로 전환되는 과정을 분석하며, 문학이 근대 자본주의의 지각 구조를 드러냄으로써 현실을 다시 감지하게 만드는 감각의 전환 장치임을 밝힌다. 그리고 『일방통행로』(1928)는 산문의 형식 자체를 해체하면서, 언어와 사고의 리듬에 내재된 지배 질서를 분열시키는 실험적 문학의 형태를 제시한다.
이러한 벤야민의 예술론은 동시대 문학 속에서도 섬세하게 구현되고 있다.
황정은의 『디디의 우산』은 후기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말해지지 않는 존재들, 지워진 삶들의 감각을 비가시적이고 침묵적인 방식으로 드러낸다. 두 중편 중 「디디의 우산」은 주인공 d와 디디(dd)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d와 디디는 초등학교 동창으로 재회한 뒤 연인으로 발전하지만, 디디는 갑작스러운 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이후 d는 깊은 상실 속에서 은둔하고, 생계를 위해 택배 상하차 노동을 시작한다. 노동의 리듬 속에서 d는 디디를 떠올리고, 음악과 기억을 통해 잊히는 존재에 대한 윤리적 응답을 계속 시도한다.
특히 이 소설은 마지막 문장인 “모두가 돌아갈 무렵엔 우산이 필요하다”를 통해, 돌봄의 감각이 곧 혁명의 감각임을 암시한다. 혁명은 체제의 전복이나 거대한 외침이 아니라, 타인을 감싸고, 기억하고, 지키는 일상의 감각 속에 존재한다. 이는 벤야민이 말한 혁명의 시간성, 즉 연속적 진보가 아닌 지금-여기에서의 응답과 감각의 변환과 정확히 맞물린다. d가 디디를 향해 반복하는 감각의 언어인 우산, 빗물, 음악은 부재한 존재를 다시 감각하는 정치적 형식이 되며, 소설은 침묵과 상실의 윤리 속에서 감각 구조의 변화를 실현한다. 벤야민이 말한 예술의 혁명성이란 바로 이런, 존재를 인식하는 방식의 전환, 언어 이전의 감각적 윤리로서의 실천일 것이다.
반면 조지 오웰의 『1984』는 벤야민이 경고한 예술의 반대 극점, 즉 감각과 언어의 정치적 억압이 완성된 세계를 그린다. ‘뉴스피크’는 사고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언어이며, 과거는 현재의 권력에 의해 끊임없이 재편된다. 감정, 기억, 감각은 모두 당-체제가 허용한 범위 내에서만 존재할 수 있고, 언어의 조직이 체제의 통제 수단으로 작동한다. 이는 벤야민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말한 “정치의 예술화”인 파시즘의 미학화 전략의 구체적 결과물이자, 예술의 정치적 가능성이 박탈된 세계의 재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1984』 속에서도 미세한 저항은 감각의 층위에서 발생한다. 윈스턴은 기억을 되살리려 애쓰고, 줄리아와의 육체적 접촉을 통해 감각을 회복하고자 한다. 이는 벤야민이 말한 신적 폭력, 즉 기존 질서를 정지시키는 정의의 잠재성처럼, 언어 이전의 감각이 체제를 거부할 수 있는 마지막 윤리적 자원으로 기능함을 보여준다. 혁명은 체제를 무너뜨리는 외침이 아니라, 감각의 충동 속에서 되살아나는 비가시적 윤리의 발화일 수 있다.
이처럼 황정은의 『디디의 우산』과 조지 오웰의 『1984』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예술이 감각 구조를 재편하고 사회적 전환의 잠재성을 담지할 수 있는 가능성을 문학적으로 실현한다. 전자는 상실과 침묵을 통해 타자를 감각하는 윤리적 혁명성을, 후자는 억압된 감각의 복원을 통한 반어적 정치 가능성을 보여준다. 벤야민의 예술론은 이 두 작품을 매개로, 문학이 어떻게 혁명 이전의 감각을 감지하고, 현실을 새롭게 구성하는 언어를 열어젖힐 수 있는가를 사유하게 한다.
4. AI 시대와 예술: 벤야민의 문학적 사유와 기술적 변혁
AI 시대의 예술은 기술의 도구적 진보를 넘어, 감각과 창작의 방식 자체가 근본적으로 재구성되는 지점에 서 있다. 인간이 독점하던 창작의 권한은 알고리즘과 대량 데이터에 기반한 자동 생성 시스템에 의해 부분적으로 이양되고 있으며, 문학, 회화, 음악 등의 영역에서 창작자와 기계, 예술성과 계산성, 창조와 재조합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단지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예술이 무엇이며, 감각은 어떻게 구성되며, 창작의 윤리는 어디서부터 시작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 묻게 만든다.
이 지점에서 발터 벤야민의 예술 사유는 새로운 조명을 얻는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1936)에서 그는 기술복제가 예술의 ‘아우라’를 붕괴시키고, 예술을 대중과 현실 속으로 던져 넣는다고 진단했다. 그는 복제 가능성이 예술을 개별성과 독창성의 신화에서 해방시켜, 현실의 정치적 구조에 개입하는 수단으로 전환시킨다고 보았다. 이 복제는 단순한 재현의 기술이 아니라, 감각의 조직을 재구성하는 정치적 사건이었다. 벤야민의 관점에서 보자면, AI에 의한 예술 역시 또 하나의 감각 재조직의 계기이며, 예술과 인간 감각 사이의 관계를 다시 쓰게 만드는 문턱일 수 있다.
그러나 AI 시대의 예술은 벤야민이 기대한 대중적 해방이나 감각의 정치화를 실현하기보다는, 새로운 형태의 상품화와 규격화, 그리고 감각의 자동화로 향할 위험도 내포한다. 예컨대 생성형 AI는 이전 예술작품들의 데이터를 재조합함으로써 결과물을 만들어내지만, 그것은 새로운 감각의 형성이라기보다는 기존 감각의 통계적 중복에 가까울 수 있다. 벤야민이 강조한 ‘충격(Shock)’으로서의 예술, 즉 현실에 대한 비판적 각성과 인식의 전환은, 알고리즘적 예측과 반복의 체계 속에서 무력화될 수 있다. 감각은 전환되기보다는, 자동화되고 예측 가능한 패턴으로 훈련된다. 이는 벤야민이 『보들레르의 몇몇 주제에 대하여』에서 말한 감각의 분열과 충격, 도시적 경험의 파편화와 대조되는 디지털 환경 속 감각의 평준화와 안정화로 이어질 위험을 내포한다.
AI는 또한 창작자와 감상자의 관계를 뒤흔든다. 벤야민은 예술의 정치적 잠재력을 관람자, 독자의 위치 변화를 통해 보았다. 영화나 사진에서처럼 관객이 단지 몰입하는 존재가 아니라, 비판적으로 관찰하고 판단하고 실천하는 존재로 전환될 때, 예술은 혁명적 잠재력을 가진다고 보았다. 그러나 AI 기반 콘텐츠는 알고리즘이 사용자의 취향을 추론하고, 그에 맞는 콘텐츠를 공급하는 체계를 따르기에, 수용자는 점점 더 자신의 취향 안에서 순환하게 된다. 이는 벤야민이 가장 경계했던 “예술의 정치화”가 아닌 “정치의 미학화”, 즉 감각과 판단의 자동화를 통한 지배 질서의 은폐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I 시대의 예술은 여전히 벤야민이 말한 ‘중단의 정치학’, 즉 기존 질서의 감각 구조를 정지시키는 실천을 수행할 가능성 또한 품고 있다. 특히 예술가가 AI의 사용을 단순한 도구가 아닌 형식 실험과 윤리적 질문의 공간으로 활용할 때, AI는 예술과 사회를 둘러싼 기존 인식에 감각적 충격을 주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예컨대 AI가 생성한 시가 전통적 시어의 위계와 리듬을 해체하거나, 비인간적 감각이 인간의 고정된 감수성을 흔드는 경우, 우리는 벤야민이 『일방통행로』에서 실험했던 단속적 사유의 리듬, 분절된 언어의 파열을 다시 체험하게 될 수 있다.
또한, AI는 예술의 윤리적 책임에 대한 질문을 우리 앞에 다시 던진다. 창작의 주체가 모호해지고, 재현의 경계가 흐려진 지금, 예술은 더 이상 ‘무엇을 아름답게 재현하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감각하고, 누구에게 응답하는가’라는 윤리적 물음의 장으로 이동한다. 벤야민이 『역사 개념에 대하여』에서 말한 것처럼, 예술은 억압된 자들의 목소리를 구제하는 행위이며, 말해지지 않은 것에 대한 응답의 공간이다. AI가 문학을 흉내낼 수는 있어도, 상실의 감각, 침묵의 무게, 고통에 대한 응답을 수행할 수 있을까? 이것은 기술이 아니라 윤리와 감각의 문제, 다시 말해 예술의 정치적 본질에 대한 질문이다.
AI 시대의 예술은, 단지 ‘새로운 도구의 사용법’이 아니라, 예술이 윤리적 감각으로서 어떻게 지속 가능한가라는 철학적 과제다. 벤야민의 사유는 지금 이 순간에도 유효하다. 예술은 언제나 기술의 진보보다 감각의 진보를 먼저 요구한다. 그리고 그 감각은, 체제에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체제의 균열을 감지하고, 현실을 다른 방식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순간에 발생한다. AI 시대의 예술은 벤야민이 말한 그 “지금-여기”의 감각 속에서, 기술 너머의 정치적 상상력을 다시 요구받고 있다.
Ⅵ. 문학을 통한 비판적 사유: 벤야민의 문학적 언급의 현대적 의의
1. 현대 문학에서 벤야민의 이론의 적용 가능성
—한유주의 『불가능한 동화』를 중심으로
현대 문학은 더 이상 세계를 단순히 재현하거나 사건을 모사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언어 자체의 조건을 질문하며 말해지지 않는 것에 도달하려는 감각적·형식적 실천으로 나아가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전환은 발터 벤야민이 예고한 문학적 사유와 깊은 연관을 지닌다. 그는 『일방통행로』(1928)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1936)에서 언어와 서사의 형식 실험이 감각의 재구성과 정치적 사유로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했으며, 예술이 단순히 미적 대상에 그치지 않고 감각의 조직 자체를 전복하는 정치적 장치라고 보았다. 벤야민에게 문학은 현실을 단순히 반영하는 매체가 아니라, 현실을 재구성하는 인식의 틀로 기능할 수 있는 실천이었다.
한유주의 장편소설 『불가능한 동화』는 이러한 벤야민의 문학적 사유가 현대 문학에서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지를 섬세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소설은 언어의 재현 가능성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 속에서, 서사 구조 자체를 해체하고 언어적 불가능성과 존재론적 불안을 드러내는 실험적 형식을 취한다. 특히 한국 사회의 트라우마와 폭력이라는 맥락 속에서, 이 작품은 언어와 서사의 윤리적 책임을 묻는 동시에, 독자에게 새로운 감각적·정치적 실천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벤야민은 언어를 단순히 세계를 설명하거나 대상을 표상하는 도구로 보지 않았다. 그는 언어가 감각과 인식을 조직하는 매체라는 점에서, 그 사용 방식이 체제의 인식 구조를 전복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다고 보았다. 『불가능한 동화』는 이러한 사유를 언어와 서사의 해체를 통해 정교하게 구현한다. 작품 속 "나는 노래했다. 그리고 나는 노래하지 않았다"와 같은 문장은 언어가 현실을 재현할 수 없다는 점을 드러내며, 벤야민이 『보들레르의 몇몇 주제에 대하여』에서 말한 ‘감각적 충격(shock)’의 개념과 맞닿아 있다. 이러한 충격은 독자로 하여금 허구를 허구로 인식하게 만들며, 문학을 자기 자신을 노출하는 메타 담론의 장으로 전환시킨다.
또한, 아이가 죽은 줄 알았던 장면 이후 다시 등장하는 구성은, 사건의 진실보다 기억과 언어가 구성하는 감각적 진실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는 벤야민이 혁명을 시간의 연속성 속에서가 아니라, 단절과 파열 속에서 돌연 출현하는 계기로 본 역사 인식과 연결된다. 이와 함께 아이가 자신의 신체를 일일이 분절하며 이름 붙이려는 장면은 언어가 고통과 트라우마를 온전히 포착하지 못하고 분절된 채 남겨짐을 상징하며, 언어 일반의 불완전성과 표현의 한계를 전면화한다. 이는 벤야민이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에서 언급한 언어의 비대칭성과도 긴밀하게 연결된다.
한편, 아이가 일기장에 타인의 필체로 "나도 죽여보고 싶다"고 쓰는 장면은 타인의 언어가 주체의 내면을 침범하고 잠식하는 과정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는 벤야민이 기술 복제 시대에 아우라(aurä, 원본성)가 붕괴된다고 말한 맥락과도 연결되며, 개인성과 독자성의 해체를 통해 현대 사회에서 언어가 어떻게 타자화되는지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한다.
이처럼 『불가능한 동화』는 벤야민이 『역사 개념에 대하여』에서 제시한 “기억되지 못한 자들의 구원”이라는 예술의 윤리적 과제를 문학적 서사 속에서 구체화한다. 특히 아이가 작가 ‘나’에게 “왜 저에게 그런 짓을 했나요?”라고 질문하는 장면은 창작 행위가 피조물에게 가할 수 있는 폭력을 드러내며, 문학이 단순한 미적 창조를 넘어 윤리적 자기반성의 장이 되어야 함을 요구한다. 아이의 이름이 끝내 밝혀지지 않는 구성은, 고통받는 존재들의 익명성과 말해질 수 없는 자들의 침묵을 환기시키며, 문학이 이들을 대변하고 기억하는 윤리적 연대를 수행해야 함을 강조한다.
이처럼 『불가능한 동화』는 한국 사회의 트라우마와 폭력이라는 맥락 속에서, 아이의 개인적인 고통을 넘어서 억압된 집단적 상처를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이름 없는 아이는 기억되지 못한 존재들, 말해질 수 없었던 자들의 잔존이며, 문학은 이 잔존에 대한 윤리적 응답을 통해만 자신의 정치성을 획득할 수 있다. 이는 벤야민이 예술에 부여한 역사적 윤리성과 정확히 교차한다.
결국 『불가능한 동화』는 동화라는 장르적 기대를 해체하며 “문학이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넘어, “문학이 끝내 말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보다 근원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이 작품은 벤야민이 예술에서 본 혁명적 가능성인 감각과 서사의 질서를 뒤흔들고, 새로운 인식과 응답의 틀을 여는 실천을 현대적으로 계승하는 동시에, 한국 사회라는 특수한 현실 속에서 윤리적·정치적 사유로 확장하고 있다. 『불가능한 동화』는 언어와 서사의 한계를 응시하면서도 그 틈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으며, 독자에게 감각과 응답의 전복적인 경험을 제공하는 동시대 문학의 한 정점이라 할 수 있다.
2. 벤야민의 문학적 사유가 현대 사회에 미친 영향
발터 벤야민의 문학적 사유는 단지 문학 비평의 차원을 넘어서, 현대 사회의 감각 구조, 역사 인식, 언어 윤리, 창작 실천 전반에 걸쳐 깊은 흔적을 남기고 있다. 그의 사유는 기술과 예술의 관계, 창작과 정치의 경계, 감각과 기억의 윤리 같은 문제들을 통해, 문학이 어떻게 사회적 전환의 잠재성을 지닌 사유의 장이 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벤야민이 예술을 현실의 반영이 아닌 감각의 조직화이자 인식의 재구성으로 본 점은, 현대의 수많은 문학 창작자들과 이론가들에게 결정적인 시사점을 제공했다. 그의 사유는 ‘무엇을 말하는가’보다 ‘어떻게 감각하게 만드는가’를 문제 삼으며, 예술의 정치적 효과를 내용이 아닌 형식과 감각의 배열에서 찾는다. 이러한 관점은 오늘날 언어 실험적 문학, 파편적 서사, 시간의 교란을 통한 서사적 비판성 등의 형식으로 확장되고 있다.
예컨대, 디지털 시대에 등장한 하이퍼텍스트 소설이나 AI 기반 생성 서사 등은 서사와 언어의 조직 방식이 어떻게 감각에 영향을 주는지를 실험하고 있으며, 이는 벤야민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예견한 감각 구조의 재편성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기술이 감각을 지배하는 시대일수록, 문학은 그 감각의 구조를 재조직하고 전복하는 윤리적 실천의 공간으로 기능하게 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벤야민의 사유는 단순히 인용되는 고전이 아니라, 현대 문학 창작과 비평의 형식을 재구성하는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또한 그의 역사 철학은 오늘날 다양한 문학적 기억 장치, 특히 증언 문학, 전쟁과 학살을 다루는 서사, 소수자와 주변부의 목소리를 재현하는 문학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역사 개념에 대하여』에서 그가 주장한 “기억되지 못한 자들의 구원”이라는 문장은, 문학이 역사적 진실을 기록하는 도구가 아니라, 침묵당한 존재를 감각하게 하는 윤리적 형식이 되어야 한다는 오늘날의 문학적 요청과 만난다. 이는 과거를 단순히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감각 속으로 과거의 파편을 소환하는 문학적 실천으로 이어지며, 혁명은 과거로부터 도래한다는 그의 역사 인식은 현재의 문학이 미래를 구상하는 방식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벤야민의 사유는 또한, 현대 문학이 창작의 윤리적 책임을 성찰하는 방식에도 깊은 영향을 미친다. 작가가 쓰는 언어는 단순히 개인의 감각이 아니라, 사회적 언어의 틀 속에서 말해지며, 그 언어는 때로 피억압자의 말할 권리를 침범할 수도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불가능한 동화』에서 아이가 작가 ‘나’에게 “왜 저에게 그런 짓을 했나요?”라고 묻는 장면은, 벤야민이 제기한 예술과 폭력의 긴장, 즉 창작자가 감당해야 할 윤리의 차원을 문학적으로 구현하는 예다. 이는 현대 문학이 서사를 구성하는 동시에 그 구성 자체를 반성하는 이중적 장으로 기능하게 한다.
더불어 벤야민이 제기한 ‘신적 폭력’의 개념은, 현대 문학이 다루는 법의 경계, 제도의 무력화, 억압 구조에 대한 예외적 응답을 사유하는 틀로서도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다. 정치적 무기력 속에서 문학은 제도를 직접 바꾸지 않더라도, 기존의 감각과 언어 질서를 일시적으로 중지시키는 형식의 중단을 통해 현실을 다시 사고하게 만든다. 이는 혁명의 언어가 외침이 아니라 침묵과 형식의 틈새로부터 발생할 수 있음을 의미하며, 문학이 제도 바깥에서 발현하는 예외적 윤리의 가능성을 탐색할 수 있게 한다.
이처럼 벤야민의 문학적 사유는, 현대 문학의 형식, 주제, 정치성, 윤리, 감각에 이르기까지 다층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문학이 단순히 의미를 해석하거나 감정을 소통하는 장르가 아니라, 현실을 재구성하는 감각적 장치이자 역사적 실천이라는 점을 날카롭게 환기시킨다. 그는 문학을 통해 세계를 전복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 그 자체를 전복의 공간으로 사유하는 급진성을 우리에게 남겼다. 이러한 사유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벤야민의 사유는 문학을 비판적 실천의 가능성으로 다시 되묻게 만들며, 그 물음 속에서 현대 문학은 여전히 살아 있는 사유의 실험장으로 남아 있다.
3. 문학을 통한 정치적 반성: 벤야민의 유산
—클레어 키건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중심으로
발터 벤야민은 예술이 정치와 만나는 지점을 단지 직접적인 현실 고발이나 선동적인 서사로 보지 않았다. 그에게 문학은 오히려 감각 구조를 전복하고, 말해지지 않는 것에 접근하며, 침묵 속에서 윤리적 응답의 가능성을 감각하게 하는 형식적 실천으로서의 정치성을 지닌다. 문학은 세계를 바꾸기보다는 현실을 감각하는 방식을 바꾸는 사유의 실험장이며, 독자가 익숙하게 받아들였던 현실의 리듬을 중지시키는 ‘지금-여기(Jetztzeit)’의 충격적 순간을 통해 비판적 반성을 유도한다.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Small Things Like These)』은 이러한 벤야민의 문학적 유산이 현대 문학 속에서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섬세하고도 강력한 사례다. 이 작품은 1980년대 아일랜드의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석탄 배달업자 빌 펄롱이라는 한 평범한 인물이 마그달렌 세탁소의 구조적 폭력과 침묵의 공모 체계를 목격하고, 그 앞에서 윤리적 선택의 기로에 서는 과정을 조용하고 간결하게 그려낸다.
소설의 중심에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 폭력, 즉 사회 전체가 공모한 침묵 속에서 유지되는 종교 권위와 제도적 착취가 놓여 있다. 빌은 수녀원 지하에서 학대받는 한 젊은 여성을 우연히 발견하고, 침묵할 것인지 아니면 위험을 무릅쓰고 그녀를 구할 것인지 선택의 순간을 마주한다. 그의 선택은 크리스마스 시즌이라는 상징적 배경과 대비되며, 공식적 서사와 개인의 윤리적 실천 사이의 간극을 예리하게 드러낸다. 이는 벤야민이 예술의 정치성을 형식의 윤리, 침묵의 파열, 소외된 존재에 대한 감각적 응답이라는 차원에서 사유했던 관점과 밀접하게 맞닿는다.
벤야민은 『역사 개념에 대하여』에서 “기억되지 못한 자들의 구원”을 예술의 과제로 제시한 바 있다. 빌의 선택은 거대한 체제를 무너뜨리는 영웅적 혁명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침묵하는 마을, 공포에 익숙해진 사람들, 권위에 무감각해진 일상 속에서, 한 개인의 미약한 결단을 통해 역사적 침묵에 균열을 낸다. 이는 벤야민이 ‘지금-여기’에 불현듯 출현하는 과거의 파편, 즉 억압된 자들의 기억이 감각적이고 정치적으로 현재화되는 순간으로 이해했던 메시아적 시간성의 구현이라 할 수 있다.
클레어 키건의 문체는 이 윤리적 정치성을 드러냄 없이 드러내는 방식으로 실현한다. 극도로 절제된 문장과 여백의 리듬은 말해지지 않은 것을 감각하게 만드는 침묵의 형식이며, 이 또한 벤야민이 말한 “형식의 정치성”—즉 예술의 정치적 힘은 내용보다 감각의 조직화 방식에 있다는 주장과 연결된다. 작중 인물들은 어떤 정치적 언설도 내뱉지 않지만, 독자는 그 침묵 사이에 놓인 긴장을 통해 현실의 비정상성과 도덕적 선택의 무게를 감각하게 된다.
작품의 배경이 된 마그달렌 세탁소는 아일랜드의 실제 역사 속에서 오랫동안 은폐되어 온 제도적 폭력의 장소였다. 키건은 이 역사적 사건을 과도하게 재현하거나 고발하지 않고, 하나의 윤리적 장면 속으로 농축시킨다. 이는 벤야민이 강조한 ‘충격적 이미지’, 즉 전체적 서사 대신 파편적 장면이 현실의 진실에 더 가까이 도달할 수 있다는 주장과 정확히 호응한다. 특히 빌의 개인적인 과거—사생아로 태어나 사회적 편견과 가난을 경험한 그의 기억—은, 그가 왜 침묵하지 않고 누군가를 향해 손을 내밀 수 있었는지를 설명하며, 윤리적 선택은 언제나 고통과 기억의 사적 층위에서 비롯됨을 보여준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정치성을 고발이나 분노가 아닌 형식과 감각의 수준에서 수행하는 드문 작품이다. 말하지 않음, 소리 내지 않음, 강요하지 않음으로써 문학은 독자 스스로 침묵 속의 진실을 감각하게 만든다. 이 작품은 벤야민이 바랐던 문학의 정치적 잠재성—현실을 전복하는 힘이 아니라, 현실을 다시 감각하게 만드는 윤리적 실천을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구현하고 있다. 빌의 작은 행동은 “혁명”이라는 단어 없이도, 일상적 윤리의 언어로 현실을 흔드는 메시아적 중단이 된다.
이처럼 키건의 소설은 벤야민의 유산을 가장 정제된 형태로 현대 문학 속에서 실현하고 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정치적 반성이 반드시 거창한 언어와 급진적 형식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님을, 작고 조용한 응답이야말로 가장 급진적인 윤리적 실천이 될 수 있음을 예증하는 작품이다. 문학은 때때로 세계를 바꾸지 않지만, 사유의 방향을 돌리고 감각의 결을 바꾸며, 그러한 틈에서만 가능한 정밀한 정치적 반성을 수행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벤야민의 문학적 유산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4. 벤야민의 기술 복제 이론과 AI 창작: 예술의 새로운 정치적 잠재력
발터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1936)은 예술이 기술적 변화와 만나는 지점에서 어떤 정치적 잠재성을 품을 수 있는지를 가장 급진적으로 사유한 텍스트 중 하나다. 그는 이 글에서 기술 복제가 예술작품의 아우라를 해체함으로써, 예술이 더 이상 제의적 권위의 대상이 아니라 현실 속에 개입하는 실천적 장치로 전환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예술은 더 이상 원본성과 전통성의 기반 위에 서지 않고, 감각의 조직화를 통해 현실 인식의 구조 자체를 바꾸는 행위로 변모하게 된다. 벤야민에게 기술은 예술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을 해방의 조건으로 전환시키는 매개였으며, 그 핵심은 기술 그 자체보다도 그 기술이 감각 구조에 어떤 변화를 불러오는가에 있었다.
오늘날 생성형 인공지능(AI)의 등장은, 단순한 복제의 차원을 넘어 창작의 자동화, 의사(擬似) 감각의 형성, 그리고 예술의 주체성 자체에 대한 도전이라는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 AI는 이제 시를 쓰고, 음악을 작곡하며, 그림을 그리고, 심지어 소설을 구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기술적 전환은 단지 창작 주체의 변화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의 방식, 기억의 구조, 그리고 응답의 윤리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동반한다. 이 지점에서 벤야민의 사유는 다시 소환될 필요가 있다. 과연 AI 창작은 감각의 해방을 촉진하는가, 아니면 감각의 자동화를 통해 현실 인식의 균질화를 심화시키는가?
실제 예술 현장에서는 이러한 질문을 사유하는 다양한 실험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GAN 알고리즘으로 제작된 《Portrait of Edmond de Belamy》(2018)는 아우라 없는 이미지가 어떻게 예술시장과 소비문화 속에서 새로운 권위를 획득하는지를 보여주며, 벤야민이 경계했던 정치의 미학화를 시사한다. 이 작품은 18세기 회화 양식을 학습한 AI가 '그럴듯한' 인물을 그려낸 것으로, 원본성과 창작자의 개입 없이도 고가에 낙찰되며 새로운 형태의 예술 권위를 형성했다. 벤야민이 말한 ‘아우라의 해체’는 이 작품에서 단순히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상품성이라는 새로운 질서로 복원되는 전환을 보여준다.
반면, 음악가 홀리 허든(Holly Herndon)의 실험적 음반 《PROTO》(2019)는 AI의 목소리를 감각의 경계 지점에서 활용하는 전위적 시도다. 이 프로젝트에서 허든은 자신의 목소리와 인간 합창단의 소리를 AI 보컬 'Spawn'에게 학습시키고, 함께 노래하는 방식으로 곡을 구성한다. 특히 트랙 〈Evening Shades〉에서는 AI의 음성이 인간 합창을 따라가며, 청취자에게 목소리의 주체와 감정의 기원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효과를 낸다. 이처럼 인간의 감정이 결여된 음성이 인간의 언어와 중첩될 때 발생하는 비감각의 감각, 감정의 잔향은 벤야민이 말한 ‘충격(shock)’을 통한 감각 전복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문학의 영역에서도 유사한 실험들이 이어진다. 영국 작가 마크 허멜(Mark Hume)은 AI 언어모델과 공동으로 『Philosophical Transactions』(2023)을 집필했다. 이 작품은 AI가 제안한 서사를 작가가 재편집하는 방식으로 구성되며, 문장 사이에는 무언가 말해지지 않은 것, 윤리적 판단이 유보된 감정의 결핍이 반복적으로 감지된다. 예컨대 한 여성 등장인물의 죽음을 AI는 기술적으로만 묘사하고, 그것을 작가가 감정적·윤리적 맥락으로 보완하는 과정에서, 서사의 진동이 발생한다. 이는 벤야민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언급한 감각의 자동화, 인식의 무감각화가 문학적 층위에서 어떻게 나타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실험이라 할 수 있다.
시적 실험으로는 Oscar Schwartz의 『You Are Not Human』 프로젝트가 주목할 만하다. 이 시집은 AI가 생성한 시와 인간 시인의 작품을 병치시켜, 독자에게 "이 감정은 누구의 것인가?", "진정성은 어떻게 감각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예컨대 AI가 작성한 한 시에서 “나는 네 슬픔을 껴안고 싶다 / 알고리즘의 팔로”라는 구절은 감정의 언어를 기술적 상상력으로 대체하면서도, 실질적 정동은 결여된 상태로 제시된다. 이는 벤야민이 『일방통행로』에서 비판한 표현의 자동성, 감정의 재현이 아닌 기계적 반복과 유사한 맥락에 놓인다. 감정은 외형을 가질 수는 있지만, 그 내면의 시간성과 기억, 맥락이 빠진 감정은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AI 시는 인간 언어의 유사체로 작동한다.
이처럼 각기 다른 매체와 형식을 통해 나타난 AI 창작 실험들은, 기술이 단순한 도구가 아닌 감각 구성의 주체가 될 수 있는지를 사유하게 만든다. AI는 자율적인 창작 주체가 아니며, 고통을 기억하지 않고, 응답의 책임을 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구성하는 인간의 선택과 실천에 따라, AI는 예술의 감각 구조를 재편하고 기존의 미학적 질서를 해체하는 정치적 실천의 계기가 될 수 있다.
벤야민은 예술의 정치화를 단지 메시지의 변화로 보지 않았다. 그는 예술이 현실을 감각하게 만드는 방식 자체를 전환할 때 정치적이라고 보았다. 감각의 전복은 현실을 느끼는 방식, 곧 정치적 세계 인식의 구조를 바꾸는 일이다. 이때 AI는 감각의 기계화라는 위험을 내포하는 동시에, 감각의 타자화와 불연속성을 통해 새로운 인식의 문을 여는 실험 장치가 될 수도 있다. 따라서 문제는 기술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그 기술이 감각과 윤리를 어떻게 구성하는가, 그리고 그 구성 방식이 어떤 현실을 가능하게 만드는가에 있다.
이처럼 AI 시대의 예술은 벤야민이 우리에게 남긴 핵심적인 물음을 다시 던지게 만든다. 예술은 더 이상 인간만의 것이 아니라는 이 시대에, 우리는 여전히 감각의 윤리, 기억되지 못한 자에 대한 응답, 말해질 수 없는 고통에 대한 형식적 책임을 예술에 요구할 수 있는가? AI가 문장을 쓰고 이미지를 만들 수는 있지만, 누군가의 침묵에 윤리적으로 응답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예술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며, 동시에 인간 바깥에서 다시 쓰여야 할 감각의 경계에 서 있다.
이처럼 AI 창작은 기술 진보의 사건이기 이전에, 예술의 윤리적 정의에 대한 철학적 시험대이다. 벤야민의 사유는 여기서 다시 살아난다. 예술은 무엇을 재현하는가보다, 어떻게 감각하게 만드는가, 무엇에 침묵하는가,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무엇에 응답하는가를 묻는 실천이다. 감각의 질서를 바꾸는 예술, 그것이야말로 벤야민이 기술복제 시대 이후에도 예술이 수행해야 할 정치적 과제로 남긴 가장 급진적인 유산이다.
Ⅶ. 결론
1. 벤야민의 문학적 사유의 핵심 정리
발터 벤야민의 문학적 사유는 단지 문학 텍스트에 대한 해석적 틀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의 사유는 문학을 현실과의 경계에서, 정치적 감각의 전환과 역사 인식의 재구성을 가능하게 하는 철학적·윤리적 실천의 장으로 보았다. 이 논문에서 다룬 여러 저작들인 『역사 개념에 대하여』,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 『보들레르의 몇몇 주제에 대하여』, 『일방통행로』 등은 각각의 주제를 넘어 하나의 공통된 문제의식, 즉 어떻게 말해지지 않는 것을 감각하게 만들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수렴된다.
그는 문학을 과거의 반영도, 단순한 창작의 영역도 아닌, 역사의 파편이 현재 속으로 불현듯 출현하는 장소로 이해했다. 문학은 그 자체로 ‘지금-여기(Jetztzeit)’를 만들어내며, 연속적이고 진보적인 시간 개념에 균열을 내고, 망각된 자들의 기억을 정치적 감각으로 소환한다. 따라서 벤야민에게 문학적 사유란, 기억되지 못한 자들의 구원을 위해 언어와 형식을 실험하고, 감각의 질서를 전복하는 행위였다.
또한 그는 예술과 문학을 단순한 표현의 수단이 아닌 감각의 재구성 장치로 보았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강조된 감각 구조의 재편은, 예술이 현실을 재현하는 방식이 아니라, 현실을 감각하게 만드는 방식 그 자체를 정치화할 수 있다는 급진적 통찰을 제시한다. 따라서 그의 문학적 사유는 언어와 형식, 이미지와 리듬, 침묵과 공백 등 문학의 세부적인 감각 장치들에 주목하며, 그것들을 통해 현실의 정치적 본질을 감각하게 하는 방법을 끊임없이 사유한다.
벤야민은 문학을 통해 감정과 기억의 윤리적 형식, 제도적 폭력에의 예외적 응답, 창작자와 수용자의 정치적 책임을 구성해낸다. 그의 사유는 전통적인 의미 해석학의 틀을 넘어, 문학을 말해지지 않은 것을 드러내고, 언어의 침묵을 응답의 공간으로 전환하는 실천으로 확장했다. 이러한 점에서 벤야민의 문학적 사유는 해석보다 형식의 정치성, 의미보다 감각의 윤리성에 더 가까우며, 이는 곧 문학이 현실을 전복하는 대신, 현실을 다시 느끼게 만드는 감각의 형식이라는 점을 뚜렷이 보여준다.
2. 역사, 정치, 예술의 상호 작용의 중요성
발터 벤야민의 문학적 사유는 단지 문학 텍스트에 대한 해석적 틀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의 사유는 문학을 현실과의 경계에서, 정치적 감각의 전환과 역사 인식의 재구성을 가능하게 하는 철학적·윤리적 실천의 장으로 보았다. 이 논문에서 다룬 여러 저작들인 『역사 개념에 대하여』,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 『보들레르의 몇몇 주제에 대하여』, 『일방통행로』 등은 각각의 주제를 넘어 하나의 공통된 문제의식, 즉 어떻게 말해지지 않는 것을 감각하게 만들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수렴된다.
그는 문학을 과거의 반영도, 단순한 창작의 영역도 아닌, 역사의 파편이 현재 속으로 불현듯 출현하는 장소로 이해했다. 문학은 그 자체로 ‘지금-여기(Jetztzeit)’를 만들어내며, 연속적이고 진보적인 시간 개념에 균열을 내고, 망각된 자들의 기억을 정치적 감각으로 소환한다. 따라서 벤야민에게 문학적 사유란, 기억되지 못한 자들의 구원을 위해 언어와 형식을 실험하고, 감각의 질서를 전복하는 행위였다.
또한 그는 예술과 문학을 단순한 표현의 수단이 아닌 감각의 재구성 장치로 보았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강조된 감각 구조의 재편은, 예술이 현실을 재현하는 방식이 아니라, 현실을 감각하게 만드는 방식 그 자체를 정치화할 수 있다는 급진적 통찰을 제시한다. 따라서 그의 문학적 사유는 언어와 형식, 이미지와 리듬, 침묵과 공백 등 문학의 세부적인 감각 장치들에 주목하며, 그것들을 통해 현실의 정치적 본질을 감각하게 하는 방법을 끊임없이 사유한다.
이러한 사유는 문학 작품의 구체적인 실천에서도 깊이 구현되고 있다.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 4·3 사건의 억압된 기억을 현재화하며, 말해지지 않은 죽음에 감각적 응답을 시도한다.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는 노예제도의 역사적 트라우마가 유령의 형태로 현재를 침범하게 하는 구조를 통해, 과거와 현재의 감각적 얽힘을 예민하게 형상화한다.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아일랜드 마그달렌 수녀원이라는 구조적 침묵의 역사에 대해, 한 개인의 윤리적 결단과 연민을 통해 현재적 감각을 부여한다. 이들 작품은 모두 벤야민이 말한 ‘지금-여기’의 순간에 과거의 억압된 진실이 출현하며, 감각과 형식을 통해 정치적 현실을 변형하는 문학적 실천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벤야민은 문학을 통해 감정과 기억의 윤리적 형식, 제도적 폭력에의 예외적 응답, 창작자와 수용자의 정치적 책임을 구성해 낸다. 그의 사유는 전통적인 의미 해석학의 틀을 넘어, 문학을 말해지지 않은 것을 드러내고, 언어의 침묵을 응답의 공간으로 전환하는 실천으로 확장했다. 이러한 점에서 벤야민의 문학적 사유는 해석보다 형식의 정치성, 의미보다 감각의 윤리성에 더 가까우며, 이는 곧 문학이 현실을 전복하는 대신, 현실을 다시 느끼게 만드는 감각의 형식이라는 점을 뚜렷이 보여준다.
3. 벤야민의 문학적 언급에 대한 향후 연구 방향
벤야민의 문학적 사유는 시대를 앞선 급진성과 이론적 다층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많은 영역에서 충분히 탐색되지 못한 지점들을 남겨두고 있다. 그의 문학에 대한 접근은 단순한 비평이 아니라 철학, 정치, 신학, 언어학, 미학이 교차하는 복합적 장에서 이루어지기에, 그의 사유를 현대의 다양한 담론 속에서 재맥락화하려는 시도는 앞으로도 계속될 필요가 있다.
특히 향후 연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방향에서 더욱 풍부하게 전개될 수 있다.
첫째, 기억과 윤리의 정치학이라는 관점에서, 벤야민의 ‘기억되지 못한 자들의 구원’이라는 명제를 현대 문학에 적용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는 난민, 제국주의, 젠더 폭력, 트라우마 서사와 같은 주제를 다루는 텍스트들에서 벤야민의 사유가 어떻게 윤리적 응답을 구성할 수 있는지를 분석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둘째, 기술과 예술의 관계에 대한 논의를 더욱 확장할 필요가 있다. AI, 메타버스, 디지털 문학, 알고리즘 서사 등 새로운 기술 환경에서 예술의 감각 구조가 어떻게 변형되고 있으며, 벤야민의 ‘아우라’ 개념이나 ‘감각의 정치화’가 어떻게 갱신될 수 있는지를 묻는 연구는 그 실천적 중요성을 더욱 부각시킬 것이다. 이는 특히 포스트휴먼 연구, 생태비평, 데이터 문화론 등과의 접점을 넓히는 길이 될 수 있다.
셋째, 형식 실험과 감각 구조의 전복이라는 주제는 향후 벤야민 연구의 주요한 통로가 될 수 있다. 그의 사유는 문학 형식—특히 단편, 파편, 목록, 몽타주—의 정치성을 적극적으로 사유하는 데 적합하며, 이는 동시대 문학과 시각예술의 ‘비연속적 감각 구성’과 만나며 생산적인 비평 틀을 만들어낼 수 있다.
넷째, 동아시아 문학과 철학과의 대화 가능성 역시 새롭게 모색될 수 있다. 벤야민의 사유는 ‘예외 상태’, ‘침묵의 윤리’, ‘시간의 비연속성’ 등에서 장자, 불교, 도가 사상과 흥미로운 공명점을 갖는다. 이를 통해 서구 이론의 수용을 넘어선 철학 간 대화로서의 문학 연구도 가능해질 것이다.
이처럼 벤야민의 문학적 언급은 고정된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오늘날의 감각, 언어, 윤리, 기술, 정치, 형식이 충돌하는 장에서 여전히 유효하게 작동하는 사유의 원천이다. 향후 연구는 그의 이론을 해석하고 반복하는 데 그치기보다는, 그 사유의 구조와 실천적 긴장감을 재창안하는 방식으로 나아갈 때 비로소 문학과 철학 모두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4. 벤야민식 사유에 대한 비판: 현대적 한계와 가능성
벤야민의 문학적 사유는 그 급진성과 개념적 혁신에도 불구하고, 현대사회와 예술 환경의 변화 앞에서 일정한 한계와 비판의 지점을 드러내기도 한다. 특히 그의 사유가 형성된 시기는 파시즘과 전쟁의 위협 속에서 예술과 정치, 윤리와 폭력의 관계를 절박하게 사유해야 했던 시대이며, 이는 오늘날의 복잡한 디지털 자본주의, 감정 노동, 플랫폼화된 예술의 조건과는 다소 다른 맥락 속에서 구성된 것이었다.
첫째, 벤야민은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이 아우라를 해체하고 대중과의 새로운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고 보았지만, 오늘날의 기술 예술은 오히려 플랫폼 자본주의에 포섭된 소비지향적 감각의 체계 속에서 재구성되고 있다. AI 창작물은 아우라가 없는 대신 알고리즘의 권위와 데이터의 절대성에 기반한 새로운 형태의 위계와 익명성을 만들어내고 있으며, 이는 벤야민이 기대했던 감각 해방의 정치성을 부분적으로 제한하거나 왜곡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
둘째, 벤야민의 ‘신적 폭력’(divine violence) 개념은 기존의 법적 질서를 중단시키는 윤리적 응답의 가능성으로 해석되어 왔지만, 그것이 실제 사회적 실천으로 이어지는 경로에 대한 설명은 모호하다. 예외 상태를 중단시키는 비작동(dis-activation) 혹은 ‘신적 중지’의 윤리는 급진적인 윤리이긴 하나, 현실 정치와 제도, 감각의 훈련 과정 속에서 어떻게 실현 가능한가에 대한 구체적 논의는 여전히 미완으로 남아 있다.
셋째, 그의 사유는 종종 지나치게 은유적이고 파편화된 문체로 인해, 실천적인 구체성과 비판적 명료성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주기도 한다. 이는 문학과 철학, 정치와 형식이 교차하는 장점이자 동시에 모호성의 위험을 내포한 방식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벤야민의 사유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가 제기한 핵심적인 질문들—기억되지 못한 자는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가, 감각은 어떻게 정치화되는가, 말해질 수 없는 고통에 문학은 어떻게 응답하는가—는 오늘날의 윤리적, 감각적, 기술적 조건에서도 여전히 긴급하게 남아 있다. 오히려 그의 비유적·파편적 사유는 기존의 이론화된 정치철학으로 포착되지 않는 문제들, 특히 감각적 공백, 윤리적 침묵, 감정의 무형성 같은 문제들을 사유할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한다.
결국 벤야민의 사유는 완결된 체계가 아니라, 열린 질문의 형식이다. 그것은 오늘날의 현실에 그 자체로 해답을 제시한다기보다, 우리가 익숙하게 여겨온 감각, 언어, 시간, 응답의 구조를 낯설게 만들고 재구성하게 하는 철학적 자극으로 작동한다. 그러므로 벤야민은 비판받아야 마땅하며, 바로 그 비판의 과정에서 더욱 풍부하고 살아 있는 사유로 갱신되어야 한다.
Ⅷ. 문학적 고찰의 끝에서: 벤야민의 철학과 나의 창작의 길
발터 벤야민의 문학적 사유를 처음 마주했을 때, 나는 그것을 하나의 해석의 틀로 받아들이기보다, 문학이 감당해야 할 윤리와 언어의 무게에 대한 철학적 충격으로 경험했다. 그의 사유는 그 자체가 하나의 질문이었다.
“문학은 어떻게 말하지 않음의 윤리를 실천할 수 있는가?”
“예술은 감각을 조직하는 장치로서, 무엇을 다시 느끼게 해야 하는가?”
“그리고 나는, 그런 형식과 감각을 창작자로서 감당할 수 있는가?”
『역사 개념에 대하여』에서 벤야민은 과거의 이미지가 현재의 위기 속에서 번쩍 빛나는 순간을 “지금-여기(Jetztzeit)”라고 불렀다. 이는 내가 써야 할 문장이 시간의 궤도를 따라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가 충돌하는 균열의 자리에서만 탄생할 수 있음을 말해준다. 문학은 연대기를 따르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의 틈에서 불현듯 솟구쳐 오르며, 잊힌 자의 얼굴을 현재 속에 다시 데려오는 실천이 된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그는 감각의 재편을 말한다. 기술은 아우라를 해체하고 예술을 민주화한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 이상을 보았다. 벤야민이 정말로 말하고자 했던 것은, 예술이 감각을 새롭게 배열하고, 현실을 다시 느끼게 만드는 형식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예술은 더 이상 위계와 권위의 사물이 아니라, 감각을 정치적으로 조직하는 장치로 재구성되어야 한다.
『일방통행로』와 『보들레르의 몇몇 주제에 대하여』에서 그가 보여준 파편적 글쓰기, 도시 속 산책자의 감각, 이미지의 충격은 문학이 어떻게 감각 그 자체의 구조를 흔들 수 있는가에 대한 형식적 힌트였다. 문학은 더 이상 완결된 이야기가 아니라, 충격과 단절, 침묵과 반복, 이미지의 교란으로 구성된 새로운 리듬의 장이어야 했다. 나는 이 생각 앞에서 자주 멈추었다. 그리고 두려웠다.
“나는 과연 그런 문장을 쓸 수 있을까?”
“누군가의 말해지지 않은 고통을, 내가 감각하도록 만들 수 있을까?”
“그 침묵에, 내가 윤리적으로 응답할 수 있을까?”
나는 종종 문장 하나를 쓰는 것이 누군가의 무덤 앞에서 침묵을 배워가는 일처럼 느껴진다. 혹은 말해지지 않은 기억 앞에 언어가 감히 다다르지 못하는 어둠을 바라보는 일처럼. 그러나 이 두려움은, 동시에 쓰고자 하는 열망이기도 하다. 문학이란 말해지지 않은 것을 드러내고, 언어의 침묵을 응답의 공간으로 전환하는 실천이며, 현실을 전복하는 대신, 현실을 다시 감각하게 만드는 감각의 형식이라는 그의 통찰은, 내가 문장을 통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다시 되묻게 한다.
나는 이제 AI라는 새로운 감각의 조건 앞에 서 있다. 언어는 자동화되고, 감정은 알고리즘화되며, 창작은 기술의 영역으로 이행하고 있다. 그 안에서 나는 다시금 벤야민의 사유로 돌아간다. AI 포맷을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오늘날의 감각, 언어, 윤리, 기술, 정치, 형식이 충돌하는 장에서 사유의 원천으로 삼을 수 있을까? 나는 이제 쓰는 자이기 이전에, 묻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 질문의 형태로만 문장은 살아남는다.
그래서 나는 결심한다. 향후의 창작은 그의 이론을 반복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 사유의 긴장과 구조를 나만의 감각으로 재편하고, 그 윤리적 떨림을 감당할 수 있는 문장으로 쓰겠다고. 내 문장은 이 세계의 허공 속에 가만히 머무는 침묵들을 어루만질 수 있는, 그런 언어의 윤리적 형식이기를 바란다.
나는 묻는다. 내가 가진 이 언어의 감각, 이 감정의 결, 이 고통에 응답하려는 본능은 누군가로부터 받은 달란트일까. 그렇다면 나는 그것을 끝까지 쓰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나는 때때로 그 달란트가 나에게 축복이 아니라, 무거운 짐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모든 문장은 다 쓰기 전에는 상처이고, 모든 고백은 다 꺼내기 전에는 두려움이다. 그러나 나는 안다. 그 상처 속에 빛이 있고, 그 두려움 안에 감각의 윤리가 있다는 것을.
나는 쓰는 자로 살아가고 싶다. 때로는 말해지지 않은 자들의 침묵을 어루만지는 문장으로, 때로는 내 고백조차 감당하지 못해 입을 다무는 언어로, 그러나 끝내, 어떤 형태로든 이 세계와 윤리적으로 연결된 문장으로 살아가고 싶다. 벤야민은 ‘기억되지 못한 자들의 구원’을 말했지만, 나는 이제, 기억하지 못했던 나 자신을 다시 구원하는 문장을 꿈꾼다.
쓰는 자로서의 내 삶은 결코 화려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문장은 누군가의 어둠 속에서 단 한 번, 아주 작게 빛나는 감각의 순간이 될 수 있기를. 이 글을 마치며, 나는 다시 쓰기를 시작한다. 언제나, 다시. 말해지지 않은 세계의 조용한 진동을 향해. (끝)
참고 문헌 (연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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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황정은, 『디디의 우산』, 창비,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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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클레어 키건, 『이처럼 사소한 것들』, 홍한별 역, 다산책방,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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